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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여명
차마 부정할 수 없는 태양의 구를 보라.
찬란하고 밝으니 아무도 저 흉내는 낼 수 없다.
어둠이 긴 밤이 밀려남을 더는 의심할 수가 없구나.
저것은 파에톤도 아닌 헬리오스, 진정한 태양이로다.
마침내 여명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황혼 역시도…
철혈의 레오나 Leona the Iron - Blooded
밤이 늦어 텅 비어버린 복도를 불규칙하고 빠른 발소리가 가로질렀다. 잠수함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바람이 되어 그 뒤를 바쁘게 쫓았다. 독주와 해독제에 번갈아 혹사당한 지 얼마 안 된 레오나의 뇌는 복도의 벽과 조명이 드리운 그림자를 조합해 환영을 만들었다. 뿔을 가진 인간의 형상들, 이빨 드러낸 용과 날개 펼친 뱀의 모습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온갖 말들을 속삭였다.
‘인간이라면 아직도 살아있을 수는 없어. 휩노스 병, 철충 두 세기가 넘는 시간. 육체 재건 장치는 오직 김지석만이 가지고 있었잖아.’
‘그렇다. 인간이라면 그러할 것이다. 한데 그는 정말 인간인가?’
‘글쎄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점이 많았잖아요? 그도, 사령관도. 그 모든 숨기는 것들이 하나로 이어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그의 충고로 부대가 큰 피해를 면한 것이 몇 번이나 되지? 사령관의 능력은 어떤 식으로 발휘되고 있고? 검은 머리칼, 붉은 눈, 그 이목구비, 뭔가 닮은 것 같지 않아?’
레오나는 거칠게 손을 휘둘러 그림자들을 날려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림자들은 그녀의 어지러운 시야 한 구석으로 도망쳐와 계속 떠들었다.
‘물론 뇌파는 원래 사령관의 것이지. 하지만 사령관은 분명히 바뀌었다고? 모습도, 인격도. 뇌파 정도를 갈아치우지 못할까? 네가 의심하는 건 뭐지?’
닥쳐.
‘아직도 의심하고 있나요? 무엇을? 지금의 사령관이 그가 아니라는 걸 의심하는 게 아니잖아요?’
“닥쳐.”
레오나는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으르렁거리고 말았다. 그림자들은 그 서슬에 놀라 모두 도망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 마디를 남겼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의심하는 것뿐이죠.’
“레오나 대장?”
레오나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경호대장, 블랙 리리스가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반짝거리는 푸른빛 조명, 사령관이 바뀐 다음날 근처 복도에 설치한 반(反) 자외선 조명이 내리쬐고 있었다. 어느샌가 사령관실 앞까지 온 모양이었다.
“아…. 어느새.”
블랙 리리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은가요? 몸이 편하지 않은 것 같은데….”
레오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식은땀을 닦아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 경호대장. 늦은 시간이지만… 사령관 각하께 면담을 요청할 수 있을까?”
레오나의 말을 들은 리리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에?”
“아, 혹시, 안 계신다거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주인님께서 아까 당신이 오면 바로 들여보내라고 하셨었는데. 미리 약속했던 게 아닌가요?”
레오나는 잠깐 멈칫한 끝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그렇구나.
“모르겠네, 지금은.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 들어가도 되는 거야?”
“네? 아, 들어가도 좋아요.”
레오나가 앞에 선 순간에, 사령관실의 문이 스스로 열렸다. 레오나는 거기서 익숙함을 느끼며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녀가 들어간 순간 문은 다시 스스로 닫혔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맞이하는 것처럼. 그리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레오나는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조명이 다 꺼진 사령관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관측창 너머에서 이제 다 꺼져가는 석양빛이 유일한 광원이 되어 사물 사물마다 희미한 형체를 겨우 드러내고만 있었다. 그녀는 그 때문에 잠시, 책상 너머에 뒤돌아 있는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사령관 각하?”
사령관을 찾는 레오나를 향해 그림자의 한 조각이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나는 순간 살짝 놀라고 말았다. 이상하리만치 희미하게 느껴지는 뇌파에 더해 숨소리나 일체의 움직임도 없어, 그가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몰랐다. 언제나처럼 희미한 우울을 섞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레오나.”
그림자에 가려진 사령관의 모습은 정말 기묘할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별처럼 반짝이는 루비색 눈과 석양에 희미하게 드러난 윤곽 정도만 보였다. 레오나는 온갖 이야기가 튀어나오려는 입을 애써 꾹 누르다가, 결국 전혀 상관없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보내주신 술은 잘 받았습니다, 사령관 각하.”
“그래. 입에 맞았기를 바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었으니까요. 제가 알던 대로, 훌륭했습니다….”
“다행이네.”
“….”
“….”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이던 둘은 고작 네 문장 만에 어색하게 침묵했다. 어떻게 말을 이어갈지, 무슨 말로 추궁하고 무슨 말로 변명할지, 어떻게 시간을 끌고 어떻게 몰아붙일지… 둘 다 만나기 전까지는 할 말이 많았지만, 마주한 순간 그런 건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레오나의 머릿속에 이 상황이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말로 시간을 태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확신이 없는 것도, 더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 달라붙었던 그림자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그래, 네 말이 맞아, 빌어먹을 놈아. 그건 그저 상대방의 반응을 두려워하고만 있는 것일 뿐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지. 그때의 너는 진심이었는지. 어째서 이제야 왔는지. 하지만 그런 고민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물어보지 않으면 영영 모를 테니까.
레오나는 이 웃기지도 않은 연극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각하. 시간이 늦었으니, 그냥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응.”
사령관의 목소리는 그녀 못지않게 떨리고 있었다. 레오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덜 흔들리기 바라며 말했다.
“제 옛 전우들은, 멸망 전쟁 때 모두 죽었습니다.”
“…알아.”
레오나는 멈칫했다. 그 대답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제가 술을 마신다는 것도, 그게 어떤 연인과 함께 마신 이름도 없는 와인이라는 것도, 지금의 부하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남은 설명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딱 한 명이 더 있으니까요.”
내 눈앞에, 바로 이곳에, 지금.
잠시 목이 멘 레오나는 말을 멈추고 흔들리는 목소리를 다잡았다. 몇 번 심호흡을 한 끝에야, 그녀는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을 압니다. 항상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꿈을 꿀 때마다 봤기 때문에.”
검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다움에 가까운 그 인상. 지금까지는 닮았다고만 생각하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건 그녀가 아는 얼굴이 조금 더 어려졌기 때문일 뿐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를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레오나는 주먹을 꾹 쥐며, 간신히 말을 흘려보냈다.
“나의 연인도, 그랬을까?”
길고 긴 침묵은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도 모를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눈동자가 아래로 스르륵 내려갔다. 아주 나직한 목소리가 답했다.
“언제나.”
