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감사의정권] 엘리시움 피날레








(10) 종막. 그리고.





"실현할 수 없는 것임에도 우리는 기적을 원하고


더 나은 선택에 닿지 못함에도 우리는 구원을 찾으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함에도 우리는 용서를 부르짖는다.


그 끝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끝까지 천국을 동경한다."















정적이 세계를 잠식했다. 힘도, 함성도, 그 어떤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싸움은 에클레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이 세계의 마지막 저항의 상징이자, 영광의 헌신 그 자체였던 성황마저 꺾여 바스라진 광경이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소녀의 앞에서 에클레시아는 죽은 눈을 하고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더는 싸울 수 없었다. 몸은 이미 한참 전에 죽었고, 정신은 역병의 악취로 인해 점점 변해가며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다.



"제가 이겼어요. 예하."


"....."



이런 결말을 모른 것은 아니다. 그녀도 패배로 끝날 걸 알고 있었다.


패배할 걸 알았음에도 죽음 가운데로 뛰어들었던 것은, 허망함에 대한 분노였고 도의를 져버렸던 것에 대한 후회였다.


마음 속에 거대하게 뚫려버린 구멍은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피를 토해가며 그 고통과 분노를 흩뿌리고 온 몸을 비틀며 싸웠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마음의 구멍은 더욱 커져만 갔다.


모든 것이 끝나자 비로소 마음에 난 구멍으로부터 비탄에 찌든 고통이 몸을 좀먹어갔다.


아팠다. 장기가 짓이겨진 고통보다도, 소녀가 만들어낸 십자가에 찔렸을 때의 고통보다도, 훨씬 아팠다.


툭, 투둑. 눈물이 에클레시아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엘리시온의 시민들이, 악단의 지휘자들이, 성황청의 사람들이 연기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태양빛도, 달빛도 없어진 이 죽음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스러진 것은 에클레시아의 마음이었다.



"....."



소녀는 그렇게 눈물을 속절없이 흘리는 에클레시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미간이 좁혀진다. 복잡한 감정이 마음에서 잔뜩 엉키며 말 못할 기분을 들게 했다.


죽이고 싶어서 격렬하게 싸웠건만, 이제 와서 마지막 자비심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그간의 함께 보낸 시간들이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었던 걸까.


마치 에클레시아가 그랬듯, 소녀는 자신 역시 과거에 미련이 남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 복수를 위해 다시 일어난 이상, 그 모든 과거에 작별을 고하고 뿌리쳐내야 한다. 인연도, 추억도, 선의도, 전부 잘라내야 한다.


이미 각오한 바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와서 뒤를 돌아볼 만큼 나약하지 않다.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의 사슬을 끊어내겠다는 듯 소녀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분노에 눈이 먼 복수귀가 아닌 또 다른 선택을 향해서, 죽어버린 마음을 발과 함께 앞으로 한 걸음 전진시킨다.



"언니. 그걸 가져오세요."



가장 처음 만들어낸 '언니' 에게 이교도 소녀는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백발의 역병체의 뒤로 육중한 갑옷이 공중에 둥둥 뜬 채 날아왔다.



"왕이시여. 대령하였나이다."


"......?"


"생각이 바뀌었어요. 예하. 당신을 죽이는 것보다, 당신을 살려놓는게 더 훌륭한 복수일 것 같아서요."



소녀가 손짓하자 갑옷이 에클레시아의 옆에 철커덕 하고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미 이렇게나 역병의 악취에 잠식된 이상, 당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마 저와 싸우면서 느꼈을 거에요. 어느 순간부터 숨쉬는게 편안해졌다는 걸.


원래는 죽일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예하도 똑같이 역병체가 될 김에 좀 더 살려놓는 것이 좋아보여서요."


"......"



에클레시아는 이 갑옷을 알고 있다.


엘리시온에서 중죄수들에게 입힌 채 전장의 최전선으로 투입할 때 썼던 검은 중갑.


역병의 악취나 에너지 병기의 힘을 완벽하게 차단해주는 굉장히 단단한 갑옷이지만, 한번 들어간 이는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갑옷.


성황이었던 자신이 이런 죄수의 갑옷에 갇힐 정도로 영락했다는 사실에, 에클레시아의 마음에 다시 무거운 후회가 자리한다.



"....내게 얼, 마나.... 더....!"



