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건전해요) - https://arca.live/b/lastorigin/21192630





02.




"나 왔어."


"......"




E110호로 들어선 스프리건의 눈에 양 손을 벽에 붙인 채 고개를 처박고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 브라우니가 보였다. 그녀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세를 풀지 않던 브라우니가 스프리건에게 대꾸도 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 의도를 알아 챈 스프리건은 입술을 쭉 내밀며 쏘아붙였다.




"어디 인사 좀 해주면 덧나?"


"지금 그럴 때가 아님다."




비록 원해서 왔다한들 자던 사람 깨워 이것저것 가져오게 해놓곤 고개 한번을 안돌리다니. 스프리건이 이것저것 담아온 백팩을 일부러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지만 브라우니는 여전히 본 체 조차 않고 무언갈 요구하는 손동작을 취할 뿐이었다. 밉상이라는 듯 베, 하고 혀를 내민 스프리건이 백팩에서 캔을 꺼내 손에 갖다 대자 그제야 브라우니가 구멍에서 눈을 뗐다.




"아주 빨려들어가게 생겼네. 대체 누구야? 아직 벽돌을 쓸 정도의 인물이 남아있었나?"




벽돌은 그녀들이 지니고 있는 구식 통신용 단말기를 부르는 은어였다. 벽돌은 시크릿 포인트와 관련된 사안에서 긴급을 요할 때, 신속한 연락 속에서도 비닉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통화기능만이 탑재되어 있으며 벽돌이 쓰이는 경우는 주로 사령관과 처음 관계를 맺는 '초범'이 대부분이었다.




"...크으, 한번 보십쇼. 그럼 아실 검다."




호기롭게 입가를 닦는 브라우니를 보고 스프리건도 백팩에서 캔을 하나 꺼내들어 맞은편에 앉는다. 잠도 별로 못 잔 마당에 술까지 마셔버리면 다음날 얼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안 봐도 비디오였지만 저걸 보고 입맛이 안 당길 수는 없었다.




칙-




"자, 짠."




캔을 기울이자 브라우니가 말없이 캔을 맞대줬고 첫 입을 떼려는 찰나, 스프리건은 문뜩 궁금해졌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작자이기에 브라우니가 그렇게 흥분해가면서 자기를 부른걸까. 그녀 본인이 시크릿 포인트를 발견한 위인이니 이 포의 직경보다 좁은 구멍으로 봐온 정사의 수가 그동안 사령관이 안았던 여자들 수랑 거의 비슷할텐데, 그렇게 닳고 닳은 양반이 이리도 술을 달달하게 마실 정도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예?”

“완전 애야?”

“대체 사령관님을 뭘로 보시는 검까...”

“어, 말하는 바이브...?”

“아무리 그래도 그게 말임까? 마지막 남은 인간님이신데.”

“짐작도 안 가는걸 어떡해! 그리고 사실상 틀린 말은 아닌데 뭘.”

“...딱히 둘 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함다. 다들 못 해서 안달이기도 하고 상병님도 좀 애같은 구석이 있으니.”

“그치? 너나 나같이 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고서야... 상병님?”



브라우니가 넌지시 던진 말을 곱씹던 스프리건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깨달은건지 작게 박수를 치듯 두 손을 맞잡았다.


“진짜? 진짜 그 양반이? 웬일이래, 이런 거 전혀 관심없어 보였는데.”

“그니까 제가 빨리 오라고 그랬잖슴까.”

“누가 술도 챙겨오라해서 바리바리 싸들고 오느라 좀 늦었거든?”

“아이, 덕분에 잘 마시고 있슴다.”

“하이고, 별말씀을. 그보다 왜 그리 흥분하신건지 이제 알만도 하네. 한솥밥 먹던 사람이 깔려서 앙앙대는 게 그렇게 좋으신가봐요, 일병님?”

“...안 드실껌까?”

“우선 나도 좀 보자구.”




스프리건은 거품이는 유혹을 잠시 내려놓았고, 장차 오르카 호 모두의 관계를 꿰뚫는다는 지극히 그녀의 흥미본위인 청사진을 더욱 더 크게 보여줄 단망경으로 눈을 들이밀었다.









03.




