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절검록 비주얼 노블 버전





2-1

설자


"후..."


소년이 심호흡을 하였다.

그가 손을 뻗어 문을 두드리려다, 두 치 정도에서 다시 멈추었다.


"왜 나야..."

설움이 소년의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소년의 이름은 침옥(枕玉), 태허검파의 새로운 입문제자로, 사사받은지 채 3개월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천궁봉 꼭대기까지 와서 장문(掌門)의 문을 두드리고, 그녀의 분노를 견딜 준비를 해야 했다.


'장문께 사죄드리는 일은 내가 가라니, 사제 사형분들도 너무하시지...'

소년이 장문의 분노를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


태허파(太虛派) 장문—[경진검]임조우,

올해 56세,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섰다.

정위상선이 금빛을 타고 등선하고, 태허산이 범화로 타오른 후, 선인의 수제자였던 그녀는 여섯 사제(師弟)와 함께 태허검파를 다시 세웠다.


불과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채로, 태허검파는

신주정도 강호6대종문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기에 임조우는, 그의 지아비 [축구검]마비마와 함께 강호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부부이다.

일파의 주인으로 고귀하지만, 임장문의 성격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항상 온화하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항상 동등하게 대했다.


몇가지 예외가 있지만.

만약 그 예외를 다루게 된다면, 임조우는 항상 격노하고, 불같은 자태로 변한다.


일찍이 소년이 천궁봉에 왔을 때, 좋은 사형들이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가서는:

"침옥이는 오늘 처음 왔으니, 사형들이 널 위해 가르쳐 줄 게 있다:

장문 사부 앞에서는, 한 가지 일을 두 사람이 다르게 말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부장문의 일인데;

부장문께서 밖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네가 듣게 되어도, 장문 사부에게 말해선 안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개인사를 우리가 의논해선 안돼."


"이해하였습니다."

소년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담에도—부부 사이의 일은, 남이 참견하지 말라는 게 있으니까.

그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


"한 분은 우리의 초대 사부, 대사부 정위진인..."

사형들이 갑자기 소리를 낮추더니, 좌우를 살폈다.


"너희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이 이름을 못 들었겠지만, 대사부께서는 예전에 아주 유명했고, 천년을 살아도 늙지 않는 신선이셨지.

정위진인이 20년 전 등선하셨으니, 그 일을 가지고 장문을 자극하지 말도록, 대사부가 등선할 때 데려가지 않은 것 때문에, 장문께서는 늘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다."


"아아."

정위진인의 이름은 비록 시간이 흐르며 잊혀졌지만, 소년은 그녀의 사적을 많이 들어왔고,

[유일한 신선]이라고들 하니, 이 천궁봉까지 천리를 걸어와 태허파에 들어온 것이다.


"다른 한 분은 [무쌍]소미. 그녀는 장문의 사매지만, 둘 사이가 물불과 같아서...

그 이름을 말할 필요도, 들려도 듣지 마라, 무쌍문의 사람을 만나면 멀리 숨고, 그들과 관계를 맺지 말아라."


"예?"


무쌍문—근 20년 전, 신태허검파와 거의 동시에 설립되었지만, 규모의 차이가 천지차이다.


태허검파는 현재 6대종문에 올랐지만, 무쌍은 여전히 작은 종파이다.

그럼에도, 강호의 어느 누구도 무쌍문의 제자를 건드리진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문주— [경재절염]의 소미 때문이다.(驚才絕艷)



절륜한 미모, 걸출한 지혜.


소미가 비록 정위진인의 두 번째 제자지만, 무림에서는 그녀가 태허칠검에서 가장 두려운 자라고 공인하였고,

경칭으로 [여중제갈], [무쌍선자]라 불렀다.


"...그렇게 무섭습니까?"


사형들은 고개를 맞대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무섭다."


"......"

그가 멍하니 있는 동안, 방에 있는 장문의 말소리가 귓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옥, 왜 문 바깥에 서있느냐?"



"아... 예! 제자 침옥이 장문을 뵙습니다."

소년은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감동했다.


"장문께서는... 어떻게 제자인 줄 아십니까?"


"어떻게? 난 아직 제자의 이름을 기억 못할 만큼 늙지 않았다만."

장문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자조가 묻어있었다.


"본파의 217명을, 모두 똑똑히 기억하지;

문객의 호흡이 미숙하고, 발걸음이 허황되니, 기초가 불안하더군.

아무리 생각해도, 입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너밖에 없더구나."


"...아, 네, 네. 수련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침옥이 순식간에 땀범벅이 되었다.


