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그 이야기 들으셨슴까? 이번에 상륙한 섬에 마녀가 있다고 함다."

"마녀요?"

"그 있잖슴까. 빗자루 타고 날아댕기는."


야간출격이 없는 한, 일몰 후 오르카호는 일정 해저까지 잠수해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있기에 매일 밤 달빛도 닿지 않는 바닷속 거대한 암실이 된다.


"근데 글쎄, 그 마녀가 사령관님한테 초대장을 보냈다고 들었슴다."


야근이 잦은 연구동과 자동화가 이루어진 제조동이라면 모를까, 전력 낭비를 막기 위해 잠수와 동시에 소등이 이루어지는 거주동를 밝히는 건 복도 바닥의 푸른 간접등 뿐. 비록 철충이 해수에 닿지 못한다 한들 만전을 기하기 위해 각 구역마다 야간순찰조를 운용하고 있었고 오늘의 거주동 순찰조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었다.


"마녀... 혹시 인간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바로 그검다! 멸망 후 인간님들로부터 어떤 회신 시그널도 없었다고 하지만 마녀라면 설명이 가능하지 않슴까? 숲 속에 오두막 짓고 텃밭에 요상한 식물 기르면서 집 안엔 거대한 가마솥과 해골이 즐비한 진짜 마녀! 리얼 마녀니까 통신용 단말기따윈 가져본 적도 없을테니 연락을 못했던 게 분명함다!"

"예, 예. 당신 말이 다 맞네요."


웅변이라도 하듯 손짓을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브라우니에게 헛소리라도 들은양 건성으로 대꾸하는 레프리콘이었지만 브라우니의 실없는 소리가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야간순찰은 거주구역을 돌 뿐이었지만 수 개 층에 달하는 크기였던만큼 적잖게 시간이 걸리는 임무였고, 날 때부터 병사였던 그녀라고 해도 어두컴컴한 회랑을 수 시간 묵묵히 걷기만 하는 걸 좋아하진 않았다.


"에엥, 그거 진심 맞슴까?"

"그럼요. 제가 언제 당신한테 거짓말 한 적 있습니까?"

"흐음..."


눈꼬리를 얄쌍히 늘여 의심스레 흘끗대는 브라우니에게 볼테면 보라는 듯 레프리콘이 의연하게 눈을 맞춘다.


"...뭐, 없지만말임다."


길지않은 눈싸움은 브라우니가 먼저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돌리는 걸로 결착이 났다. 막간의 기싸움을 끝내고 다시 정면을 향해 걷기 시작한 가운데, 레프리콘의 입꼬리는 살짝 말려올라가있었다. 항상 군인으로써의 품위와 절도를 중시하는 그녀였지만 브라우니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장난기가 차오르곤 했다. 시덥잖게, 이게 뭐 별거라고 웃음이 나오나 싶었다.


"그런데 진짜로 혹시, 혹시나 진짜 마녀가 인ㄱ, 아이고!"

"으앙!"


콰당-


다음 층으로 가려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다시 촉새기질이 발동한 브라우니가 뒤따라 올라오는 레프리콘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반대편에서 나타난 무언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은 후 팔을 허우적대며 몸이 기우는 브라우니를 레프리콘이 황급히 잡아앉힌다. 그 덕에 굴러 떨어지는 건 면했지만 충돌한 상대방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성대하게 계단 중간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브라우니, 괜찮아요?"

"아으... 괘, 괜찮슴다... 앗! 그보다 침입자! 침입자임다!"


레프리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브라우니가 불현듯 엉덩이를 문지르던 손을 떼 노리쇠로 향한다. 철컥, 하고 납이 들어차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지고, 뒤따라 긴장된 공기가 그들 사이를 매웠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화랑! 화ㄹ... 아니지, 경계! 경계!"

"히, 히익...!"


레프리콘을 빼고.


"브라우니, 저 분은..."

"빨리 모습을 드러내!"


두 사람이 부딪히고 각자 괴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던 찰나, 레프리콘은 브라우니와 충돌한 상대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사고 당사자들은 그러지 못했고, 서로가 서로의 반대편 계단의 사각에 쓰러진 탓에 여전히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우으으..."