사령관이 막 얕은 잠으로 넘어가려던 때였다. 맥락없는 등장인물들이 맥락없는 상황에서 맥락없는 행동을 하는, 잠에 들기 바로 직전 흔히들 겪는 요란한 장면에 서서히 묻혀가던 도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똑, 하고 끝을 힘없게 살짝 끄는 듯 불규칙한 리듬에 저절로 온 몸이 움찔거렸고, 그 순간 에밀리가 제닉스를 타고 대기권 너머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하치코가 참치캔을 모조리 까 바다로 쏟아버리고있는 묘한 장면은 제닉스의 장대한 사출음과 함께 흩어지던 구름들처럼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똑똑 똑




이 오르카 호에서 함장이란 딱지가 붙은 후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고, 그간 ‘접했던’ 그녀들의 패턴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때론 과격하기까지 했다. 교육엔 끝이 없다며 책상을 점거한 것으로 모자라 밤의 교양도 책임지겠다며 채찍을 손에 쥐는 가정교사, 문을 열어주지 않자 거대한 가위로 철문을 찢어버린 탓에 난리가 나 고작 침실 문에 고밀도 역장을 두르게 만들었고 혼나던 와중에도 순수한 사랑의 결백을 외치던 정원사, 잊을 만하면 침대에 위상변이기를 설치해 이불에 싸인 상태 그대로 자기 앞으로 데려와 벗겨먹으려는 윤리의식을 싸그리 무시하는 어린이까지. 언급은커녕 상상도 힘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를 어떻게든 해보려는 맹목적인 여자들 천지인 이곳은 말그대로 기계장치 속 야생이었다.




똑 똑 똑




‘......’




그런 경우들을 볼 때 오밤중에 찾아와 말없이 노크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케이스. 저 문을 열어주고 나면 일어날 후사를 생각하면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매우 건전한 축에 속하는 것이었다. 횟수가 계속될수록 노크라기보다는 손등으로 문을 치듯 조금씩 둔탁해지는 소리에 묘한 수줍음이, 이젠 리듬이고 뭐고 없이 되는대로 울려대는 진동에서 오늘은 결단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오늘은 연기지도를 바란다며 들이닥쳐서는 연기는커녕 본연의 모습만 보여주고 돌아간 배우와 이미 거사를 치룬 후였지만, 새로이 얻은 몸뚱아리는 황홀한 피로감을 마다하기엔 너무 튼튼하다는 것을, 얼마 전 차례로 네 명이 찾아오는 바람에 아침까지 이어졌던 장렬한 연전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지잉-




“누ㄱ...”




툭 툭...




눈앞에서 문이 열렸음에도 깨닫지 못한 듯 늦은 밤 방문자는 노크를 계속하려 들고 있다. 제법있는 신장차이 때문에 그의 명치에 폭, 하고 박히는 작은 울림. 전후좌우 가리지않고 작게 왕복하던 붉은 머리꼭지는 그녀의 맹한 손을 누군가 멈춰 쥐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고,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당황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각하.”


“레프리콘?!”




말이 오간 건 동시였지만 어조는 확연히 달랐다. 비록 술의 힘을 빌렸다 한들 조금 발음이 풀렸을 뿐이지 의연히 다진 각오를 담아 담담히 내뱉은 그녀에 반해, 그녀의 몫까지 대신 놀라준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당황해 음까지 빠져가며 헛숨을 뱉듯 질러낸 그. 마치 눈과 눈을 맞댄 신경전이 오갔고 자신이 선승을 따냈다는 눈치인지 그녀는 턱을 당기고 길게 숨을 내쉰다.




“여, 여긴 웬일이야...”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말투의 그는 다 알면서 모르겠다는양 실없는 말을 던지고 그녀의 얼굴을 훑어본다. 목을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인 탓에 천천히 들춰져 내려가는 옆머리 사이로 보이는 볼은 여전히 벌겋게 드러나 있었고, 평소와 달리 둥글게 풀린 눈썹에 반해 커다랗고 딱 잡힌 동공은 변함없이 빨갛게 맑다. 또 역시나 변함없게 번듯이 선 콧잔등은 끝이 유난히도 색이 짙었고, 오늘따라 채도가 낮아보이는 매끈한 입술 사이로 생숨이 나들고 있는 듯 아스라이 보이는 아랫입술 안쪽이 번들거린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 마지막으로 빨갛다. 전체적으로 너무나 빨갰다.




