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뽀끄루와 봉봉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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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도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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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령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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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오르카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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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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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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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아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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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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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전에 술에 취해 복도를 걸었던 때가 있다.

  

  그때의 걸음걸이는 퍽 나의 인생과 닮아있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



  *

  “주인님… 괜찮으세요?”

  

  “끄으으…”

  

  사령관이 신음을 흘리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술을 먹다 쓰러졌나? 얼마나 마신 거지? 숙취에 눈앞이 어질거렸다. 고개를 드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리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리리스?”

  

  “얼마나 술을 드신 거에요, 주인님? 어휴. 방에서 술 냄새를 빼려면 고생 좀 하겠네요.”

  

  리리스가 건네는 물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물을 마신 사령관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사령관의 모습을 본 리리스가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줍기 시작했다. 술 냄새 섞인 한숨을 토해낸 사령관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혼자 계셨나요?”

  

  “그러면 혼자 있지 누구랑 같이 있어. 어우, 말하는데도 머리가 울리네.”

  

  “들어올 때 문이 열려있길래… 주인님께서 문을 여시진 않았을 것 같아서요. 혹시 누구랑 같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순간 사령관의 머리에 붉은 머리의 소녀가 스쳐 지나간다.

  

  메이.

  

  쭈뼛거리며 자신에게 말을 걸던 소녀.

  

  눈물 맺힌 눈으로 뒷걸음질 치다 방을 뛰쳐나간 소녀.

  

  사령관이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메이가 내게 뭐라고 했지?

  

  [사령관은… 너는, 나를 사랑해…?]

  

  나는 메이에게 뭐라고 했지?

  

  [아니.]

  

  사령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사령관을 보며 리리스가 걱정스러운 눈을 한다.

  

  “주인님?”

  

  “미안해 리리스. 잠시 여기에 있어.”

  

  사령관이 방을 뛰쳐나갔다.



  *

  차가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갑판에 오른 사령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판 저 끝에 붉은 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사령관의 발소리에 메이가 뒤돌아보았다.

  

  “봐! 사령관! 보름달이 크게 떴어!”

  

  메이가 방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조금 부은 눈과 눈물 젖은 얼굴을 하고서.

  

  “메이.”

  

  “우리 만난 지도 꽤 오래됐지?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잖아.”

  

  메이가 억지로 웃어 보인다. 다 이해한다는 듯이.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런 그녀의 모습이 쓰라릴 정도로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동안 즐거운 일도 많았고… 싸운 일도 있었지만… 나는 그저…”

  

  “메이.”

  

  사령관이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오지 마, 사령관!”

  

  메이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사령관이 멈춰 선다. 메이의 뺨에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나 아직… 얼굴이 엉망이라…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메이가 눈물을 닦아낸다. 그녀의 말이, 행동 하나하나가 사령관의 마음을 새카맣게 태워간다.

  

  “나는 솔직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으니까… 네가 나를 미워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런 말 하지 마.

  

  “하지만…”

  

  사령관이 마른 침을 삼켰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너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메이.”

  

  그저, 내가 겁쟁이일 뿐이니까.

  

  메이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든다. 작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순간 메이가 비틀거린다. 아직 열이 심하다. 사령관실로 가는데도 수십 번을 넘어질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런 몸 상태로 이렇게 오랜 시간 밖에 있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비틀거리는 메이가 급하게 난간을 붙잡았다.

  

  순간, 메이가 붙잡은 난간이 삐걱였다.

  

  [그때 부딪힌 난간이 지금 많이 흔들리는 것 같거든.]

  

  삐걱거리던 난간이 꺾이며 부러졌다. 떨어지는 난간과 함께 메이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메이!”

  

  하늘하늘 흩날리는 붉은 꽃이 빛이 닿지 않는 곳 너머,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

  붉은 머리의 작은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메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책을 읽고 있는 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메이가 깨어난 것을 본 칸이 웃으며 책을 덮었다.

  

  “아, 깨어났군.”

  

  메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무거웠다. 마치 지나치게 오래 잠들었다 깨어난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사흘을 누워있었어. 닥터가 금방 깨어날 거라 말은 했지만 역시 몸이 약해져 있던 탓인지 시간이 조금 걸렸군.”