"아, 손! 손부터 보여! 손바닥을 이쪽으로!"


플래시로 머리카락이 보이기 무섭게 잊고있었다는 듯 브라우니가 재차 쏘아붙인다.


"히, 힛! 녜에!"


그 호령아닌 호령에 잔뜩 움츠러들었다고 광고라도 하듯 혀꼬인 소리와 함께 두 손이 플래시 사이로 들어섰고,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거리는 팔을 보곤 브라우니는 레프리콘을 돌아본다.


'...?'


브라우니는 레프리콘이 보기에 전에 없을 정도로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고 있었고, 그걸 본 레프리콘의 얼굴 또한 덩달아 전에 없을 정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뭐에요?"

"어떻슴까?"

"뭐가요?"

"이정도면 썩 괜찮지 않슴까?"

"아니, 그러니까 뭐가?"

"위력심문."

"...?"

"침입자의 기를 꺾는 검다."

"...??"

"헤헷!"

"...하아아..."


어이없음이 명백하게 묻어나오는 한숨이었지만 아랑곳않고 만면에 미소를 띄운 브라우니였다.


"알겠으니까, 하던 거 마저 해요."

"오우! 자, 이제 모습을 보여라!"


매우 천천히, 반 쯤 우는 소리를 내며 이 소동을 일으킨 또 하나의 장본인이 빛무리로 모습을 드러냈다.


"히잉... 제, 제발..."


바닥을 다 덮을 기세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늘어뜨린 머릿결이었지만, 넘어지는 바람에 진짜로 바닥을 다 덮어버려 먼지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아니, 당신은?!"


평소엔 그 누구도 위에 없다는 듯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눈매였지만, 지금같이 폭력 앞에선 반사적으로 물이 차오르고 국지적 지진이 일어나며 눈꼬리는 끝을 모르고 처지기만 한다.


"제발 쏘지 마세요..."


절대악의 군주로서의 카리스마에 걸맞는 위풍당당한 체구를 지녔지만, 정작 위압감을 느끼면 늦가을 된서리를 맞은 토끼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고 한없이 작아지는 새가슴 또한 지닌, 전 대마왕 현 마법소녀 매지컬 뽀끄루였다.


"뽀끄루 대마왕 씨?!"

"전직 마왕이지만요... 저, 이제 손 내려도 될까요...?"

"아, ㅇ, 옙! 실례했슴다!"


드러난 침입자의 정체를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듯 허둥대며 총구를 거두는 브라우니를 보고 뽀끄루는 온 몸의 진이 빠진 모양인지 풀썩 주저앉고는 눈물을 닦으려고 소매로 눈끝을 연신 부벼댄다. 레프리콘의 입장에서는 드디어 얼빠진 촌극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휴우, 진짜 큰 일 나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뽀끄루 님. 제가 더 일찍 말렸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다 오밤중에 돌아다닌 제 잘못이에요."


레프리콘의 사과에 드디어 진정이 된 건지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한숨을 쉬는 뽀끄루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정도로 놀랄 일인가?'


여전히 숨을 고르는 뽀끄루를 훑어보며 레프리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놀랐다고 한들 쥐라도 난 것처럼 다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는데다가, 안그래도 가릴 곳이 적은 옷가지가 죄 비쳐보일 지경의, 몸살이 의심될 정도로 땀투성이였다.


"저... 혹시 어디 안좋은 데라도 있으십니까?"

"예엒?!"

"...?"

"ㅇ, 아! 저, 그게! 그..."


전류라도 통한 듯 화들짝 놀라는 뽀끄루의 태도는 레프리콘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가는 중이었다.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좀 전 브라우니와 부딪혔을 때보다 훨씬 더 이상한 괴성을 내뱉더니, 레프리콘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하며 이리저리 눈둘 곳을 몰라하고 있다. 심지어 땀도 확연히 늘어나 방울져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결국 레프리콘은 뽀끄루를 의료실까지 데려다주기로 결심했고, 그녀를 일으켜세우려던 때였다.


"운동이라도 하신검까?"

"그, 그거다!" 


어느새 레프리콘의 옆에 선 브라우니가 무심하게 던진 말을 낚아챈 뽀끄루가 말을 이어간다.


