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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어지간히 격했거니라고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을 만큼 난리가 난 침대.

업무 때문에 피치 못하게 일찍 자리를 뜨게 되었다면서 걱정하는 말이나 연담 등이 짤막하게 적힌 사령관의 메모.

일어나면 원터치로 조리되게 세팅이 끝나있는 아침 식사 세트.

마지막으로, 온 몸에 사랑받은 흔적이 그대로 남은 자신.


참 그린듯한 정사 후의 광경 속에서, 리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는 팔을 억지로 들어다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을 문지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이대로 가면 난 죽는다.

분명히 사령관과의 야스를 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했긴 했지만,

어느 의미로 지금의 상황은 처음의 희망 이상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사막에서 물 한 모금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호수에 던져넣어지면 빠져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 소완이 아다 한 번 때더니 갑자기 해탈하는 게 요상하다 싶었는데 지금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음.

도무지 혼자서 감당할 자신이 안 생기니까.


반면에 승부 따위가 아니라 서로 힘껏 사랑했을 뿐이라는 아스널 선생님의 명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음.

'서로' 사랑한다는 건 아무튼 마주볼 수 있을 만큼 시선의 높이가 비슷하기라도 할 때 성립하는 소리지, 지금의 자신과 사령관처럼 차원이 달라져 버리면 수가 없으니까.


사실 해결법은 정말로 간단했음.

사령관 성격상 진심으로 거부하는 상대를 억지로 밀고 들어오진 않을 게 분명하니까, 한 마디만 해도 충분하리라는 건 알아.

문제는 '막상 사령관이 다가왔을 때 밀어낼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을 경우 허세로라도 긍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음.

옆에서 보면 염장질을 해도 참 개소리로 한다고 극혐하는 표정을 짓고도 남을만한 소리였지만 리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진지했어.


결국 장기적으로 분담할 누군가를 찾거나, 자기가 어떻게든 레벨업하거나인데...

알렉산드라라도 찾아가봐야 하나 고민하면서 리제는 멍하니 식사를 마친 다음 비척거리면서 씻고 나옴.

분명히 신체적인 대미지는 진즉 회복했을텐데도 어쩐지 머리가 멍하고 주변 상황이 잘 안 들어온다 싶은 것도 물로 한 번 씻어내니까 훨씬 상쾌해졌지.


적어도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자기한테 고정되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는 시선들을 알아챌 정도로는.


포티아랑 레프리콘이 얼굴을 붉힌 채 속닥이다가 시선이 맞는 순간 움찔거리며 시선을 돌린다거나.

함교까지 안내해주면서 수상할 정도로 친절하게 부축을 해주겠다는 세이프티나.

좌우좌도 아닌데 눈에서 빛이 나올 만큼 바라보다가 눈치보인다 싶으면 대놓고 휘파람 불면서 딴청 피우는 브라우니들이나.


하나하나를 목격할 때마다 쌓인 의심은 오늘따라 새빨간 얼굴로 자신한테 억양 없는 인사를 한 다음 도망치듯 돌아선 그리폰을 보는 순간 확신이 되어버리고, 리제는 바로 복귀하겠다는 계획을 급히 수정해 다시 한 번 자기 방에 뛰어들어서 이불 - 그 사이 뽀송뽀송한 새 것으로 갈아져있는 시점에서 대미지가 두 배가 되고야 만 - 에 파묻힌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깨달아.


자신의 적은 사령관과의 야스뿐만이 아니라

오르카 호라는 좁아터진 사회 내에서의 집중된 관심이라는 고도의 수치플레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   *   * 


사령관이랑 리제의 관계는 리제는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던 사령관의 상상보다도 핫한 이슈였음.

그냥 사령관 관련인 시점에서 관심을 모으는 것도 당연한데 아직은 탈론허브도 스틸라인 온라인도 들어오지 않은 오르카였으니 더더욱 그랬어.

콘스탄챠를 위시해 좀 가까운 사람들은 그나마 리제에 대한 호의 섞인 우려라도 있었지만 브라우니 네트워크로 내려가면 그야말로 오늘의 일일드라마 같은 최고의 구경거리였을 뿐임.


그런데 그 상황에서 사령관이랑 리제가 해버렸다?

이건 못 참지.


사령관이 리제의 방을 찾아갔을 때 이미 속보가 퍼져 있었고, 거사를 치르는 것이 확정된 다음에는 우연히 방 주변을 지나가는 바이오로이드 수가 많이도 늘어났고, 아침나절이 되어서야 사령관이 나왔을 때는 이미 희미하게 새어나오던 신음이 막판에 사령관에 대한 열렬한 고백으로 바뀐 건을 가지고 빈약한 상상력으로도 삼시세끼 뚝딱할만한 썰이 잘도 퍼져나갔다.

다만 비밀의 방이나 함장실이 아니라 리제의 방인 바람에 시크릿 포인트가 개발되지 않은 건 참으로 유감이다.


라는 2056번 브라우니의 말을 듣고 리제는 생각했지.

만약 시크릿 포인트가 뚫려있었으면 지체없이 오르카 호에서 바닷속으로 다이브해버렸을 테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아니, 사실은 당연히 고려했어야 했던 일이긴 해.

이벤트 스토리마다 튀어나오고는 하는, 하렘물 치고도 노골적인 야스 토크같은 걸 생각했을 때 첫빠따를 끊으면서 입방아에 안 오르기를 바라는 게 무리고,

그나마 아직 탈론페더가 복구되지 않은 점이나 직접 목격당하지 않은 건 다행인 편이다.

...라고 생각은 하는데 이성적으로 이해한들 감정적인 충격은 당연히 별개였고. 사령관의 메모에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된다고 적혀있기도 했으니 그냥 그 날 하루 전체를 얌전히 쉬는데 쓰기로 함.

겸사겸사 그나마 오르카 호의 마지막 양심으로 정확한 전후사정은 모르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찾아온 좌우좌랑 놀아주면서 멘탈케어도 어느정도 성공은 하고, 다음 날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한 상태로 함교에 도착할 수 있었음.


그리고 스카디나 콘스탄챠 등등과 사령관이 가상현실 접속 방식에 대해서 논의하는 걸 기록하다가 깨닫지.


...어? 5지 끝났어?

자기가 (신체-정신 복합적인) 야스 후유증으로 뻗어있는 사이에?


황당한 기분으로 어제치 기록을 다시 보는데 언더와쳐 파괴 보고가 있는 걸 보니 끝난 게 맞아.

거기에 겸사겸사 새로이 습득한, 강력한 바이오로이드의 유전자 지도 기록도 적혀 있었지.


멸망의 메이

블랙 리리스


뭔가 이상할 만큼 악의가 느껴지는 인선과 시점이 아닐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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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르카호 소속 지휘관기는 마리랑 칸으로 끝임.

SS로 넓혀도 알렉산드라-에이다 정도고, 위의 리리스-메이에 블팬이랑 에밀리가 조만간 더해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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