시리즈 [감사의정권] 엘리시움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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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lysium Finale.





"성무를 이행하는 자의 선택은 도의 대신 책임.


구원할 운명을 가진 자의 선택은 구제 대신 복수.


선택이라는 음표가 쌓여 만들어진 파멸의 악보 아래에서


진혼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마지막 춤을 춘다."








(반복재생)





"어째서....."



사람들의 피로 물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한때 생명의 증거였던 붉은 흔적만이 공허하게 남아 에클레시아의 손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켜야 했던 모든 것들이 한 움큼 손에 담긴 바닷물처럼, 모래사장의 모래처럼, 허무하게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떠세요? 평생을 다해 지켜왔던 소중한 것들이 모래성처럼 사라진 기분은? 아프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무력감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밉겠죠? 무슨 대가를 치뤄서라도, 심지어 나와 했던 약속을 져버리면서까지도 지키고 싶었던 인간들을 지워버린 내가."



소녀는 무표정하게 에클레시아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칼날과도 같은 말을 꺼내어 에클레시아의 마음을 후벼판다.


에클레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정처없이 손을 쳐다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위대한 정적이여.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정적을 지킨단 말인가.


역겨운 위선자 주제에. 더 이상 지킬 것이 무엇 하나 없는데도.


비탄에 빠져 절규할 뿐 아직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소녀로 하여금 한없는 분노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위선 좀 그만 떨으라고.


소녀는 욱하여 재차 언어의 칼날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당신네 교단에 의해 살해당한 우리 언니가 느꼈을 고통에는 한참 모잘라!! 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아픔 따위!! 언니를 잃고 찢어져버린 내 마음의 고통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알아!!!!!?"



집행자는 바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가련한 죄인을 더욱 가혹하게 몰아세웠다.


광기와 분노가 서린 말이 휘둘러져 에클레시아의 마음을 도려낸다.


마침내, 위대한 정적은 소녀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항상 고요히 흐르는 수면과도 같았던 그녀의 눈은 이례적일 정도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다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온갖 감정들이 한데 뒤엉킨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에클레시아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갈 곳 잃은 공허한 분노는 명확한 방향성을 잡고 눈물과 함께 흩뿌려졌다.



"이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대의 자매를 앗아간 건 나일 터...! 내게 책임이 있으니, 내 목숨만 거둬가면 될 것이 아니더냐!


그대의 자매를 죽인 것은 일반 신자들이 아님에도 어찌하여 이런 잔악한 짓을 저지르냔 말이다!!! 어째서!!!!"



소녀는 에클레시아의 분노어린 절규에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당찮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핏빛 하늘 아래 검은 몸체들이 들썩인다. 한때 인간이었을 역병체들의 몸이 일렁이며 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죄가 없다고? 아니. 저들의 죄는 단 하나. 저들이 그대의 백성이란 것이요-"


"저들의 죄는, 저들이 그대의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짐에 있으며-"


"저들의 죄는, 저들이 누리는 평화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하지 않은 무지에 있도다."



하나가 입을 열자 다음 하나가, 뒤이어 다음 하나가 소녀의 답을 대신한다.


소녀는 무표정하게 입꼬리만을 올려 에클레시아를 향해 웃었다.


역병체들 역시 소녀와 함께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끝없는 밤과 같은 드레스 자락이 웃음소리에 맞춰 나풀거렸다.


하하하, 히히히, 깔깔깔, 큭큭, 하하하하, 낄낄, 킥킥킥-


웃음소리가 벌레와도 같이 온 몸을 타고 흐른다. 긁는다. 잠식한다.


그 모든 웃음소리가 마치 사람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 같아서, 에클레시아는 속이 뒤집힐 정도로 격한 분노를 느꼈다.



"가증스런 것들이, 감히...!!"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고, 꺾였을 적의가 다시 고개를 들어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한다.


역겹다.


압도적인 권능 앞에 세상은 멸망당하고, 모든 사람들이 죽고, 그것이 조롱받는 이 현실이,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와 혐오로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에클레시아는 눈빛만으로 죽일 것처럼 이교도 소녀를 노려보았다.



"후후. 이제야 싸울 마음이 들었나봐요? 예하?"


