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탈론페더는 신음했다. 귀를 틀어 막아보려던 시도도 무색하게, 날카로운 전화벨소리가 뇌리를 뚫고 들어왔다.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벌리자 창문 사이로 별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대체 몇 시지? 페더는 게슴츠레 반쯤 떠진 눈으로 디지털 시계를 노려봤다. 인공적인 LED의 불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기계 화면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멍하게 시계를 바라보고 있던 탈론 페더는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 유선 전화기는 철충의 침략이 오기 한참 전인 21세기에 사라졌지만, 탈론 페더는 일부러 고전적인 다이얼식 유선 전화기를 제작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19세기부터 23세기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한 모든 야동을 섭렵하다 생긴, 쓸데없이 고상한 취미의 일환이었다. 아마 이 짜증나는 벨 소리를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사람도 이 지구상에 탈론 페더 한 사람뿐이리라.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끄응. 탈론페더는 속으로 불평하며 전화기로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대 옆에다가 설치해 놓는 건데! 지금이 몇 시인지 아는 건가요! 한창 즐기고 이제 잠들었는데... 투덜투덜. 페더가 이불을 잡아채자 침대 위에 놓여 있던 분홍색 장난감이 툭, 떨어졌다. 페더는 자연스럽게 이불을 어깨에 두르고 전화기를 잡아 들었다.
따르릉... 덜컥.
“여보.. 여보세요... 탈론페더입니다아...”
“...”
갑작스럽게 깨어난 그녀의 목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화기의 저 편은 조용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서도 페더의 참을성은 바닥을 보였다. 탈론페더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걷어차며 말을 이었다.
“누구세요..? 지금 새벽 세시라구요... 탈론넷 관련 사항이라면 스프리건 씨에게 문의해 주세요!”
“...페더, 나야. 여전하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많이 끼어 있기는 했지만, 전화기에서 들려온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전쟁이 끝난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아직 이 지구상에 남자- 성인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리 대장님은 좋으시겠네요). 게다가, 나름 참전용사 1세대인 페더의 개인 번호를 알 정도라면...
“사령관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탈론페더가 반갑게 외쳤다. 몸을 곧추세운 페더의 어깨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속옷만 입고 있는 나신이 달빛에 드러났다. 이미 잠이 다 날아간 듯이 반가워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다르게,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주저하는 듯했다.
“어, 그래... 밤늦게 미안. 방해한 건 아니지? 저기 있잖아, 지금 전화 너머로 다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 혹시 카멜이나 워울프나... 다른 호드 애들 전화번호 있니?”
페더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당연한 걸 물어보시네요
“물론이죠~! 그런데 연락이 될 지는 모르겠어요! 음, 샐러맨더랑 하이에나는 어디에서 도망 중이라던데... 하이에나가 핸드폰을 개조해서 카지노 문을 폭파시켰다니까 통화는 안되겠죠? 워울프는 원래 전화를 안 받고. 카멜한테는 차단당했어요! 저기, 그런데 왜 그러세요?”
“휴... 아니, 번호가 필요한 건 아니고. 어떻게든 연락 닿는 애들 데리고 지금 찍어주는 좌표로 와줄래?”
힘없고 떨리는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 사령관의 목소리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늙은 노인의 목소리 같았다. 불과 30년 전, 만류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뿌리치고 전쟁이 끝났으니 당당히 은거하겠다고 소리치던 패기는 어디에 갔는지. 아니, 5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여전히 정력적인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육체적으로 노쇠할 일 없는 사령관의 목소리는, 세월에 너무도 지친 듯이- 늙어 있었다. 페더는 마음에 엄습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령관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도,
“갑작스럽게 다들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저기, 그런데 지금 칸 대장님이랑 같이 계시지 않나요? 다들 대장님이 부르시면 한번에 달려갈 텐데.”
"..."
사령관은 칸 대장님과 결혼했다. 남자와 정을 나눈 자매는 한 두 명이 아니었고, 그중 몇몇은 사령관의 은거지에 아직까지 따라가 있기도 하지만, 사령관은 그 수많은 바이오로이드 중 칸 대장을 골랐다. 페더의 눈 앞에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결혼식이 아른아른했다. 햇볕이 너무도 아름답던 날- 무적의 용의 함대가 축보를 발사하고, 공중에서 레이븐, 샌드걸들이 엄청난 양의 꽃잎을 뿌렸다. 경애하는 대장님과 사령관님이 정식으로 결혼하고, 키스하던 마지막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리고 칸 대장님은 우리 앞에서 처음으로 우셨죠. 워울프도, 하이에나도. 카멜도 얼마나 울던지...
페더는 -끓어오르는 존경심과 사랑으로- 심지어 첫날밤에는 도촬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항상 옆에 대장님이 계실 텐데 왜 굳이 제게 물으시는 걸까요?
“...”
“... 사령관님?”
짧게 흐른 침묵.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잠시 주저했다. 탈론페더는 숨을 들이쉬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어제와도 같은 옛날, 숨을 죽이고 숲을, 사막을 정찰했을 때처럼,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원인 모를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윽고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지금 칸은 안돼. 전화로 설명하긴 좀 길구나. 이 곳에 오면.. 알게 되겠지.
일단 최대한 빨리 애들을 모아서 북아메리카 2 공항에 모여 줘. 내일 모레까지 슬레이프니르가 데리러 갈거야. 호드 말고 다른 부대에는 알리지 말고... 그럼 끊을게. 부탁해”
“저기 사령관님!”
뚜우...
할 말을 마친 남자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뭐죠 이게. 칸 대장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멍 때리던 것도 잠시, 탈론 페더의 눈빛이 변했다. 페더는 옷장 문을 열고 오랫동안 입지 않은 정복을 꺼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호드의 참모니까요! 아 이거, 좀 작아졌네요. 체형 관리 좀 할 걸 그랬어요.
낑낑거리면서 조금 작아진 듯한 제복을 갖춰 입은 탈론 페더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지도 않고서, 그녀의 가장 친한 전우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야! 너 내가 차단한 거 어떻게 풀었어! 야동 사이트 스팸 좀 그만 보내라고 했지!”
... 일단 설명부터 해야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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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대회참가작- 1편입니다. 아마4편 안에 끝날듯.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