그가 사사를 받은지 3개월, [태허진결]의 입문공법 [태이경]도 단련하지 못해, 입운계를 오를 때 숨이 찼기 때문이다.

사부의 말은 평이했지만, 소년 침옥이 듣기에는 자신이 수련을 게을리했다는 것처럼 들려,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이 아이가 입운계를 오르는 건 쉽지 않았을 테니, 놀라게 하지 마시지요."


침옥이 의아해했다: 이건 장문의 목소리가 아닌데.

방문이 홀연히 열렸고, 소년이 일평생 보지 못했던 미모의 여인이 웃음을 지으며 서있었다.


"......"



그녀의 뒤에, 장문 임조우가 무겁게 서있었다.


"소미... 태허파의 내 제자를, 어찌 무쌍문인 네가 평가하는가?"


"어머, 말이 많았습니다."


절륜한 미모의 여인이 침옥에게 추파를 보냈다.

임조우가 그제서야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침옥. 무슨 일이지? 말해보거라."


"어..."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본래 그는 사형 사제를 대신에 장문에게 사죄하러 온 것이다.


이른 아침, [무쌍선자] 소미가 초청도 없이 천궁봉에 가겠다고 하였다,

부장문의 전언을 장문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저와 사형은 사부의 노여움을 살까,감히 같이 오르자고 주장하지 못했다.

그렇게 의논하던 중, 무쌍문주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미 불운관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솔직하게 고했다:


"사부께 전합니다: 무쌍문의 소문주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둘째 사저와 현리 사형(玄離)이 임의로 정할 수 없다 하여, 먼저 산에 올라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푸훗,"

옆에 있던 소문주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


장문의 얼굴에는 말할 것도 없이, 냉랭함이 넘쳤다:

"그 사람이 여기 있는데, 무얼 보고한단 말이냐? 돌아가거라."


"예... 제자, 물러나겠습니다."

침옥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장문이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당부했다:


"이후로 송신의(送信) 일은, 네가 할 필요 없다. 현리에게 태허진결, 태이경과 태초경(太易勁, 太初勁)의 기초를 잘 가르치게 할 테니, 산을 올라도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제자, 받들겠습니다."


장문은 소년을 배려해 주었다. 침옥은 감사한 마음을 가졌지만, 말주변이 없어, 계속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부."


"가거라."


소년이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하산했다. 임조우는 제자의 모습이 청석계 너머로 사라지는것까지 보고 나서, 말 한마디 없는 소미에게 몸을 돌렸다.


"난 널 여전히 사매로 보고 있건만, 내 태허파는 널 그렇게 보지 않는군."


"제가 잘못했군요."

소미는 웃음을 유지하고, 멀리 시선을 돌려 이 작은방을 둘러보았다.


"태허파, 불운관... 훗, 정말 사저다워요."


임조우가 차갑게 대답했다.

"태허의 맥을 전해주어야 하니, 우리 손으로 끊어낼 수는 없지."


"후후, 우리 일곱 중에서, 사저가 가장 옛날을 그리워했으니까요."


두 사람은 한담을 늘어놓으며,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임조우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소미는 사소한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제자의 자질이 나쁘지도 않고 담력도 있지만, 남자니까, 태허검기를 망아지의 경지까지 단련하기는 어렵겠어요."


"...나는 사부처럼 재능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언경을 두고 말하자면, 그는 만중무일의 무학의 기재이니, 내 제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적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침옥은 분명 좋은 싹이다, 태허파는 후배에게 물려줄 테니, 아마도 그가 내 마지막 제자가 되겠지."


"사저는 지금 마지막 제자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임조우가 잠깐 멈추더니, 이내 얼굴색이 변했다.

정위 일곱 제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녀는, 두 번째 사매보다도 15살이나 많았다.

처음 임조우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 가장 어린 여섯 번째 제자랑 혼인을 하고 나서는, 연령에 대한 일을 기피했다.


"소미, 내 인내심에 도전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라."

태허장문이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경계를 찢었다,


"사부가 부활했고, 사매가 죽었고, 다음은 우리다—이게 하고 싶은 말인가?

오랜만에 날 찾아와서는, 잡담이나 하려던 건 아니겠지? 넌... 다시 사부를 죽일 셈이냐?"


"......"


임조우는 사매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았다:


"소미, 난 널 좋아하진 않지만, 한때는 널 친동생처럼 여긴 적도 있었지. 내가 한마디만 하마:

지금은 예전과 달리, 우리 일곱이 더는 모일 수 없다. 그때의 일은 요행이었으니, 다시 한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반드시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임조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20년간, 난 그 밤을 잊은 적이 없어...