"....."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셨죠? 딱히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도 그럴게, 당신이 제 마음에 있는 것들을 전부 찢어버리고 말았잖아요? 우리 언니도, 저와의 약속도, 제가 준 믿음도, 전부 다. 그래서 저도 똑같이 잃게 해준 것 뿐."



이 시가지에서 에클레시아를 본 이래 처음으로 소녀는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어색했고, 오랜 세월 벼려진 분노로 인해 얼굴 근육이 삐걱거려 정상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그래도 소녀는 기뻤다. 상상 속으로나 그렸던 완벽한 그림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됐으니까.


마지막 말로 종지부를 찍는다. 항상 고고했던 그녀를 지옥의 나락 끝까지 끌어내려 쳐박는다.



"축하드려요. 드디어 저와 동일한 출발선에 서신 것을."



그리고 그 말은 끔찍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소녀의 마지막 말은 에클레시아의 이성을 지옥 밑바닥으로 끌어당겨 쳐박았고, 마지막 남은 양심을 잔혹하게 짓밟았다.


동공이 재차 흔들린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저 말, 현실을 조롱하는 저 말.


저 말이, 에클레시아의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어 내팽개치고 으스러뜨린다.


고작. 고작 그런 이유였느냐?


그런 이유로 책임을 묻는 대신 모든 이들에게 덤터기를 씌운단 말이냐?


이 모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내 세상을 멸망시킨단 말이냐?


죄인인 나 대신 수백 수천만의 이 가련한 이들을 죽여야-









"아^$아아아*$아#!!!!!!!!"



짐승의 것에 가까운 광포한 절규를 내뱉으며 에클레시아는 소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엘리시움 피오레

크레도 Credo



카가각-!!!


가공할 속도로 튀어나가 분노를 담은 채 휘두른 단순한 종베기. 


푸른 검을 막아선 것은 흉물스러운 십자가 형상의 검이었다.


쇳소리가 귀를 긁어대고 충돌로 생겨난 풍압이 두 사람의 피부를 짓누른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전 더 이상 그때의 순해빠진 소녀가 아니라 마왕이라는 걸. 그런 약해빠진 검으로 마왕을 벨 수 있겠어요?"


"네가 스스로를 무엇이라 칭하든 상관없다!! 내 소중한 것들을 전부 앗아간 이상, 너 역시!!!!"


"한결 낫네요. 슬픔에 겨워 불쌍히 떠는 꼬락서니보다, 이렇게 악귀처럼 검을 휘두르는게 차라리!!!"



소름끼치는 웃음이 소녀의 입가에 서린다. 검붉은 십자가가 푸른 빛의 검을 강타했다.


조금의 힘만을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에클레시아는 검 째로 튕겨져 나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고요한 대지에 진동했다.


쏘아진 빛의 화살처럼 에클레시아는 다시 소녀를 향해 질주했다. 그 섬광의 끝에서 푸른 대검이 자아내는 빛의 검무가 갈라져 나오며 소녀를 덮쳤다.



엘리시움 피오레

프라가라흐의 성휘 Fragarach



여러 갈래의 빛이 발해져 눈을 가린다. 본래라면 이 신성한 빛에 압도되어 기술에 흽쓸려 나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클리포트의 마왕으로 각성한 상태.


이깟 잔나비 같은 기교론 어림도 없어.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흉물스런 십자가를 거꾸로 위치시킨 채 힘을 살짝 흘려넣었다.


그러자 끼기기기긱,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며 십자가로부터 붉은 파장이 사방에 터져 나가는 바람처럼 발산했다.


붉은 파장이 일으킨 폭풍은 푸른 빛의 궤적들을 종이를 찢듯 분쇄하고 에클레시아를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크하악....!!"



충격파가 에클레시아의 몸을 좀먹으며 옥죄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마왕과 인간의 차이라는 것을 세계 모든 영혼들의 백업을 통해 우격다짐으로 메꾸며 싸워왔다.


그렇게 모든 힘을 다해도 전번의 타기리온에게 압도당했다.


하물며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죽은 지금은 어떻겠는가?


지금의 에클레시아에겐 신자가 없다. 그녀를 믿고 따르며 힘을 보태줄 이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교도 소녀가 조금만 힘을 써도, 아니, 거의 힘을 쓰지 않고 상대해도 지금의 자신 정도는 몇 초 안에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였다.



"약해졌네요. 기도해줄 인간이 없으면 고작 이 정도. 위대한 정적이라는 이름이 울겠어요."