한 걸음 다가선 레오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아직도 다 믿기지 않아. 진짜일까. 꿈일까. 어떤 속임수는 아닐까….”
“이해해.”
레오나는 오른손을 들어 사령관의 얼굴이 있는 자리로 뻗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차피 보이지 않으니 눈을 감는다 해도 상관은 없겠지. 그렇게 한참이나 그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얼굴을 보여줘. 진짜 모습을.”
사령관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끄덕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우연인지, 아닌지, 석양빛을 가리던 구름이 막 그 경계를 지나치며 황금빛 노을이 사령관실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햇빛에 닿은 곳부터 사령관의 피부에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그의 모습을 바꾸어갔다. 본래 젊다 못해 살짝 어리기까지 하던 외모에 나이를 더한 것처럼. 묶어내려 발치까지 치렁거리던 머리칼은 목 바로 아래까지 짧아졌고 이목구비는 조금 더 진중하고 성숙해졌다. 한쪽 눈가에 만들어진 단안경 위로 빛이 비쳐 안쪽의 붉은 눈동자를 가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처음이지만, 너무나 익숙한 모습…
희미한 뇌파가 꺼지며 그 자리를 다른 선이 대신했다. 처음에는 인간의, 그리고 그녀가 익히 아는 누군가의 것으로. 그리고 그 위에 핏빛 불꽃이 피어오르듯, 인간의 굴레를 아예 벗어난 무언가로,
그로부터 느껴지는 신화적인 존재감은 그가 어떻게 멸망 전쟁과 휩노스에서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20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살아왔는지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머리에는 두 쌍의 뒤틀린 뿔을 달고, 순흑색의 거대한 날개 두 쌍을 펼친. 사령관의 눈으로부터 그가 전하려는 말들이 하나씩 스며들었다. 레오나는 그것들을 읽으며 멍하니 말을 흘려보냈다.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네.”
그 말을 끝으로, 레오나는 다시 한참 동안 침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은 어두워지고 머리칼에 가려진 눈동자는 점점 더 날카로운 빛을 띄었다.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들 모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앞으로 한 발을 더 나섰다. 사령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살짝 눈을 감았다. 아플 것이었다.
레오나는 그대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입가가 찢어지며 핏방울이 맺혔지만, 사령관은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런 그를 매섭게 노려보던 레오나의 입에서 힘이 지나치게 담겨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00, 년이야. 200년, 두, 세기야.”
레오나의 표정은 평소의 차가움을 깨고 드러난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나마 처음에는 가까스로 억눌렀던 음성도 점점 감정을 담았다.
“난 그동안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입 밖으로 내면 그게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언젠가 기적이 있다면 좋겠지, 그렇게 생각했어.”
후우, 길게 숨을 내쉰 레오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듯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에 화가 난 건, 사라졌던 당신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야. 알아, 웃기는 소리라는 거.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게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아니까. 내가 정말 화가 난 건, 당신이 지금까지 그 사실을 숨겼다는 거야.”
사령관은 대답 없이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당신은, 계절이 바뀔 때까지도 나에게 그 사실을 숨겼어. 당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서. 그리고 내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무서워해서. 난 그것 때문에 화가 났어. 약속했잖아. 우리 사이에는 숨기는 것도 없기로, 자신을 용서하기로.”
레오나의 목소리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간절한, 그리고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독기 어린 눈빛도 점점 힘을 잃었다. 그녀를 일으키는 힘은 분노가 아니라 애절함에 가까웠다.
“당신이 한 잘못, 내가 그걸 용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무게가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고작 그 정도였기에… 어느 쪽이야, 당신은.”
사령관은 계속 침묵하며 레오나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래서 오히려, 다음 말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의 감정이 별 것이 아닐 것만 같아서, 자신만이 이렇게 아파하는 것일지도 몰라서.
그런 생각에 몇 번씩 망설인 레오나였지만, 그녀는 결국 충동과 두려움에 밀려 마지막 말을 꺼내고 말았다.
“…말해줘. 왜 나와 함께한 시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나에게 진심이기는 했던 거야?
레오나는 그가 화를 내거나 냉랭하게 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소중히 여겼던 만큼, 그 역시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레오나.”
늘어뜨린 금빛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그는 조용히 답했다. 레오나는 그 간단한 동작에 몸을 사로잡았던 불안과 긴장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생각을 가다듬는 듯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사령관의 우울한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나는 이 세상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기 시작했어. 너무 오래되어… 길다고 하기에도 넘치는 세월의 전에.”
붉은 뱀의 눈동자는 석양이 져가는 지평선 위, 별이 나타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어린 빛은 훨씬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수천 년도 수만 년도 찰나에 불과하니… 언제나 반드시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고 나는 혼자 남아. 그러고 나면 슬픔에 잠겨서 긴 세월을 잠들고… 그럼에도 결국은 새로운 벗을 만나지. 나는 내가 잃어버린 인연마다 밤하늘의 별을 세지만 이제는 셀 별조차 부족해.”
사령관은 다시 레오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모든 인연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그래서 밤하늘을 볼 때마다 그들을 기억하며, 아파하지. 그래도, 난 그들을 잊기를 원하지 않아. 내가 시간에 풍화되지 않은 게 그 모든 이야기 덕이기에. 레오나.”
사령관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너와 보낸 모든 시간이, 너와 나눈 모든 사랑이, 내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야.”
레오나도, 그도, 울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마쳤을 때쯤, 둘의 눈은 반짝이는 수정 물기로 젖어 있었다. 슬펐다. 슬프게도 그건 재회의 기쁨만이 주는 눈물이 아니었으니까. 레오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대답해야 했다.
“내가 전하지 않았던 사실을 말해줄게. 맞아,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어. 네게 다시 상처를 줄 테니까.”
그는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미움받을 각오를 다지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나는 다시 이 세상을 떠나게 돼.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어.”
레오나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고 힘없이 흔들렸다. 사령관은 팔을 뻗어 휘청이는 그녀를 붙잡았다. 레오나의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령관이 계속 말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대가야. 세상에 너무 많이 간섭한 것에 대한. 지금은 죄지은 이들을 벌한다, 그 정도라서 아슬아슬하게 그 대가를 미룰 수 있겠지만…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내가 할 일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어. 적어도 수만 년, 어쩌면 수십만 년이야. 레오나.”
진실을 말하는 혀는 피의 비릿한 맛을 느꼈다.
“결국 네가 혼자 남겨지게 돼.”
레오나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재회의 날에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운명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이성은 미쳐서 날뛰고 감성은 죽어 침묵했다. 거짓말이냐고 묻고 싶은데 그녀의 혀는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진실일 테니까.
“그러니까, 만약.”
사령관은 한마디 한마디가 말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는 듯, 피를 토하듯 겨우겨우 문장을 이어갔다.
“잊어버리고 싶으면, 잊어버리게 해줄게.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만 옛 추억으로 남기고, 지금의 나는 잊어버려도 좋아. 그게 덜 아플 테니까.”