네가 아니였다면, 네 번째와 일곱 번째 사매는 죽을 뻔했었고, 언경의 얼굴에도... 운이 없었지."


"제가 바로 사저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였군요~ 후후, 20년이 흘러, [만약]은 이제 없습니다."


두 번째 사매는 이미 정해진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고,

임조우도 알고는 있었지만, 끝내 찬성할 수는 없었다.


"흠, 말해봐라, 네 계획은 뭐지?"


"제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무림에서 [지계무쌍]이라 불리는 소미가 이렇게 말했다:


"계획을 좀 더 살폈다면, 제 마음대로 되었을까요? 계획대로라면, 사부는 이미 죽었을 텐데, 어찌 다시 돌아오겠습니까... 전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변화는 멈추지 않고,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임조우의 마음에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소미를 싫어하긴 하지만, 내심 이 여인의 방법은 믿었기 때문이다; 20년 전, 7인을 모아, 죽일 수 없는 진선 정위를 죽인 것처럼.


—시간이 흐로고, 창해가 뽕밭이 되었다, 태허칠검도 예전과는 달랐다.


"그러면, 넌..."


"훗, 계획은 없다지만, 방법은 아직 많습니다."


임조우가 얼굴을 찡그렸다:


"방법?"


"예."


"20년 전, 우리는 사부를 매장하고, 태허산을 태웠습니다.

끝나고 나서 산으로 돌아가 살펴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의 헌원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미가 한걸음 다가왔다, 임조우가 보기에는 깊은 뜻이 있는 듯 했다.


"...없었다?"


"......"



소미의 시선이 임조우의 얼굴에 고정되있다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당신은 아니군요."


"뭐?"


소미는 뭔가 재밌는 상상을 했는지, 얼굴에 웃음기가 보였다:


"제가 돌아갔을때, 사부의 관이 타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관 속의 유골은 검게 그을려,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구의 위치는 제가 안배한 것으로, 화(火)의 결계가 그곳까지 타지 않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현장을 조사했더니, 예상한 대로—"


"관에 있던 것은, 사부의 유체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


"허면... 넌 일찍이 사부가 살아있다는 걸 알았단 말이냐? ...20년 전부터 알고 있었나?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나... 한마디도, 한마디도..."


"......"


"나는 몰랐다, 줄곧 모르고 있었어... 언경은? 그는 아직도 오리무중인가? 완곡히 부탁할테니...

그리고 소의, 최소한 소의에게는 알려주어야—"


"아뇨, 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임조우가 뒤로 물러났고, 그제서야 고통이 그녀의 주름을 타고 올라오며, 태허장문의 긍지를 무너트렸다.

갑자기 10살인 때로 돌아간 듯했고, 시간은 그녀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소의는 일평생 고독했다. 그 아이는 우리와 달라, 우리는 준비를 했지만... 어쨌든, 네가 그러면 안 됐었어.

대체 왜 그런 것이냐? 소미,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냐?"


"글쎄... 왜일까요?"

소미가 중얼거렸다, 눈에서 안개가 피어올랐다.



"...시간이..."


애매한 단어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미가 한쪽을 바라보며 넋을 잃은 것이, 마치 기억을 잃은 노인이 옛일의 산더미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보물을 찾고 있는것 같았다.


"그저... 시간이... 조금..."

소미가 말을 하며, 마치 화젯거리가 끝났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노인 같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임조우 앞에 서있는 소미는, 다시 침착한 무쌍문주가 되었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20년 전, 사부의 유체는 태허산에서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훔쳐 갔거나, 혹은 사부께서 환생하였을 수도 있습니다—그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가능성]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부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말입니다."


"비록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가능성이 있는 일이니,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쌍문을 설립하고, 그들을 중원 각지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요마를 제거하는 것 이외에도, 사부의 행방을 탐색하고, 의심 가는 곳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동안 계속 사부와 헌원검의 비밀을 탐구했고, 다소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필승의 것은 없겠지만, 가능한 수단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단]... 임조우를 불쾌하게 만드는 단어였다.


"사부께 네 술책을 부리려 하지 마라, 그녀는 정위진인이시다."


"네... 사부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소미의 입가가 움직였다, 슬픔을 담은 미소였다:


"만약 사부가 절 죽이러 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피살자에겐 복수의 권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부를 시해한 일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한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우리에겐 끝없는 고통만이 있을 테니까요. 사저는?"



"......"

30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것이, 바늘이 되어 태허검파의 여장주의 마음을 뚫었다.


