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궤적 - 1 

종말 궤적 - 2

종말 궤적 - 3

종말 궤적 - 4

종말 궤적 - 5

종말 궤적 - 6






왜 이렇게 오래걸렸느냐...

원래 작문이 느린 편인데다가 평소에 5천자 정도씩만 썼는데, 이번 화에는 어디까지 써야겠다 정하고 썼더니 1만 3천자를 넘겨버림.

근데 여기 소설 올리는 사람들 보니까 하루에도 몇 편씩 쓰는 사람들 보여서 핑계라고 하기도 민망하네.






이번 편은 이거 들으면서 썼음. 너무 유명한 곡이라 읽으면서 듣기에 분위기가 어울릴지는 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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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멸망 전, 내가 제공기로 맹위를 떨치던 시절의 마지막 비행...


무전기에서 전파 방해로 인한 잡음과 함께 수 많은 인간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오버로드에서 임무편대에게 알림, 주방위군 24 여단이 방금 캐나다 국경을 넘었고 이제 알래스카에는 AGS만 남아서 교전 중입니다. 사령부에서 전 기체 공역에서 퇴각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베이커 리더에서 오버로드, 본 편대 노벰버 공역에서 이탈합니다."


"세비어 1, 노벰버 공역에서 남쪽으로 이탈합니다. 본 시간부로 해군 항공대 지휘로 복귀하겠음."


"오버로드에서 노벰버 공역의 모든 편대에게, 현재 공역 내에 확인되는 아군 편대는 팬케이크와 포터 편대 뿐입니다. 아... 포터 편대가 레이더 상에 3기밖에 잡히지 않는데 확인 바랍니다."


"포터 1에서 오버로드, 교전 중 포터 3을 잃었음. 명복을 빌어주길 바란다."


"아... 알겠습니다. 오버로드에서 팬케이크, 귀 편대에서 300 방향에서 적 요격기 편대가 접근 중. 적기 4기, 고도 3만 5천피트, 거리 90마일. 포터 편대에서 지원 가능한지?"


"포터 1, 포터 편대는 모든 공대공 무장을 소모했기 때문에 교전할 수 없음. 비행 유지하며 현 공역을 이탈하겠다."


"여기는 팬케이크 1, 팬케이크 편대원들은 연료 여유가 5분어치밖에 없다. 교전은 어렵다."


"오버로드에서 팬케이크, 팬케이크 편대는 아군 방공방 지원을 받기 전에 적 요격기에게 공격받게 될겁니다. 로버트 대령님, 대책이 필요합니다."


"아... 이렇게 될 줄이야. 보아하니 누군가는 여기 남아야겠구만. 5명이서 난장판을 즐길 실력 좋은 사람이 필요할테니 내가 가도록 하지."


"대령님? 젠장. 팬케이크 3에서 오버로드, 선도기가 편대를 이탈했다!"


"보고있다 팬케이크 3. 오버로드에서 팬케이크 1, 대령님, 차라리 윙맨으로 쓰는 바이오로이드를 보내시죠. 팬케이크 2, 즉시 300 방향으로 선회하여 적 요격기 편대와 교전할 것. 이건 명령이다."


"팬케이크 2, 예 알겠..."


"팬케이크 1에서 팬케이크 2, 직속 상관으로서 명령한다. 현재 비행 방향을 유지하며 지금부터 팬케이크 편대의 지휘를 맡을 것. 남은 편대원을 모두 살려서 기지로 귀환시켜라."


"예, 예?"


"알겠나 그리폰?"


"알겠습니다. 팬케이크 2 지금부터 팬케이크 편대 지휘를 맡겠습니다."


"대령님 지금 바이오로이드의 지휘를 받으라는겁니까?"


"팬케이크 3, 자네가 계산기 달린 바이오로이드보다 계산이 빠른가? 하늘에서 살아돌아오고 싶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머리를 빠릿하게 굴려라..."


"아직 불만이 있나?"


"없습니다."


"오버로드에서 팬케이크 1, 로버트 대령님, 이건 말도 안됩니다. 남아서 편대를 지휘하시고 그리폰을 보내시죠. 제발 재고해주십쇼."


"거절하겠네. 저 친구는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을 것 아닌가. 나는 먼저 가서 항공 구조대를 기다리겠네."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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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고 우중충해서 을씨년스러운 가을날. 7명의 소총을 든 육군 의장대와 장교들, 정복을 갖춘 육군 항공대 파일럿들과 기지 요원들, 그리고 검은 옷을 갖춰입은 방문객들이 첩첩산중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지.