"......"



에클레시아는 말없이 소녀를 독기어린 눈을 하고 노려보았다.


이교도 소녀 역시 눈에 살의를 담아 에클레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침묵 속에 다시 두 검이 휘둘러지며 전투의 노래를 자아냈다. 폭탄이 터지고 공간이 짓이겨지는 우악스러운 소리가 정적을 찢어발겼다.


푸른 빛이 몇 번이고 꺾이고, 몸에 상처가 하나 둘씩 늘어난다.


격렬한 힘의 개방과 충돌이 파괴된 시가지에 또 다른 파괴의 흔적을 남겨 종말의 악보를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눈 앞의 상대를 향해 덤벼든다.


피가 맺히고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상대를 향한 증오가 터져 나와 몸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꿈을 꿨다.


세상을 구한 뒤에 언니를 만나, 함께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는 꿈을.


예전처럼 저녁을 해먹고, 때로는 무용담을 떠들며, 평범한 삶을 누리는 꿈을.



꿈을 꿨다.


세상을 역병으로부터 구하고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여 하나된 세계를 이루는 꿈을.


이교도라고 차별받지 않고, 각자의 자유를 노래하며, 마땅히 행복을 누리는 꿈을.



언니를 살리고 싶었다.

모두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한 끝에 다다른 그 종착지에는-


오직 절망만이 가득했다.

오직 정적만이 가득했다.




이곳은 여정의 종착점. 멸망한 세계의 한 가운데.


검게 물든 자들은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 서로를 탓하며 복수를 부르짖고 서로를 죽이며 점점 떨어진다.


가련한 소녀의 있을 곳을 없애버린 것.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에클레시아 또한 인지하고 있다.


소녀가 정당한 응보를 요구했다면 목숨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다른 이들만큼은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


책임져야 할 존재는 에클레시아 자신이지, 일반인들이 아니었으니까.


책임을 져야 할 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책임의 소재를 불특정 다수에게 물으며 대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그건 속죄를 빙자한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죄이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희생된 이들을 향한 울분이 한데 모여 일그러진 증오로 재탄생한다.



"용서치 않겠다....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 대한 그 죄!! 이 손으로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죄가 없다고? 정말 그럴까?"



귀기어린 눈을 하고 소녀가 고함쳤다.



"이교도를 차별하고, 죽이고, 그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당신들이! 그렇게 우리 언니마저도 망설임 없이 실험 재료로 써버린 당신들이!!! 정말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냐고!!!"


"자신의 악행을 정당하다 말하는 것이냐!! 원정군 내에서 그대에게 선의를 베푼 이들도, 그저 내일을 살고자 했던 무관계한 이들마저도, 이 2천여 만의 엘리시온 인간들이 정녕 모두 죽어 마땅했느냔 말이다!!! 대답해라!!!!"



검붉은 십자가가 에클레시아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진다.


푸른 빛의 검이 소녀를 향해 번개같이 쇄도해온다.


마왕의 역병의 힘과 에클레시아가 가진 빛의 힘이 서로 격돌하며 파열음이 주변의 지반과 공기를 으스러뜨린다.



"그래!!!! 죽어 마땅해. 내게서 언니를 먼저 빼앗아간건 당신들이야. 먼저 뺏어갔으니까, 죽어 마땅해!!


당신들과 같은 땅을 밟고 사는 것 자체가 역겨워, 당신들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 조차 토악질이 난다고!!! 죽어!!!!!"



"그딴 생각이, 그대의 자매를 죽인 교단 사람들과 뭐가 다르지? 통합을 명분삼아 이교도를 죽였던 자들과, 복수를 명분삼아 세계를 멸망시킨 것이 뭐가 다른가!!!


똑같이 전락하여 행동하는 주제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들을 모독하지 마라!!!!"



다시 한 번, 서로의 검이 품은 살의가 교차한다.


당신이 자초한거야.

그대가 자초한거다.


항상 편함을 선택해왔던 당신들 엘리시온이 불러온 결과라고.

너 역시 거대한 분노에 눈이 가려져서 편함을 선택한 것이라고.


소녀가 토해내는 울분이 그렇게 말한다.