  

  “…사흘?”

  

  메이가 기억을 더듬어 가장 최근의 일을 떠올린다. 갑판 위에서 사령관에게 소리치다가, 어지러워 난간을 붙잡고…

  

  “난간이… 부러져서…”

  

  “떨어졌지. 지난번 별의 아이를 피하고 정박한 이후로 난간이 계속 문제였다는군. 함 내 방송으로 전달했지만 그대가 병을 앓았을 때라 못 들었던 걸 거다.”

  

  칸이 메이에게 마실 것을 건넸다. 한입 마시자 온몸이 따듯해졌다. 메이가 칸을 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사령관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대가 물에 빠진 이후로 거의 노이로제에 걸린 듯이 불안해했거든. 사실 사령관의 상태도 멀쩡한 편은 아니었다만.”

  

  사령관이 다쳤다고? 메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칸이 덮은 책을 침대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 바다에는 유빙이 떠다니니까. 떨어지는 그대를 붙잡아 같이 바다로 떨어졌어. 그 와중에 유빙에 부딪혔다. 머리가 두개골이 보일 정도로 크게 찢어졌지.”

  

  “사령관이?! 괜찮은 거야?! 두개골이 보일 정도면 크게 다친 건데! 도대체 왜…”

  

  “일전에…”

  

  불안해하는 메이의 말을 칸이 끊었다.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칸의 성격을 알기에 메이도 잠자코 칸의 말을 들었다.

  

  “사령관이 설원에서 작전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무어냐고 내게 묻더군.”

  

  “그건 네가 아니라 발할라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그쪽이 설원 작전 전문이잖아.”

  

  “설원 전문이니까 그런 거다. 설원 지역에 익숙지 않은 사람의 충고를 듣고 싶다는 것이겠지.”

  

  칸이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와 전투 화장을 지운 단아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사령관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인 걸까?

  

  “그때 나는 빙판 위를 걷는 것을 주의하라 했다. 빙판 위를 걷다 빙판이 깨져 물속으로 빠지면 순식간에 심장마비가 오게 되거든. 실제로도 그런 사고가 자주 있었고.”

  

  극지방의 물속. 칸의 말에 메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 말이 뇌리에 깊숙이 남았던 모양이야. 사령관이 걱정되어 달려온 리리스가 그대들을 건져내고 닥터에게 그대가 무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그 남자는 거의 반쯤 미쳐있었다. 닥터에게서 그대가 괜찮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듣고 나서야 치료실에 갔지. 치료실에 갔다는 말도 적절치 않군. 무사한 그대 얼굴을 봐야겠다며 난동을 피우다가 우는 리리스의 얼굴을 보고 마지못해 갔으니.”

  

  칸의 말에 메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사령관의 모습이라니. 그는 모두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언제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일을 넘겨왔다. 진중한 모습조차 보기 힘든데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당황해 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제는 어찌할 수도 없는, 그저 안쓰러운 감정일 뿐이니까.

  

  메이의 서글픈 표정에 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전부 다.”

  

  그렇게 말한 칸이 메이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웃는 칸의 모습을 본 메이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 그러셔! 그것참 좋으시겠네! 라이벌 한 명이 탈락했으니까! 적어도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나는 그저…!”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않기로 했는데. 눈물이라는 녀석은 주인의 마음도 모르고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뻥 뚫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얼마 전 아스널도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뭐, 아스널은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말하는 수준이지만.”

  

  메이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칸을 바라보았다. 멍한 메이의 얼굴에 칸이 말했다.

  

  “설마 이 오르카 호에서 그대가 처음 고백한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메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은연중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겠지. 그런 메이를 보며 칸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스널뿐만 아니다. 마리도, 홍련도, 레오나도. 용도 넌지시 사령관에게 고백했지. 대장급 인물 중에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던 것은 나와 그대뿐이라는 것이다. 아니, 이제는 나뿐이군.”

  

  결국, 자신은 늦은 것이구나. 그저 바보같이, 그저 어리석게. 소녀처럼 꿈만 꾸다가 나의 사랑을 놓쳤구나.

