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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클라 봉다제프스카, 소녀의 기도.


멀고 먼 폴란드의 작곡가의 펜 촉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조금은 빠르게 편곡 된 것 같으면서도 한껏 감미로움을 자아내는 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그 마력에 저항하지 못한 악마는 하얀 분필을 내려두고 느긋하게 자리를 떠나고 만다.


그제서야 사악한 악마의 주박에서 풀려난 인간들은, 저마다 책상을 이어 붙이며 한숨 돌릴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오쿤! 오늘 점심은 뭐 싸왔어?"


"글쎄, 뭘 넣어 주셨으려나? 오늘 아침에 계란말이 있었으니까 아마."


도시락을 열어보니 역시나 아침에 먹던 것과 같은 계란말이, 비엔나 소시지, 야채와 과일이 조금 들어 있다. 나름 정석이라면 정석인 조합이다.


그 때 리리카가 교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여어 제군들!"


"리리카쨩 무슨 일이야? 같이 밥 먹어줄 친구가 없는거야?"


이치조 리리카. 어렸을 때부터 라덴과 함께 뭉쳐 다녔던 소꿉친구로, 우리보다 한 살 많은 히오도시회의 언니 되시겠다. 물론 존댓말은 쓰지 않는다. 친구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 밥 먹고 동아리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어서 데리러 올 겸 온거야. 우리 반 애들이 나랑 도시락 나눠 먹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야 리리카쨩네 엄마는 요리를 잘하니까."


리리카의 깜짝 등장에 라덴이 입맛을 다시며 양 손을 삭삭 비벼댄다. 확실히 리리카네 어머니는 요리를 잘 하시니 오늘 점심은 꽤나 화려할지도?


분홍색 손수건이 풀어지고, 들어 올리는 도시락 뚜껑 아래에서 마치 황금빛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으응 아니, 오늘은 엄마가 바쁘셔서 도시락은 내가 직접 쌌거든."


순식간에 풍기기 시작하는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 뿜어져 나오던 광채는 어느새 사그라들고, 거무튀튀한 보랏빛 연기만이 한 움큼 튀어나와 연옥의 순례에 오르는 인간의 군상을 지어냈다.


도시락은 전체적으로 황금빛을 띄고 있기는 했다. 김치? 조각 비슷한 것이 덜 익은 계란 사이에 마구 섞여 이뤄낸 주황빛 액체 위에, 한쪽 면이 검게 탄 소시지 세 개가 철퍽 얹어져 있는 모양새여서 그랬지.


"쌌다고? 도시락을? 다른 걸 싼 거 아니야?"


"어허, 무슨 소리를. 이게 요새 유행하는 한국식 런치라는 거라고."


"이건 한국의 대핀치잖아. 한국인들한테 사과해."


오늘 따라 라덴쨩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데? 츳코미가 마르질 않는다.


뭐, 그렇게 웃고 떠들며 즐겁게 점심 식사는 시작 되었다. 서로의 반찬을 빼앗아 먹기도 하면서, 평소처럼 즐겁게...


평소처럼?


잠깐만.


"저기, 라덴쨩. 리리카쨩."


""응? 왜?""


조금 진지한 내 부름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갸우뚱한다.


"혹시 나 여중생인 거야?"


잠시 둘 모두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확실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긴 하지. 엊그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이케맨 여중생이 되었다니. 무슨 라이트 노벨 제목도 아니고 말이야.


내 말도 안되는 물음에 오늘 따라 컨디션이 좋은 라덴이 대답해 주었다.


"그럼 지금까지 뭐라고 생각했는데? 명탐정 코〇처럼 검은 조직의 수상한 거래 현장을 목격해서, 그에 집중한 나머지 뒤쪽에서 다가오는 나머지 한 명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당해서 아〇톡신 4869를 먹고 어린 모습이 되기라도 했다고 생각한 거야?"


"아니었어?"



-----



두 번째 카나데도 날 떠났다. 세 번째 카나데와는 더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지.


이번엔 공부를 좀 열심히 해 볼까. 공부랑은 영 인연이 없는지라 고등학교에 들어서도 해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카나데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 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아홉 번째 카나데도 날 떠나갔다. 졸업식 당일이면 어김없이 떠나간다. 이번엔 카나데와 아무런 접점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조차 모른다. 하지만 졸업식 날이 되니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난 다시 중학생 시절로 돌아온다.