“술 마셨어?”


“한잔, 했습니다.”




말 끝에 점을 찍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프리콘. 역시 문을 연 순간 확 풍긴 게 헛맡은 건 아니었던 거 같았다. 술을 마시고 별안간 찾아오는 것도 그에게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내방자의 정체가 드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물론 자신이 배에 오르기 전부터 그녀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 그녀만큼이나 안면을 튼 터울이 긴 바이오로이드는 손에 꼽았고, 지금은 이런저런 인물들 덕에 어쩔 수 없이 익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처음 그녀의 복장을 보았을 때 군복의 진정한 기능성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했으니 아예 그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취임한 후 얼마 안가 원정부대로 들어간 탓에 정기 귀환보고를 제외하면 맞닿을 기회가 얼마 없었고, 그녀 본인이 군인으로써의 모습에 충실했기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만 봐왔을 뿐 그러한 욕구를 바라던 기억이 없었다. 한때 스프리건이 뿌리고 다녔던 테이프 속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한 번. 술에 취한 딱 두 번을 제외하면 스토익한 그녀밖에 보질 못했다.




“좋은 밤입니다.”


“아, 응. 너도.”




그래도 본분을 잊지 않겠다는 듯 살짝 엉성한 각으로 경례를 하는 레프리콘. 그걸 본 사령관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냥 술을 먹고 찾아왔을 뿐이라면? 뼈속까지 군인다운 그녀이니만큼 다른 얘들과 기분 좋게 마신 김에 문뜩 생각이 나 인사만 하러 온 거라면? 평소의 그라면 그가 타고 있는 오르카 호에서 그러한 발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 자신이 모를 리 없었지만, 뜻밖의 손님의 등장에 놀란 것에 비해 잠이 덜 깬 건지 썩은 줄같은 상상력를 입에 담기로 했다.




“그래서 레프리콘, 밤 늦게 무슨 일이야?”


“...하러 왔습니다.”


“음, 인사를?”


“섹스입니다.”


“예, 그렇겠죠...”




혹시는 혹시일 뿐, 담백한 대답을 보니 역시 내기 전부터 틀릴 게 뻔한 오답이 분명했다.




“그래...”


“...안됩니까?”


“아니, 그...”


“......”




우물쭈물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난 모양인지 레프리콘은 아랫입술을 반 쯤 말아문 채 사령관을 응시한다. 아무런 표정변화없이 바라보는 눈매만이 점점 사나워지는 걸 느낀 그는 아직도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안되요?”


"그건 아닌데..."




술을 먹고 불쑥 찾아오는 경우는 대개 두가지로 갈린다. 우선, 연정을 쉬이 전하지 못해 삭이고 삭이다 결국 마음이 삭아버릴 지경이 돼 처방전이랍시고 들이붓다가 찢어진 틈이 생겨 분출해버리고 마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전자와 달리 기분좋게 잘만 마시다 별안간 흥이 올라 깊이 생각않고 기운이 가는대로 몸을 맡기는 것.




"아마 내일 눈 뜨면 후회할거야."




그는 후자밖에 경험해보질 못했다. 애초에 전자의 경우가 있다는 걸 인지조차 하지못한 상태였다. 마치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듯 매혹적인 객체가 넘쳐나는 이곳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간직한 방주임과 동시에 올바른 관념을 가지길 거부하는 자들이 너무 많은 밝은 소돔이었다. 아마 그가 한 영화광과 밤을 지샜던 날. 알코올에 의한 감정의 발현을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워도 너무 잘못 끼운 것일지도 모른다.




"......"




그는 나름 자신이 합리적인 대답을 했다고 느꼈다. 실제로 별다른 낌새없이 술기운에 찾아와 관계를 요구했던 그녀들의 경우 그의 말을 듣고 정말 제 방으로 돌아가거나, 결국 그대로 밀어붙이는 탓에 하긴 했는데 다음날 자기는 잘 마시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깨어보니 다른 누군가와 같은 이불에서 어깨를 맞고 있다는 걸 보고 이게 다 술 탓이니, 안 말린 사령관 탓이니 자책아닌 자책을 하는 경우가 썩 많았다. 애초에 그럴 의도로 마셔놓곤 끝나고 딴청부린다는 걸 그는 알 턱이 없었지만.




