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22362464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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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얕은 계곡 물을 거울 삼아 턱을 매만진다. 생존해오느라, 적응해오느라 전혀 신경쓰지 않은 부분이었더래도 풍성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수염이 한 껏 자라나 있었다. 해안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어귀를 들어가 보니 꽤 맑은 계곡이 위치해 있었다. 언제고 바닷물로 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이 계곡이 가져다 주는 의미는 각별했다. 

수염을 양껏 잡아 한번 쭉 잡아당겨 본 뒤, 고개를 들어 뒤돌아 살며시 웃으며 말 했다.


"정말 잘했어. 알비스."


무슨 이유인지 산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기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령관님!' 하고 크게 불러댔기에 마음을 놓고 목소리를 따라가니 이런 계곡을 발견했다며, 이제 씻을 수 있다며 방방뛰는 알비스였던 것이다. 씻을 만한 물이 있을 거라는건 어림짐작 했었지만, 그런 것은 뒤로 한 채 잠자코 알비스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 했을텐데?"


의도치 않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말하니 알비스는 한 번 움찔하고 몸을 떨고는, 고개를 내린 뒤 입을 열었다.


"응 사령ㄱ"


"알비스."


"네 인간님"


알비스가 밉거나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갑고, 그저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지켜주고 싶은 '아이'이다. 

오르카에 있을 무렵에도 그랬고, 당연히 지금도 그렇다. 알비스가 내게 있어 소중한 아이 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호칭에 대해서는 확실히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나는 지금 너의 보호자가 될 수는 있어도, 너의 사령관은 될 수 없다고.

어린아이에게 괜스레 심술을 부린 것만 같아 얼굴이 살짝 화끈 거리면서도, 아마도 분명히 굳어있을 표정을 풀고 알비스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춘 뒤 마주 보았다. 


"그럼, 이제 도시로 가볼까?"


아담한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껴안아주니, 알비스는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이제는 하나만 남은 귀를 쫑긋거리며 배시시 웃는다.

그렇게 웃으며 작고 포근한 손을 내밀어오기에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아주며 일어섰다.


"인간님! 도시로 가서 뭐할꺼야?"


"글쎄 일단 너희 둘이 입을 새 옷 부터 찾아볼까?"


지금 두 아이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좋게 말해도 옷이라 불러 줄 수 없었다. 군데군데 타거나 구멍이 뚫려있고 다 찢어져 헤져버렸으며 말라붙어 굳어버린, 짙은 구리색의 핏자국들이 곳곳에 얼룩져있었다. 도시에서 옷을 찾지 못하더라도 넝마를 기워 입히는게 낫다 싶은 몰골이었다. 최소한의 위생과 보온을 생각해서라도 새 옷은 꼭 필요했다.

알비스의 옆에서 말 없이 우두커니 서있는 LRL을 한 번 흘깃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겸사겸사 참치도 찾아보고."


"초코바! 초코바는?"


"물론 초코바도!"


와이! 하고 감탄사를 흘리며 알비스는 옆에 있는 LRL을 껴안았다. 

LRL은 멋쩍은 듯 하면서도, 옅게 미소지으며 살며시 알비스를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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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씨발"


깍지 낀 손에 무게를 실어 내리치듯 눌러댔다. 앞섶을 푸는 것이 먼저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알비스의 앞섶을 풀어헤치며 연신 알비스를 불러댔다.


"알비스! 알비스!"


오랫만에, 아침은 씻으면서 시작할 참이었다. 바닷물이라 미덥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새로 발견한 보금자리가 생각보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바닷물로 씻는다는 건 오늘만큼은 사소한 문제였다. 하루하루가 여유롭지 못함에도 오늘의 시작 만큼은 이상하게 여유가 느껴졌다. 소중했던 이들에게 버림받고, 범고래를 잃고, 홀로 구축 해왔던 생존에 필요한 살림들까지 잃었기에 그 어느때보다 여유가 없었어야 할 터였다. 홀로 생존 할 지식과 경험들이 충분히 쌓였기에 다시 시작하는건 문제 없다고, 새로 발견한 보금자리가 너무나 아늑하다고 하는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을 여유로움이었다.