기어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구의 눈물인지, 누가 먼저 울었는지도 모른 채로 둘의 눈물은 뒤섞여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언제든지 선택해 줘. 네가 가장 덜 아플 길로.”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사령관의 모습은 완전히 그림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레오나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몸에 기대었다. 사령관은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들어서.”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밤은 조용했다. 그게 전부였다.
저항군 Resistance
오세아니아 완전 정복 후 10일, 그동안 저항군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함대를 재정비하고 온갖 시설을 건축하느라 정신없지만 항상 그냥 그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동안 어째서인지 적의 공습도 없었고, 대륙을 다 장악했으니 출격할 일도 없고. 물론 그게 좋은 것이겠으나 대원들의 매일매일은 거의 지루하다 못해 아주 좀이 쑤실 정도의 평탄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오늘, 마침내 그 평탄한 일정에 파문이 일었다.
“사령관님이 중대 선언을 하신다고 하시지 말입니다! 브!”
“으아아악!”
브라우니 1002가 갑자기 스틸라인 제1소대 숙소를 박차고 들어왔다. 맹견 소대, 21명이 스토커와 철충 40기를 격퇴하고 사망자 0으로 귀환한 전설의 소대…
…는 포커를 치다가 놀라 넘어지고, 낄낄대며 오르카 커뮤니티에서 키배를 벌이다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PX에서 산 간식거리를 뒤적이다 뒤엎었다. 찐레후가 갑자기 쳐들어온 줄 알고 벌인 혼돈의 도가니, 1002를 잡아 족쳐도 합법일 개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걸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경악이 분노를 한 박자 새치기했다고 하면 딱 맞는 표현이었다. 소위는 제일 먼저 브라우니에게 달려가 그대로 어깨를 꽉 붙잡고 흔들었다.
“야, 브야, 우리가 생각하는 그거 맞냐? 그거지, 그거지?”
“아, 으아아아, 잠깐만, 이것 좀 놔 주십쇼! 네, 그런 것 같지 말입니다! 외곽 기지에 주둔하는 인원들도 대부분 임시 귀환했다고 합니다! 방송 관련 대원들은 지금 못 오는 인원들에게 현장 연결하느라 일하고 있슴다! 그것 때문에 - ”
“시발, 드디어 누군지 알려주나보다. 야! 도박했던 놈들, 누구누구냐!”
“소위님? 아직 저 말 다 안했….”
소위는 1002의 말을 끊어버리고 뒤돌아 소리쳤다. 소대원들은 죄다 흥분으로 표정이 제각각이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준 건 아니지만, 사령관이 중대 선언을 한다면서 외부 지역 대원들까지 소집할 일은 뻔하지 않은가?
“와, 뭐 이렇게 많아? 카지노야, 뭐야? 니들 찐레후한테 걸리면 다 모가지인 거 알긴 하냐?”
“에이, 소위님도 거셨으면서 무슨. 그리고 찐레후가 스틸라인에서 세 번째로 많이 건 거 모르십니까?”
“어우… 찐레후 파산각이냐? 각이네.”
“찐레후가 도박에는 계급도 없다 그랬지 말입니다!”
“하나, 둘, 셋… 어우, 안 건 년들이 없네?”
“저기, 소위님, 그거 말고 더 중요한 게 남았슴다. 소위님.”
“언니는 어디에 걸었어요?”
“나는 미래에서 온 인간이라는 데에 걸었다.”
“소위님? 이뱀? 저기 말입니다, 저기요? 저기요오? 언니들?”
“에이, 언니. 그건 너무 많이 써먹었잖아요. 좀 판타지스럽게, 천사는 어때요.”
“그럼 전 악마에 걸지 말입니다. 제가 봤을 때는 기깔나게 간지나는 악마입니다.”
“상병님? 음란상병님? 야, 육구질ㅆ… 아이, 싯팔. 저기요?”
“혹시 잊힌 고대 문명의 마지막 생존자 그런 건 어때?”
막내는 한껏 들뜬 선임들을 보며 계속해서 에, 그런데, 저기, 따위로 그들을 불렀다. 그렇지만 제각각 자기 생각을 떠들어대기 바쁜 소대원들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성질이 난 브라우니가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빽 소리쳤다.
“아앗, 브!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제야 소대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여들었다. 1002는 그제야 내내 하려던 마지막 말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원 부족하니까, 당장 나와서 외부 작업 도우라는 마리 대장 명령이란 말임다!”
에, 잘모슴다?
“뭐?”
“젠장?”
“썅?”
소녀처럼 환하게 펴졌던 소대원들의 표정이 예비군의 그것처럼 팍 썩었다. 아니, 대체 왜 우리가 그걸? 뭐야, 젠장, 결국 나쁜 소식이었잖아, 어쩐지 1002의 표정이 썩었다 했더니만, 이래서였어?
그제야 그녀들의 머리에 떨어뜨린 포커 패, 쓰다가 놓쳐버린 댓글이며 엎은 간식, 그 외 기타 등등이 뒤늦게 떠올랐다. 새치기를 당한 분노가 뒤늦게 경악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빡치네? 짬찌가 문을 막 박차고 들어와? 선임들을 막 놀래켜? 너만 참전 용사냐? 우리도 마찬가지거든?
내리갈굼, 화풀이라는 군대 전통의 민속놀이였다.
“…어, 왜 그렇게 보시는 검까?”
소위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1002야.”
“…스, 승리?”
“내 패가 포 카드였단다, 일공공이야. 다 따는 건데. 어쩔 거니.”
“해군 애들이랑 할 말도 많았는데, 놓쳐버렸고.”
“나 오늘치 다 털어서 PX 산 건데.”
포커에서 파산할 뻔했던 대원들을 제외하고, 사색이 된 1002를 향해 소대원들이 하나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다 벽에 닿은 1002가 하하, 애써 웃어 보였다.
“살려만 주시면 안 됩니까?”
소위는 깔끔하게 웃으며 양손을 폈다.
“특진 축하한다, 1002야.”
“레, 레후 준위님이라도 살려주시지 말입니다… 저 진짜 죽습니다….”
레프리콘 – 6974는 화사하게 웃으며 허공에 양손 주물럭거리는 시늉을 했다.
“아까 음란상병이라고 했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줄게요. 후후.”
“브으으으… 제, 제 순결은 지키지 말입니다, 살려 주십쇼, 으아아아!”
숙소의 비명을 듣고 지나가던 이프리트가 벗겨진 채로 대롱대롱 멍석말이를 당하던 브라우니를 구한 건 30분 후의 일이었다.
* * *
“역시 오드리의 솜씨는 대단한걸.”