"알았어?"




레프리콘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곱씹는 중이며, 자신처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왜."


"그래, 돌아가면 물 많이 마ㅅ...?"


"그니까, 왜애."


"...?"


"...나는 왜 안되냐고."


"안된다는 게 아니라..."


"아니, 아니면 뭐?"




여전히 얼굴을 숙인 그녀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이어져나온 단어들은 그를 좀전과 비교도 안되게 당황시킨다. 상급자를 깎듯이 대하고 상대가 누가 됐든 존대를 잊지않는 레프리콘의 말이 짧은 것도 짧은 것이니와, 무엇보다 자신의 뜻에 한 번도 반기를 들지않던 그녀가 말꼬리까지 물어가며 명백한 자기주장을 늘어놨다.




"진짜 ㅆ......야!"




답답함을 못이기겠다는 듯 땅만 보며 자꾸 발을 구르기 시작하더니 결국 거친 말이 나오기 직전, 레프리콘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그녀가 사령관을 부를 수 있는 가장 건방진 호칭과 함께 그의 양 팔을 덥썩 부여잡고 힘껏 당긴다. 원래는 사령관을 끌고 올 요령이었지만 행동력은 전에 없을 정도로 끓어오르는 것에 비해 사지에 대한 장악력 역시 전에 없을 정도로 바닥을 찍고있던 탓에 그녀의 생각대로 되진 않았고, 결국 날아들듯 그의 가슴께에 박치기를 하는 형국이 됐다. 하지만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어쨌든 사령관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레프리콘은 그 부들부들한 천에 안면을 폭 박은 채 만족한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고, 중심을 잃을 뻔 했지만 당겨지는 순간 가까스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받아낸 사령관은 생전 처음보는 그녀의 격한 언동에 당황을 넘어 경악에 이르고 있었다.




"......"


"레, 레프리콘?"




어느새 그의 등에 팔을 두르기까지 한 레프리콘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면서 천의 촉감을 즐기는 듯했다. 슬슬 어깨에서 손을 떼야하나 고민하던 사령관은, 그녀가 팔을 깊게 맞잡아 안을수록 복근에 가해지고 있는 묘한 압력도 덩달아 쌔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방금은 호되게 놀란 탓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레프리콘의 팔과 그의 등이 닿는 면적이 늘어남과 동시에 부드러운 그 무언가가 배를 포근하게 감싸는 면적도 늘어나기 시작해 그의 복근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저기, 슬슬..."


"아직."




완전히 자기의 세계에만 빠져있던 건 아니었는지 대답을 하긴 하는 그녀였지만 사령관의 한계는 다가오고 있었다. 옷에 얼굴을 부비는 건 질려버린 모양인지 사령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연신 깊은 숨을 들이내쉬는 레프리콘. 그녀의 폐부가 가득 차고 돌아가기를 반복할 때마다 그녀의 가슴팍도 올라가고 내려가기 마련이었다. 사령관 또한 배에 맞닿은 두 개의 압력이 임계점에 달하고 느슨해지길 반복함에 따라 심장이 빨라졌다 느려졌지만, 정작 고간의 해면체는 임계점을 모르고 치솟고있었다. 안된다. 이 이상 강직도를 높일 순 없었다. 슬슬 골반을 더 뒤로 뺐다간 알비스와 함께 본 고전만화영화에 나오던 말썽쟁이 고양이의 사촌들처럼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우울한 상상에 잠기기로 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야."




최근 그에게 있어 가장 아픈 기억이었던, 추기경을 배알하고자 했던 때를 상상하던 도중이었다. 사령관이 상념에 빠지느라 눈치를 채지 못했을 뿐 이미 일련의 행위를 멈추고 잠잠해졌던 레프리콘이 그의 옷을 꽉 쥐어당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고, 똑같은 호칭으로 운을 땠지만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이어진다.




"내가 너 좋아하면 안돼?"


"어?"


"걔네보다 나랑 훨씬 오래 봤잖아...."


"레프리콘...?"


