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스는 눈을 떴다. 하지만 전구의 빛이 내리쬐자, 그녀는 절로 눈을 찌푸렸다.
“으음…”
“오, 이제 일어났는가.”
눈이 빛에 적응하자,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정장을 차려입은 훤칠한 남성이었다.
‘잠깐, 눈이 부시다고?’
문득 그것을 깨달은 그녀는 몸이 따듯하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몸은 지난 수백년 간 갇혀있던 차갑고 녹슨 갑옷이 아닌, 부드러운 이불에 감싸진 상태였다.
“여긴…”
“이런, 정화 시술 중에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가? 음, 일단 축하하네. 자네는 방금 그림자에서 다시 한 번 인간으로 되돌아왔네. 그리고 난…”
“코핀 컴퍼니의 사장…이자 관리자라고 했었나. 이제 기억이 나는구나.”
모르스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녹슨 갑옷이 아닌 새하얀 손이 움직이는 것이, 그리고 피부에서 전해지는 따듯한 온기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오, 큰 부작용은 없나보군. 침식체를 되돌리는 건 나로서도 첫 시도라, 긴장했었는데 별 일이 없는 듯하여 다행이군.”
어렷품이 기억이 돌아왔다. 타기리온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불완전한 상태였던 그녀와 네퀴티아…였던 레아라는 여자는 결국 쓰러졌었다. 그래도 이 관리자라는 남자가 멀쩡히 있는 것을 보면, 어찌저찌 해결은 된 모양이다.
“그 네퀴…아니, 레아라는 자는…무사한가?”
그러자 관리자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나흘 전에 정신을 차렸지. 자네가 마지막이라네.”
“다행이구나.”
안심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그녀는 익숙해진 죄인의 갑옷도, 과거의 영광된 푸른 갑주도 아닌 그저 얊은 환자복 차림이었다.
“이제 그림자가 아니니, 자네를 뭐라고 불러주면 좋겠나? 본명이 분명 에클…”
“…모르스. 지금의 나는, 그저 모르스일 뿐이다.”
“…그래. 그러지. 자네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녀는 그런 자신을 잠시 신기한 듯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얼굴을 굳혔다. 한동안 그림자로 변해버린 엘리시움 필하모닉을 추적하느라 신경쓸 겨를이 없었지만, 자신은…
신의를 배반한 죄인이었으니.
“나를, 되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더냐?”
관리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나는, 죄인이다. 신뢰를 저버리고, 약속을 어겼으며, 세상을 멸망으로 치닫게 한 원인이지. 그런 나를…어찌하여 되살린 것이냐. 나의 힘은 신앙을 원천으로 삼는 힘. 나를 숭배하는 이들이 없는 지금, 나는 그대가 바라는 거대한 힘도 이미 잃었다. 타기리온과 대적하는 도중 잠시 힘을 얻긴 했다만...미안하지만 그 정도는 내 전성기의 힘의 절반조차 되지 못했어. 그리고 난 전성기의 힘으로도 타기리온을 막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자네의 힘이라도 필요해. 타기리온이 아직 쓰러지지 않았거든.”
“…!”
“상황이 불리해지자 자리를 떠나더군. 자네도, 레아 양도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우리 측도 그녀를 붙잡을 힘은 없었어. 그래서 이왕 놓친 것, 얼터니움으로 자네를 되돌릴 시간이나마 번 셈 친 거지. 그러니 나에게는 선택지가 딱히 없다네-약해진 자네의 힘이든, 네퀴티아와 뒤섞인 레아 양의 힘이든, 가진 건 전부 사용해야지.”
“그대는…내가 타기리온과 무슨 관계였는지 아는가.”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르스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레아 양이 설명해 주더군. 자네와 함께 싸우던 소녀가 세계의 대적자였고, 그녀의 언니를 잃은 충격에 폭주하여 마왕으로 각성했다…라고. 대강은 알고 있네.”