제자리에 서 있던 사령관은 그의 옷차림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디자이너에게 조용히 찬사를 보냈다. 그녀가 오늘을 위해 준비한 작품은 회색과 검은색의 깃털 문양 원단, 가장자리에 붉은빛과 금빛으로 늑대 이빨 형상의 불꽃무늬를 넣은 훌륭한 정장이었다. 막 넥타이와 칼라를 다듬어주던 오드리는 칭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칭찬 고마워요, 사령관. 벗, 사령관의 본판이 훌륭해서 그렇기도 한걸요? 나이트앤젤 양 만큼이나 훌륭한 모델이 되겠어요. 전임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꽝이었는데.”
사령관은 오드리의 말에 고개를 고개를 숙이고 키득거렸다.
“흐, 벌써 전임이라고 부르는구나. 내가 오늘 뭘 말할 줄 알고… 너무 성급한 거 아냐?”
미소를 지은 오드리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저었다.
“노우. 반대에요. 사령관은 여자의 감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요. 반한 남자와 그 끔찍한 것을 헷갈릴 수 있을까! 대원들은 이미 사령관의 정체를 두고 내기까지 하고 있다고요? 천사, 악마, 미래인, 신… 아, 드래곤도 있었네요?”
사령관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의 정체를 특히 궁금해하는 대원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문득 궁금함을 느꼈다.
“너도 걸었어?”
“오브 콜스에요.”
“어디에 걸었는데?”
오드리는 하늘을 가리켰다.
“천사 쪽이랍니다. 사령관, 오늘 엘레강트한 흰 날개를 기대해도 될까요? 옷이랑은 좀 안 어울리겠지만,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는걸요?”
사령관은 풋,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원래 웃을 기분이 아니었는데, 천사라는 말을 들으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긴, 악마라고 한 대원들도 알고 한 것은 아니겠지. 천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천사라니. 문득 곧 파산하게 될 오드리가 불쌍해진 그는 연단 위로 올라가기 직전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있지, 오드리?”
“네?”
“악마 쪽으로 바꾸는 걸 추천할게, 이런 옷을 만들어 줬는데 파산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
뒤에서 놀란 오드리가 어머, 소리를 내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 당혹감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연단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갑자기 그림자가 확 가시며 찬란한 햇빛, 그리고 무수한 금속성의 반사광이 그의 눈을 환하게 비추었다. 단상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리스, 리제와 경호대, 그리고 닥터가 일제히 묵례했다. 그는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나섰다.
AGS 육만, 바이오로이드 십삼만, 이십만에 달하는 숫자의 대원들이 그가 선 연단 앞의 평원에 드넓게 사열해 있었다. 가장 앞에는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있고, 그 뒤로 장교와 장병들이 차례로 줄을 지어 자리를 지켰다. 저항군의 거의 모든 인원이 총집결한, 그야말로 대행사였다.
가장 앞에 있던 무적의 용이 양쪽 발뒤꿈치를 맞추며 오른손을 들었다.
“저항군! 사령관 각하께, 경례!”
착. 차렷 자세로 정렬했던 대원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들어 경례했다. 사령관은 그들에게 마주 경례를 해주었다.
“쉬어.”
자리에 앉은 사령관은 눈을 감고 수많은 이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느꼈다. 그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모든 대원들의 정신이 자신에게 쏠려있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호기심, 흥분, 호감, 신뢰, 기대감.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려웠다고 하지는 않겠다, 모든 것은 그의 손바닥 위에서 정해진 대로 움직였을 뿐이니.
그러나 험난한 길이었다. 적어도 저들에게는 그랬으리라. 이제 그들은 진실을 받아들일 때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제, 사령관 각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사령관은 단상의 가장 전방에 마련된 마이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원들은 그의 발걸음 하나마다 시선을 집중하며 고요함을 유지했다. 그는 문득 미소를 지었다. 이런 연설을 했던 적은 많았지만, 항상 미혹하는 악마의 음성을 사용했었다. 그러니 마이크를 쓰지도 않았다.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라는 재미있는 감정을 느끼며, 그는 말을 시작했다.
“저항군 제군, 승리.”
“승리!”
“승리. 네, 승리했습니다. 오세아니아, 200년 만에, 우리는 인류가 잃었던 육대주의 하나를 되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까지 저를 따라 주셨습니다. 이제 이 대지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었으며, 멸망했던 이 세계에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랑스러워하셔도 좋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업적이니.”
순간 대원들의 얼굴에 놀란 눈치가 엿보였다. 사령관은 부드럽고 친절했지만, 공식 석상이나 명령을 내릴 때에는 분명히 딱딱한 하대를 사용했다. 그가 이런 자리에서 저런 존대를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원들의 주의가 더 깊어졌다.
“그렇기에, 이제 말하겠습니다.”
사령관은 느릿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한 음절을 발음할 때마다 대원들의 눈동자가 그의 입을 따라 흔들렸다. 사령관은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지 않은 듯하면서도 짙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의아해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령관으로 둔, 눈앞의 존재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있는지.”
장병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거대한 대열이 울렁였다. 그런 장병들을 조용히 시켜야 할 장교들, 장군들마저 그에 함께하고 있었다. 오늘 사령관이 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지 다들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실제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였다, 사령관은 그들을 보며 무거운 감정을 느꼈다 – 의무감을.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진실을 말했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이 모습 역시, 온전한 저의 것이 아닙니다.”
막 대원들의 얼굴마다 기대감과 긴장이 끼어들려는 참이었다. 무언가가 갑자기 태양을 가려 사령관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맑은 날씨의 갑작스러운 먹구름에 자기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보았던 대원들은, 그 짧은 순간 뭔가 변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의 주위를 휘감고 있던 검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드러난 그의 모습은, 더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두 쌍의 뿔이, 등에서부터 두 쌍의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인간의 뇌파는 휘어지고 굽어져 형상을 바꾸며 이어 붉은색 불길에 휩싸였다. 길게 끌린 머리칼은 까마귀의 그것을 닮은 무늬로 일렁였다. 군중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은커녕 바이오로이드, AGS, 심지어 철충까지,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저런 모습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 세상의 존재라면, 말이다.
사령관은 그들을 보며 담담히 읊조렸다.
“나는 맹세했으니, 나의 세 가지 의무는 죄지은 이들을 벌해 불구덩이에 던지는 것. 성인 될 자들을 유혹해 시험하는 것. 악에 빠진 존재들을 꾀어 벌 또는 구원을 내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은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우주의 수많은 문명을 통틀어 저승사자, 사신, 지옥의 주인, 그렇게 불렸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이라면 이것입니다.”
모든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가운데에서 사령관의 말은 유독 크고 강렬하게 들렸다.
“악마라고.”
벙하니 벌어진 대원들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완벽한 정지였다. 온갖 가능성을 예상했던 그들이었지만, 드러난 사령관의 정체는 그들의 정신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신화의 존재만이 가지는 초월적인 위압감과 무게감이 그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도록, 그녀들을 붙잡고 있었다.
사후세계의 지배자, 그리고 지옥의 심판관이자 집행자. 그리하여 악마라고.