"...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임조우가 조용히 말했다.


"좋습니다, 저도 목이 잘릴 생각이 없으니, 이제부터 사부와의 전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생사여부와, 승패는 하늘에 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기에 온 이유입니다. 사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임조우는 눈앞에 있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 친구, 전우, 연적이며 숙적이었다, 한때는 서로 죽어도 왕래할 것 같지가 않더니, 지금은 임조우의 만감이 교차하여, 그 어느 기분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마침내, 임조우가 말했다:

"들어보지."


소미가 불운관을 나와, 천궁봉 꼭대기에서 두 팔을 벌리고는, 빙글 돌았다:



"태허파가 필요합니다."






2-2

서방의 강호


"!!!"


황량한 사막, 소녀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옷을 적셨다.

소녀가 무의식적으로 곁에 있는 포대기를 더듬어, 헌원검을 쥐고 나서야, 안정이 되었다.


"악몽을 꾸었나?"

한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나찰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이상했다. 막 만났을 때, 그의 신주어는 이렇게 유창하지 못했고, 서역의 억양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의 말은 현지인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아뇨, 괜찮습니다."


나찰인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시선을 떼고 잔을 들어 붉은 액체를 입에서 음미했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붉은 물은 곧바로 흔들림을 멈췄다. 그건 항상 같은 높이를 유지했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소녀는 항상 그게 뭔지 궁금했고, 몇 가지 생각은 했었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소상이 일어나 앉았다,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옷을 털고 나찰인의 곁에 앉아, 서역의 신비한 도깨비불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상한 물건이다.



외양은 그저 푸른 공이었지만, 아무리 굴려봐도 속의 화염은 움직이지 않고, 빛과 열만을 발산했다.

사막의 밤은 온도가 극히 낮았지만, 두 말과 이 공에 둘러싸여 있으니,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이 인간 마술은 죄다 대단하네...'

소상은 자신도 모르게 곁에 있는 금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기, 나찰인."


"나도 이름이 있다만."


"당신네들 이름은 이상해서, 제가 기억하기 힘듭니다."


나찰인이 웃더니, 신경 쓰지 않고, 옆에 있는 관에 눈길을 보냈다.

그는 계속 저 크고 무거운 관을 지고 다니며, 이따금 저것과 말을 하는데, 매번 소상을 극도로 불편하게 했다.

이소상이 잠시 기다렸지만, 나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왜 선인을 찾으십니까?"


"......"


긴 침묵.

소상이 오장육부를 뒤져, 다음 화제를 찾고 있던 때, 나찰인이 돌연 입을 열었다.


"나는 선인을 본 적이 있다."


"예?"


소녀가 의심을 보이고는, 그를 흘겨보았다:

"에헤이, 절 또 속이시는군요, 이전에는 제게 선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치, 나찰인들은 진실을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군요."


"속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주 긴 이야기이기도 하지."


"상관없습니다. 시간도 많고, 어차피 잠깐 동안은 잘 생각도 없으니까요."


나찰인이 발 밑의 모래를 보더니,


"정말 듣고 싶나?"


"네! 하지만 너무 어렵게 말고, 간단하게, 최대한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좋아. 20년 전..."



"잠깐만요, 20년 전? 당신 지금 몇 살입니까?"


"...그렇게 내 말을 끊으면, 난 말을 할 수가 없다."


"음, 죄송합니다, 계속해 주시죠."


"후우..."

나찰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20년 전, 유럽과 신주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유럽에서 파견된 원정군의 이름은 천명 기사단으로, 나도 그중 하나였지. 명 제국의 실력은 매우 강했고, 천명 또한 이렇게 강한 상대를 만난적이 없었다. 하지만 Walküre와 Der Schlüssel Gottes의 힘으로, 천명은 계속해서 승리를—"


"에이— 잠깐만요, 발 뭐시기? 더 뭐시기?"

이소상이 불만인지 입을 내밀었다,


"제가 분명 그쪽 이름들이 이상하다고 했었는데, 그렇게나 말씀하시는군요! 절 놀리십니까!?"


"...정말 미안하군, 자연스레 말하다 보니."

나찰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너희의 신주어로 해석해 주마."


"오오, 그거 좋습니다~ 소녀도 이번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음..."


"음?"


언어 환경이 달라 전환이 어려운지, 나찰인은 몇 번이나 입을 떼고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래. 서방의 기사는, 너희들의 협객이다."



2-3

천명파



나찰인이 실마리를 찾았는지, 손뼉을 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빙그레 웃었다:


"처음부터 다시 말하지: 신주의 서쪽에는 대륙이 있는데, 구라파(歐羅巴)라는 이름이다.