"준비, 조준, 발사!"

[[[탕!]]]


로버트 조던 대령, 조던가 3형제가 모두 미육군 항공대에 복무하는 군인 집안의 엘리트, 부대 내에 '똑똑이 로버트'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인, 더블 에이스이자 바이오로이드를 이용한 공중전의 새 지평을 연 이 시대 최고의 인간 파일럿, 나의 선도기이자 팬케이크 편대의 편대장, 그리고 이 성조기 덮인 관에 누운 영결식의 주인공...


"준비, 조준, 발사!"

[[[탕!]]]


그의 유해는 격추 당한지 한 달이 넘게 지나서야 수습될 수 있었어. 알래스카에서 아군이 퇴각한 이후 다시 교두보를 마련하는데에는 3주가 넘게 걸렸기 때문이지. 압도적이었던 적의 초기 공세 속에서 아군이 손실을 최소화하고 퇴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입안한 제공 작전의 성공이 있었지만, 정작 그 작전을 이끈 본인은 살아돌아오지 못했어.


"준비, 조준, 발사!"

[[[탕!]]]


... 아니, 그는 살아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성공적인 작전을 입안할 정도로 접근 권한이 높고 주변 정보를 잘 알고 있었으니, 구조대가 올 수 없을 것이라는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거야. 


그래서 그런가, 예포 사격이 끝나고 관이 팬케이크 편대원들 앞을 지나갈 때, 그의 아내가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얼굴을 노려보았을 때, 그리고 내 뺨을 후려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이 개같은 년! 우리 아들 직장을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가족도 뺏어가!"


"조던 여사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저 년이 거짓말을 한거야! 우리 남편이 바이오로이드 따위를 살리자고 가족들을 두고 갈 리가 없어! 감히 로버트를 모욕해?"


"여사님! 이 바이오로이드는 그냥 군사 장비일 뿐입니다! 대령님께서는 최후까지 명예롭게 싸우셨습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무능한 쓰레기! 주인을 버리고 도망치는 배신자년!... 이거 놔요!"


"일단 진정하시고 여사님..."


헌병들에게 제지당하면서도 꿋꿋히 날리던 욕설... 완전한 진실은 아니지만, 완전한 거짓도 아닌,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단어들. 욕설의 신랄함이 마음을 후벼파는 힘이 있어서일까, 그 때부터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이 확 달라졌지.


그렇게 인망 좋았던 편대장님이 당하셨으니, 고작 바이오로이드이고 윙맨인데 살아서 돌아온 나한테 불만을 가진 인간들이 있었을거야. 조던가가 군인 가문이었고, 그의 형제들 중 육군 항공대에 복무 중인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런 분위기의 변화는 아마 필연적이었겠지. 최고의 에이스를 죽인 윙맨, 성능은 좋다지만 같이 임무에 나가기는 꺼림칙하다. 부대 내에서 도는 이야기가 차라리 내 귀에 직접 들릴 일이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바이오로이드니까. 내 앞에서 말을 가려줄 사람은 없었어.


새 시대의 제공기, 승리의 상징이라고 나를 좋아해주던 부대원들은 영결식 이후 단박에 사라졌고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 비아냥과 비웃음만 점점 늘어났지. 임무도 혼자 출격해도 되는 임무들, 강행 정찰이나 사진 촬영 같은 임무만 맡게 되었어. 


외롭고 힘든 시기였지만... 웃기게도 그 절망과 분노는 인간을 향하지 않더라. 편대장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인간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좌절하는 자신에 대한 무기력함, 그리고 그런 인간을 책망하지 못하는 바이오로이드인 나 자신에 대한 혐오만 남아 나를 갉아먹었지. 그리고 로버트 대령은... 가족까지 있는 사람이 왜 도구인 나를 쓰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던졌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정찰기로 분류가 변경되어 있었고 팬케이크 편대에선 쫓겨나서 다시는 팬케이크라는 콜사인을 쓰지 못했지. 뭐... 인간들이 멸망하기 전까진 말야. 그건 나에게 주어지는 벌이었지만 인간들이 그걸 벌이라고 생각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겠네. 도구에게 벌을 주려는 사람은 없으니까. 인간들은 써봤더니 별로인 도구는 버리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 뿐이지.