중학교 생활은 지긋지긋하다. 카나데가 없으니까. 그녀를 찾아보려고 노력도 해 봤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이사오기 전 카나데가 살았다던 곳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이사 오기 전의 카나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스물 두 번째 카나데도 날 떠났다. 이번 카나데는 이상한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느니, 이상한 글귀가 눈 앞에 보인다느니. 이 세상이 반복되면서 카나데도 점점 고장 나는 걸까.


아니 고장 나는 건 나다.


요즘 들어서 오감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병원을 찾아가 봐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 뿐이다.


알고 있다. 몸이 문제가 아니란 것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인간의 세포는 200년 이상 분열할 수 있지만, 몸이 그 이상 사는 것을 거부해 분열을 멈춰 머리고 늙어 죽는 것이라고.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이, 영혼이 더 이상 시간을 받아 들이는 걸 거부하고 있는 거다.



아흔 아홉 번째 카나데가 날 떠나갔다. 나는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겠지.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다.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한다. 소리가 울려 내 달팽이관을 흔들어도 몸이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빛이 망막을 통과해도 보는 것을 거부한다.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여 카나데를 만날 준비를 할 뿐이다. 학교에 가고, 입학 시험을 치고 합격한다. 그 뿐이다.


카나데를 만나면 그제서야 몸에 제 기능이 조금 돌아온다.


전신에 라텍스를 두른 것 같은 피부는 그녀의 살결을 느끼기 위해 다시 감각을 받아 들인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가녀린 목소리를 듣기 위해, 무슨 향수를 뿌렸는지 맞추기 위해,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감상을 나누기 위해, 감각이 다시금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 동안의 세상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반복되는 세상을 끝낼 힌트 조각은 조금씩 모여 어느새 액자를 가득 채울 정도의 그림 퍼즐이 되어있다.


조건은 아마 카나데가 나를 포함한 리리카, 라덴, 하지메. 넷 과의 관계를 동시에 맺는 것.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도전해 보았고, 수 십번 이나 인간 관계, 친구 관계가 파탄 나곤 했다.


골인 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도 몇 번인가 있었지만 결국 모두 시간 초과로 다시 되돌아 오고 말았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랐다. 카나데와 친해지는 것, 이 조건을 깨닫게 만들게 하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으니까.


결국 난 포기했다. 그저 마모되어 가는 내 감각을 되돌려줄 카나데만을 기다리고, 이후엔 그녀와의 생활을 즐길 뿐인 기계처럼 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횟수를 세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이 지옥을 끝내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까.


100은 나름 상징적인 숫자다. 혹시나 어쩌면.


아냐, 괜한 기대감 갖지 말자. 절망하지 말기로 생각 했잖아.


그냥 100번째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도전해 보는 거다. 아무 의미 없단 것을 알아도.


"이번에 실패하면 그냥 포기하자."


포기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응? 아오쿤 뭐라고?"


작게 중얼거린 말이 라덴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주변의 모든 정보가 다시금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싸온 도시락의 내용물이 보이고, 식은 계란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알고 있다. 이는 회광반조, 이른바 가불인 것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정말로 끝.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나는 양 뺨을 소리나게 짝짝 치고는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아자아자! 힘 내자! 세상 모든 여자들이 카나데쨩한테 매료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진짜 미쳐버린 거야?"



-----



"피곤하다 피곤해."


너무 충실한 삶을 살아버린 탓일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조금 힘이 들어가버렸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에 빠진 수많은 여학생들의 파도에, 지금의 나는 뒤집힌 서핑 보드를 잡고 메달린 한낱 이케맨에 불과했다.


"꽃미남의 삶이란 정말 힘들구나."


어제만 해도 집 앞까지 따라와서 창문 새로 날 지켜보던 스토커 탓에 조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입학 첫 날부터 지각까지 하게 생겼으니, 카나데쨩한텐 좀 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급한 마음에 길모퉁이에서 누가 튀어 나오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세게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 쿵


"윽."