성녀가 토해내는 절규가 그렇게 말한다.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던 두 사람은 이제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이상, 발자국에 피가 묻은 이상, 피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저주로 인해 채워진 증오라는 이름의 사슬에 묶여 서로 칼을 겨눈 채 마주할 뿐, 만나지 못한다.


눈이 마주한 그 찰나의 순간, 에클레시아의 몸이 사라진다.


동시에 신성한 힘을 주먹에 담아 번개같은 속도로 소녀를 향해 내지른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음속. 정권이 그대로 들어갔다면 치명타였을 터.


그러나 이 지경에 와서도, 서로 원수지간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죄책감에 쌓여 있었다.


그 죄채감이 에클레시아의 움직임에 무심코 제동을 걸었다.


북을 친 듯한 고동이 시가지에 크게 울렸다. 음속에 준하는 속도였을 텐데도 에클레시아의 정권은 소녀의 손에 막혀 있었다.



"뭣-"



당연한 이치. 2천여만 명의 백업을 받아도 부족할 판에, 개인의 힘만으로 마왕을 상처입힐 수 있을 리가 없다.


소녀는 팔을 휘둘러 에클레시아의 뺨을 쳐올렸다. 


공기가 찢어지는 거친 소리와 함께 찾아온 어마무시한 충격에 에클레시아의 시야가 뒤틀리고, 뇌가 흔들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람을 조종, 날아갔던 에클레시아를 단번에 눈 앞까지 끌고와 2번째 일격을 명치에 꽂아넣는다.


마왕의 거대한 힘을 응축한 정권 지르기가 에클레시아의 복부에 그대로 작렬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에클레시아는 투포환처럼 날아가 거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섯 번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끝에 건물을 무너뜨리고 도심 한가운데에 쳐박히고 나서야 반동이 잦아들었다.


아직 안 끝났어.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소녀는 난폭하게 손을 휘둘렀다.


손짓과 함께 검은 드레스의 역병체들이 손을 뻗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멸망의 곡조를 읊조렸다.


노래가 들려오고 힘이 곳곳에 응집되어간다. 에클레시아의 주위 하늘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뒤틀리며 무수히 많은 붉은 십자가 형상의 검이 빼곡하게 만들어졌다.



처형의 검 Supplicium



핏빛 하늘에 떠오른 무수한 십자가들이 자아내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도적.


하나를 받아내도 몸이 버텨내질 못하는 위력의 십자가가, 하늘을 빼곡하게 메운 채 에클레시아를 향해 일제히 날아든다.


이대로 끝날 순 없어. 뇌가 흔들려도, 내장이 파괴되어도, 여기서 쓰러질 순 없다.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그 마음 하나만으로 몸을 움직인다.


사고에 노이즈가 일어간다. 그윽해진 역병의 악취가 이젠 친숙하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악취 속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는데, 숨을 내쉴 때마다 조금씩 힘이 생겨나는 듯 했다.


에클레시아의 검에 푸른 빛이 모여들어 작렬하듯 증폭했다. 빛의 폭발이 일며 대지를 밝게 뒤덮었다.


무량대수의 흉물스런 십자가에, 단 한 자루 진실된 십자가의 빛으로 맞선다.



엘리시움 피오레

포스타 데 스텔레 Posta de Stelle

베라 크로세 Vera crose



푸른 빛의 심판이 하늘로 쏘아지며 검붉은 십자가들과 격돌했다. 폭풍이 몰아치며 공간이 찢어지고 힘과 힘이 서로를 살라먹고 바스라진다.


승부의 축은 당연히 이교도 소녀 쪽으로 기울었다. 기도를 상달할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은 에클레시아 쪽이 압도적인 열세였다.


대단위의 검술을 사용해도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십자가들을 전부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없애지 못한 십자가의 파도가 고스란히 에클레시아를 덮쳤고, 한발 더 나아가 시가지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콰드드드드득- 콰직, 퍼억, 푸욱-



땅이 쪼개지는 소리, 살이 찢어지는 소리, 피가 튀기는 소리가 정적을 물들였다.


에클레시아가 서 있던 일대에는 흉물스런 십자가들이 첨탑처럼 꽂혀 역겨운 역병의 악취를 내뿜어댔다. 온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피가 철철 흘렀다.


죽음의 비가 자신을 덮쳐오는 와중에도 최대한 검을 통해 쳐낸 것인지, 몇 갈래의 십자가가 몸을 관통한 것 외에는 아직 살아 있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위대한 정적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쿨럭, 큭...."