얼마나 더한 수치를 줘야 만족하겠느냐는 에클레시아의 말에 이교도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편하게 죽을 생각은 집어치우세요. 영원한 감옥에 갇힌 채 생명을 영위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끝없이 후회하시길.


그게 제가 당신에게 내리는 또 하나의 벌."



마왕 타기리온으로서 내리는 또 하나의 벌이자, 이교도 소녀로서 내리는 마지막 자비.


라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광기에 젖어 있던 목소리는 불같은 분노 대신 물 속에 잠긴 것 마냥 축축하고도 담담하게 형을 선고했다.


소녀가 재차 손짓하자 그녀의 언니를 닮은 역병체들이 에클레시아를 양쪽에서 잡았다.


이미 죽어버린 몸으로는 그녀들이 자신을 갑옷 속에 집어넣는 것에 저항할 수 없었다.


갑옷 속에 넣어진 에클레시아는 자신의 맨눈으로 소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바람이 불어와 폐허만이 남은 이 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길게 풀어헤친 이교도 소녀의 머리가 스산하게 흩날렸다.


나부끼는 머리칼 너머로 보인 이교도 소녀의 눈동자 속에는, 과거의 그 순선했던 시절의 소녀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언니를 살려내라고, 왜 그런 실험을 지시했냐고. 그렇게 말하며 울고 있었다.


자신이 달래줘야 하는 어린 소녀가 저기 울고 있다.


분노가 식자 본래 갖고 있던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어째서 이렇게 되버린거지. 그 생각만이 에클레시아의 마음을 무겁게 채워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쉽사리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 세계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아아.."



그래. 그랬었구나.


살기 위해서 금기에 손을 댄 것이 잘못이었고.


살기 위해서 하나된 신앙으로 통합을 이루려던 것이 잘못이었으며.


살기 위해서 거짓을 선택하고 도의를 져버린 것이 잘못이었구나.


자신이 선택해왔던 것들이 오답임을 알리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에클레시아의 마음만이 운명이 제시하는 잔혹한 결과의 태풍 앞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처롭게 비틀거렸다.



"......"



예전에, 멸망의 예언을 피하려고 했다가 멸망으로 치닫고 만 왕이 있었다.


멸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왕은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들이 도리어 멸망을 불러오고 말았다는 이야기.


멸망을 막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죄까지 끌어안은 탓에 같은 죄인으로 영락한 왕.


지금의 자신에게 걸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에클레시아는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소녀여..."



누군가는 이야기 속 왕에 대해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왕이었기에 자기 실현적인 예언으로 멸망을 몰고온 것이라고. 왕의 죄는 그 자신이 왕이었던 것 뿐이라고.


그 말마따나 차라리 내가 성황이 아니었다면.


추기경의 자리에 앉지 않고 한 명의 평범한 전사였다면.


그랬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판결 앞에 선 죄인처럼, 끝을 앞둔 노인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았어야 했던 것일까.


이제 와서는 질문을 할 사람도, 답해줄 사람도 남아있지 않으니 의미 없는 사색이었지만.


그러나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만큼은 말해야 했다.



"미안하다.... 정말...."



절망 가운데 분노했을 때도, 검을 맞대고 서로를 저주할 때일지라도, 소녀를 향한 사과만큼은 항상 진심이었음을.


위선이라 느낄지라도, 언제나 미안하다는 진솔한 감정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음을.



"안다.... 사과를 구하지 않는 것도... 씻을 수 없는, 상처란 것도..."


"......"


"사람들이 전부, 죽었음에 분노했거늘... 그럼에도, 그대를 향한 미안함만은.... 지울 수, 없었다. 미안하다."



어쩌면 그대와 나는 이런 결말에서 마주하는 대신, 친구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눈물과 함께 나지막한 사과가 슬픈 바람이 되어 소녀에게 전해진다.


휘날리는 바람에도 눈 하나 꼼짝않고 소녀는 마저 손짓한다.


검은 감옥의 철창 문이 닫혀 에클레시아의 시야를 가려간다. 앞으로는 세상의 풍경을 갑옷 너머로밖에 볼 수 없게 되겠지.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 지친 눈에 담은 것은 지독한 공허만이 잔뜩 남은 고향 세계의 하늘과 땅이었다.