너희 신주의 무림에는 각자 문파가 있지만, 유럽에는 단 하나, 천명파만 있지."


"천명파는 세 사람이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이 조상의 무공을 세상을 압도해, 적이 없었다 한다. 천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럽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고, 이어서 신전, 영령궁, 형관문등의 문파를 흡수했지."


"천명이 유럽을 모두 관리했지만, 사무가 번잡하여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지. 그래서 천명은 권력을 3가문에 나누었고... 3대 종가가, 지금까지 천 년을 이어왔다."


"와, 천 년!"

이소상이 크게 놀랐다,


"치, 그건 정말 대단하군요, 우리 6대 종파에서도 천 년의 역사인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럼 천명의 검파는, 무슨 무공을 수련합니까?"


"검술도 있고, 사격술도 있지만; 천명의 진정한 독문절학은, 바로 네가 말하는 [요술]과 [마술]이다."

나찰인이 왼손을 들어, 황금 십자가를 보여 주었다.


"너희의 문화를 고려하자면, 법기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겠군."



금빛 사슬이 번쩍였다. 이소상은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 내력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다시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녀가 나찰인의 손바닥을 쳐다보자, 금색의 십자 모형이 빠르게 사라져, 연기가 되었다.


'아, 이 느낌은...'


"천명진파 3보물 중 하나: [유다서약]

붕괴능을 구속— [진기]의 흐름을 막는다."


"그리고 어젯밤 널 치료한 것은, 다른 보물인 [백화흑연];

그건 인체를 치유하고, 뼈와 살을 돋게 해주지. 진기만 충분하다면, 아무리 심한 부상도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본 두 가지 법기는, 진품이 아닌, 모조품이다."

나찰인의 손가락이 자신의 태양혈을 가볍게 눌렀다.


"여기에, 천명파들도 모르는 나만의 고유 법기— [허공만장]이 있지."


"사물을 보고, 접하고, 이해한다면; 허공만장은 진기를 통해 [의태]하여, 실체로 만들 수 있지. 그렇기에 난 천명 3대 법보를 약하게나마 모방할 수 있다."


"......"

이소상이 팔짱을 끼고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찰인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머리가 이미 고유명사로 가득 차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잠깐, 잠깐만요. 그쪽 천명파는 굉장히 재미있군요, 법보니 뭐니..."

소상이 고뇌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왜 갑자기 법구가 튀어나옵니까? 아 설명하지 마십쇼, 당신이 대단한 건 잘 알겠으니까요. 계속 천명파의 일을 말해주시죠."


"그래."

나찰인이 한숨을 쉬며, 소상을 바라보았다:


"천명이 유럽을 장악하고, 오랜 시간이 흐르더니, 야심이 점차 자라나, 마침내 큰 땅과 자원이 풍족한 이웃나라에 눈을 들이기 시작했지.

20여 년 전, 천명파는 공격— 음, 신주를 방문해, 신주를— 어, 비무를 희망했지."


"너희 신주의 군인들도 강했지만, 천명의 발키— 음, 여협들은 신묘한 법기를 지녔기에, 비무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나찰인이 말을 멈추는 것은, 역사를 이소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느라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땡볕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나찰인이, 지금은 벌써 콩알만 한 땀방울이 정교한 얼굴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한 편 소상은 그 꼴을 보고, 재밌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천명이 승기를 쥐었을 때, 선인이 나타났다.

나는 그때 그녀를 보았는데..."


"과연 선인이라는 건가?...

그녀가 손을 흔들자, 하늘에는 천둥이 울렸고, 대지는 얼어붙고, 화염이 불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에 천명의 군세는 박살이 나버렸지. 성기사가 막아섰지만,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찰인이 쓴웃음을 짓더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최강의 발키리... [유다서약]에 정통했던 천재도,

그녀 앞에선, 패배할 수밖에..."


나찰인의 눈이 또다시 그 관을 향했다.


이소상은 그의 시선을 의식했다,

하루를 같이 지내면서, 그녀는 나찰인이 가끔은 말하며 웃다가도, 관을 보기만 하면 세계의 모든 것을 배척하고 외로움에 빠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 뭐가 들었습니까?"


싸움에 관심 없던 이소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항상 저기에 대고 말하지 않습니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나찰인이 고개를 젓더니, 곤란한 듯이 시선을 관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모릅니까? 열어보질 않았습니까?"


"......"