"...적어도 좋아하게만이라도 해줘."


"..."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는 건 싫단말야..."


"......"


"그건 너무..."


"레프리ㅋ"


"너무, 비참하잖아요..."




너도 나를 좋아해라가 아닌 너를 좋아하게 해달라. 감정의 일방통행을 고하는 듯한 말조각들은, 그녀에게 있어 애절한 고백의 음표라기보다는 이기적인 투정의 찌꺼기에 가까웠다. 먹처럼 말라붙어 찌든 감정을 벗겨 토해낼 수록 자신의 속내가 드러나고, 그 낯짝이 여전히 검기만 한 것같아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을 통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눈꺼풀과 맞닿은 천이 뜨겁게 젖어가는 것 또한 부끄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멈추고싶지 않았다.




"나는 각하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야 각하는 한 명 뿐이니까. 멸망해버린 세상에서 단 한 명 남아버린 게 각하라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나만 그런게 아니란 것도 알고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좋은 사람인걸. 그녀들도 본연의 감정에 솔직했을 뿐 나쁜 건 없고, 설령 지금 또 다른 인간님이 나타난다한들 해도 모두 나처럼 각하 곁을 지키고 싶을 게 뻔하잖아. 다 내가 나쁜거니까. 그러니 더더욱




"그냥, 잠시만 이대로..."




나를 좋아해달란 말은 할 수 없잖아.




'......'




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답을 바라는 것도 무언갈 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닌, 일종의 혼잣말에 가까웠던 일방적인 통보. 하지만 감정이란 언제나 일정한 상호작용을 동반하기 마련이었고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령관의 속에서도 큰 풍파가 몰아치는 중이었다. 동의를 구하는 그녀의 첫 마디에는 얼떨떨함을 느꼈지만 뒤이어 던져지는 말들이 주는 묵직한 무게감은, 성격상 남한테 말조차 못한 채 그녀 혼자 오롯이 가슴 속에 담아 짓눌리고 있었을 것이란 걸 느끼게 해줬다. 뒤이어 그의 품안에서 뱉어진 애처로운 푸념들은 반쯤 웅얼거리듯 먹혀버렸음에도 흩어지기는커녕 축축한 목소리는 그의 피부를 타고 더 선명히 들려올 뿐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오랜시간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갈 곳을 잃었던 그의 손이 드디어, 거친 숨과 함께 간간이 떨려오던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끌어안는다.




"...!"




불현듯 자신을 감싼 낯선 감촉에 놀란 듯 움찔거린 레프리콘이었지만 이내 그 포근함을 받아들여 더욱 깊게 얼굴을 묻는다. 천천히 어깨와 뒷머리를 토닥이길 반복하는 손길에 몸이 길들여지는 것처럼, 레프리콘은 마음은 안정감을 찾아가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뒷머리를 쓸어만져 줬을까, 그의 등을 감싼 팔이 느슨해지며 레프리콘이 천천히 고개를 뗀다.




"진정 좀 됐어?"


"...추태를 보여서 죄송합니다."




여전히 푹 숙인 채 조금씩 히끅대는 레프리콘. 한 쪽 팔을 풀어 눈가를 닦고는 도로 마치 원래 제자리라는양 다시 사령관의 허리에 두른다.




"술은 진작에 깬 것 같고."


"...네."


"레프리콘, 고개 좀 들어봐."


"......"




사령관의 말에 망설이던 레프리콘은 방금 전 했던 동작을 다른 쪽 팔로 재차 반복하고는 마지못해 든다는 듯 얼굴을 들었다.




"술 깬거 맞나? 눈 쪽이 아직 빨간데."


"윽, ...우, 울어서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마따나 술기운은 이미 가신 듯 눈가만 벌겋게 물들어있을 뿐 평소에 보던 혈색 그대로였지만, 눈물에 머리카락이 엉겨붙고 볼을 따라 남아있는 물자욱 때문에 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디 가진 외모는 어디 가지 않는건지 저도 모르게 콩깍지가 씐 건지 장난스런 농에 발끈하는 그녀가 그의 눈엔 그저 아름답게 보일 뿐이었다.




"역시 솔직하구나."