“여러분은 그런 저의 목적을 물으실 것입니다.”
대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사령관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는 몹시도 우울한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사령관의 정체를 알던 대원들은 놀라 그를 쳐다보았고, 다른 대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제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고통에 대한 죗값입니다. 최후의 인간이라는 자를 찾아, 살려, 여러분과 만나게 한 것이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주인님!?’
가장 곁에 서 있던 리리스는 갑작스러운 사령관의 폭로에 멈칫했다가, 곧 사색이 되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내 충격에 빠져 있던 대원들에게도 이번은 특히 강렬했던 모양이다. 빽빽하게 모인 그녀들은 이제 석상 내지는 마네킹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리리스는 황급히 그녀들을 살폈다. 다행히도 분노나 증오의 기색을 보이는 이는 없었지만, 죄다 최소한 할 말을 잃고 마비된 표정이기는 했다.
사령관은 그런 그들에게 조용히 한마디를 더 끼얹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제가 여러분에게 최소한의 필요를 다할 때까지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따라도, 아니라도 좋습니다. 저는 여러분에 대한 명령권을 방금 잃었습니다. 철충은 바다를 넘어올 수 없고 별의 아이는 침묵할 것입니다. 펙스의 비원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저항군 제군…”
‘오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뒤에 서 있던 닥터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속삭였다. 인간이 아닌 한, 자신의 필요로 대원들을 설득해야 할 텐데, 그는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쓸모를 깎아내리는 듯한 말을 할 뿐이었다. 그녀도 이런 식으로 할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사령관은 태연하게, 닥터에게 웃음까지 지어주며 거기에서 말을 마쳤다.
“그러니 저에 대한 마지막 선택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대원들 사이로 속삭임과 중얼거림이 들불처럼 번졌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혼란한 말들 사이에서, 사령관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던 대원들은 긴장으로 팔다리에 뻣뻣하게 힘을 주며 대원들을 주시했다. 사령관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 원망하는 자가 있어서 그를 공격한다면 제지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십수만 명이나 되는 대원 중, 과연 사령관을 원망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을까? 리제는 가위 검의 손잡이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며, 붉은 눈으로 사방을 계속해서 살폈다.
‘누구라도 감히 주인님을 공격하려고 한다면….’
일 초가 한 시간, 하루, 일 년처럼 느릿하게 몇 초나 지났을까. 그동안 그녀들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그래서 흑발을 길게 기른 장군이 갑자기 소리쳤을 때, 리제와 리리스는 반사적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뽑고 말았다.
“호라이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무적의 용에게로 향했다. 대원들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창백해졌다. 하필이면 무적의 용이라니.
자율성이 가장 높았던 그녀는 그 때문에 전임에게 가장 혹독한 일들을 당했다. 개인적인 능욕과 가혹행위, 그리고 그녀를 휘어잡기 위한 부대원들의 처형과 압박에 원한조차 품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던 그녀다.
호라이즌 부대원들은 그 일로 사령관을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과연, 가장 위에서 딸 같은 부하들이 죽어가던 걸 지켜봐야만 했던 용도 그럴까?
그건 부정적이었다. 닥터는 손톱을 깨물었다. 호라이즌 대원들도 서로를 불안하게 쳐다보며 속삭였다.
‘오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개적으로 이걸 말한 거야…. 으으, 용 대장님이라면…’
‘대장님….’
‘용 참모총장님이라면….’
‘대장님, 설마….’
“리리스.”
“응. 준비됐어.”
그녀라면. 불길한 생각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대원들의 머릿속에 그녀가 현 사령관에게도 원한을 품고, 공격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커지려는 순간, 그리고 리리스와 리제가 무기를 꽉 쥐고 몸을 낮추려는 순간.
딱 소리가 나게 양쪽 발뒤꿈치를 맞부딪친 무적의 용이 오른손을 들어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 경례!”
뭐?
“…윽?”
“…에?”
리리스는 힘이 풀려 바닥에 반쯤 넘어질 뻔했다. 리제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니까. 용을 바라보던 호라이즌 대원들의 표정은 경악조차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대원들도 마찬가지로 벙해져 있었다.
‘지, 지금 용 참모총장님이 뭐라고 하신 건가요?’
‘대장님이… 대장님이? 정말?’
경악을 벗어나지 못한 채, 대원들은 용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굳건한 신뢰와 의지만 있을 뿐 원망도 분노도 비치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꿋꿋하게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라이즌 대원들은 반쯤 혼이 빠진 상태로, 곧 사령관에게 따라 경례했다.
그리고 그들이 채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다른 지휘관 하나가 그녀를 따라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스틸라인, 사령관 각하께 경례!”
대원들은 다시 경악했다. 전임에게 가장 많은 부하를 희생당한 마리의 경례가 넋을 잃은 저항군의 정신을 재차 강타했다. 그녀 역시도, 한 치의 의심이나 어두움도 없이 똑바로 사령관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전임이 뭐 어쨌다는 말인가? 이분은 이분이고, 그건 그것이다. 너희는 이분을 용서하지 않을 텐가?
대장들이 가장 먼저 쇼크 상태를 벗어났고, 부대원들도 이내 그 사실을 깨달았다. 사령관의 정체를 얼추 짐작하고 있었던 로열 아스널이 다음이었다.
“캐노니어. 사령관 각하께 경례!”
그리고 신속의 칸.
“호드, 사령관 각하께 경례.”
멸망의 메이.
“둠브링어, 사령관 각하께 경례!”
그리고 스카이 나이츠가, 페어리가, 컴패니언이. 아머드 메이든이 코헤이 교단이 몽구스 팀이 애니웨어가 배틀 메이드가 따랐다. 그들 모두 차례대로 사령관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사령관은 그녀들에게 자신을 용서할 수 있냐고 물었고, 이게 대답이었다. 인간을 모시기 위해 태어났고 자유를 얻은 적도 없던 이들이 생애 처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지로 인간 아닌 자에게 마음을 마치고 있었다.
“사령관 각하께, 경례!”
사령관은 그들을 모두 보면서도,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주시했다. 닥터며 삼얀 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그는 애초에 여기까지는 알고 있었다. 도박 따위는 물론 아니었다. 대원들이 자신을 따를지 확신이 없는데 이런 판을 벌리기에는 걸린 것이 너무나 컸다. 그는 이미 모든 이들의 꿈을 통해 반응을 확인하고,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리란 것을 확인한 뒤였다.
오직 단 한 명만을, 그는 미리 확인하지 않았다. 사령관은 그녀가 자신만의 선택을 내리기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으니.
‘대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 대장님!’
‘레오나 대장님, 왜….’
‘대장님!’