일시적인 뇌진탕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 내장은 방금의 정권으로 완전히 아작났고,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십자가에 꼬챙이가 되어 있었다.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채 그저 시체처럼 억지로 몸을 움직일 뿐. 에클레시아의 몸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게 아니었을 텐데. 피를 토하며 에클레시아는 무너진 마음 가운데 자조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 죽인다, 치워버린다는 편한 선택을 해온 세상 속에서, 홀로 불편하고 고된 순례길을 걷고자 했다.


편한 선택지 대신 옳은 선택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다가온 멸망 앞에서 허락된 것은 옳지 못한 선택지. 그것마저도 세계의 남은 사람들을 모두 지키기 위해, 용인했다.


처음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였다. 다음은 멘탈 프린팅 실험의 승인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두 차례, 눈을 돌렸다.


'지금 당장'을 지키지 못하면 '앞으로의 미래' 따윈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묵인했다.


그것 자체가, 그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만일 정의롭고 옳은 선택지만을 골랐다면 그 끝엔 과연 구원이 있었을까.


나는,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했던 걸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느 가능성을 떠올려도 오직 지금의 이 황폐한 멸망의 한복판만이, 에클레시아의 눈에 들어오는 유일한 광경이었다.



"일어서요. 당신은 더 고통받아야 해. 이 저주받은 세상과 함께 고통받다 죽어야 해."


"....내가 저지른 죄악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것."



억지로 몸을 움직여 팔다리를 관통한 흉물스런 십자가를 잘라낸다.


몸을 옥죄는 끔찍한 고통에 비틀거리며 에클레시아는 검을 지지대 삼아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가 책임을 묻겠다는 기치 하에 인간으로서의 선을 져버린 것 역시, 죄악이다."


 

죄인으로 영락했다 한들, 이행할 성무가 없어졌다 한들, 베어 진멸시켜 마땅한 악만큼은 눈 앞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한때 인류를 대표했던 이로서, 위대한 정적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로 정한다.


에클레시아는 마음을 다잡고 검을 쥔 손이 터질세라 힘을 꽉 쥐었다.


역병의 악취가 이젠 싱그러운 산소처럼 편하게만 느껴졌다.



"와라.... 마왕 타기리온....! 이것이 내 마지막 성무이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마침내 에클레시아는 소녀의 존재를 버리고 마왕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미 스러진 성무의 잿더미 속에서 건져올린 잿불을 마지막 성무라며 포장한 채 껍데기만 남은 몸을 채찍질한다.


격한 싸움으로 몸은 이미 걸레짝이 됐고, 죄인으로서의 마지막 마음이 더 큰 폭력에 의해 꺾여졌다.


남은 것은 의무만을 위해 움직이는 망집.


성무의 망령이 겨눈 칼날을 바라보며 소녀는, 타기리온은 만족스럽다는 듯 조소했다.



"후후. 후후후후후! 그래. 그래야 죽여버릴 맛이 나죠. 당신의 세상이 무너지기 이전에, 내 세상은 당신들에 의해 한참 전에 없어지고 말았으니까!!!"


"네놈에게 스러져간 모든 백성들의 생명을 위해, 내 세상을 없애버린 네놈을....!!"




응징하겠다.


괴물처럼 절규하며 에클레시아는 다시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녀 역시 수천 갈래의 붉은 십자가들을 소환하며 에클레시아에게 덤벼든다.


찬란히 빛나던 기억들이 쌓여갔던 서로의 사이에는 피와 원한만이 남아 있었다.


상대를 귀히 여기던 자애로운 성황과 선함을 품고 살아가던 소녀는 더 이상 없다.


이제는 서로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잘라낸 채, 자기 자신마저 불사르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두 불나방만이 있을 뿐이다.


검붉은 십자검과 푸른 빛의 대검이 재차 격돌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노래한다.


저 너머 어딘가에 둘 중 하나를 기다리고 있을 죽음을 향한, 마지막 진혼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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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커미션 받았음. 뒤에 한편 더있음 수구. 이따 밖에 나갔다와서 쓰고 올릴거읾.


목석아이도루 예하쨩의 감정을 터뜨려보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전편같은 광기는 없는듯?


부족한 실력이지만 계속 봐주는 사람들은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