사령관이 머리를 감싼 팔을 풀어 그녀가 미처 못닦은 눈물을 엄지로 훔쳐내주고는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따라 원을 그리듯 머리를 정리해준다. 사령관의 손가락이 눈 앞을 지날 때마다 그쪽 눈을 살포시 감고 뜨는 그녀에게 그의 손길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볼에 붙어있던 머리를 다 떼어낸 후 이번엔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 엄지를 움직여 볼을 살살 훑는다. 엄지가 눈 아래서 왔다갔다 하는 걸 묘하게 힘이 풀린 눈으로 쫓던 레프리콘은, 대충 물자욱을 다닦아낸 그가 엄지의 움직임을 멈추자 시선을 바꾼다.




"......"




볼 옆으로 살짝 보이는 엄지를 쭉 타고 튀어나온 팔목뼈로, 팔목뼈를 지나 두터운 전완을 타고 팔오금으로, 팔오금을 건너 반팔 위로도 태가 나는 단단한 어깨로, 잘 뻗은 승모로, 남성미가 맺힌 목젖으로, 각진 턱끝으로, 광대로, 눈동자로, 눈동자로, 눈동자로, 눈동자로,




"자, 끝..."




자국을 닦는 데 정신이 없던 사령관이 드디어 그녀가 보내는 열렬한 시선을 느낀다. 아마 난생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 그녀의 살짝 탁해진 그녀의 동공.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욕망의 마력에 홀린 것인지 그는 볼에서 손을 떼는 것보다 천천히 쓰다듬는 것을 택했다. 이에 레프리콘은 마치 주인에게 마킹을 하는 애완동물처럼, 고개를 기울여 매우 천천히, 하지만 진한 움직임으로 볼을 비벼댄다. 곧 그의 애정어린 손길에 응답하려는 듯 그녀가 양 팔을 풀어 그의 손을 포개어 잡고는 크게 숨을 뱉는다. 볼과 숨에 닿은 손바닥과 팔이 불처럼 뜨꺼웠다.




"...각하."




그의 손에 가있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그의 눈을 향한다. 힘빠진 목소리가 귓바퀴로 달큰하게 감겨듦과 동시에 치켜뜬 붉은 눈동자와 재차 마주친 순간, 그는 그의 안에서 충동이 치달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하느라 잊고있던 감각이 다시 열리는 걸 느꼈다.




"각하는 진정을 못하신 모양이네요."


"...인정합니다."




레프리콘의 점입가경이 진행되된 순간, 사령관은 허리를 뒤로 빼는 걸 잊고있었을뿐더러 레프리콘과의 물리적 접촉을 계속되는 상태였고 좀전부터 계속되고있는 야릇한 이벤트덕에 결국 그의 고간은 하의의 탄력한계치가 무색할 정도로 우뚝 솟아 그녀의 가슴을 넘볼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하시겠어요?"


"아하하..."


"...에잇."


"으윽...!"




술기운도이 아닌 맨정신으로, 이런 무드 속에서 부끄러움까지 무릅쓰고 먼저 권했음에도 멋쩍게 웃는 사령관이 맘에 안들었던 레프리콘은 그의 손을 놓은 뒤 그의 양 허리를 붙잡고 몸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까 나눴던 마음 따뜻해지는 포옹이 아닌 몸을 비벼 무언가에 자극을 주려는 의도가 명백한 몸동작은 지금의 그에겐 즉효성이었는지 그 거대한 몸이 움찔거리는 걸 넘어 덜컹거리는 걸로 보였다.




"하실거냐구요, 섹스.."


"그야 물론..."




불의의 습격은 여러 장의 직물을 사이에 뒀음에도 불구하고 혈액이 가득 찬 해면체엔 상당한 자극이었는지 저절로 온몸의 근육이 조였다 풀리는 짜릿함이 말단까지 빠르게 퍼졌고, 그 해면체 사이 분비선으로 무언가가 찔끔, 들어차는 듯한 감각을 확실히 느꼈다.




"후후..."


"근데 진짜 괜찮겠어?"




그가 정사에 들어가기 전 상대가 누구든 치레로 건내는 말이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걱정의 의미를 조금 담고있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온거니까요. 그런 기분이고."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는 그녀를 따라 웃었고, 돌아서서 카드를 갖다대자 방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