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손가락 끝에서 약간의 따끔함, 그리고 액체가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보지 않아도 흐르는 게 피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이 갔지만, 살짝 누른 것 만으로도 이렇게 쉽게 상처가 날 정도일 줄은 몰랐다.


분홍머리 흡혈귀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입 안에 들어가있는 손가락 쪽으로 시선이 내려가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떤 매력이라고 해야할 지, 참으로 묘한 기분이 되게 만들었다.


마치 먹을 것을 기다리는 애완동물같다고 해야 하나. 이런 말을 흡혈귀에게 한다면 아마 실례라면서 바닥을 뒹굴거리며 항의를 하지 않을까.


…상념이 너무 길어진 것 같다.


슬쩍, 피가 흐르는 게 느껴지는 손으로 시선을 옮기니 송곳니에서 손가락을 뗐는데도 피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게 보인다.


한 방울, 한 방울. 빠른 속도로 뚝 뚝 떨어지는 피가 송곳니를 타고 입에 들어가고 있는데도, 입을 다물 생각을 못하고 혀만 날름 움직여 피를 먹는 흡혈귀도 보였지만.


…감질맛 난다는 듯이 내 손을 쳐다보던 흡혈귀가 상체를 들어올리며 내 손을 부여잡고는 입으로 빠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쯉, 쯉. 내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는 부분만을 혀로 핥기도 하고, 빨기도 하면서 음미하던 흡혈귀는, 손가락 끝에서 피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핥았다.


아쉽다는 듯이 쩝쩝 거리는 흡혈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입 밖으로 손가락을 빼니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있었는 지 쉽게 나왔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손가락을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도, 초점이 돌아와서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 지 깨달았는 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서는 거의 시체에 가까울 정도였다.


"죄, 죄, 죄송합니다! 너무 많이 빨아갔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많이 빨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깊게 상처가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흡혈귀의 침으로 흥건한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주변에 휴지라도 없나 둘러보지만 내 집이 아니라서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 건지 파악이 되지를 않는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흡혈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고, 후다닥 하고 금세 나와서는 내 손가락에 휴지와 상처에 바르는 약, 그리고 반창고를 챙겨왔다.


"그렇게 많이 안 뜯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아니에요! 제 침이 묻은 건데…."


너무 과할 정도로 많은 양의 휴지를 뜯고는, 그대로 내 손을 정성스레 닦아주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 정성이 느껴지는 모습이어서,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들었다.


…내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정도라면, 본인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흡혈귀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런 기미는 전혀, 아예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자기 침이 묻은 내 손가락을 열심히 닦고있을 뿐이었다.


이미 다 닦여서 침의 ㅊ도 안 보인은 상황이었건만, 그런데도 닦다보니 이제는 내 손가락이 아플 정도였다.


됐다는 의미로 흡혈귀에서 손가락을 빼니, 그제서야 자기 침이 다 닦인 것을 보고는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에서는 상처가 나아가는 증거인 진물이 나오는 것을 보며, 흡혈귀는 바르는 약의 뚜껑을 열고 내 손가락에 조심스레 발랐다.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는 다는 게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기에 참았다.


정성스레, 너무 많이 바르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이 정도면 금방 낫겠지 싶을 정도로 바른 뒤에야 반창고를 붙였다.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마를 훔치는 흡혈귀의 모습을 보다가, 반창고가 붙은 손가락을 살펴본다.


반창고에 그려진 귀엽게 그려진 강아지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아무튼, 흡혈귀에게 피도 먹였으니 이제 제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지 확인해볼 차례였다.


"…아까 사용헀던 마법을 다시 써주셨으면 합니다."


"…네. 다시 해볼게요."


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흡혈귀는 자신의 손을 쫙 펼쳐서는 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거기에 시선이 돌아갔지만, 생각해보니 맨 눈으로 빛을 본다는 건 시력에 매우 나쁜 일이었기에 흡혈귀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흡혈귀가 살짝 보였지만, 왜 그런 건지는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가, 갑니다!"


끄으응 하며 힘을 주는 소리와 함께, 안 그래도 밝던 거실이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까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흡혈귀의 손을 안 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과도할 정도로 거실이 밝아진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흡혈귀가 됐다! 성공했다! 하는 소리와 함께 빵 하고 빛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거실 창문이나 베란다에 커튼이 쳐져있어서 그렇게 많은 양의 빛이 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겠지만, 거실을 가득 채우기에는 충분한 빛이었다.


한순간이지만 시야를 잃어버리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해본다.


…흡혈귀의 손에 집중된 빛에 생각보다 더 많은 마력이 들어간 나머지, 그대로 빵 하고 터져버린 게 아닐까.


간단한 추론이었지만, 맞는 듯 싶었다.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한 시야 사이로, 두 눈을 손으로 감싼 흡혈귀의 모습이 보였다.


시력이 나빠지거나 실명이 되는 게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사람과는 다르게 신체 능력이 좋은 건지 금방 나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곧바로 내게 다시 사죄의 절을 올렸지만.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버렸습니다! 어떻게 사과 드리면 될 지…."


"사과는 됐으니, 다음부터는 조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야 쓴 게 단순히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만, 다음번에 사용하는 게 다른 마법이었다면 큰 사고가 났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충분한 사고였지만.


그걸 흡혈귀도 이해하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내 얼굴을 올려다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그냥 절을 올린 상태로 몇 분을 있었으니까.


