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디스포리아 채널

 푸념글은 더 안 쓰기로 했다. 이곳은 일기장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것 또한 마지막 편지다.


 며칠 전 동생이 돌아와서는 엄마가 전해주라고 했다며 무언갈 쥐여주고 갔다.


 짜증날 정도로 투명 테이프를 통해 꽁꽁 감싸맨 편지와 상자 하나.


 봉투가 아깝긴 해도 아끼고 싶단 생각도 없어서 짜증이 날 즈음 북북 찢어 열어버렸다. 이걸 쓴 사람 생각은 내 알 바 아니지.


 그녀가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릴때 나와의 대화는 내 알 바가 아니었던 것처럼. 복수는 아니겠지만 나의 사소한 분풀이였다.


 결국 편지란 것은 사십 대인 그녀에게도 지극히 상투적인 무언가였을 거다. 편지 하면 으레 생각나는 문구들, 그리움, 파편화된 추억, 너와 함께 걷고 싶다는 바램.


 문제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 하나하나가 지극히도 나에게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마치  몇 달 전에, 내 귀로 속삭였던 것이 다시 들려오는 듯 했다.


 "나는 너를 남성기가 반짝거리는 남자아이로 낳았어."


 끔찍했다. 마지막엔 성경의 구절을 써 놓았더랬다.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을.


 그것이 누군가에겐 구원이고 누군가에겐 희망이겠지만 나에겐 아니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 대하겠다. 뭐 어떤가.


 각자가 자기가 수고하는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전도서 3:13-

 젊은 시절에 너의 위대한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괴로운 날이 닥치기 전. 인생에 낙이 없구나 하고 말할 때에 이르기 전 -전도서 12:1-


 글씨는 알아보기 어렵진 않았지만, 글자 몇 개가 뭉개진 듯 했다. 굳이 노력하긴 싫어서 넘겼다.


 선물이란 것도 그랬다. 적당히 종이란 것들을 찢어내자 퍼즐 상자 하나였다.


 이건 좀 의외였다. 그래도 수많은 것들을 제치고서라도 온전히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기대는 금방 끝났다. 안엔 책 두 권과 편지 하나, 사진 한 장이 있었다.


 몇년 전 찍은 내 사진이었다.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에겐 막심한 후회로만 남은 시간들이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길래 웃었을까. 그때도 나는 여전히 끔찍하게 생각했었는데. 사진을 찍는 것조차도 좋아하지 않았다.


 편지는 그녀가 아닌 이모의 것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조금도, 그 어떤 감흥도 없었다.


 나는 이미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데다, 어릴 적부터 나와는 상충되는 그녀의 개소리를 무시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다 개소리일 뿐이었다 나에겐.


 하나 기억나는 건, 몇년 전 죽었다던 외할아버지가 갖고 있는 책이라고 했었다. 유품처럼 생각하라고 했었던 것 같아 코웃음을 쳤다.


 결국 진정 소중한 것은 내가 아닐 것이니까.


 유품으로 생각하라면서 보낸 것이 청소년기의 고민에 대해 별 도움조차 안 될 웃음과 긍정으로 해결하자는 멍청한 책들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고, 내 속살을 헤집고, 울컥 솟아오르는 핏덩이를 삼키는 기분을, 제대로 느껴본 적도 없을 것을 묘사할 수 있게 되어서야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나름의 도움은 됐다.


 내 휴대폰은 위약금을 물고 해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유는 좋은 사람들과 만나는 게 아니고, 나쁜 교제를 하는 것 같아서.


 밤중에 몰래, 그것도 멍청하며 근거없을 종교적 신념 하나로 타인의 휴대폰을 들여다본 주제에 말은 장황했다.


 내가 화낸 원인은 그거였다.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없이 자기 멋대로 결론내리고 화내고 대화를 멈춰버린 것에서.


 그래서 화가 났다. 내 휴대폰을 뒤졌단 것은 용서할 수 있었다. 뇌우칠 위인도 아니었으니.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그런데 이젠 화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 있었다. 그녀는 정당화의 달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이후로 그녀를 혐오했다. 그녀는 모든 생각과 사고가 거세된 것 같았다. 나의 모든 물음은 성경으로 답했다.


 나의 모든 의혹은 성경을 읽으라며 회피했다. 결국 그 얕은 믿음이 파헤쳐지고 울었을 때도 난 그녀를 혐오했다.


 지금은 그녀를 더욱 파헤치고 헤집어놓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심히 짜증났다. 수천 년 전의 책 한 권과 텍스트 몇 줄에게 모든 걸 빼앗긴 사람이라니. 끔찍했다. 자기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성경이 아니라 그녀의 의견을 듣고, 성경이 아니라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다. 멍청한 년이.


 이야기했다. 바뀔 생각도 없고 대화할 생각도 없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웠고, 보낸 것들은 읽지 않아도 뻔하니 나중에 불태우던 쓰레기장에 버리던 하겠다고.


 앞으론 영영 대화할 일도 없을거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ㅡ


 마지막이었다. 내 어린 질투심을 조금만 드러내자면 외할아버지란 작자를 잔뜩 저주하고 욕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를 자극하고 욕보이며 더 낮고 깊은 구덩이로 빠뜨릴 수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친구와 가출했던 그녀를, 내 엄마를 억지로 잡아끌어 성경과 그 말도 안 될 사이비에 의탁하게 만든 작자가 싫어서였다.


 ..


 비참했다. 나에게 남은 가족이고 혈연이란 것이. 저주하고 욕하고 비난할 부모조차 사라져버린 것이.


 나는 이미 그녀를 부모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터다. 부모였던 것이나 부모나, 가족이나 나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내가 태어나서 죽 느낀 것은 길다란 수직관계와 위 끄트머리에 선 부모 뿐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체념하듯이 살아간다. 그 무엇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 게임을, 유튜브를, 소설을, 모든 것이 무의미와 직결된다. 허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화를 낸다고 승패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사건이 바뀌진 않는다.
내가 짜증을 낸다고 전개가 달라지진 않는다.


 내 감정은 무의미의 총화이며 허무의 화신이었다. 모든 것이 빨아들여지고 나아갈 힘을 잃는다.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일 뿐이었다. 내가 느끼는 것으로는 그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무력감. 그래, 끝도 없을 깊은 무력감.


 결국 나는 나와 친한 몇 명에게만 행복과 즐거움과 분노와 질투와.


 내가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누군가 앞에서만.


 그렇게만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