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뭐,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냐. 그냥 케이블만 몇 개 꽃고 설치하면 끝이다. 별거 없어. 그나저나 원래는 이프리트를 찾았는데 이놈은 도대체 어딜 간 건지 원."


꿀 같은 주말에 사역을 나가게 된 둘둘과 삼칠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임펫 상사가 자판기 앞에서 둘을 달랬다. 참고로 이프리트 병장은 아침 후 담배 친구한테서 이 소식을 진작에 듣고 일정을 급변경, 으슥한 곳으로 숨은 지 오래였다.


"주말에 참 수고한다 수고해. 이거 천천히 마시고, 내가 사인해 줄 테니까 가점표 한 시간당 2점으로 쳐서 올려 놔라."


"감사합니다!"


죽상이었던 둘둘과 삼칠의 표정이 그나마 펴졌다. 스틸라인의 가점 제도는 추가근무 1시간당 가점 1점, 포상휴가 하루를 위해서는 100점을 모아야 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리라. 둘은 허겁지겁 임펫 상사가 사주는 밍밍한 전해질 음료를 마시고 그녀를 따라 바로 옆의 강당에 들어섰다.


"다 왔으면 여기 모여 줬으면 좋겠거든? 설명할 거거든?"


비좁은 강당에는 스틸라인의 타 부대에서 차출된 인원들과 오르카의 기술 담당관 포춘 준위가 있었다 둘둘과 삼칠은 얼른 입구 반대편의 갈색 벽 앞에 가서 섰다.


"닥터가 새로 개발한 바이오로이드용 수면 캡슐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이 구획부턴 복도가 좀 좁아서 애기들이 다닐 수가 없거든? 너희가 힘 좀 써줘야 겠거든?"


말인즉슨 캡슐 설치를 위해서 케이블이나 설비 등을 지정된 방까지 운반하고 설치를 도와 달라는 소리였다. 뒤이어 포춘은 간단하게 캡슐 설치에 대한 지식을 인원들에게 전파했다.


"...자, 그럼 설명은 끝났고 이제부터 옮기면 되거든? 누나랑 임펫 상사도 도울 거거든?"


'옮기라니 대체 뭘?' 이라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모두가 포춘을 바라보자 그녀는 모두의 뒤쪽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작업인원들은 그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강당은 결코 비좁지 않았다.


뒤쪽의 갈색 벽, 그것은 벽이 아니라 넓은 강당에 천장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설비와 케이블 박스 무더기였다.




"허억...헉..."


"브으...브!"


점심을 먹고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목장갑을 낀 채 땀이 비오듯 하는 둘둘은 63번째 박스를 삼칠에게 건넸다. 받아든 삼칠은 힘겨워하며 그것을 지정 자리에 옮겼다.


"브...브라우니, 무거운 거 들 때 허리를 굽혀서 들면 다치기 쉬워요. 다리를 잘 써 봐요."


"네...네...넷슴다. 레프리콘 일병님은 괜찮으심까?"


"저...는 헉, 이런거 익숙하니 걱정 말고."


"역시 레,레,레프리콘 일병님이지 말임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맨손으로 무거운 설비와 케이블이 든 장비를 옮기기 시작한 지 백수십 분째, 후임 앞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순 없다는 일념 하에 참고 있었지 본심을 말하자면 온몸을 저미는 듯한 근육통에 복도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만 싶었다.


다시 64번째부터 박스를 주고 받고 주고 받고 주고받고 주고받고주고받고, 얼마나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나서 슬슬 정신이 나갈 것 같을 무렵에야 비로소 설치가 끝났다. 둘 다 생활복이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허억, 드...드디어 끝났지 말임다! 이제 돌아가서, 허억, 쉴 수 있지 말임다!"


"허억, 허억, 후. 수고했어요 브라우니. 저녁 먹고 마트나 가서 시원한 거라도 사먹죠. 제가 살게요."


사실 일요일 저녁 후엔 죄 깊은 사령관이 자원을 제조에 꼬라박기 때문에 마트의 대부분 식료품이 동이 나게 되지만 이 둘이 지금 그걸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쁨을 나누고 있던 그 때, 옆에서 같이 쉬고 있던 임펫의 내선 통신 단말에 신호가 들어왔다.


"2중대 행정보급관 임펫39 전화 받았습니다... 승리, 네? 지금 말입니까? 다시? ...예, 예...그러면 일단 넣겠습니다. 예, 승리."


통화 내용도 그렇고 통화를 끝낸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임펫 상사는 잠깐의 침묵 후에 작업 인원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지금 설치 끝낸 수면 캡슐 말인데...사령부에서 당분간 안 쓸 것 같다고 케이블 다시 정리하라고 명령 내려왔거든..."


"...잘 못 들었습니다?"


설치 완료 바로 직전에 해저에서 Fan파가 변동하는 것을 발견한 사령관이, 통신으로 설치 중지와 동시에 전력 및 영양 케이블 회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헉, 크윽, 헉..."