  

  “하지만 단 한 명도 사령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칸의 말에 메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은 싫지만, 은연중에 생각했다. 용 같은 키도 크고 몸매도 좋은 사람을 보며 자신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바로 저런 사람이겠구나.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져 시선을 돌려왔다. 작고 어린아이 같은, 그저 소녀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마저 사령관에게 거절당하다니.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전에 그와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때도 아마 누군가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 같군. 아마 레오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레오나에게 고백받은 사령관은 그날 저녁도 메이에게 고백받았던 날처럼 술을 들이켰다. 우연히 사령관실 앞을 지나가던 칸은 그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겁쟁이야.”

  

  책상 위의 빈자리보다 술병이 많아질 때 즈음, 그가 가슴 속 가장 깊숙이 있던 한 마디를 꺼내 들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고백받은 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 이 말인가?”

  

  “그 말대로.”

  

  칸의 빈 잔에 술을 따라준 사령관이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켰다.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양의 술을 단숨에 들이켠 사령관은 병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후 다른 술을 꺼내 들었다.

  

  “지나친 과음은 좋지 않아. 오늘은 이만 하는 게 좋겠군.”

  

  “요즘은 참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들어. 상투적인 말이 아닌, 정말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술을 자제하라는 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 사령관이 말했다. 술을 그만둘 생각은 없는 거로군. 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받아들여 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대가 싫지만 않다면.”

  

  “싫기는.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준다는데 싫을 리가. 오히려 눈물이 날 만큼 기쁘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싫지 않아서,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서. 그게 문제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주위의 시선을 살필 겨를도 없을 정도로 한없이 빠져들게 될 거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상대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줄 정도라면 더더욱. 그것이 나쁜 점이 있나?”

  

  “다른 사람들은?”

  

  사령관의 말에 술잔을 집으려던 칸의 손이 멈추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 무슨 일을 하든 그 사람을 우선하게 될 거고.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상처받는 사람들은? 내가 답해주지 못하는 그 수많은 마음은?”

  

  오만한, 허나 그의 입장을 알게 된다면 뼈저리게 공감하게 될 그의 깊은 고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대가 그 누구를 사랑하든 모두가 이해하겠지. 모두가 그대를 사랑했고, 그대는 사령관이니까.”

  

  “그래. 그 빌어먹을 사령관. 나는 사령관이니까. 편애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 모두를 헤아려야 하는 자리이니까.”

  

  언젠가 누군가 그랬지. 사령관은 사령관이라는 직책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는 우리 앞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아무리 무신경한 그라도 수천의 생명을 짊어지는 사령관이라는 자리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사랑을 시작하고, 누군가를 편애하고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게 할 거라면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생각했지.”

  

  그 부담감이 이런 식의 부담감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줄 수 있지.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것이 잠자리라고 할지라도.”

  

  술을 한껏 들이켠 사령관이 병을 내려놓았다. 붉게 물든 얼굴로 천장을 바라본 그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랑해 줄 자신은 없어. 나는 사랑할 자신은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상처입힐 자신은 없으니까. 내가 우유부단하고, 겁쟁이니까.”

  

  사령관이 술을 입가로 가져갔다. 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사령관의 술을 뺏어 들었다. 사령관이 반쯤 감긴 눈으로 칸을 바라보았다.

  

  “사설이 긴 걸 보니 확실히 취하긴 했나 보군. 미안하지만 술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칸이 취한 사령관을 일으켜 침대로 데려갔다. 스스로도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아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얌전히 따랐다.

  

  그를 침대에 눕힌 칸이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대에게는 그대만의 생각이, 사정이 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오르카 호의 모두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아닌가 싶군. 그대가 누구를 사랑하든, 우리는 받아들여 줄 수 있으니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칸이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그대의 생각이 바뀌길,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를 빌지.”



  *

  “그게 뭐야.”


  칸의 이야기에 메이가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그에게는 사랑할, 사랑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거지. 그것이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이 조금은 기쁘기도, 슬프기도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 고작 그런 이유로? 누군가를 상처입히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도대체 왜… 그건… 그건 그냥…”


  “겁쟁이지. 그가 말했듯이. 하지만 그런 그를, 우리는 사랑하지 않나?”