"가핰"


부딪힌 건 조그만 금발의 여자아이, 머리칼에 가려 얼굴은 잘 모이지 않는다. 떠오른 건... 빵인가?


- 탁


아무튼 넘어지는 걸 그대로 보고 있을 순 없었기 때문에 넘어지는 손목을 잡아 살짝 당겨 안았다.


"괜찮냐?"


"아아, 내 아침밥이..."


이런 상황에도 떨어진 식빵부터 걱정하는 건가. 뭐랄까 귀엽기도 하면서 조금 얼빵 하다고 할까. 머리색도, 키도 카나데와 비슷하지만, 수줍고 지적인 분위기의 그녀와 비교하기에는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 정도의 차이였다.


"에, 아오씨?"


분명 모르는 소녀였으나,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설마 설마하니 골목에 숨어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스토커중 하나였던 걸까?


"너 뭐야, 나 알아?"


잡고 있던 손목을 휙 내던지곤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너도 내 스토커냐? 아 진짜 등교 첫 날부터 기분 더럽게."


자세히 보니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홀로 고교에 카나데 말고 금발 머리의 아이가 또 있던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작은 아이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카나데랑 꽤 비슷한 것 같은데.


그리고 그제서야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다.


"아니 아오씨. 코너에서 클락션도 없이 휙 달려 나온 건 아오씨잖아요. 저는 지금 아오씨 때문에 아침밥도 못 먹게 생겼는데 저 보고 기분 나쁘다구요? 식빵이는 날 위해 반년을 기다려 알갱이를 맺고 분골쇄신해 가루가 되선 불에 타는 고통까지 견디며 한 끼 식사가 되어 줬는데! 그런 제 식사를 방해해 놓고 본인이 기분 나쁘다구요!?"


놀랍게도 그 얼빵한 소녀는 카나데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카나데였다!


"아, 그... 미안. 이거라도 먹을래?"


가방을 뒤져 작은 판 초콜릿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물론 카나데는 음식 욕심도 딱히 없는 데다, 낯도 많이 가려서 처음 보는 사람이 주는 초콜릿 같은 건 절대 받아 먹을 리가 없지만...


"헤헤, 그렇게 사과 하신다면 또 못 받아 줄건 없죠."


그렇게 말 하며 받은 초콜릿의 포장지를 벗기더니 입안 가득 쑤셔 넣기 시작한다.


뭐랄까, 너무 다르지 않아? 그, 카나데는 좀더 지적이고 품위있고 고상하고 수줍어하고!


아무튼 입가에 초콜릿을 한껏 묻히는 이런 아이는 아니었다. 확실하다.


입가라도 좀 닦으라고 손수건을 꺼내 넘겨주려 하자 카나데가 우물거리는 채로 입을 쭉 내민다.


"크흡."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손수건으로 정성스레 삐죽 내민 입술을 닦아 주었다.


"움냠냠."


그렇게 한참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


"응?"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비비는 카나데.


"저기 아오씨."


"왜?"


"그 막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데요."


그 귀여운 모습에 이미 반해 버리고 만 모양이다. 물론 카나데에겐 언제든 반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조금 다른 느낌이라 해도 전혀 문제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곧바로 그 얘기를 꺼낼까 했지만, 아무래도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하, 또 진부한 칭찬이네. 뭐 내 미모가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답긴 하지."


"아니 진짜 물리적으로 빛이 난다고."


능청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자 카나데는 빛무리를 흩어 보려는 듯 내 얼굴 근처에 손을 휘적거렸다.


이내 포기한 듯 남은 초콜릿을 한 입에 집어 삼키더니 내 소매를 당기기 시작했다.


"응?"


왜 그런가 싶어 쳐다보자 갑작스레 입술을 내민 채 얼굴을 들이대기 시작하는 카나데.


이 정도로 적극적이라고!? 우리 아직 첫 만남인데...!


그녀의 입술이 다가옴에 따라 얼굴이 뜨겁게 달아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유래 없는 빠른 진척,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나 다름 없다. 이런 기회를 버릴 이유가 없었으므로.


- 쪽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덕지덕지 묻은 초콜릿 탓에 조금 지저분하지만 달콤한 맛이 나는 키스.


"이 씨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