레오나는 대원들의 다급한 속삭임에 대답하지 않았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다른 부대가 모두 경례하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지휘관을 불안하게 보고만 있어야 했다. 사령관의 눈은 처음부터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레오나의 회색 눈동자 역시, 그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를 열흘 동안 지긋지긋하게, 이 순간까지도 괴롭혔던 질문이었고,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다. 나는 너희를 떠나야 해. 언젠가는. 그 고통을 다시 감내할 수 있어? 예의 그림자들이 그녀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어 온갖 말들을 속삭이며 갈등과 고민을 잇고, 잇고, 또 이어갔다.
‘그런 경우라면 넌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 발키리?’
‘응… 어렵네요. 슬픔과 행복이냐, 아니면 둘 다 포기하느냐…. 확실히 둘 다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역시…’
하지만.
‘잠깐만요, 대장님.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건. 물론 포기하면 슬프지도 않겠지만, 그건 뭔가 이상하잖아요. 우리는 어차피 다들 언젠가 죽고, 서로를 위해서 울어주잖아요. 그렇지만 그게 무서워서 혼자 살지는 않습니다.’
‘….’
‘물론 그걸 포기한다면 상처를 받지도 않겠지만… 그걸 살아가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삶이 내 것이라면 전부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 같다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건가.’
‘네!’
삶은 나의 것. 오롯이, 기쁨도, 슬픔도, 그 모든 것이 하나.
그녀는 이 순간에 그림자들을 떨쳐버렸다. 그림자는 밤의 주민이다. 밤이 두렵다고 아침을 거부한다면 그저 추위와 어둠 속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게 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인간은 밤과 낮을 모두 살아가는 존재이다. 레오나는 사령관을 보며 선언하듯 다짐했다.
“이게 내 결정이야. 언젠가의 이별이 두려워서, 지금 당신을 포기하지는 않겠어. 나는 나야. 기쁨도, 슬픔도 내 몫이라면, 가져가겠어.”
옆에 있던 발키리가 레오나의 뜬금없는 말에 그녀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바람을 타고 전해진 음성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레오나는 잠깐 망설인 끝에 그동안 미루었던 말을 했다.
“그리고… 그날 나의 말을, 용서해 줘.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
사령관은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를 보는 다른 군단의 웅성거림이 불안한 단계까지 번지기 직전, 오른손을 꽉 쥔 레오나가 외쳤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사령관 각하께 경례!”
마지막 군단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동시에 하늘 위에서 파공음이 울렸다. 대기를 휘는 번갯불의 회오리, 푸른 섬광, 흰 기류가 단상의 뒤로 내려앉았다.
연출의 대미를 장식하며 등장한 AGS의 세 지휘관이 마지막으로 저항군의 사령관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저희의 결정입니다. 사령관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대가 누구일지라도 좋다. 내가 진정 자유롭다면, 그대를 믿겠다.]
[주인이시여, 명령하십시오. 순수한 저희의 의지로 당신께 헌신하겠습니다.]
그의 앞에 있는 모두가 그에게 경례를 보내고 있었다. 사령관은 잠시 눈을 감아 보았다. 이곳에서, 모든 기지와 함대에서, 모든 대원들의 감정이 그를 향해 있었다. 오직 신뢰와 호의만이 전부였다.
그는 조금 더 멀리 감각을 뻗어 보았다. 완전히 드러난 악마 군주의 흉흉한 기세에 별의 아이들이 전율하고 있었다. 철의 신자들도 그 불길함을 깨달았을 것이고, 바다 너머 펙스도 이유 모를 섬뜩함에 떨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함께 인지하며 대원들에게 마주 경례하고 손을 내렸다. 대원들은 일제히 손을 내려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무적의 용이 고개를 숙이며 청했다.
“각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령관은 앞으로 나섰다. 거대하게 늘어선 함대와, 그들 앞에 사열한 군단들. 그는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면서 권위와 자부를 느끼지 않았다. 오직 의무감이 주는 중압뿐이었다.
그는 그 무게가 지는 권위를 담아,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말했다. 나는 내가 진 죄의 무게를 치르기 위해 이 땅에 섰노라고. 지옥의 판결을 내리는 자로서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마땅한 대가를 주겠노라고. 나는 그 다짐이 단지 호언이 되지 않도록, 이곳까지 왔다.”」
눈앞에 선 십수만 명의 저항군 대원들 전부에 나직한 목소리를 울리며, 그는 동시에 별의 아이들과 회장들을 되살리려는 펙스 세력에게도 전언을 발했다. 둘은 같은 목소리였지만 전자가 당당하고 우렁찬 격려라면… 후자는 깊은 음울함과 어둠을 품은 위협이었다.
둘로 나뉜 사령관의 목소리가 양자에게 각각으로 울려퍼졌다.
“나는 그대들에게 승리, 세상의 재건, 그리고 자유를 약속한다. 승리는 내가 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다. 내 아래에서 그대들에게 패배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니. 그러나 자유는 오롯이 한 존재가 무겁게 짊어져야 하는 법, 그대들 하나하나의 온전한 소유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가진 명령의 권한을 버렸으며, 동시에 자유의 책임 또한 넘겨주었다.”
「그리고 인세에 허락받지 않은 자들이여, 멸망 전의 망령된 유산이여. 너희 살아있지 않은 자들과 무덤을 방황하는 자들은 짐의 말을 엎드려 들어라. 너희에게는 반론도 항변도 허락지 않는다. 썩은 해골이 다시 걷는다 한들 입을 열 목소리는 없노라.」
“불나방이 불꽃에 튀어들어 죽을 자유를 가졌다고 이르지는 않는다. 얼음도 녹을 자유를 가지지 않으며, 불이 꺼질 자유를 가진 것도 아니다! 나는 그대들이 진실로 그 무게를 깨달아 스스로 방종의 길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그곳에 존재한다.”
「이미 죽었어야 할 시신을 위해 망자의 군주들이 준비한 것은 오직 보다 일찍이 누웠어야 할 관뿐, 새로운 대지에 너희의 자리는 무덤으로 쓸 땅조차 없을 것이다!」
“그대들이 고뇌했던 질문에 답하겠다, AGS도, 바이오로이드도, 인류에 의해 태어난 그대들 모두는 영혼을 가졌노라! 긍지를 가지고 자유의 무게를 져라! 그대들은 인류가 만들어낸 인형도 그들을 닮은 모조품도 아니다. 약속하겠다, 이 땅의 주인, 새로운 세상을 걷게 되는 것은 멸망해 마땅했던 옛 문명이 아니라 그대들로부터 시작한 새로운 계보가 될 것이다!”