"운동! 맞아요! 요즘 너무 늘어진 탓에 살이 찐 게 아닌가 해서 밤에 남몰래 조깅을 하고 있었거든요. 비,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다시 스크린에 서야 할테니까요. 에헤헤..."

"힐 신고계시지만말임다?"

"앗..."


기발하다는 듯 삿대질까지 더해가며 눈을 빛내던 뽀끄루에게 다시 툭, 하고 브라우니가 의문을 내던지자, 둘을 향하던 눈동자는 다시 바닥으로 내리깔리고 곧게 편 그녀의 검지도 따라서 스르륵 접히기 시작했다.


"하긴, 힐 신고 하면 더 효율이 좋지 않겠슴까?"

"그래, 그래 그거! 맞아요! 그래요!"


검지가 완전히 엄지 아래로 말려들어가기 직전,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브라우니가 재차 말을 잇는다. 이에 뽀끄루는 이번에야말로 틀림없다는 듯 브라우니가 채 입을 다물기도 전에 따라붙고는 돌림노래처럼 다시 이어나간다.


"그, 그! 힐을 신은 채로 조깅을 하면 균형감각도 기를 수 있잖아요? 게다가 이 의상보다 대마왕 복장의 굽이 좀 더 높거든요? 이젠 마법소녀긴 하지만 나중에 또 대마왕으로 분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니까 미리 연습도 겸할 겸 해서 힐을 신고 달리는 게 훨씬 좋...겠죠?!"


어째서 의문형으로 맺었는지 뽀끄루 본인도 알 턱이 없었지만, 아까보다 훨씬 더 곧게 편 검지를 연신 흔들어가기까지하며 항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엾이 여겨 저 둘이 길을 터주길 바랄 뿐이었다.


"근데 말임다..."

"히잉...!"


하지만 하늘이 무심하게도, 또 무심하게 운을 띄우는 브라우니를 보고 절망감에 눈물만 차오른다. 눈앞이 희뿌예 눈을 감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제 또 무슨 말이 날아오든간에 각설하고 그저 비켜주십사 곡이라도 하는 것밖에 길이 보이질 않았다.


"운동이라면 저기 연구동쪽 출구에 체단실 있으니까 거기서 하심 됩니다."

"...제발 그냥 가게 해주ㅅ... 네?"

"체단실요, 체단실. 체력단련실말임다."


브라우니가 입을 떼기 무섭게 넙죽 엎드려 빌기 시작한 뽀끄루에게 들려온 말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그 자세 그대로 눈을 한차례 닦은 후, 잘못 들었나싶어 고개만 빼꼼 내들어 브라우니를 바라본다.


"모르시는 것같길래."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사람좋게 베시시 웃고있었다.


혹시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되지 않을까? 아까완 다르게 훈훈하게 받아친 지금이라면 되지 않을까? 뽀끄루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물음을 어렵사리 입에 담는다.


"저... 가도 되나요?"

"예?"

"...! 아, 안되는 거였나요...?"

"아뇨아뇨, 그게..."

"그게...?"


오히려 이쪽이 곤란하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이는 브라우니의 얼굴이 서서히 옆에 선 레프리콘에게 향한다.


"...? ㅁ, 뭡니까 둘 다?!"


레프리콘은 뽀끄루의 기세가 한 번 꺾였을 때부터 사실상 이 콩트에서 의식을 떼 상념에 잠겨있었고, 그녀가 시선을 의식한 건 곧 봇물이 터질 것처럼 물기가 가득 들어찬 뽀끄루의 눈망울마저 그녀를 향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게말임다... 그쵸?"

"그쵸...?"

"그러니까 뭐가 말인데요!"


고개를 까딱이며 이유 모를 동의를 구하는 브라우니와 메아리치듯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재차 동의를 구하는 뽀끄루를 보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는진 모르겠으나 어째선지 뽀끄루가 이 상황을 넘기려 애를 쓰는 것도, 그녀에 대한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아, 가시고 싶으시면 가셔도 됩니다. 애초에 막은 적도 없으니."

"...! 정말인가요? 감ㅅ, 정말... 크흡, 증믈 금스흠니드...!"


