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쟤는 이름이 뭐야? 나랑 엄청 닮았는데, 내 동생 해도 돼?


오래 전, 차가운 감촉 속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따스함을 느꼈던 순간의 기억이 키아나의 귓가에 아지랑이 처럼 맴돌았다.


과거의 기억 속에 잠겨있던 그녀는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고 있는 장소는 다름아닌 천명 본부의 주교실. 오토 아포칼립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이 모든 악연의 종착지.


키아나가 천명 본부에 발을 들인 것은 이번이 3번째였다. 첫번째는 그녀가 태어났었을 때였고, 두번째는 그녀가 율자로 각성해 되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을 때였으며, 3번째가 되는 지금 이 순간에, 그녀는 그때 저질렀던 과오와 과거의 악연을 청산하기 위해 이곳에 또 다시 한번 발을 들였다.


그렇게 천명 본부에 3번째로 발을 들인 이후부터, 키아나는 본부를 지키던 천명의 발키리들을 제압하고 끝이 없어 보이던 기갑들까지 눌러붙은 고철들로 만들어 보이며 이곳까지 왔다. 적을 만나면 무찌르고, 길이 막힐 때 까지 쉬지않고 계속 나아가며.


그녀의 신체는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공간의 율자의 힘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스승의 유산을 물려받아 신염의 율자가 된 이후부터 이정도의 전투와 도보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산책에 지나지 않는 정도에 불과했기에.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주교실에 거의 다 다다른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최후의 적과 맞서려면 체력을 보존한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키아나 카스라나.”


하염없이 걷던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듀란달.”


천명의 S급 발키리이자 현존하는 최강의 발키리. 한때 키아나가 되고싶었던 우상이자, 꼭 이루고 싶었던 목표에 선 소녀, 듀란달.


백색 바탕에 청색의 장식이 가미된 그녀의 4세대 발키리 슈트, 월백이 키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비춰졌다. 강하고 우직하며, 자신의 뜻과 신념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천명의 S급 발키리와 마주한 키아나는 자신과 어딘가 닮아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켜줘.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시간낭비야.”


“여기까지 왔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군요.”


듀란달이 청백의 창을 키아나에게 겨눴다.


영적의 헬러. 그녀의 청백색 발키리 슈트와 한쌍인 그녀의 무기. 예전에 한번 그 창과 맞서보았던 키아나는 그녀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난 경고했어.”


키아나가 허공에서 수르트의 대검을 불러내 손에 쥐며 듀란갈에게 겨눴다. 말로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싸우는 것 이상의 시간낭비였다.


[쉬익-]


듀란달이 손을 움직인 것과 동시에 헬러가 키아나의 심장을 노리며 A급 발키리 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날아들었다.


음속을 아득히 넘어선 소리. 전차의 포탄처럼 공기를 찢으며 적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날아드는 랜스.


그러나 A급 발키리 따위가 아닌 키아나에게 있어 그것은 피하기 쉬운 꼬챙이에 불과했다.


[쾅!!]


키아나가 몸을 살짝 옆으로 비튼 것과 동시에 거대한 랜스가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그리고 키아나는 그것을 기회삼아 대검과 함께 무기를 내던진 듀란달을 향해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어 도약했다.


공간의 율자의 권능. 태어났을 때 부터 지니고 있었던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익숙한 능력.


“흡!”


허를 찌르며 대검의 리치가 닿는 거리까지 도약한 키아나는 짧은 기합과 함께 그 무엇도 태워버릴 수 있는 열기를 머금은 대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천명의 최강이라 불리는 발키리. 제아무리 율자인 키아나를 상대한다고 해도 그렇게 빠르게 패배할리가 없는 강자였다.


[쿵!!]


단단한 저항감이 대검의 날을 타고 키아나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타오르는 대검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아닌 왕의 방패. 월백에 내장된 기갑이 지닌 뚫리지 않는 방어였다.


“묵직한 일격이로군요.”