내게 다시 한 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편대장을 버리고 도망치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았을텐데... 공중전의 새 시대를 연 우수한 바이오로이드, 그게 나였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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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태평양 상공, 휘황찬란한 태양, 푸르른 하늘, 진청색의 바다, 레이더에 보이는건 알루미늄 조각들이 하늘을 할퀸 흔적, 그리고 오랜만에 경고음이 꺼져서 조용해진 헤드셋까지. 지금 할 일은...


"팬케이크 1에서 오르카와 에셜론, 저를 쫓던 적기 2기를 격추했습니다. 에셜론 1 합류 가능한지-"


"으아아 살아있었군요 그리폰! 저, 으아악!"


"대령님? 현재 상황과 위치를 알려주세요. 대령님이 뿌린 채프에 가려서 그 쪽 방향은 레이더로 아무 것도 못봅니다."


"데이터 링크 봐요! 저는 지금 그 채프 한 통 더 뿌려야 돼요!"


"아이고야..."


탈론페더 대령님과 적기와의 거리는 28마일, 나와 탈론페더 대령님 사이의 거리는 150마일. 대령님의 최고 속도가 나보다 조금 빨라서 이 상태로 쫓아갈 수는 없어. 탈론페더 대령님이 내 쪽으로 와야해.


"에셜론 1, 팬케이크 1쪽으로 합류 가능합니까?"


"저 지금 선회하면 잡힐 것 같은데요?"


"속도 잃지 않는 선에서 북쪽으로 선회만 해주셔도 돼요."


"아아, 오르카에서 메이 소장이 알린다. 오르카에서 귀 편대를 지원하기 위한 전투 편대를 출격시킬 예정이다. 에셜론 1의 현 비행을 유지하면 12분 내에 합류할 수 있다."


"에셜론 1, 거부합니다. 12분은 너무 길어요. 팬케이크 방향으로 선회하겠음."


"팬케이크 1 확인, 에셜론과 합류하겠습니다."


"오르카에서 임무 편대, 계획 변경 확인. 귀관들의 판단을 존중하겠다."


"아 에셜론 1, 혹시 적 무장 상태 확인이 가능한가요?"


"안됩니다 팬케이크 1. 무장창은 보이지 않아요."


"공격 당한 횟수라도?"


"방금 흘려보낸게 레이더 유도 미사일 4발째네요."


FQ-104는 열추적 미사일 2발에 레이더 유도 미사일 2발이 들어가고 적기는 2대니까...


"레이더 미사일은 다 피하셨네요. 거리만 유지하면서 오시면 되겠는데요? 10마일 거리에 마하 2만 유지하셔도 괜찮을거에요. 고도 유지하시고요."


"확인, 현재 진행방향 350... 355... 360... 북쪽으로 비행 유지할까요?"


"제 쪽으로 쭉 돌아요. 040까지 선회하시면 됩니다. 에셜론 1에서 거리 140마일"


"에셜론 1, 040 방향으로 선회. 적기 거리 20마일입니다."


다시 한 번 고도를 올리면서 교전 상황을 점검해볼거야. 3만 7천피트까지 올리는게 좋을까 아님 4만? 한계 고도에 너무 가까이 가면 기동성이 떨어져서 별로고. 4만까지만 올라갈래. 


무장은 열추적 미사일 4발은 이미 소모했으니 AMRAAM 미사일만 남았네. 레이더 유도 미사일은 적을 레이더로 못잡는 지금은 쓸데가 없는데... EOTS 유도 키트를 달아놨으니까 EOTS 유도로 전환하고 적외선 카메라와 연동시켜놔야겠어. 단거리 미사일이 없고, EOTS 유도는 고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를 못쫓아서 힘들겠지만 이거랑 기총으로 해결을 봐야겠네. 미안하지만 탈론페더 대령님을 미끼 역할로 쓰면 이길 수 있겠지.


다시 마하 2에 가깝게 속도를 얻고 나니 12초마다 10마일씩 대령님과 가까워져. 시신경 단말 시술 덕분에 저기 30마일 거리에 탈론페더 대령님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 뒤에 이 쯤에... 그래 철충 2마리도 보이고. 30초 뒤면 마주치겠네. 


"팬케이크 1, 적기 시야에 잡힙니다."


"에셜론 1, 확인. 계속 직진할겁니다."