화색이 돌던 뽀끄루는 기어코 댐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니, 우실 것까지야..."

"이야, 축하드림다!"


깊은 바다 잠수함 속 어두운 복도 한 가운데 엎드린 채 입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코를 삼키는 여자와 정말 잘됐다는 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 여자의 등을 두드려주며 눈 앞에서 엄지를 들어올리는 또 다른 여자, 그리고 그 둘을 보며 과연 이 광경이 어떻게 보일 지 곰곰히 생각해보는 한 여자까지. 


"...너무 개판이잖아."






01.


"그럼 순찰 수고하세요!"

"옙! 뽀끄루님도 들어가십쇼!"


손을 흔들며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뽀끄루에게 둘은 따라서 손을 흔들어준다.


""...""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어째선지 발소리가 멀리서 잦아들 때까지도 손을 흔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둘 다 손을 내렸음에도 뽀끄루가 떠난 방향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동시에 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꽤 큰 사달이었지말임다. 안그렇슴까?"

"그러게. 저 정도로 유약한 사람일 줄은... 저쯤 되면 경지에 가깝네."

"그야 세상에 이런사람 저런사람 있는 법이지말입니다."


불현듯 눈 밑이 시뻘게질 때까지 한참을 울어제끼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뽀끄루가 떠오른다. 사실 저 극에 달한 안쓰러움이 세뇌의 원천은 아닐까하고 생각한 레프리콘이었지만 구태여 입에 담진 않았다. 잘은 몰라도 브라우니도 같은 생각을 하고있을 것만 같았다.


"... 근데 저거, 했네요, 했어."

"했다니, 뭘요?"

"이거 말임다 이ㄱ, 우와악?!"


쿠당탕-


"읏!"


아까 올랐던 곳을 지나고 이번엔 반대편 계단으로 돌려던 순간이었다.


"아야야..."

"당신 진짜... 이번엔 또 뭐에요!"

"죄, 죄송함다... 미끄러졌어요..."


데자뷰처럼 뒤를 돌아보면 브라우니가 또 넘어지고 말았지만 결과는 같지않았다. 레프리콘이 잡아줬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브라우니가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앞으로 미끄러져 넘어지며 발로 레프리콘의 코를 차버리고 말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바로 직전 진빠지는 일을 겪은 탓에 정신이 팔려 반응이 늦어졌다.


"그래서,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예, 턱을 찧긴 했는데 괜찮은 것 같슴다... 분대장 님은 괜찮으심까?"

"저도 딱히. 그렇긴 한데..."


가볍게 스치듯 차인 덕에 코피가 나진 않는 모양이었지만, 코를 만진 레프리콘의 손에 무언가가 묻어나왔다. 브라우니가 찼던 그녀의 콧잔등에 묻어있던 점성을 띤 투명한 액체. 손끝으로 비벼보자, 미끈거리며 뗀 손가락 사이를 잇다가 점성을 잃어 얇아지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빛에 가까이 비춰보니 마냥 무색이라기 보다는 실을 꼰 듯 짙은 유백색의 액체도 섞여있었다. 


'...콧물?'


"무슨 일 있슴까?"

"신발 바닥 좀 살펴보세요."

"신발요? 어디보자..."


액체의 정체를 판별하는 데에 정신이 쏠린 레프리콘은 브라우니 쪽을 보지도 않은 채 엄지와 검지를 맞닿고 떼고를 반복하고있다. 브라우니는 레프리콘의 코를 멋들어지게 차버린 쪽 신발을 손으로 훑었다.


"뭐야 이거?"


브라우니는 레프리콘이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늘여보기도 하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까지 하며 자신이 자빠졌던 원인을 알아내려 애를 쓰고 있다. 이윽고 더 나아가 손가락에 혀끝을 대기 직전, 레프리콘의 눈치를 보는 듯 바닥을 뺑 둘러보더니,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곤 질색을 하며 황급히 손가락을 벽에 눌러 닦아냈다.


"으아아아! 큰일 날 뻔했네!"

"브라우니?"

"분대장 님, 그거 당장 닦으십쇼. 지지, 지지임다!"

