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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1xx년 2월 10일

내 평생 걸어다니는 해골, 버섯 인간에 칼 든 생선까지 봤지만, 쇠로 된 고래 안에 들어간 건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빛이 나를 시험하는 건가?


안에 들어가자 반반한 여자들이 바글바글 모여 날 구경했다. 호기심 반, 경계 반이었다. 그녀들은 종류별로 모습이 겹쳤는데, 영지에 있을 때 용병들이랑 다른 게 없어서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졌다.


함장실에 들어가니 사령관이란 자가 날 정중히 맞이했고 (호위로 안경을 쓴 하녀가 장총을 들고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 우리 둘은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1. 지금은 21xx년으로, 철충이란 괴물들 때문에 인류가 오래 전에 멸망했다.

2. 여자들은 모두 바이오로이드란, 만들어진 가짜 인간이다. 이들은 진짜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이 있지만,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3. 자신은 유일한 인간으로, 철충을 몰아내 인류의 재건에 힘쓰고 있다.


아직도 그 말을 믿기 힘들지만, 그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깨어나니 수백년이 지난 지 오래. 믿을 리가 없지.


그는 빈 방이 부족하단 이유로 날 철재 생산소라는 곳에 데리고 간 뒤 침낭만 덜렁 주었다.

여기에 온 게 최악의 선택이 아니길 빈다.


6. 21xx년 2월 11일

아침부터 날 찾아온 건 처음 만난 넷이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꽤 호의적인 게 고마웠다. 그들은 날 식당으로 데려간 후 식사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질문을 해댔다.


야영 때 물어보지 못한 게 산더미라며. 비번이었던 그들은 내가 영지에서 겪은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식사가 끝난 후에도 흥미롭게 들었다. (빨간 머리는 도중에 화장실로 튀었지만)


사령관과 달리 제법 내 말도 믿어주더라. 이야기를 계속하다보니 어느새 브라우니만 30이 모여들었고, 내 농담에도 자지러지게 웃으며 내일 또 이야기해달라고 졸라댔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군.


7. 21xx년 2월 15일

안락한 생활에 찌들어있다 보니 일기를 쓰는 것도 잊을 뻔했다. 생각해보니 이런 습관을 들인 것도 별로 안 됐지만.


오늘 아침, 철혈의 레오나라는 년이 나에게 오르카 호에서 내리길 권유했다. 요안나와 비전투원이 주둔하고 있는 섬은 여기보다 더 쾌적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인간이 한 곳에 여러 명이 있으면 군 명령에 혼선이 있을 수도 있다고. 경어였고, 논리도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일종의 경고로 느껴졌다.


사실 브라우니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특히 간부들)은 대부분 날 반기지 않는 눈치긴 했지만서도

(휘갈긴 철자 한 줄)

이렇게 쓰레기장에 처박혀 있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낫지. 결단을 내려야겠다.


+ 두 번째 인간님은 되게 특이하신 분이지 말임다. 언행은 불량하고, 저희들을 종종 한심하다는 듯이 보시는데, 기록 속 구인류님들처럼 저희들을 딱히 차별하지도 않고 친구처럼 대해주지 말임다.


무엇보다도 입담을 듣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데, 특히 걸어다니는 생선과 거대 농게 이야기는 정말 안타깝지 말임다. 사람을 공격해서 위험한데다가 살코기마저 오염되서 먹지도 못한다니 너무 불합리한거 아닙니까.


아무튼 내일은 폐허가 된 유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는데, 잠이 안 올 정도로 기대되지 말임다. - 브라우니 46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