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시 반. 브라우니 10090712, 줄여서 712라고 불리는 병사는 장갑복을 입은채 경계를 서면서 월면에 설치된 거대한 지대함 대공포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제1차 철충전쟁에서 별의 아이을 심연 속에서 끄집어내 씨를 말리고, 지구에 파견되었던 철충들을 전멸시켰음에도 사령관은 십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전쟁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령관은 철충들이 곧 다시 침공할거라고 주장했으며, 1차 철충전쟁이 끝난 이후에 오르카 저항군으로부터 재편된 지구 최고사령부는 도시를 빠르게 수복하고 다시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병기들을 지표면과 월면에 배치했다. 712가 보고 있던 대공포 또한 이러한 일환으로 배치된 것이었으며, 마천루 크기만한 거포들이 마치 고슴도치 가시마냥 월면을 따라 수십, 수천개가 놓여져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최근에 월면에 배치된 712는 군생활이 굉장히 불만족스러웠다. 저중력으로 인해 화장실 변기는 제대로 내려가지 않았고, 잘못 움직여도 익숙하지 않은 균형감각 때문에 넘어지기 일쑤였으며, 훈련은 고된데 정작 씻거나 먹을 물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X 물품들도 원활히 보급되지않아 712가 소속된 부대는 냉동과 탄산음료 구경을 못한지 5일째였다. 어차피 까라면 까야하는 군생활이었고 사령관의 명령에 불만을 가진건 아니었지만, 712는 최고사령부 시계가 조금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브라우니는 한참 지평선을 바라보며 대공포의 숫자를 세다가 질려서, 옆에 있는 레이더를 살펴보았다. 초록색으로 깜빡이는 화면엔 전에는 본적 없던 수많은 빨간 점들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브라우니는 붉은 점들의 숫자를 한참 세다가 질려서 옆에 있던 사수인 레프리콘 10011582, 줄여서 582 상뱀에게 물었다.


"와아...582 상뱀. 이것 좀 보십쇼. 여기 이 빨건것들은 뭡니까? 도저히 숫자를 셀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많지 말입니다." 

"..."

"왜 그러십니까?"


712는 사수인 582의 얼굴이 말그대로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582는 덜덜 거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꼭 부여잡고 소리쳤다.


"으...으아아! 보고합니다! 대규모 적 출현입니다! 처, 철충! 철충 출현입니다아아! 712!!!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보였던거에요?! 계속 보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에에...그거 그냥 똑같은 화면만 보여주길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건줄 알았지 말임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지금..."

"...저 큰일 난겁니까?"

"후우...큰일이긴 한데, 일단 지금 걱정부터 하죠."


582의 말이 끝나자마자 브라우니 옆에 있던 대공포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고는 검은 하늘을 향해 푸른색의 플라즈마 탄을 발사했다. 지표면에 있던 잔뜩 박혀있던 대공포들이 불을 뿜으면서 어두웠던 달의 밤하늘을 밝게 물들이 대지를 뒤흔들자, 그 둔한 712조차도 이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와 582 상뱀은 어떻게 되는걸까? 우리는 무사히 살아남을수 있을까? 아니...지구는 이번에도 무사할수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제 2차 철충 전쟁은 허무하게도 지구의 너무나 빠른 재건과 기술적 발달을 예상하지 못한 철충 원정군이 1달에 걸쳐 달과 지표면에서 모조리 격멸되면서 끝났다. 


***


"이렇게 전쟁도 끝이군."

"스케일은 더 커졌는데 정작 걸린 시간은 더 줄어들었는걸."

"그거야, 이번엔 저희가 단단히 준비했으니까요."


오르카 잠수함 내부에선 저항군을 지휘해온 역전의 명장들이 원탁에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 자리에 사령관은 오르카 말고 다른 부대를 시찰하기 위해 잠시 잠수함 바깥에서 나가있던 찰나였다. 1차 철충전쟁이 끝나고도 지구 최고사령부는 오르카를 벗어나 육지에 둥지를 틀지 않았는데, 일단 일하던 곳에서 일하는게 편하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었지만 다음 전쟁에서도 잠수함에 최고 사령부를 두는 것이 여전히 안전할 것이라는 사령관의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판단은 정확하여 월면의 대공포화를 뚫고 누더기가 되어서도 악착같이 지표면에 상륙한 철충 병력들은 오르카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한채 지구 지표의 주둔군에게 쓸려나갔고 마지막 발악으로 퍼붓던 궤도 폭격으로부터도 무사했으니 말이다.


"근데 이제 더이상 철충들로부터 침공은 정말 없는거야?"

"그렇지. 사령관이 닥터랑 스카디들을 닥치는대로 끌어모아서 철충쪽이랑 접촉한 다음에 통신을 엿들었는데, 저쪽도 굉장히 당황했다고 하더군."

"이제 별의 아이도 저 곳엔 없는데 우리도 병력을 더 보내야하나...라는 내용이 있었다지? 참 놀라워. 난 저 놈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엄청 죽여버리니까 목숨 아깝다는게 느껴지나봐? 후훗..."


레오나는 웃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다른 지휘관들도 이젠 공포의 대상이 아닌 사령관의 손에 놀아난 바보로 전락한 철충들을 비웃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무적의 용은 그때 때마침 무언가 생각난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톡톡 두드려 지휘관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렸다.


"이참에 여기 모인 김에, 소관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만."

"뭔데?"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앞으로 뭘해야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오."