이소상의 곁에 껍데기만 남겨두고, 그의 사고는 저 멀리 가버렸는지, 나찰인은 대답이 없었다.

소상은 턱을 괴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나찰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허한 눈빛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을 궁금해했다.


집을 생각하나?


천리나 떨어져,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서역의 고국을?

아니면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을까?


...부모는 있을까? 아, 뭐래, 당연히 있겠지~ 어디 돌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친구는? 연인은? 설마... 벌써 결혼했을까? 스승은 있나? 그 천명파의 제자 아냐?


소녀는 갑자기 자신이 나찰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비록 이틀간 동행했지만, 소녀와 나찰인은 의미 있는 대화를 하지 않았고,

이름을 물었었지만, 그 웅얼거리는 이상한 발음 때문에 기억하길 포기했으며, 지금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더 많이 대화를 해야 했는데...


소상은 풀이 죽었다.

문득 떠올렸다: 나찰인을 사부에게 데려가고 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와 함께 지낼 시간이, 반나절밖에 남지 않았다;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겠지.


'휴... 사부가 그를 며칠이나 잡아두실까?'

소녀는 왠지 모르게 실의에 빠졌다.


그녀가 15년간 살면서 처음 가진 친구에게, 함께 하는 즐거움과, 이별의 슬픔을 같이 느끼고 있었다.

기나긴 밤, 잠들지 못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날이 밝을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2-4

축구검



마찬가지로 잠들지 않는, 광활한 모래바다에 사람 한 명,  말 한 필.

말은 한혈과 금제의 말로, 머리는 가늘고, 몸통은 주홍빛이며, 허리는 길고 가늘었다.

하루 천리도 거뜬한 명마로, 말발굽이 가볍게 모래를 디디니, 구덩이에 빠지지 않아 평지를 걷는 것과 같았다.

사람은 갖은 고생을 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건장한 체구에 장발, 근육이 엉켜있었다.

얼굴에 있는 긴 칼자국이 비록 그의 뛰어난 외모에 걸림돌이 될지라도, 호걸로 보이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람과 말의 침묵은, 마치 주종을 넘어선 친구처럼 느껴졌다.

만약 중원의 무림인사들이 이 기이한 조합을 보고 있었다면, 내심 욕을 하고, 주먹을 쥐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입을 모아 [마장문!]이나 [마형!]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가 바로 정위진인의 유일한 남제자 였기 때문에,

칠검의 여섯 번째 제자,

명성이 자자한 천궁봉 태허파의 부당주:


[축구검]—마비마. [逐駒劍]—馬非馬。

겉으로는, 그는 여러 신분을 겸비하며, 명성이 극에 달하니, 강호의 그 누구도 그와 사귈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속으로는, 마대협을 [미친놈], [정신병자], [이상한놈], [죽지않는마비마]라 불렀는데도, 다툼이 생기지 않고, 우정이 유지되었으며,

아무도 그와 친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마비마라는 사람이, 무공에만 멈추지 않고, 행실이 매우 오만했기 때문이다.

비록 태허검파 부장주라는 이름을 지고 있었지만, 마비마는 근본적으로 독보적인 협객이다.


태허문의 제자들은 1년에 그를 몇 번밖에 보지 못한다: 그의 애마 [야혈]과 함께하는 날이, 그의 부인 임조우와 함께하는 날보다 많을 것이다.

천궁봉에서의 마 부장문은 태도가 온화하며, 겸손하다;

하지만 산을 내려가면, 사람이 변한 것처럼, 모든 것에 시비를 걸며, 모든 화마에 도전한다.

상대가 명문의 후예던, 실력 있는 자건, 마비마는 개의치 않는다.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인가? 악을 처단하는 것인가?

축구검에게 그런 명분은 필요하지 않았다.

싸우고 싶어 싸우고, 손을 쓰고 싶어 쓴다;

검을 쓰고 싶어 쓰고, 주먹을 쓰고 싶어 쓴다;

누군가 돕고 싶어 돕고, 죽이고 싶어 죽인다;

모든것이 마음대로다.

이런 이유로, 무림의 정도인들은 그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태허장문 임조우는 그가 저지른 사건 때문에 늘 분주했다.


그의 적이 천하에 널려있었지만, 공연히 태허칠검에 죄를 짓고 싶지는 않았고, 몰래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비마의 태도는: '오는자는 거절하지 않는다' 였다.


[날 죽이고 싶으면 와라, 언제든 기다릴 테니.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못 죽인다면 네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를 죽이러 온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매복, 흉계, 독살, 색계, 도전, 비무...