"네? 대체 뭐길래..."

"아무튼 빨리! 닦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

"...?"


영문을 모르는 레프리콘이었지만 사색이 돼선 손사래치는 브라우니를 보고 외투의 소매춤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하얗게 빛나며 번지듯 묻어나오는 모양새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후우, 설마설마 했지만 진짜로 했을 줄이야..."

"뭔데 그래요?"

"그... 우선 올라가는 게 어떻겠슴까?"
"알았어요. 올라가서 말하는 걸로 하죠. 우선 이것 좀 다 닦아두고..."

"아니아니아니! 냅두십쇼! 청소로봇이 알아서 할검다!"

"...? 그래요 그럼."


레프리콘이 소맷자락을 쥐어올려 바닥을 훑으려는 순간, 브라우니가 아까 자기 혀를 갖다 댔었을 때만큼이나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녀를 만류하곤 신발 바닥을 계단 모서리에 긁어댄 후 먼저 위층으로 치달려 올라간다. 예의 액체가 묻어있는 곳을 피해 올라가던 중, 레프리콘이 아까 무심코 닦아냈던 소매를 바라보자 액체는 벌써 말라붙어 반쯤 가루가 돼 떨어져나가있었다.


"그래서 대체 뭘 했다는건데요?"

"이거 말임다. 이거."

"......어어?!"


브라우니가 왼손 엄지와 검지로 구멍을 만들고 오른손 중검지를 쑤셔박는 시늉을 하자, 처음엔 알아먹지 못한 듯하던 레프리콘도 툭툭 거리는 소리가 네다섯 번 이어지자 이해가 됐다는 듯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불신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변해가며 브라우니를 쏘아본다. 


"잠깐만요, 그렇게 단정지을 순 없는 거 아닌가요?"

"분대장 님, 야간순찰은 오늘이 처음이신거 아님까?"

"예? 그거야 그렇죠."


레프리콘은 오르카호 내에서 그녀보다 근속이 긴 바이오로이드가 있냐고 묻는다면 쉬이 손에 꼽기 힘들 정도의 베테랑이었지만 야간순찰제를 시행하기 전부터 원정부대에 차출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장기원정에 대한 배려로 야간순찰은 면역되어오다가 최근 본부대 소속으로 돌아온 탓에 오늘이 생애 첫 오르카호 야간순찰이었다.


"그럼 시크릿포인트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슴까?"

"...처음 들어봐요."

"그렇담 오늘 많은 걸 배워가시게 되는검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고, 다시 말을 잇는 건 마지막 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나서였다.


"다왔슴다. 거주구 꼭대기층."

"그래서 시크릿 포인트가 뭔데요?"

"그전에, 거주구 꼭대기층과 다른 층들의 차이점에 대해 아심까?"

"차이점? 그러니까..."


레프리콘이 마지막으로 오르카호 구획정리를 읽었던 때와 달라진 게 없다면, 거주구 꼭대기층과 다른 층들의 다른 점은 딱 두 가지이다.


"설계문제로 방은 총 스무 개이고, 입주인원 부족으로 실제 사용되는 방은 사령관님의 침실인 E109 호 뿐이며 그 외에는 모두 빈방이라는 거네요."


그녀의 말마따나 거주구의 꼭대기층인 E층은 101부터 120호실까지만 존재하며 지금 그녀들의 눈앞에 있는 E109호만이 문패에 입주자가 입실해있음을 뜻하는 주황색 등이 둘러져있었고, 좌우로 마주보고 늘어선 다른 방들은 죄다 빈방을 뜻하는 빨간색 등이 켜져있었다.


"맞슴다. 근데, 이건 아셨슴까?"


성큼성큼 E110호실 앞에 선 브라우니가 자신의 ID카드를 꺼내 센서에 갖다대자,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드민카드인가요?"

"그냥 제 ID카드임다."

"어떻게...? 본인의 카드론 거주구에서 본인의 방밖에 열 수 없잖아요?"

"포츈씨 말로는 단순한 보안망 오류라고 함다. E110호실만 모든 ID카드로 열 수 있슴다. 진짜 오류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자, 들어오십쇼."