직감. 


나는 직감 했을지도 모른다. 어제 그 폭발이 일어난 순간부터 바이오로이드들과 마주 하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순간에 대비해 적어도 마음만큼은, 정신만큼은 다잡고 있어야 한다고. 절대로 초조해하고, 분노하고,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는 편이 더 그들이 괴로울 것이라고.

때와 장소도 정해지지 않은, 언젠가 마주칠지도 모를, 기약이 없을지도 모를 만남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괴로울 거라고? 절로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오르카에서 내린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저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노라 나 자신에게 선언했었을 터였다. 오로지 '산다'는 목적만으로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생존해왔을 터였다. 바이오로이드가 어쩌고 철충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이제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없을 터였다.

무엇을 바랐기에, 그들을 마주하면 어떻게 하고 싶기에 나는 이런 아무 의미도 없을 사고의 격류에 휩쓸리는가?

지금의 나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우선은 내 눈 앞에 있는 아이였다. 미약하게 남아있는 맥박마저 꺼져버리기 전에, 이 아이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령ㄱ 켁켁 "


깨어나지 얼마 되지 않은 LRL이 토해내고 입가에 남아있는 바닷물을 닦은 뒤, 초조히 알비스를 보고있었다. 늘 착용했던 안대는 사라져있었고 그 안대 뒤에 숨겨왔었던 왼쪽 눈은 뭉개졌다는 표현이 알맞은 상태였다. 폭발의 여파로 인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이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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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좋은 옷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멸망 전 인류의 기술에는 종종 놀라던 적이 있었다.

인류 멸망 후 반세기는 훨씬 더 지났음에도 상태가 좋은 옷, 그것도 색이 거의 바래지 않은 옷이 남아있음에 나는 다시금 그 기술에 놀라며 LRL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을 막 마친 상태였다. 멸망 전 백화점이라 불리던 건물의 의류창고를 한번 스윽 훑어보고는 혹시나 성인남성용 의류도 좋은게 남아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피어올랐다.


"고마워요 사령 인간님…"


오르카에 있을 무렵의 LRL과는 사뭇, 아니 완전히 다른 LRL을 보면서 나는 3일 전, 이 두 아이를 발견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눈을 뜬 두 아이를 데리고 동굴로 돌아간 뒤, 일단 물을 끓여 먹이기로 했다. 이러나 저러나 수분부터 충분히 공급해주고 보는 게 우선이라고 보았다. 반합을 후후 불어가며 끓인 물을 먹이고 나니, 아이들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기다렸다는 듯 잠들었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던 처음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편안한 얼굴의 곤한 잠이었다.


그 이후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나무로 작살을 급조해 될 수 있는대로 물고기를 잡아댔다. 어제 쓰던 낚싯대 또한 조악한 건 같았기에 바로바로 결과물을 찍어 올릴 수 있는 작살이 더 낫다고 보았다. 바람이 이뤄지기라도 한 건지, 무언가에 씌이기라도 한 것인지 물고기는 하루가 멀다하고 잡혔고 충분히 잡은 뒤엔 동굴로 돌아와 한마리 한마리 정성스레, 한 편으로는 급하게 손질했다. 해가 숨어 모닥불에 의지했기 때문인지, 마음이 급했는지는 모르지만 손을 몇 번 베인 것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조금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두 아이를 만나기 전에 느낀 그 기묘하고 이유모를 여유가 아닌, 안도에서 오는 여유였다. 이제 막 숙면에서 깬 아이들은 훈제로 만들어둔 물고기들을 게눈 감추듯 몇 마리 먹고나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제서야 나를 보았다.