모든 방법이 사용되었지만, 무수한 상처를 제외한다면, 마비마는 죽지 않았고, 아주 잘 살고 있었다.



"제 남편은 악인이 아닙니다, 그는 자유를 좋아하고, 제멋대로이며, 충동적일 뿐.

모두들 제 체면을 보아서라도, 그와 적대하지 말아주십시요.

무림에 이 임가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태허검파가 반드시 힘을 보태겠습니다."


수년 전, 임조우의 50살 생일에, 무림의 이름 높은 문파를 초청하였다.

술잔을 기울이며 한 이 발언은, 사실상 남편에 대한 사죄로, 명망 있는 세력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마 부장문이 웃으면서 일어나, 19잔의 벌주를 받은 것도, 이 사과의 연속이었다.

술이 몸으로 들어가니, 이내 장부의 눈물이 되었다.

눈물은 경솔히 흐르지 않으니, 고독한 밤비가 쏟아졌다.

모든 사람이 진실로 보아온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었다.


마비마는 자유를 좋아하지 않고, 소유하지도 않았다.

사부가 부활했다는 걸 알자마자, 마비마는 밤새 달려 무쌍문으로 직행했고,

이 일을 첫 번째로 둘째 사저에게 알렸다.


"알고 있어."

"거기에는 내 제자가 있었고, 스스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었지. 너보다 반나절 정보 빨랐을 뿐이지만.

잘 왔어, 내 정보는 너무 단순해서, 네 설명도 듣고 싶었거든."


[무쌍선자] 소미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하게 했고, 세세한 사항들을 물었다.


"사태가 긴급해, 인근에서 잠시 알아보았습니다.

여러 묘사들을 볼 때, 사부가 틀림없습니다."


"여전히 20살, 아니면 더 어린 모습?"


"그렇습니다."


"사부는 정말 안 늙으시네~"


태허2제자가 한번 웃자, 마비마의 마음도 같이 뛰었다.


"...시간과 장소가 전부 이상해.

그래도, 이건 내 예상이 맞다는걸 보여주고 있으니..."

말을 끝내고, 소미는 습관적으로 시선을 하늘로 보냈다.


"네 말투도 어딘가 이상해, 망아지.

...어딘가 이상한 거지, 그렇지?"


"마을을 전부 죽이고 태웠습니다.

...이건 사부의 성정이 아닙니다."



"하."

소미가 한숨을 쉬었다,


"맞아,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배후에 다른 일이 숨겨져 있을 거라 의심은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사부]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


"......"


"[마을을 전부 죽이고 태웠습니다... 이건 사부의 성정이 아닙니다.] 방금 한 말이지.

그럼, 사부는 어떤 성정이지? 내 기억으로는 어릴때, 그녀는 사저를 데려가 망산을 태우고, 수많은 성화 교민들을 죽였어."


"염세라(閻世羅)가 사술로 교민들을 제어하니, 주화입마에 빠져; 망산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조우가 말하길 그곳의 진기가 매우 강하다 했습니다. 만약 그래도 두었다면 필시 요수가 나와 화를 불렀을 겁니다."


"그래, 사부는 그저 주화입마에 빠진 사람과, 요기만을 불태웠다는 거지.

그래서 죽여도 괜찮고, 태우는게 맞다고?"


"...도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악을 멸하는 것은 태허문인의 책무입니다."


소미의 시선이 마비마에게 쏠렸다.


"주화입마, 화요, 시변... 이름은 많지만, 본질은 상동하지: 바로 진기가 인체가 견딜 수 있는 부담을 넘었다는 거야. 지나친 진기로 이성을 잃고, 발작을 일으키며 살육과 파괴만을 일삼는 야수로 전락해버리지. 이 과정이 시작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어."

"그래서 죽이는 것이 구원이지. 요마 하나의 목숨을 취하면, 수천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아.

그래, 태허의 책무는 바로 그런 것이지: 마에 빠진 자를, 용서 없이 죽여라."


"...나는 이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어.

20년간, 내 무쌍문이 참살한 괴물은 일천을 넘지.

하지만 난 자랑하지 않아, 오히려, 이 계율을 혐오하니까."


"...그들은 정말로 죽어야 할까?

주화입마에 빠진 자들은 주로 무공을 접하지 못한 백성이고, 강호의 자제들은 소수지. 그들 다수는 그저 보통 사람이고, 악인은 없어, 다만... 불행히도 [진기]에 화를 입었을 뿐."


"[진기]의 눈이 없고, [천의]의 인이 아니면, 사람은 그저 개일 뿐이지.