"헤극, 허윽, 큭,"


둘둘은 죽을 힘을 다해서 몇 번째인지도 모를, 무거운 케이블이 담긴 박스를 삼칠에게 넘겼다. 받아든 삼칠 역시 몹시 힘겨워하며 그것을 옆의 레프리콘에게 전달했다. 이제는 서로 말을 할 여유도 별로 없다.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보니 옆 중대 레프리콘은 어디서 난 건진 몰라도 일말의 주저도 없이 죽은 눈으로 전투 자극제를 꽂고 있었다. 작업이 철충들이랑 치고박는 것만큼 힘들다는 소리였다.


"흐에, 히으, 주, 주그꺼 가씀다흐, 주, 주그꺼 가씀...윽."


아까부터 숨이 턱에 닿아 휘청거리던 삼칠이 결국 일을 냈다. 허리를 굽혀 상자를 들다가 중심이 비틀려 쓰러진 것이었다. 강당 앞에서 상자를 받아 넣던 임펫이 뛰어왔다.


"7077,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이,이, 일어설 수 있슴다. 일어설아아앗!"


"브, 브라우니! 브라우니!"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삼칠이었지만 임펫의 손길이 허리에 살짝 닿자 무지막지한 통증에 다시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격통에 힘이 풀려 기절한 브라우니의 다리 사이로 소리 없이 노란 웅덩이가 배어나왔다.


"이거 제대로 나간 거 같은데, 1922, 옆에 애랑 7077 데리고 수복실로 가라. 입실 끝나면 여기로 돌아오지 말고 당직실 가서 바로 보고하고 쉬어. 수고했다."


"허억, 허억, 예 알겠습니다. 스, 승리."


둘둘은 타 소대 브라우니와 함께 삼칠을 부축하여 자리를 떴다. 입실이 필요하다는 삼칠을 함 반대편에 있는 수복실에 맡기고 돌아와 보고를 마친 뒤엔 이미 저녁 시간이 끝나 있었다.


점심부터 쫄쫄 굶은 채 생활관으로 돌아온 둘둘을 맞은 것은 아침부터 세탁기 안에 너무 오래 두어 마르지도 못하고 곰팡이가 약간 슬어버린 속옷과 생활복이었다. 그래도 땀에 흠뻑 젖은 것보단 나았기 때문에 둘둘은 눈물을 머금고 세탁기 안의 생활복을 입은 채 점호를 받았다. 당연하지만 차갑고 축축했다.


"어어. 점마 왜 저래 장마철 개새끼마냥 푹 젖었노?"


"오늘 막내랑 잘못 걸려서 개빡센 작업 뛰고 왔답니다. 지금도 자살할 거 같은 눈빛인데 가만 두시지 말임다."


"아이고...그 뭐냐, 점호 끝나면 샤워실 다녀 와. 당직사관님한테 말씀드려 놓을게. 담배 피고 갈래? 라이터 줄까?"


점호 동안 선임들이 여러 모로 신경을 써 줬지만, 아침에 대부분의 옷을 세탁기에 때려넣었기 때문에 샤워를 해 봐야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몸에 달라붙은 땀을 씻어야 했다.


"...감사합니다. 샤워실만 다녀오겠습니다."


재빨리 샤워를 끝내고 소등한 뒤 둘둘은 덜 마른 속옷만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체온이 내려가서 그런지 재채기가 나왔다. 둘둘은 눈을 꼭 감고 잠에 들려 애썼다.


'아...오늘 3시 불침번 근문데.'


춥고 배고프고 온 몸이 아프고, 불취식 시 벌점 10점이랬는데, 입실한 브라우니 허리는 괜찮을까 등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야만, 어떻게든 느려터진 이 시계를 내일이라는 곳으로 밀어올려야만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었다.


"꼬르륵..."


시간 생각에 반응이라도 하듯 배꼽시계 소리와 함께 맹렬한 허기가 둘둘을 덮쳤다. 내일 식단이 뭐였더라. 양파 튀김, 스틸라인이 제일 사랑하는 양파 튀김이다. 레프리콘은 그나마 살짝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일단은 한 숨 자고 소완 조리장이 튀겨낸 따끈한 양파 튀김을 먹으면 분명 이 기분도 더 나아질 거야. 모든 게 좋아질 거야.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사실 몹시 피곤했던 둘둘이 속으로 삼칠이가 자주 부르곤 하던 노래를 속으로 되뇌이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 무렵, 그녀의 감은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길다란 속눈썹을 타고 베개에 툭 떨어졌다. 합성 수지와 플라스틱 대롱으로 구성된 베개는 군바리의 눈물조차 먹기 싫은 듯 축축한 붉은 머리카락 위에 그대로 빗겨 흘려 물기를 보탰다.


내일 아침 둘둘 사령관의 오판으로 인한 식량 문제와 그로 인한 식당의 장기 휴업을 알게 되지만 미래의 일인데 지금 말해 무엇 하리, 지금 꿈 속에서 그녀는 퇴원한 삼칠이와 전우들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큰 양파 튀김을 한창 행복하게 나눠 먹고 있는 것이었다.




중간에 브라우니 대사는 고전 명작을 인용해 봤습니다(https://arca.live/b/lastorigin/9822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