  칸의 상냥한 말에 메이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언제나 모두를 위해 행동하는 그 바보 같은 사람을, 우리는 사랑한 것이니까.


  "너는 화나지 않아? 너는 사령관에게 고백하지도 않았잖아. 그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면서. 하지만 사령관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가 먼저 내게 다가오는 일은 아마 근시일 내에는 없겠지. 하지만 그가 자신의 생각마저 넘어서고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준다면, 그만큼 기쁜 일이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다."


  물론, 내가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여 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칸이 덧붙였다.


  “나를 비롯한 대장급들은 사령관의 말을 듣고 모두 그를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위한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그의 사랑을 받을 일은 없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을지 몰라. 사령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겁쟁이였던 것이겠지.”


  “왜 나는? 나는 왜 몰랐던 거야?”


  “그건 사령관의 부탁이었다.”


  [메이에게는 비밀로 해줘.]


  잠이 들기 전, 사령관은 떠나가는 칸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녀석은, 메이 만큼은 몰랐으면 해.]


  칸의 말이 끝나자마자 메이가 방을 뛰쳐나갔다. 메이가 떠나가고 홀로 남겨진 칸은 미소 지으며 차를 마셨다.


  “그래. 가장 먼저 그 남자의 사랑을 얻는 사람은 그대 같은 사람일지 모르지.”



  *

  메이가 사령관의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불안한 표정으로 서류를 바라보던 사령관이 문을 열고 들어온 메이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메이! 깨어났…!”


  메이가 다가오는 사령관을 밀어냈다.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그녀가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이야?”


  그 한마디에 사령관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 한 발짝 물러난 사령관이 덤덤히 말한다.


  “그래.”


  그의 목소리에 메이가 눈물을 흘리며 사령관의 뺨을 올려붙인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피할 자격 따위 있을 리 없을 테니.


  “어쩜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있어! 우리를 위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너는 다른 모두를 상처입힌 거야! 네가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너는 우리에게 사랑하기를 포기하라고 강요한 거나 다름없어!”


  분노에 찬 메이의 외침에 사령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옳은 말이니까.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모두에게 상처받기를 강요한 것이니.


  다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사령관의 생각을 이해하리라. 어른이니까. 어느 정도 그의 생각에 공감하며, 타협하고, 받아들이고, 포기할 것이다.


  허나 메이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른이 아닌, 소녀인 그녀는.


  그래서 메이가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순수하게 사랑하기를,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에게 가장 버거웠으니까.


  메이가 사령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한다. 애달픈, 허나 여태까지와는 달리 빛나는 눈으로.


  메이가 그녀 마음속 가장 고운 소리를 골라내어 말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아.”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그를 만난 이후로, 그에게 빠져버린 이후로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단 하나의 말.


  사랑했어


  사랑해


  앞으로도


  “사랑할 거야.”


  눈물을 머금고 사령관을 바라보는 메이의 말이 그의 가슴에 절절히 와 닿았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던, 그건 너의 생각이야. 너의 생각으로 내 생각이 바뀌길 바라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날은 오지 않아.”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메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려 뻗는 사령관의 손을, 그녀가 조용히 밀어냈다.


  “나는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길 바라. 내 뺨에 흐르는 눈물 닦아주고픈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남들보다 당당해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하지만 속은 누구보다 여리고 소녀 같은.


  그럼에도 그 여린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심지는 그 누구보다 곧은.


  그저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나의 소녀.


  너는 언제나 나의 옆에서 당당하게 빛났다. 여리면서도 굳은 너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나약한 스스로가 증오스러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스스로가 증오스럽다 하여도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기에. 나는 스스로를 부정해도 너는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너에게 빠져버린 이후로 내게 세상은 너의 색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그 색이 어찌할 수도 없이 사랑스러워.”


  더없이 간절한, 살아오며 이렇게 간절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의 한마디.


  “그러니 너도 나를 사랑해줘.”


  사령관은 말없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눈물의 맛이 나는 키스.


  더없이 마음이 와 닿는 입맞춤을.


  붉은 머리의 소녀는 그 날 처음, 사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