레프리콘은 브라우니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서보았지만 개인물품만 없을 뿐, 자신의 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시크릿포인트가 대체 뭔데요?"

"쉬잇, 조금만 작게 말하십쇼. 지금 바로 알려드릴테니."


브라우니가 검지를 레프리콘의 입술에 갖다대며 그녀를 벽으로 잡아끌었다. 둘이 기대앉은 벽은 구조상 E109과 맞닿은 벽이었고 아무리 촉이 굳은 레프리콘이라고 해도 이쯤되면 알아챘을 거라 믿은 브라우니는, 이에 화답하듯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레프리콘의 얼굴에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다.


"당신, 설마..."

"따라란...따라라란..."


경악하는 레프리콘에게 아랑곳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눈짓하는 브라우니. 그 눈 끝이 향한 곳에는, 바로 벽에 기대서만 알아볼 수 있게 하얀 벽에 하얀 점토가 삐죽 삐져나와있었다.


"자, 어서요."

"......"


자신에게 속삭이는 마귀와 점토를 번갈아보던 레프리콘은 결심을 굳힌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점토로 손을 뻗는다. 일부러 끼우고 뽑기 쉽도록 납작하게 빚어놓은 듯한 모양새에, 자세히 보니 손때까지 옅게 묻어있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을 오갔을지 상상하기 어렵지않았다. 이윽고 그 말랑말랑한 폭탄에 지문이라는 불을 놓자, 점토를 떼어내고 눈을 들이미는 건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졌다.


"..."

"상황보고 부탁드림다."

"...각하가 주무시고 계시네요."


수 센티 직경 사이로 은은한 수면용 간접등이 드리우는 침대가 보이고, 이불을 뒤집어 쓴 탓에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이불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로 보아 사령관이 이미 잠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에이, 그럼 오늘은 뽀끄루 씨 뿐이었나. 아깝지만말임다."


어느샌가 포켓보틀을 꺼내든 브라우니가 입맛을 다시며 병을 기울이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 아, 괜찮지 않슴까? 이제 순찰도 다 끝났는데."

"...그게 아니라, 아깝다니요? 혹시..."

"암요. 일 대 사 릴레이매치까지도 봤슴다."


일 대 사.


"..."

"한 모금 하시겠슴까?"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말없이 손을 내민 레프리콘에게 설마 진짜 마실 줄은 생각 못했다는 듯 재빨리 먼저 한 입 들이킨 후 병을 건낸다. 적어도 브라우니의 기억속엔 그녀가 술을 마셨던 장면은 단 한 번, 자포자기했던 여름의 그 날밖에 없었다. 무표정하게 받아든 레프리콘은 병을 코앞에서 몇 번 휘휘 돌리며 역시 익숙지않은 듯 코를 찡긋대는가 하더니, 입술에 가져다 대곤 천천히 병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병에서 입으로, 입에서 목으로. 액체가 주소를 옮겨감과 동시에 역겨운 쓴 맛이 불타는 길을 내는 듯한 감각은 여전히 지독한 경험이었다. 


"역시 별 거 없네요."

"그쵸? 항상 첫 술 뜨는 게 제일 어려운 법임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역스레 침을 삼키는 모습도 그때와 판박이였지만 애써 모른 체하며 술병을 다시 건내받는다.


"...각하께선 그렇게 고프신 걸까요?"

"아니, 반대지 않겠슴까? 엄마 따라온 꼬맹이들 덕에 여탕도 여기보단 성비가 나았을 검다."

"듣고보니 그렇네요. 근데, 어디서 신청하죠?"

"저도 모르겠슴다. 안해봐서리."

"...딱하네요, 둘 다."

"근데 굳이 신청이 필요함까? 이게 종이쪼가리 들이밀고, 도장 쾅쾅 받을 일은 아니지 않슴까?"

"흐응..."

"여기요."

"아, 고마워요."


이번엔 망설임없이 단번에 들이킨 레프리콘. 어느새 목주변까지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아까 그거, 그거 맞죠?"

"맞슴다, 사랑의 윤활유."

"그래요, 그거... 뽀끄루 님 대단하네. 들어온 지 얼마 안됐다고 들었는데..."