무장 발사대를 꽉 쥐고 적 편대를 주시하자니... 적 2기 중 하나가 탈론페더 대령님에게 미사일을 쏘고 기수를 올려. 16마일 거리에서 쏜 열추적 미사일이 맞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으니 다행이야. 한 기는 마저 대령님을 쫓고 미사일 던지고 빠지는 저 놈은 나를 상대하려는 모양인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


EOTS 영상에서 밝게 빛나는 내 쪽으로 오는 적의 엔진열에 조준을 걸고 발사 스위치를 AMRAAM에 두자 적기 옆에 [띠딕] 소리와 함께 READY 글자가 나타나. 나는 왼손에 쥔 무장창을 앞으로 뻗어서 바로 방아쇠를 당겼어. 쒸이익 소리를 내며 미사일이 날아가지만 레이더 유도도 아니고 영상 유도니까 나도 맞을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아. 견제구에 불과하지. 애초에 EOTS 유도 키트도 공식 지원되는게 아니고 내가 수제 개조를 한거니까... 다음에는 닥터나 포츈 언니한테 부탁해서 제대로 쓸 수 있게 해봐야겠어.


어쨌든 일단 미사일을 날려놓으니 조준해놓은 적기가 마구 롤링하면서 회피기동을 시작했어. 이 때를 틈타서 나는 기체를 180도 롤해서 뒤집고 기수를 내려서 탈론페더 대령님을 뒤쫓는 녀석 쪽으로 갈거야. 


[쒸우우우우 우 우    우...]


탈론페더 대령님의 엔진 소리를 들으면서 지나치자 대령님을 쫓던 철충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기수를 올려 내 쪽으로 선회하려 해. 목표를 대령님에서 나한테 옮긴거지. 어떻게 알았냐고? 레이더 조준 경보가 삐삐 거리면서 다시 울리기 시작했거든. 


정직하게 정면으로 맞서줄 생각은 없으니까 나도 다시 기체를 뒤집어서 기체를 상승시켜야겠어. 조종간에서 플레어 사출 스위치를 올리니 다시 한 번 뒤꽁무늬에서 사방으로 불꽃을 뿌리고 있어. 일단 적기를 지나쳐갈 때까지는 계속 뿌려야 적외선 미사일 조준을 방해할 수 있을거야.


앗! 저 철충 멍청이가 플레어에 조준 걸고 미사일을 쏜 것 같은데? 적이 발사한 미사일이 허공으로 비행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또 수싸움에서 이긴게 틀림 없어. 


기분 좋게 적기를 지나쳐서 다시 기체를 뒤집고 아래로 선회를 시작해. 나를 지나쳐간 적기는 위쪽으로 계속 상승하면서 선회하고 있어. 이렇게 되면 수직 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선회전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이 상태가 유지되면 적의 꽁무늬를 잡는건 내가 되니 승리는 예정된거야.


"에셜론에서 팬케이크, 적기가 다 그 쪽으로 붙었어요."


"알아요. 으읍... 다 잡을 수 있어요."


계속해서 선회를 하는게 달가운 일은 아니야. 회피기동 할 때처럼 가속도는 있는대로 받아서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을 계속 느껴야 하거든. 이제 원의 저점에 도달해서 다시 올라가고... 적기는 아직 고점을 못찍었으니 각도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네.


선회는 회피기동과는 달리 한 쪽으로만 가속도를 받는데다가 계속 하다보면 속도도 느려지고 받는 가속도도 점점 줄어드니 좀 더 편할 뿐이지. 분명 마하 2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었는데,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선회해보겠다고 속도는 다 잃고 서로 아음속으로 꼬리를 쫓고 있어. 다시 원의 고점을 지났고, 적기는 아직 하강 중이니까 반 바퀴 정도만 더 회전하면 조준점에 적이 들어올 것 같은데...


기관포 조준경을 켜고, 적기가 조준점에 들어가는 모습을 봐. 적이 비행하는 속도가 있으니까 지금처럼 조준점 중앙에 있을 때 쏘는게 아니고 좀 더 앞쪽에 쏴야해... 이제 조금만 더 선회하면... 지금!


[브르르르르르르륵]


방아쇠를 당기자 위잉거리는 모터 소리와 함께 천지를 울리는 기관포의 포성. 노란 빛꽁무늬를 달고 날아가는 총탄들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적기에 빨려들어가고, 놈의 조각난 날개들이 산산이 박살나고 불타면서...





"그리폰! 피해요!"


"엣?"


반사적으로 러더를 차면서 조종간을 우하방으로 당겼어. 몸이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밀려나고, 놀라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지도 못하고 반응부터 했는데,


[피빙]


총알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예광탄이 내 왼쪽으로 스쳐 지나갔어.