넌 사부가 살인한게 잘못이 아니라는 거지, 내 말도 그래. 하지만 잘못은 반드시 존재하지.

만약 사부, 나, 그리고 죽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면, 잘못은 하늘에 있는거야."


"망아지, 태허는 감옥일 뿐이야. 사부의 무공은 세상을 덮었지만, [하늘]의 죄수기도 했지.

이제 그녀가 죽은 지 20년이나 흘렀는데, 그 [악을 멸하라]는 계율에 묶여있는 거야?"


"옛 인상으로 새로운 것을 판단하는 건, 큰 손해일뿐이야."


"......"

마비마가 그녀의 섬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옛날의 고통이 또다시 마음속에서 솟구쳤지만, 이미 그에겐 일상이었다.

이 여자는, 어릴 때부터 무정할 정도로 냉정했고, 항상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지금 그녀에게 오래전에 말했었던 그 말을 다시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난 대답할 수 없어."

소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 망아지, 보자마자 알겠네."


——


"너도, 참."

소미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는데, 나무라는건 아니였다.


"넌 이 세상에서 날 가장 잘 아는 남자지만, 아직 부족해;

난 이 세상에서 널 가장 잘 아는 여자지만, 이건 사랑이 아니야."


"난 널 사랑하지 않아,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후훗,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바꿀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하."

마비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제게 부탁할 일이 있죠, 안 그렇습니까? 절 속이지 말아주시죠, 거짓말을 더 했다간, 더 집착할지도 모르니까요."


"바보 같긴, 망아지. 넌 내게 속지도 않을 거고, 나도 널 속이지 않아."

소미가 손가락을 흔들자, 그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그 흰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넌 존중해 줄 가치가 있어, 망아지—— 넌 좋은 남자야, 일찍이 내게 달라붙던 아이들하고는 달라.

전부 그럴 필요는 없지, 그래, 이해해. 네가 그런 잘못을 할 필요도 없고, 그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는데... 이해해."


"그래서, 난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원하지 않아,

알겠니?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거야."


"...그리고 바라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야.

네가 스스로 선택하는 거지."


마비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즐겁지 않았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만해. 내가 준 것은 선택이고, 선택한 건 너야.

이제 내가 할 말은, 너도 선택을—"


"저는 남겠습니다."



소미가 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먼저 눈을 보고, 다시 그의 목을 보고, 손을 보았다.

이 눈길이 그를 정말 기쁘게 했고,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사부가 당신을 찾을 겁니다, 죽게 둘 수 없습니다."


"...걱정 마, 난 안 죽으니까."

소미가 가볍게 대답했다.


마비마가 침묵했다, 그 한마디에 목이 메인 것이다.

[무쌍]소미의 말은 언제나 진실이 되기에.

그녀는 소미다. 자신 없는 일은 하지 않고, 무의미한 약속도 하지 않는다.


"미리 준비했다지만, 사부의 귀환은 내 예상에 있지 않았어.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길 바래."


"제가... 조우에게 돌아가 통지하라는 겁니까?"


"아니, 거긴 내가 직접 가서 말할 거야. 넌 더 먼 곳으로 가."


"셋째 사저는 같은 방향이니... 다섯째 사저?"


"그래."

소미가 손뼉을 치고,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막북으로 가주길 바래. 야혈의 속도면 보름이 채 안 걸릴 거야.

다섯째 사매에게 가서, 사부가 돌아왔다는 걸 알려줘—

—그리고 잘 봐, 그녀가 헌원검이 있는지 없는지."


"음? 그녀의 검이 없습니까...?"


"그래, 그래서, 잘 보라는 거야.

헌원검의 행방은 정말 중요해, 난 전부 파악했으면 해."


마비마가 고개를 숙이고, 소미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이 일을 제기한 이상, 무슨 의도가 있겠지만,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소미와 알고 지낸지 30년,

이 명석한 여인은, 남자에게 해명하는걸 좋아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알려만 줍니까? 중원으로 데려올 필요는 없습니까?"


"응, 말만 전하면 족하고, 어떻게 할지는 다섯째 사매의 자유니까.

그리고는, 천궁봉으로 돌아가, 거기서 나와 만날 테니까."


"좋습니다."


사내가 대답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조우는..."


"알고 있어."

그녀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 두 단어가 남자의 근심을 말끔히 털어냈기에,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마비마가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망아지~"

소미가 뒤에서 불렀다,


"난 거짓말 안 했어, 난 안 죽을 거니까."


남자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마비마가 야혈을 타고 사막으로 들어갔다. 소미의 지시에 따라 테허오검을 찾기 위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