듀란달이 눈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태연한 목소리로 키아나의 대검을 막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에 키아나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꾸했다.


“과연 묵직하기만 할까?”


“?!”


대검의 도신을 잠식한 화염이 붉은 빛을 넘어 푸른 색 열기를 띄우며 월백 슈트의 방패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에 듀란달은 잠깐이지만 눈썹을 치켜들었고, 바로 월백에 내당된 또 하나의 기갑, 퀸의 대검을 내세워 키아나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키아나는 이를 마치 춤동작과도 같이 우아하면서 날렵하게 피해냈다. 그리고는 이내 잠시 적과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고, 대검을 지면에 내리꽂은 채 듀란달에게 말했다.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싸울거면 전력을 다해 싸워. 어설프게 했다간 시간조차 못 벌 테니까.”


“...과연, 확실히 더 강해졌군요. 실례했습니다.”


눈앞의 은발머리 소녀는 예전에 보았던 미숙함을 간직한 그 소녀가 아니다. 소녀는 어엿한 한명의 전사이자 발키리. 그리고 자신이 믿는 숭고함으로 인류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율자였다.


설렁설렁 할 수는 없다. 듀란달이 막아야만 하는 적은 여태껏 그녀가 상대했던 적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 요르문간드의 수장인 케빈 다음의 강함을 지닌 전사였다.


“전력을 다해 상대해 드리죠.”


듀란달이 또 하나의 랜스를 꺼내 키아나를 향해 겨눴다.


백화흑연. 6번째 신의 열쇠. 예전 2차 붕괴 때 천명의 또 다른 S급 발키리였던 세실리아 샤니아트가 다뤘던 무기이자 유품.


“....”


흑과 백의 색으로 이루어진 랜스를 본 키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리우면서도 애틋한 시선으로 적이 지닌 신의 열쇠를 바라 볼 뿐이였다.


-난 너를 사랑한단다, 시린. 


...Ich liebe dich.


그녀지만 그녀가 아닌 소녀가 최후의 순간에 느낄 수 있었던 온기. 코어의 기억 속에 영원히 세겨져 지금 이 순간, 그녀가 K-423이 아닌 키아나 카스라나로써 서있을 수 있게 이끌어주었던 빛.


“하압!!”


“...!”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 아른거리던 시야 사이로 죽음의 창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월백의 가속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자신과 거리를 좁힌 듀란달의 접근을 허용한 키아나는 반사적으로 화염의 대검을 휘둘러 듀란달의 일격을 받아냈다.


[콰앙!!]


거대한 두 힘이 격돌하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눈 돌릴 틈도 없이, 두 소녀의 공방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서로를 향해 이어져나갔다.


화염과 죽음의 대결. 율자임에도 모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소녀와, 인간임에도 인간을 위해 악을 용납하기로 한 소녀의 대립.


-아빠, 그럼 저 애는 우리랑 같이 사는거야? 이름은 뭐로 하는게 좋을까?


치열한 전투 속에서 아까도 들려왔던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키아나의 귓가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아나는 그 목소리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허수공간을 열어 수백개가 넘는 아공의 창을 불러내 월백의 기사를 향해 내리꽂았다.


-그런데 왜 쟤는 저기에 있던거야? 어디 아파?


하지만 수백에 달하는 아공의 창은 백화가 만들어낸 거수(巨樹)에 의해 전부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렇게 공간의 율자의 권능이 담긴 공격을 막아낸 발키리는 흑연을 투척해 율자의 뺨에 얇은 자상을 만들어냈다.


“역시 흑연의 힘은 당신에게 통하지 않는군요.”


흑연의 능력은 죽음 그 자체. 닿는 것 만으로도 상대의 신체를 부식시키고 안식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죽음의 율자 코어를 체내에 지니고 있는 키아나에게 죽음의 창이 지닌 능력은 통하지 않는다.


“...통하지 않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키아나는 뺨에 난 상처를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바닥에 박힌 흑연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뽑아든 흑연은 검은 가루로 흩어지며 형체를 잃어버렸고,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 창의 모습을 되찾았다.