철컹-



갑옷이 닫혀 에클레시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소녀는 에클레시아의 사과에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소녀가 조용히 손짓하자 거대한 진동과 함께 에클레시아의 갑옷을 중심으로 차원의 균열이 열려갔다.


죄인을 추방시키기 위한 문이 그 입을 벌려 죄인을 맞이한다.



"그 갑옷에 갇힌 채 영원히 방랑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라. 백성도, 세계도, 제위마저 잃은 미천한 자여."



처음 만들어진 '언니'만이 에클레시아에게 차가운 말로 대답했다.


균열이 점점 닫혀가자 에클레시아가 들어간 검은 갑옷이 서서히 입자화되어 이 세계로부터 사라져갔다.


마침내 갑옷의 모습이 전부 사라졌을 때, 소녀는 에클레시아가 없어진 자리를 쓸쓸하게 바라봤다.


이제 이 세상에 살아남은 생명은 단 하나도 없다.


역병의 악취에 취해 미쳐서 역병체로 전락한 것들을 제외한다면.


소녀는 자신이 바래왔던 대로 세상을 멸망시키고 복수를 이룬 것이다.



"왕이시여, 경하드리옵니다! 왕을 괴념케 했던 모든 것들은 왕의 위대한 권위 앞에 먼지가 되었고, 이 세계는 그 죗값을 치뤘나이다! 더욱이 이 미물들에 세례를 내려 새로운 자매들로 탄생시키시니 그 자비로우심을 어찌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있겠사옵니까?"



처음 만들어진 언니로부터 헌사가 내려졌다. 뒤이어 다른 언니들도 한 목소리로 소녀의 행동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마왕이 된 후부터 모두의 성원과 함께 이 정벌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입을 모아 칭송하는 소리에 소녀는 수심에 잠긴 듯한 눈을 하고 손을 가만히 들어보였다.



"....언니. 잠시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왕이시여...?"


"정벌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살육에 신물이 나네요. 좀... 쉬어야겠어요. 이해해 주실거죠?"



백발의 역병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명령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따른다.



"하명하신 대로."



처음 만들어진 언니는 다른 역병체들과 언니들을 이끌고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수천만의 대군이 일제히 이 아스칼론 시가지 폐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혼자가 된 이교도 소녀는 계속 에클레시아가 차원이동했던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에클레시아의 푸른 검만이 그 광휘를 잃은 채 묘비처럼 꽂혀있는 것이 보인다.


어두운 먹구름이 소녀의 얼굴에 자리했다. 소녀의 눈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실타래처럼 뭉쳐져갔다.


아프다.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이뤘음에도 소녀의 마음은 어째서인지 여전히 아픈 채였다. 시원했지만, 아픔이 가시지 않는다.


가시를 뽑았을 때 수반되는 아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녀는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았다.


그간 소녀는 복수를 위해 전장을 걸어왔다. 과거의 모든 것을 잘라내기 위해 앞만 보고 정벌의 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던 에클레시아를 마침내 굴복시켰을 때, 소녀는 그녀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거둘 수 없었다.


방금까지 반드시 죽여버리겠노라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는데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를 죽이는 대신 유폐시켜 떠돌게 했다. 마지막 숨통을 끊어 완벽한 복수를 실현하지 않았다.


홀로 남은 폐허 가운데 소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난 시간들을 회상한다.


사실 소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을 아무리 죽여봤자, 언니를 죽인 모든 이들을 죽여봤자, 언니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복수심에 불타던 처음에는 그걸 부정했다.


마왕의 권능으로도 언니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리라고. 자신의 복수에 정당성을 실어 세상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복수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인다는 그 수단에 가치가 없었음을 직면한 것은 마지막 순간.


자신도 모르게 유폐시키는 것이 '이교도 소녀로서 내리는 마지막 자비'임을 마음 속에서 고했을 때.


그 때 비로소 소녀는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기억 또한 마왕인 자신을 구성하는 한 부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 과거를 전부 끊어내기로 다짐했음에도, 정작 그 과거의 행적이 마왕으로서의 자신을 만들어낸 인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소녀는 손을 뻗어 에클레시아의 푸른 검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금방이라도 과거의 그 찬란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 소녀의 등 뒤에서 지금의 일인 것처럼 재생되었다.