우는 듯 하면서도 웃는 것 같은 얼굴. 소리없이 떨구는 닭똥같은 눈물방울. 아이들이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었다. 전신의 곳곳에 새겨진 흉터와 생채기, 기워입은 넝마보다 못한 옷차림이 이 아이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가를 대신 말해주는 듯 했다.


'알비스, 귀를 다쳤니?' 


'LRL, 그 눈은 어떻게 된거야?' 


묻고 싶은 것을 속으로만 되새겼다. 아이들 또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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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아이들의 옷 몇 벌과, 내가 입을 옷을 기능성 위주로 몇 벌 챙긴 뒤 배낭에 쑤셔넣었다. 스포츠코너에서 찾은 가볍고 용량이 큰 배낭이었다. 상태가 좋은건 의류 뿐만이 아니었음에 감사하고 백화점을 나섰다.

양 손에 한 명씩, 아이들의 손을 마주잡고 걸었다. 서둘러 도시를 벗어나고자 했지만 웃는 얼굴로 재잘대는 알비스와 이전보다 더 안정된 LRL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걸음을 맞춰주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대파되어 바스라져가는 AGS와 철충들의 잔해가 눈에 밟혔다. 몇몇 잔해에는 이끼가 끼거나 풀, 꽃이 자라나 있기도 했다. 

이 도시는 내가 사령관이었을 무렵, 제법 신경써서 공략했던 도시들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철충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 서둘러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게, 재잘대는 알비스와 그 재잘거림에 조금은 반응을 보이게 된 LRL을 에스코트라도 하는 모양새로 걷다가 한 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인 것을 보았다. 


"물러나! 뒤에 있어!"


두 아이를 낚아채듯 뒤로 당기고 나는 다시금 무언가 움직였다고 느껴진 위치를 보았다.


"인간님? 왜 그래?"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올려다보는 알비스가 내 눈이 보는 방향을 따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잘못봤나? 나 또한 알비스와 같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 발길을 옮기려던 차였다.


"…사령관님."


등 뒤에서 서늘하리만치 내리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나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그녀 아니 이 개체가 이렇게나 빨랐나?'


그녀는 은엄폐와 사격에 일가견이 있었을지언정, 순간적인 속도는 평범했을 터였다. 라는  지금은 아무래도 좋을 의문을 지우고 나는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바이오로이드 개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몇 분이 지났을까, 경직된 분위기와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해 곳곳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 도시에 겁이라도 먹은건지, 마주 잡은 아이들의 손이 조금은 떨고 있는 듯 했다. 


혹은 내 손이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발키리 언니…"


"할 말이 없으면 가겠어"


그 말만을 남기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이 이름 모를 감정들을, 혹여나 아이들이 어떤식으로든 그 편린이라도 눈치챌까 두려워 머뭇거리는 아이들을 보채듯 발길을 옮겼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구태여 반응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던 없던, 그 날 이후로 언제고 생각했지만 나는 더 이상 관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이 개체와 다시 마주한 상황에서도 다를 건 없었다. 너, 혹은 너희들 모두. 내 눈 앞에 있던 없던, 할 말이 있던 없던,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없었던 간에 정말로 더는 관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이 발소리를 제지할 생각이 들지 않았고 혹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몸이 튀어나가는 일도 없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중간 중간, 고개를 살짝 돌려 뒤따라오는 바이오로이드의 모습을 확인하는 아이들이 신경쓰여서 였는지는 모른다.

십여 분을 더 걸었을까. 나는 결국 고개를 돌려 내뱉듯이 말을 꺼냈다.


"…짧게 하는게 좋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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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잠 안와서 두번째 이어썼다. 재밌게 봐주면 고맙겠네 ㅎㅎ


이벤트 파밍 방금 막 대충 졸업하고 7-8 아스널 노리면서 돌리고 있는데

좀 나와라!! 첫스킨 너한테 사준다고 개년아!!



https://arca.live/b/lastorigin/22405397 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