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미국과 소련의 공군 장성들은 미래의 전쟁에서 과거의 공중전 전술은 다소 쓸모가 없어질 것이라고 직감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핵무기의 위력은 재래식 전력의 존재 가치를 위협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으며, 이제 전쟁은 누가 상대방의 전략 폭격기를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격추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전쟁 수행 전략의 패러다임이 바뀜에 따라 전투기는 이제 더 이상은 적 전투기와 맞붙지 않아도 되었다. 전략폭격기와 버섯구름이 하늘을 뒤덮을 것이라고 예견되는 미래 전장에서 전투기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무시무시한 가속도와 상승력, 그리고 적 항공기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격추할 수 있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진먼 포격전 당시 노획한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을 역설계하여 자기들만의 열추적 미사일(AA-2 Atoll, 또는 R-3S)을 만드는 데 성공한 소련은 자신만만했다. 적의 꼬리만 일정 시간 물고 있으면 마법처럼 날아가 적을 일격에 격추시키는 무기가 손에 들어왔던 것이다. 초음속 요격 임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소련은 미사일 운용에 맞추어 자신들의 최신예기를 설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미그-21 초음속 전투기였다.

 

미그기의 조종사들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항공전술을 요구받았다. 당시 소련이 사용했던 지상 관제 요격 시스템인 ‘보즈투크’는 요격에 나선 미그기들에게 직접 좌표 코드를 전송함으로서 표적까지 자동으로 보내주는 기능이 있었다. 적기의 요격은 모두 보즈두크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전투기 조종사가 직접 적을 색적할 필요도, 추격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미사일의 발사한계를 초과하지 않기 위해 조종사들은 전투 상황을 포함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공기에 2G를 초과하는 부하를 가하는 기동을 실시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론과 열병식은 완벽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 터키 공군의 RF-84기가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자 제982전투항공연대의 타라투타 대위는 자신의 미그-21PF로 해당 항공기를 요격할 것을 명령받았다. 타라투타 대위가 RF-84기에 접근하여 터키 공군 라운델임을 확인하자, 지상관제소는 즉각 격추를 명령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타라투타 대위가 달고 있던 무장인 R-3S는 최소 사거리 1km에 최소 항공기 속도 900km/h라는 발사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조건을 달성하려면 적기가 소련 영공을 벗어나게 될 판이었던 것이다.



결국 타라투타 대위는 궁여지책으로 항공기의 속도를 낮추어 발사 거리를 확보한 뒤 첫 번째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거리가 충분하지 않아 빗나가고 말았다. 어렵게 발사한 두 번째 미사일 역시 적기를 추적하지 못하고 하늘로 솟구쳤고, 설상가상으로 미사일의 매연이 엔진으로 흘러들어와 미그기의 엔진이 꺼져버렸다. 그렇게 정밀 무장을 장착한 최신예 소련제 초음속 요격기는 직선 비행하는 적의 비무장 아음속 항공기를 격추하지 못하고 기지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소련 방공시스템의 총체적인 한계를 모두 보여주었다. 조종사는 적절한 근접 공중전 실력이 부족했으며, 무장은 성능과 신뢰성이 저열했고, 지상 관제 장교들은 자신들이 관제하는 항공기의 무장별 성능도 제대로 숙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 특유의 한계로 인하여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자 소련 군 당국은 이 사건을 조용히 덮어버렸다.

 

이때쯤 미국 역시 자신들이 만든 고성능 미사일들의 성능을 믿고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뛰어들었고, 팬텀기들은 그 믿음을 완벽하게 부숴버렸다. 시계 밖 교전(BVR)이 본격적으로 가능한 최초의 항공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정치적 제약들과 당시 전자장비의 열악한 성능으로 인하여 북베트남이 사용한 소련제 구식 항공기들은 저고도 격투전에서 팬텀을 농락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수백만 달러짜리 전투기들이 왠 동양의 후진국의 공군한테 줄줄이 박살나는 것을 보며 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베트남전의 진행을 보며 똑같이 충격에 빠진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었다. 북베트남이 사용한 항공기들은 분명 소련제이기는 했지만, 북베트남을 가르쳐 준 비행교관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던 데다 그 항공기들은 소련에서는 이미 십수년 전에 몽땅 퇴역해버린 퇴물들이었다. 더군다나 소련제 항공기들은 미군기보다 훨씬 열등한 레이더와 항전장비를 장착하고 잇어 BVR은 사실상 불가능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미국보다 상황이 나쁘면 나빴지 절대 좋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좋지 않은 상황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여실히 펼쳐졌다. 소련제 항공기들이 승승장구하던 베트남과는 정 반대로 이집트의 보즈두크 요격 시스템과 미그-21은 이스라엘의 항공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깨져나갔다. 소련은 보즈두크 방공시스템의 부끄럽고 무능력한 실패에 대해 이집트군의 무능을 탓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내 소련군은 자신들이 직접 싸움에 나설 기회를 얻게 된다. 계속되던 이스라엘의 공중 도발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조종사들을 이집트에 직접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소련은 자국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마리’에 있는 공군기지를 거점으로 삼아 한 달여간의 훈련을 거쳐 이집트에 파견될 최고의 조종사들을 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리 공군기지의 환경dms 황량한 이집트의 사막 지형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에 파견될 조종사들은 이곳에서 눈에 띄는 지형지물이 없을 때 비행하는 법 등 그들에게 필요한 실력을 배양했다. 또한 이곳에서 시행된 훈련은 기존 소련 공군의 요격형 훈련체계보다는 살짝 더 난이도가 높았다. 조종사들에게는 최대 G를 일상적으로 넘나드는 등 일반적인 훈련보다 훨씬 더 과격한 기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나름의 훈련을 마친 소련 조종사들이 마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소련 공군이 겪은 최악의 굴욕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공군 조종사들은 소련의 조종사들보다 기량이 월등했다. 소련 조종사들이 마주친 바로 첫 교전부터 소련 측은 단 한 대의 이스라엘 전투기를 격추하지도 못하고 전투기 4대와 조종사 3명을 잃어야만 했다. 마리에서 소련 조종사들은 기동 여건이 좀 더 좋아지긴 했지만 결국에는 요격전 위주의 훈련을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소련에는 제트기 간의 근접 기동전과 격투전을 가르칠 수 있는 교관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의 처절한 실패는 공군 수뇌부의 단잠을 깨우기에 차고도 넘쳤다. 소련 공군은 자신들이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찾아서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중동에서 철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공군 수뇌부는 다름아닌 마리 공군기지에 ‘특별 항공 교육 센터’, 또는 제1521 항공기지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소련판 ‘탑 건’의 시작이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