“전 다룰 수 없는 무기를 사용할 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


마치 누군가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내뱉은 말이었다. 마치 그 말을 증명하듯, 듀란달은 바닥에 방치되어 있던 헬러를 불러들여 백화흑연과 함께 키아나를 향해 겨눴다.


그리고 키아나는 그런 그녀의 일격을 피하는 것 대신, 정면으로 받아내기 위해 모든것을 집어삼키는 불꽃을 대검과 그녀 자신에게 두르며 막대한 양의 붕괴 에너지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나도 상대의 전력을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아.”


“...무모하군요. 받아낼 수 있다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겁니다.”


“글쎄, 그건 확인해봐야 알지 않을까.”


키아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리석 바닥들이 초고온의 열기에 의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듀란달을 중심으로 그녀의 체내에 자리잡은 거품우주가 주변의 공간을 집어삼키며 신의 창을 거대화 시키기 시작했다.


먼저 선공을 가한 것은 듀란달이었다. 적을 위해 기다려 줄 명분 따윈 없었던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율자를 향해 신살의 창을 떨어뜨렸다.


[콰과과광!!!]


귀를 찢는 굉음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자욱한 연기를 불러일으켰다. 시야가 가려진 탓에 율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듀란달이었지만, 그녀는 제아무리 율자라 할지라도 신의열쇠와 신살창의 힘이 합쳐진 일격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피했다면 반격의 여지가 있었을텐데.’


적은 무모한 것을 넘어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제아무리 전투 스타일이 무대포고 앞뒤를 안가리는 열혈이라고 할지라도 막지 못할 공격을 받아내는 건 그저 멍청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는 듀란달, 침입자를 처리했습니다. 곧 그쪽으로-”


[투둑-]


듀란달이 귀에 걸친 통신기로 보고를 올리던 그 순간, 자욱하게 낀 먼지 속에서 들려와서는 안될 인기척이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듀란달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격은 이게 끝이야?”


“...!!!”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갖이 익어버릴 것만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시야를 가리던 먼지 사이에서, 흔들림이 없는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며 주변을 화염으로 뒤덮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네. 불만 없겠지?”


“킹그!!”


적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듀란달은 본능적으로 방어무장인 킹을 내세워 적의 일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공간을 절단하며 날아드는 거대한 화염 앞에서, 최강의 방패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콰과과광!!!!]


단 한번 전력으로 휘두른 일격. 그럼에도 상대를 죽이지 않기 위해 조절한 위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무력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커헉…! 큭…”


[스릉-]


방어를 했음에도 온 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의 상처를 입은 듀란달의 목덜미에, 키아나의 열기가 서린 대검이 겨눠졌다. 


“...죽이세요. 당신의… 승리입니다.”


“....”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랬기에 패자인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으며 미련없이 죽음을 기다렸다.


[쿵!]


그러나 키아나는 패자의 목을 베지 않았다. 그녀는 겨누던 대검을 내린 채, 나지막히 선생님과 나눴던 마지막 약속 중 하나를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룸다운 것을 지키고, 아름다워질 것을 지키고,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킨다.]”


“....?”


죽이지 않고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는 적의 행동에 패자인 듀란달은 그을린 상처를 억누르며 침묵과 함께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승자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런 그녀의 의문에 대한 답을 말해주었다.


“....라그나 대장으로 부터의 전언이야.”


“....!”


적으로 부터 들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오래 전 세상을 떠나간 스승의 이름에 발키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은발 머리의 소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


승자는 그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대검을 거두고 패자를 뒤로 한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안녕, 듀란달.


안녕, 내 어릴 적의 우상.


그리고… 안녕.


나의 언니.


줄곧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말하지 못한 인사를 속으로 되뇌이며.




듀좆은 매좆보다 갤주랑 맞다이 뜨는게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써봤다. 


근데 시발 그냥 농후한 보빔소설이나 쓸걸 머리 아파 뒈지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