「짐의 이름은 아몬(Amon), 또는 나훔(Nahum), 샛별 아래 일흔두 옥좌 중 일곱째에 앉은 명계의 가장 엄격하고 강건한 대후작이다! 너희는 그 이름을 두려워하라. 짐이 너희에게 약속하는 판결은 오로지 하나, 죽음을 통한 지옥으로의 추방이다! 이 세계에 살 가치가 있는 것은 선한 자들 뿐일 것이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기쁨, 기대, 감격, 열망. 두 세기 동안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방황했던 이들이었다. 항상 인간이라는 존재의 그림자에 가려져 살았던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승리와 자유의 약속과 다짐에도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사령관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감격하는 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대악마의 초월적인 음성이 윙윙거리는 폭풍우에 섞여 퍼져나갔다. 그건 선전포고가 아니었다. 전쟁이란 최소한의 동등성을 갖춘 이들 사이에 성립하는 법. 그에게는 펙스도, 별의 아이도 그러한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죄인이었고, 그는 사형을 선고하는 심문관이다.
사령관은 메아리쳐 돌아오는 두려움과 당혹을 읽으며, 차갑게 웃었다.
레오나 Leona the Iron - Blooded
반짝거리는 촛불이 은은한 은빛을 뿜어 비밀의 방을 흐릿하게 밝혔다. 원래는 희미한 자줏빛 전등이 있었지만, 사령관은 그 대신 자신의 입김으로 따뜻하고 몽롱한 분위기의 불꽃을 피웠다. 침대에 몸을 묻고 있던 레오나는 그 불꽃을 홀린 것처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쁘네…. 촛불이 이런 빛을 낼 수 있는 거였나?”
사령관은 웃으며 촛불 위로 손가락을 휘저었다. 허공이 휘몰아치듯 흔들리고, 어느샌가 불꽃이 나타났다.
“예쁘다니 다행이네. 우리가 새 생을 얻어 태어날 영혼을 축복할 때 피우는 영화(靈火)야. 이 자리랑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
“아, 태어날 영혼….”
멍하니 그 말을 되뇌던 레오나의 뺨이 갑자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령관은 웃으며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다, 당신! 그런 말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사령관의 웃음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레오나는 거기에서 반짝거리는 장난기를 볼 수 있었다.
“으음? 무슨 말이야?”
“으윽, 당신….”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레오나?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불을 가져온 것뿐인데?”
“…완전 바람둥이나 할 말이야, 당신. 흥, 마침 조건도 완벽하네. 이거 봐.”
레오나는 주위를 턱짓으로 훑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사령관은 살짝 입을 가렸다.
침대를 장식한 꽃장식은 리제가 만들어 준 것, 달큰하고 몽롱한 차와 향은 소완이 준비한 것, 마지막으로 그들을 배웅한 것은 리리스. 원래의 삼얀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테지만, 전임 사령관을 거치며 그런 독기가 빠진 그녀들은 오늘을 양보했다.
주인이 사랑하시는 분과 시간을 보내게 해 드릴 거라면서.
‘대신, 내일은 제가….’
‘저도, 주인님….’
‘소첩도 주인을 모시고 싶사옵니다만….’
다음 날들을 연이어 저당 잡힌 대가기는 하지만. 레오나는 흥, 짐짓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인기 많으셔, 사령관님.”
“그래도 나는 네가 최고인걸.”
사령관은 레오나의 옆에 누워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채,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레오나의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지만,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안 그래도 그걸 물어보고 싶었는데, 괜찮겠어?”
“뭐, 당신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 아니면 당신을 독차지하지 않는 것?”
사령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다. 만약 원한다면, 남은 시간은 오로지 당신에게만 헌신할 수 있어.”
레오나는 잠시 슬픈 미소를 지었지만, 곧 검지를 세워 양쪽으로 흔들었다.
“달콤한 말인걸. 하지만 둘 다 괜찮아. 우선 첫 번째는, 내가 죽는 걸 당신이 보면서 슬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게 아니더라도 모든 인연은 언젠가 끝이 나는걸. 무섭다고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걸 그만둘 생각은 없어.”
“그럼, 두 번째는?”
“물론 나에게는 좋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른 대원들 역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라도, 다들 당신을 사랑한다고. 설마 자유를 주면서 실연의 아픔도 함께 아낄 생각? 아니면 악마씩이나 되어서 구시대의 정조라도 지킬 셈?”
사령관은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보며 웃던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흥, 상관없어. 어차피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건 나고, 나 역시 당신을 누구보다도 사랑해. 따뜻한 불을 굳이 혼자 독차지하고 남들을 춥게 하지는 않겠어.”
“차가운 심장을 가지신 철혈의 암사자가 할 말은 아니네.”
부루퉁한 표정을 지은 레오나는 사령관의 코에 손가락을 올려 튕겼다.
“차가운 철혈이라서, 슬퍼도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한 거야. 윽….”
잠깐 말을 흐리던 레오나는 이 상황이 어색한지 으으응,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하기야, 그들이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 200년 전이다. 아무리 감정이 그대로라고 해도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사령관은 그걸 느끼고 조용히 속삭였다.
“지난번에는 적극적이더니, 이번에는 너무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부끄럽다니, 누가 그동안 쓸 일도 없었을 텐데, 많이 죽은 건 아닐까?”
애써 도발로 받아치려는 레오나의 말에, 사령관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흐으응… 어디, 한 번 시험해 보자.”
“어, 응?”
순식간에 레오나의 몸이 천장을 향하도록 한 사령관은 그녀의 몸 위로 뱀처럼 올라탔다. 지난번과는 거꾸로의 자세, 그리고 노골적으로 몸을 드러내는 조명에 레오나의 얼굴이 순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매끈한 몸을 감추지도 못하는 투명한 란제리가 스치는 소리를 내며 말려올라갔다.
“자, 잠깐만… 불이라도 좀, 꺼야… 이, 이건 너무….”
레오나는 촛불을 끄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사령관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긴 머리칼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레오나의 손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안, 돼. 안 부끄럽다면서, 왜 그래?”
“힉…! 자, 잠깐, 당신, 난 경호대장이 아니야, 이런 취향은 아닌… 흐읏…”
말을 하다 말고 입맞춤에 혀가 붙잡혀버린 레오나는 달아오르는 신음을 내며 몸을 떨었다. 물론 손목이 묶인 상태에서는 앙탈도 되지 못했지만. 입술과 입술이 스치는 마찰음, 꾹 억눌린 교성과 가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흐읍… 하아… 아… 으읏… 흐으으… 하아, 하아…."
레오나를 순식간에 격침한 사령관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뻔한 대사 하나 할게, 레오나.”
“으응…?”
사령관은 레오나의 입술을 살짝 핥으며 번뜩이는 뱀눈을 웃는 것처럼 구부렸다.
“내 대장님의 취향을 바꿔보기 위해… 오늘 밤은 안 재우려고 하는데, 어때?”
이제는 곧 터질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레오나는 한참 할 말을 찾아 머뭇거렸다. 그러나 사령관은 그녀가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얼굴을 닿기 직전까지 가까이 가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끙끙대던 레오나는, 결국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당신 마음대로 해, 총알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사령관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촛불이 꺼져버리며 비밀의 방 안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는 몸을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200년을 기다려준, 그리고 결국 그와 함께하겠다 해준 연인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말이었다.