새끼 잃은 어미는 또 다른 어미의 새끼를 앗아간다. 짐승조차 이러할진대 사람은 오죽하겠느냐.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을지니, 그대들은 상처가 덧나지 않게 권면하고 하나되어 교제에 힘써라.



그 때의 자신은 분명 이렇게 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예하. 눈 앞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나요?


옳은 지적이로다. 현명한 소녀여. 나도 인간인 이상 힘들지도 모르지.


허나, 그것이 힘든 길인 것을 앎에도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내가 추기경으로서 제시해야 할 진정한 법도가 아니겠느냐.


으음.... 저로서는 어렵네요...



그렇게 말씀하시고, 당시 예하께선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주셨다.



같이 노력하자는 것이니라. 언젠가 내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을 때, 상처를 상처로 갚으려 들 때. 그대가 함께 내 곁에서 도와줄 수 있겠느냐?



당시의 자신은 함께 세상을 반드시 구원하고 언니를 찾겠노라고 다짐하며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 같이 손을 뻗어봤음에도.


맞잡을 손의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에클레시아의 잔상은 사라지고 그녀의 애검만이 고스란히 남아 그 자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



손바닥을 쳐다보다 말고 소녀는 생각에 잠겼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니. 제 말에 스스로 넘어지셨네요.


같이 노력하자던 맹세가 무색하게, 바보같이 진흙탕에서 구르며 서로 피에 물든 채 이렇게 전락한 처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건.... 저도 마찬가지였던 걸까요.



"그렇지 않나요? 예하...."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정적 속에서 소녀는 읊조렸다.


훗날, 타기리온에게 있어 이 순간은 언니를 잃었을 때와 더불어, 억겁의 시간을 통틀어 가장 가슴이 시리고 아팠던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되었다.








.....




........







현실 세계

고물 다이브 함선

다이브 개시 후 3분 경과.






쿠궁, 쿠궁. 하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린다. 함선 곳곳에 비치된 전등이 고장난 가로등처럼 명멸하길 반복했다.


함선이 흔들릴 때마다 한 번, 또 흔들리면 한 번. 불규칙한 주기로 오락가락하는 전등의 불빛이 스산하게 선실 내부를 비춘다.


출근길 만원의 지하철을 탄 것처럼 함선은 잊을만 하면 한번씩 흔들렸다.


조명이 영 좋지 않은데다가 종종 흔들리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를 이어갔다.


가만히 앉은 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는 생각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들 모두 이 다이브가 얼른 끝나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점에선 이견이 없을 터였다.


대시 또한 리타의 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만 반쯤 죽어 정신을 못차리는 채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신기하다는 듯 선실 내부의 풍경 곳곳을 방방 뛰어다니며 관람하기 바빴지만, 다이브가 시작된지 20초도 채 안되어 사색이 되어 맥을 못추고 있었다.


심각한 중증의 다이브 멀미였다.



"하아....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비즈니스 모텔 잡아줄테니까 거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이 짐짝 같은 게."


"으에에.... 미안해요.... 리타 언니. 저 먼저.... 가요오오..... 히잉....."


"....."



둔탁한 걸음소리가 들려온다. 검붉은 갑옷을 입은 거구의 존재가 대시의 앞으로 다가왔다.


갑옷을 입은 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대시에게 알약처럼 생긴 무언가를 내밀었다.



"흐에...?"


"이걸 삼키거라. 소녀여. 상태가 호전될지어다.



대시는 들고온 물병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약을 받아들어 입에 넣어 삼켰다.


약을 삼키고 얼마 되지 않아 어지러운 것이 점점 가시더니 대시의 안색이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금방 멀쩡해졌어요! 약 효과가 진짜 좋네요. 에헤헤!"


"....."



대시는 언제 빌빌댔냐는 듯 살갑게 말하며 활짝 웃어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밝은 소녀의 인사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갑옷을 입은 자는 바로 뒤돌아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뭐지? 나 지금 차인건가? 대시는 예상치 못한 쌀쌀맞은 반응에 얼어붙고 말았다.



"엑? 잠깐만요! 어.... 갑옷 씨?"


"신경쓰지 마렴 꼬마야. 모르스는 원래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거든."



용병대장의 완장을 찬 남자가 손을 저으며 대시를 안심시켜줬다.


처음 듣는 이름에 대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르스...요?"