언제까지 저러고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렇게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래 갈 생각도 없었고.


갓난 사슴처럼 점점 떠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다리에 떨림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있지 말고 제대로 앉으셨으면 합니다. 다리, 아프지 않습니까?"


"아, 아픕니다. 그래도, 제가 저지른 사고에 비하면…."


"잠깐 시야를 잃었을 뿐이지 시력이 나빠지거나 실명이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시야를 잃었다구요? 모, 목숨으로 사죄해야만…!"


급기야는 손톱으로 목을 그으려고 하는 것에 그러지 말라고 말려야 할 정도였다.


…흡혈귀의 손톱은, 사람의 손톱보다 훨씬 날카롭게 갈려있어서 저기에 실수로라도 닿으면 온 몸에 상처가 날 것 같다.


저런 것으로 목을 살짝 그었는데도 피가 안 난다는 점에서 흡혈귀의 신체도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죄송해요. 여태까지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조절해야 할 지를 몰랐어요."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번이 사람의 피를 처음으로 먹어본 것 아닙니까."


"그, 그렇죠. 물론, 맛있었습니다! 사람의 피라는 게 이렇게 맛있는 거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까 먹었던 내 피의 맛을 음미하듯이 혀로 입가를 핥던 흡혈귀는 그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고는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게, 너무 흥분한 것 같아요. 지금도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아서…."


"…그 정도입니까?"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도 사람의 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희석된 물만 마셨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돌아가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에요. 저희 부모님도 충분히 오래 살으셨어요. 오히려, 더 오래 살지 않고 가서 괜찮다고 하실 정도니까요."


"…돌아가실 때의 연세를 물어봐도 괜찮습니까?"


"아마… 백살은 충분히 넘기셨던 걸로 기억해요. 저를 늦게 낳으셨으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스물 셋이에요."


…백살이 넘었는데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신체에 대단하다고 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서로의 사랑이 대단하다고 해야하는 건지.


흡혈귀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었다면 사십에서 오십을 넘는 순간 아이를 가지는 게 힘들 텐데, 그런 것에서 벗어난 종족들이 여기에는 얼마나 많을까.


저 신체 능력도 그렇고, 부러운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그리고 한달이라는 시간동안 다른 종족들을 보아오며 느낀 것은 각 종족들마다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눈 앞의 흡혈귀도 그런 문제가 있었다.


사람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남자였을 때에 있던 곳과 동떨어진 곳에서도 위안감을 준다.


"저기, 사람… 아니, 언니는 몇 살이에요?"


"…스물 다섯입니다."


"스물 다섯… 저랑 두 살 차이네요!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이미 언니라고 불렀지만."


"…괘, 괜찮습니다."


흡혈귀가 언니라고 부르는 말에 순간적으로 한 박자 쉬면서 말을 이었지만, 괘의치않고 내게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한 흡혈귀였다.


"피부는 뭘 했길래 이렇게 좋은 거에요? 저 처럼 부모님에게 관리라도 받은 거에요? 아니면, 따로 관리라도 하는 거에요?"


"관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피부가 이렇게 좋은데? 나는 아침에 자서 밤에 일어나는 체질이라 매일매일 관리하지 않으면 피부가 상하는데! 이건 사기야!"


반창고가 붙여진 손을 만지작거리며 불공평을 주절거리기 시작한 흡혈귀의 모습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언니라고 불렸던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여성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화장에 대해서도 모르고, 여성이 어떤 관리를 해오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게 맞았다.


그냥, 남자였을 때처럼 살아왔다.


그렇다보니 눈 앞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그리고 여성의 대화로 다가오는 게 너무나도 낯설어서 긴장된다.


"…혹시, 제가 피를 마셨던 것 때문에 그렇게 긴장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여성… 다른 종족과 대화를 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죠. 사람이니까."


이해한다는 듯이 음, 음.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한 흡혈귀는 내 두 손을 마주잡았다.


"저도,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근처에 저와 같은 동족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저도, 가끔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쵸!? 분명, 혼자서 살아가는 게 아닐 텐데도 가끔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난 분명 여기에 있고, 저처럼 야간에 생활하는 다른 종족들을 밖에서 보는 데도 말이죠!"


안 그래도 흥분했던 흡혈귀는 더 흥분해서는 마주잡은 내 손을 위아래로 연신 흔들며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제 옆에 언니가 산다는 것도 그때 아침에 알았던 거에요! 저도 뭐라고 말을 붙여보고는 싶었는데, 이런 성격이라서…."


"…이해합니다."


가끔, 누군가와 대화를 한 다는게 참으로 어색해서 말을 걸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그렇게나 잘 나오던 말이, 잘 모르는 남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리가 안 굴러간다고.


남자였을 때에 친했던 여성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기에는 없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절로 지어진 처연한 웃음에 흡혈귀가 웃던 얼굴로 굳어버린다.


그리고는, 금세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제, 제가 너무 주제 넘은 행동을 했나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냥, 친구를 떠올렸을 뿐입니다."


"아…. 그 친구 분은, 잘 살고 계시나요?"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


마주잡은 두 손을 놓아버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이는 흡혈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는 내가 어떤 말을 했는 지 깨달았지만, 차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여기에 없다는 말은 사실상, 죽었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으니까.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말은, 존재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내 표정이 어떤 모습일 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