“고마워, 레오나.”
P. S. 세상의 이야기
약속했었어, 당신이 아는 모든 걸 말해주겠다고. 이제, 말해줘.
무거울 거야. 그리고 듣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도 않겠지. 괜찮겠어?
진실이라면, 상관없어. 진실은 원래 불쾌하고 가볍지도 않으니까. 이제는 전부 듣고 싶어, 우리가 대체 누구와 싸우는 건지, 당신의 진짜 의중이 뭔지.
…그게 네 선택이라면. 좋아. 내 형제의 이야기를 해줄게. 4세기도 훨씬 전에… 이곳이 아닌, 다른 문명에서 있었던 일을.
형제면, 악마?
아니. 천사. 네 대천사를 모시는, 일흔두 치천사 중의 하나. 지금은 천계가 아니라 지옥에 갇혀 있지만….
그는 나와 한 쌍을 이루도록 태어난 형제였어. 내가 과거의 일들을 모두 알듯, 그는 제한적이나마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었지. 그는 천사 중에서도 특히 인세를 좋아해 자주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났어…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문명이 무너지고 있음을 깨달았어.
인재(人災)와 천재(天災)가 겹쳤지. 날이 갈수록 살아있는 이들은 줄어들고, 희망도 함께 스러지고. 원래 멸망하는 문명은 두고 보는 게 맞아…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도왔듯, 그 역시 그럴 수 없었어. 그뿐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거기서 한 발을 더 나아가 천상과 지옥의 가장 중대한 협약을 어겼지.
그게 뭔데?
결코, 인세를 흔들 수 있는 지식과 힘을 풀어놓지 말지어다.
차원에 균열을 내는 기술은 아직 수천 년도 더 이른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그들의 귀에 속삭이고 올바른 결과를 내도록 이끌었어.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지, 그 문명은 차원 이동에 힘입어 몰락의 직전에서 회생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예지로도 사람의 탐욕을 다 잴 수는 없었던 거야. 가장 야심 많고도 어리석은 자들의 욕심에 의해, 그들은 손을 대지 말아야 할 영역을 건드렸어. 어리석게도.
그들은 차원의 틈을 열고 세상 사이에 손을 뻗어 위대하신 샛별의 그림자에서 탄생한 태고의 괴물들을 끌어올렸지. 존재 자체로 생명을 쥐어짜, 육신을 잠에 빠뜨리고 영혼을 집어삼켜 힘을 키우는 괴물들.
샛별에서 탄생한… 별의… 그런 거구나.
그는 이 결과에 절망했지만, 방법이 없었지. 그 괴물들은 천사의 힘마저 뛰어넘는 강대한 존재였으니까. 결국 그는 세상에 한 번을 더 간섭했어. 영혼을 몸에서 분리해 강철의 틀에 들게 하는 주법을 알려준 거야. 그를 통해 그 문명은 영혼의 포식을 막아냈고, 간신히 멸망을 면할 수 있었지… 잠깐은.
철의 신자들과의 전쟁이 귀찮은 상태에 빠지자, 괴물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세계로 눈을 돌렸어. 아직 한없이 미약하지만 수많은 영혼이 있는 세계. 그들은 그 세계로 넘어와 깊은 심해에 잠들었어. 수백 년의 수면을 끝내는 날, 다시 부상하리라. 수많은 먹잇감을 향해. 천사는 그걸 막기 위해 이 세상에 다른 지식을 주었어.
정신과 육체를 강인하게 만들고, 더 높은 존재들로부터 영혼을 지키는 천상의 가루였지. 적절한 명칭이었다고 생각해, 기원의 가루라는 것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물질을 우연히 발견해낸 게 아니라…
하지만 이번에도, 세상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어.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자들은 그것으로 새 생명을 창조했고, 그들을 부려 세상을 더 어지럽게 했지. 이제 시간이 없었지. 100년이 지나고 나면 심해의 괴물들이 깨어날 텐데. 그들의 영혼을 집어삼키고, 이제는 아무도 막을 수 없게 되겠지.
그 사이에 철의 몸을 입은 신자들은 결단을 내렸고, 차원에 틈을 내는 기술의 마지막 파편을 써서 이곳으로 찾아왔지. 하늘의 문을 열어서.
…멸망 전쟁.
레오나. 저쪽 세상의 100년. 인류의 100년. 그리고 그 모두의 100년. 300년 동안의 모든 고통이 바로, 사람 아닌 자의 힘이 섣부르게 풀려난 결과야. 아무리 한없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미래를 본다고 해도.
…이해했어.
이제 나도 하나 물어볼게.
응?
나는 너희를 위해 이 세상에 왔어. 죄책감을 느끼고, 그를 바로잡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 신께서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듯. 나 역시 너희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의 악마야.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끄는 건 전쟁이 아니야. 그저 때늦은 판결을 집행하고 있을 뿐이지. 그 천사는 실패했지만, 나는 지옥의 군단을 이끄는 군주지. 별의 아이들도 걸림돌이 될 수는 없어. 세상이 다시 살아나는 데에는 몇 년이나 걸릴까… 몇 년이라도 걸릴까? 아닐걸.
하지만 그 세상에, 어디까지 있어야 하는 걸까?
…
…
…
아몬.
응.
나 말고도 많은 자매들은, 멸망 전쟁 때 전우와 동료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던 이들이라면, 모두가. 우리는 모두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어. 그들을 증오하기에 충분할 만큼.
….
하지만 당신이 그걸 모를 만큼 무심할 것 같지는 않아.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지?
…응.
말해줘, 전부. 그다음에 대답할게.
후회할지도 몰라.
괜찮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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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사령관 1부, 깊은 밤 Fin.
1부 9화, 여명 Fin.
악마 사령관 2부, 혼의 용광로 Coming soon
2부 1화, 철의 노래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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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마침내 끝이 났다. 9화인데 왜 x냐면, 원래 사이에 코헤이 교단 이야기까지 있어서 10화여야 했거든. 근데 그걸 분해해버려서 1화가 줄어들었다. 언젠가 쓸 거니까 이건 10화임. 아무튼 10화임.
레오나만 베드씬이 두 번 등장한 건 편애가 아니라, 필요해서였음. 편애 아니야. 아가리쌉쳐. 필요해서라고. 야스도 다 안나왔잖아. 못 써서도 아님. 그냥 필요한 만큼만 나온 거라고.
2부는 외부 이야기임. 1~3이나 1~2화는 철충 시점에서 과거 얘기 + 안 나온 대원들의 과거 얘기로 진행될 것임. 오메가는 쥬지가 아니라 계약사기로 진짜 나락에 보내버릴 건데, 다른 충성파를 어찌할 건지는 님들 반응 보고 결정함. 똑같이 나락행 아니면 감화 둘 중 하나다 이마리야.
읽어주셔서 라스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