"그래. 저 녀석 이름. 블랙 네트워크에서는 걸어다니는 재앙으로 유명하지. 못들어봤니?"


"네. 못들어봤는데....? 리타 언니는 저 이름 아세요?"


"어."


"우와아, 역시 리타 언니! 모르는게 없으시다니까요! 아주칭찬해~!"


"하아.... 이렇게 와글와글대는걸 보니 아까처럼 다이브 멀미로 빌빌댈 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 같은데."



즐겁게 떠드는 대시를 보며 모르스는 선실의 구석에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대시에게 멀미약을 건넨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원정군을 꾸려 타기리온을 토벌하러 갔을 당시, 이교도 소녀 역시 심각한 배멀미로 코러스 함에 탈 때마다 멀미약을 달고 살았으니까.


다른 세계의 다른 존재일 텐데도 자꾸만 과거의 모습을 비춰본다.


이 세계의 소녀는 자신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마치 뭔가에 씌인 것처럼 선뜻 먼저 다가가게 된다.


그것이 아직까지 망령으로서 살아남은 자신에게 뒤따르는 저주겠지.


대시가 있는 곳에는 활기와 생명이 샘솟고 있었다. 반면에 자신이 있는 이 곳은 후회와 죽음이 여전히 차가운 감옥처럼 자신을 옭아메고 있다.


이 세계의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자신의 과오가 빼앗아간, 이교도 소녀가 품었을 미래의 한 가능성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메말랐을 눈물이 갑옷 안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역병의 악취에 심취하여 인간성을 잃은 괴물로 전락하고 그리도 오랜 시간을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녔건만, 아직도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기라도 하다는 걸까.


갑옷 속에서 모르스는 눈을 감는다. 언제나 눈을 감을 때면 지키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의 원망스런 외침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그들이 소리내어 노래한다.


아아. 위대한 정적.


꺾여버린 영광 속에 아직도 망집으로 남은 초라한 죄인이여.


한때 가장 성스럽고 위대한 존재였으나, 모든 것을 잃고 영락한 죄인이여.


기도하고 기도한 끝에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천국은 강림하지 않았구나.


썩어버린 가지를 붙들고, 아직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매달리는 추한 몰골을 한 채, 영원히 후회할 수 밖에 없구나.


그래. 그들이 노래하는 그대로였다.


이젠 이름마저 망각 속에 가라앉아 기억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저지른 죄만이 족쇄가 되어 마음을 옥죄는도다.


이건 이렇게나마 속죄할 수 밖에 없는 초라한 죄인. 나 모르스의 이야기.


들을 자 없이 그저 광야에 바람과 함께 나부끼는 이 가치없는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있다면.


사죄받을 수 없고, 사죄해줄 이 없는 이 추악함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있다면.



"....."



.....부디. 나와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말길.













-아아. 기다림 끝에. 저기, 왕께서 자매로 선택하신 자가 오는구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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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끝.


8월부터 이어져온 장대한 일정이 마참내 끝을 맺었습니다.


씁쓸하지만 머 다들 그밑 해봤으니까 결말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잖아...?


나도 이런거 쓰고싶지 않았다 그치만 정사가 이렇게 가라고 날 이끌었어 흑흑 에클쨩 댕기리온쨩 댕시쨩 리타쨩 미안내ㅠㅠㅠㅠㅠ


쓰기 시작할 당시는 에클레시아가 실장되지도 않은 상태여서 에클쨩이 쓰는 검술은 전부 창작으로 떼우느라 머리 좀 많이 썼는데 막상 다 쓰지도 않았는데 실장되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쓰던대로 쓰기로 결정함


에클레시아와 댕기리온의 고뇌와 분노가 잘 드러났을려나 모르겠네. 이런 축축한 후회테이스트 글은 써본적이 없어서.


매주 1번씩 시간 쪼개서 쓴 글인데 사람들이 너무 잘 반응해줘서 깜짝 놀랐음. 사실 카챈도 오래되니까 사람 많이 줄고 념글 못가는 문학도 좀 있었잖아. 그런데도 잘들 읽어주고 즐겨줘서 나는 쓰면서 정말 죤나게 힘들었지만 정말로 즐거웠음.


문학이란게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시간을 들이는 영역이다보니, 들인 시간에 비례한 반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 문학도 간간히 읽어줬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카사 문학들 많이 사랑해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