"일단 시원하게 즐겨야지."

"흠...예전처럼 그런 가벼운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것이 아니오. 이제 앞으로 지구를 어떻게 꾸려나가야할지, 의견을 듣고 싶었소."


다른 지휘관들은 침묵했다. 단순하지만 막막한 질문이었다. 먼저 마리를 필두로, 수많은 지휘관들이 의견을 냈다.


"일단 사령관을 먼저 지도자로..."

"아뇨. 사령관님은 이제 지쳤다고 하셨어요."

"그럼 우리들이? 그러면 투표부터 해야하나..."

"흐음, 주인님이 원하시는대로 하면 되지않을까요?"

"근데 저번에 물어보니까 우리들의 자유가 존중 받는 형태로 하면 좋겠다고..."

"으으...우리들의 자유가 뭔데?! 골치아프니까 우리한테 떠넘기는거 아냐?"

"말을 삼가시오. 내 생각엔 사령관이 우리들에게 나름 숙제를 내준 것이라 생각하오만."

"일단 다들 한명씩 그냥 자기 생각을 말해보는건 어떤가?"


칸의 말에 고개를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맨처음 라비아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전쟁 전에 가장 보편적이었던 민주주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게 낫지않을까요? 일단 큰 틀에서 초대 정부 수장은 사령관님으로 하되, 의회는 저희 바이오로이드들로 하고 사법기관은 AI와 AGS들이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이제 사법부 수장도 투표로 뽑는지 같은 자잘한건 나중에 논의하고..."

"저 또한 같은 생각이에요."


레모네이드가 라비아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마리가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전 반댑니다. 제 생각엔 전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야한다고 봅니다. 최고사령부가 모든걸 결정하고 또다른 전쟁에 대비해야합니다."

"군국주의라...마리 대장다운 선택이네."


레오나가 씩 웃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단순히 내 성향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건 아니야. 비록 철충과 별의 아이를 무찔렀다고 해도, 또다른 위협이 생겨나 다시 예전처럼 인류가 멸망한다면 어쩌겠나? 내가 맨처음 생산되었을때엔 인류에게 외계인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고 바다 속 괴물은 그저 신화속 존재였지. 하지만 그런 신경쓰지도 않았던 위협들이 문명을 결국 파괴시켰어...앞으로도 계속 이대로 전선을 유지하고 대비 태세를 갖추는게 현명하다고 봐."

"씁쓸하지만...이건 마리 대장의 말이 맞는것 같군."


칸은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아자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은 할말이 없나?"

"아, 후후...죄송합니다. 어제 베로니카 자매와 하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말이죠. 여러분은 빛을 믿으시나요?"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지금 이 자리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저는 제 대리자 그리고 반려와 함께 철충과의 싸움을 계속 해오면서 빛은 무엇인가에 대해 늘 고뇌해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싸움이 끝나고 나서 대리자와 함께 밤낮을 지세우며 빛이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자...아니 반려의 역할은 이 세상에서 무엇일까를 이야기했지요.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하고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존재, 한없이 자애로우면서도 언제나 냉철한 지혜를 지닌 존재. 그리고 저희들을 만들어낸 창조주인 인간의 마지막 후손이면서 우리를 말로써 직접 명령하고 다스릴수 있는 존재...그렇습니다. 저희는 마침내 저는 반려가 곧 세상의 빛이며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눈을 빛내면서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는 아자젤의 모습은 마치 철충 무리의 한복판에서 이상한 소리를 읊어대는 스피커와 같은 기세로 지휘관들을 질리게 했다. 지휘관 전용 회의실에 앉아있던 수많은 지휘관들은 아자젤에게 그만하라고 계속 눈치를 주었고, 메이는 아자젤이 말을 하는 도중에 더 이상 참지 못해서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자젤은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커피나 마시고 이야기나 하려고 모였던 지휘관들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기분이 나빠져 지휘관들은 그냥 슬금슬금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 그렇군. 그래..."

"생각해보십시오. 반려는 자신의 말 한마디로 우리의 행동을 조종할수 있는 신이면서 동시의 우리를 사랑해주는 진정한 보호자로써...아앗!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저희는 온 우주에 반려에 빛을 뿌릴 위대한 사명을 다해야...!"


달아나는 지휘관들을 홍조를 띈채 무서운 기세로 추격하는 아자젤의 모습은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수많은 지휘관들이 아자젤의 전도를 피해 달아났을 때, 방 안에는 무적의 용과 레오나만이 남아있었다.


"흠, 다음 회의에는 아자젤을 빼자고 건의 해봐야겠군."

"후후...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무슨 말이오?"

"어머, 맨 먼저 물어봐놓고 정작 자기는 시치미 떼기야?"


레오나와 무적의 용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무적의 용이 입을 먼저 열었다.


"일단은 당연히 아자젤의 의견은 기각이 되겠구려."

"뭐 당연하겠지. 지금 문화유산인 바티칸 복원을 하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반려가 거기에서 살게 할건 아니니까..."

"그리고 마리의 의견은 괜찮지만 결국 현상유지라는 말 밖에 되지않지. 그리고 라비아타 총령의 의견은 너무 이상적이지."

"별로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사령관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선택지일것 같은데."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면 가능한 선택지일것이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아니지."

"고로 내가 생각하는 안은..."


무적의 용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커피잔에 남아있던 커피를 비우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사령관을 왕으로 추대하는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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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정도 쓸 생각인데 20일까진 완결할수 있지않을까...힘내라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