“세계를 구하는 대가로 언니를 찾아달라는 단 하나의 부탁도 지키지 못하여 세상을 구한 영웅과 세상 모두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내게 타기리온…아우드라에게 다시 한번 검을 겨누라, 그리 말하는 건가.”
언뜻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일그러진 모르스의 얼굴에도, 관리자는 낯빛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네. 자네가 나서지 않는다면…이 세계 역시 자네의 세계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르지.”
자신의 세계. 자신의 역린과도 같은 그 말을 들은 모르스의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대는…참으로 매정하구나. 그래, 이 또한 나의 업보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대의 뜻대로 하겠다. 내 갑옷과 검을 다오. 과거의 힘은 잃었으니…하다못해 기교라도 단련해야겠지.”
“음? 그건 안 되네.”
그리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말에 모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내가 자네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긴 했다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기를 들고 싸우라는 말이 아니네. 지금 그 상태로 타기리온과 맞서는 건 싸움이 아니라 자살이지. 지금 자네가 할 일은 잘 먹고, 잘 자고,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는 것이라네.”
“내 몸은 문제없다. 그러니…”
“자네는 이제 막 그림자에서 인간으로 돌아왔네. 전성기의 신체와는 한참 동떨어진 상태일 테지. 그리고 무엇보다, 일어나자마자 죄인이니 업보이니 우울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걸 보니 정신은 아직도 그림자 시절을 못 벗어난 것 같군. 식사를 내올 테니, 그동안 쉬고 있으시게.”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모르스에게, 관리자는 문을 나서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나는 자네의 힘’도’ 필요한 거지, 자네’만’ 필요한 건 아니라네. 다시 말해서, 자네 혼자서 다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저 우리 모두의 짐을 조금 나눠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네.”
“여긴, 엘리시온이 아니니까.”
그리고,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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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스가 일어난 지 일주일 째,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무기를 돌려받지 못했다.
“사. 장. 님. 제가 보내드린 서류는 다 처리하셨나요?”
애꾸눈의 여성이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관리자를 노려보자,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먼 산을 쳐다보았다.
“부사장, 감시 진정하고…알다시피 얼터니움 정화 시술을 나로서도 처음이라 말이야. 경과를 지켜보던 중이었네. 서류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뭉치가 모르스의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에 떨어졌다.
“경과를 지켜보는 중에도, 서류는 처리하실 수 있겠죠.”
“부사장, 잠깐…”
“처리하실 수 있겠죠, 사장님?”
“…아무렴. 내 저녁 전에 전부 처리해 두도록 하지.”
“잘 되었네요. 오후 6시 정각에 찾으러 올 테니, 그때까지 끝내주시길.”
신경질적인 쾅 소리와 함께 이수연이 문을 닫고 나가자, 관리자는 터덜터덜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더니, 의자에 걸터앉아 펜을 집어들었다.
“미안하네, 모르스. 아무래도 잠시 업무를 좀 봐야 할 것 같아. 최근에 일이 좀…꼬이다보니, 본사 업무가 좀 밀렸거든.”
모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아니…나도 돕겠다. 모든 걸 처리할 수는 없어도, 정리 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 비슷한 주제의 서류 더미로 분류해두지.”
“아니 괜찮네만…”
“어차피 지금 나는 하는 일도 없지 않은가. 사양할 필요 없으니 어서 다오.”
관리자는 곤란해 하는 듯 하면서도 서류더미를 건넸다. 모르스 자신이 업무를 직접 처리할 수는 없겠지만, 이래뵈도 예전에는 이보다 더한 서류의 산도 처리해 본 적이 있으니 없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렇게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병실 안에선 종이 스치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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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편 올라갑니다...
쓰기로 약속했던 예하 야설 시리즈 첫번째 순한맛 파트임. 상대는 당연히 관남충.
이왕 순애물인 김에 빌드업이 좀 있겠지만 결말엔 19금 씬 들어갈꺼임 ㅇ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