"저도 긴가민가 했는데, 역시는 역시 역시나였슴다. 딱 엎어진 자리였고."

"......"

"뭐, 내일 당장 어찌될 지 모르는데 참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슴까. 둘 중 어느쪽이었든지간에."

"...브라우니, 브라우니 2056."
"왜그러심까?"

"... 아까 그거, 먹으려고 했죠?"

"모르는데 별 수 있슴까."

"흐응..."

"안먹어서 천만다행이지만. 자, 받으십쇼."

"...땡큐땡큐."


과감하게도 병을 수직으로까지 기울여버린 레프리콘은 그 대가로 두 볼 가득 술을 머금고야 말았다. 자칫 잘못하면 역류해버릴 것 같은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목구멍을 열었고, 기어이 입 안을 비워버린 그녀를 보고 브라우니는 술병을 입에 문 채 박수를 보냈다.


"대다하심다. 대다하심다."


긴급 알코올 투여의 영향은 대단했는지 브라우니에겐 이젠 레프리콘의 안면과 머리카락이 구분이 되지않는 경지에 이르른데다가, 레프리콘은 결국 풍걸린 것마냥 고개를 까딱이기까지 시작했다.


"...난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뭘 말임까?" 

"정액."

"...대단하심다."


브라우니가 술병을 한 번 흔들어보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이 바닥을 치는 간격으로 어림잡아 길게 한 모금 정도의 양만 남았을 뿐이었다.


"하긴, 좋아하면 뭔들 못하겠슴까."

"흐응..."

"보니까 다들 좋다고 물고 빨아줬지만 말입니다."

"......"

"...이제 저 마실 것밖에 안남았슴다."

"...어쩔 수 없네."


의외로 순순히 돌아갈 의향이 있는 모양인지 스르륵 일어선 레프리콘이 옷을 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브라우니가 자리를 마무리를 지으려 술병을 주욱 들이켜 세울 때였다.


"...나도할거야."


툭-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하던 레프리콘이 별안간, 목에 건 총을 바닥으로 던진다.


"...?"

"...나도, 나도 사령관님이랑 섹스 할거야."


푸우-!


"케헥, 케헥! 켁!"

"...2056, 괜찮아요?"

"ㅇ, 왜... 왜 갑자기...?"

"굳이 신청할 필요도 없고."

"예에..."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그, 그러긴 한데..."

"좋아하니까."

"으음..."


허리 위로 들어난 그녀의 살갗이란 살갗은 죄다 붉게 물들어있었고, 혈관을 타고도는 취기에 요동치는 심장을 주체못한 나머지 거친 숨소리를 따라 어깨와 가슴팍이 연신 흔들리고 있었지만 브라우니를 내려다보는 눈빛 만큼은 핀을 박은 듯 움직일 줄 몰랐다. 설마 안주삼아 아무런 생각없이 던진 말들을 그대로 주워담고 있었을 줄이야. 혹시 진짜 고주망태가 된건 나 자신이고, 그녀는 맨정신인 게 아닐까하는 착각이 순간 브라우니의 머릿속마저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안되나요?"

"...진심임까?"

"그럼, 제가 언제 당신한테 거짓말한 적 있습니까?"


지잉-


브라우니가 여태 본 적 없을 정도로 산뜻한 레프리콘의 웃는 얼굴은 깊은 기시감만을 남긴 채 그녀를 지나쳐갔다. 이윽고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와 함께 옆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브라우니는 얼굴을 세차게 흔들더니, 홀리기라도 한듯 허리에 맨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큰일났다... 진짜 큰일이다, 큰일... 찾았다!"


그녀가 애타게 찾던 물건은 구형 통신용 단말기. 알코올 탓일까, 흥분 탓일까.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하나하나 꾹꾹 눌러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 와중에 옆방에서 부산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 하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초조함은 배가 되어갔다. 


"제발, 제발, 제발... 빨리 좀..."


정겨운 신호음이 십 수 바퀴 반복되었고, 드디어 충실한 구시대의 단말기가 귓가 너머로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를 불러들여줬다.






"여, 여보세요! 스프리건 씨! 빨리 시크릿 포인트로 오십쇼!! 지금 당장! 아, 술도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