[쐐애애애애애애액]

[드르르르르르륵]


그리고 나서야 뒤늦게, 자신보다 배로 빨리 움직이는 총알과 비행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뒷북만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지. 


"괜찮아요 그리폰?"


"예예 팬케이크 1, 대령님 덕분에 피했습니다."


뒤쪽을 서둘러 살펴보니 적기가 나를 공격하고는 계속 직진해서 빠져나가고 있어. 선회해서 한 번 공격 기회를 잡아보려고 했지만 거리는 이미 5마일이고 점점 멀어지고 있네. EOTS 유도 모드인 AMRAAM을 한 번 더 쏴보긴 할건데... 마하 2로 움직이는 기체를 맞출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안하니까 맥이 빠지네.


진짜 문제는 적기도 그걸 눈치챘는지 회피기동에 들어가주지 않는다는거야. 여유있게 위쪽으로 선회하면서 고도 확보하고 다음 공격 기회를 잡으려고 하네. 공중전의 기본은 높고 빠른 쪽이 유리하다는건데, 나는 지금 그 둘 다 크게 불리한 상황이야. 나는 쓸 수 있는 유도 무기도 없고, 적은 열추적 미사일이 한 발 남아있으니.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느냐...


하면 당연히 36계 줄행랑이지. 전쟁터에서 오래 살고 싶으면 정정당당한 싸움도 하지 말랬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불리한 싸움을 할 일은 없는 법이야. 


일단 급하게 속도를 좀 얻어야 하니 고도를 버리고 속도를 당겨써야겠어. 7천 피트 정도 강하하면서 초음속으로 속도를 올리고 도망치면서 고도를 다시 올리면, 에너지라도 대등한 상황에서 맞설 수 있을거야.


[띵 띵 띵 띵]


...라고 생각한 계획이 1초만에 어그러지네. 미사일 경고가 울리는데 적기가 내 쪽으로 마지막 남은 미사일을 갈겼다는 이야기지.  미사일 회피 자체는 아직 플레어도 남았으니 급강하 하면서 속도를 올려서 하면 할 수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애쓰는 동안 저 괘씸한 철충놈이 나한테 달라붙어서 기관포로 끝장을 보려 할거야.


회피기동도 불리한 이 상황도 정말 싫지만 그렇다고 죽으란 법은 없으니, 할 일은 해야겠지.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3만피트 거리의 끝없는 태평양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 꽂을거야. 미사일도 저번처럼 적당한 거리가 되면 플레어를 뿌리면서 회피할거고. 그 다음이 문제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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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돌이 꼬맹이 메이 대장... 이렇게 베베꼬인 사람마냥 호칭하긴 싫긴 한데 작전 지휘실에서 저 저 대놓고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가만히 넘어갈 수가 없다.


"거 표정 관리 좀 해요 대장."


"나이트 앤젤. 지금 작전이 통째로 망하기 직전인데 웃음이 나오겠어?"


"아 아직 안망했잖아요. 망하고 나서 그러던가."


"우리가 주역으로 나가는 첫 작전부터 망하면 사령관 얼굴은 무슨 낯짝으로 보려고 그래?! 작전 계획도 내가 낸건데 사령관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니 애초에 표정을 고따위로 짓고 있는걸 사령관이 보면 좋아라 할까요 싫어할까요? 이 천재 전략가 꼬맹이 지휘관이 우려하는 상황이 닥치기도 전에 우려하던 결과를 낼 수 있다는걸 모를 리가 없는데 도대체 문제에 사령관만 끼면 이성적인 판단이 안되는건지 뭔지. 아 그래 뭐 이성문제가 원래 이성적으로 해결하는게 아니긴 하지만 이건 좀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작전 지휘 중인데, 최소한의 감정 관리라도 해야죠."


"알았어. 흠흠."


입꼬리를 기묘하게 재조정하는 대장. 이런 모습을 사령관이 보면 안되는데...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사령관은 그 특유의 뭐가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하는 표정으로 홀로그램 지도와 상황판만 쳐다보고 있다.


"다이카 1 이륙했습니다... 방위 045 고도 2000피트에서 편대 형성 대기하겠습니다."


다이카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함교 스피커로 흘러나온다. 우리 대장이 다이카에게 편대원으로 붙인게 하르페이아였지.


"하피 1, 이륙 준비 되었습니다. 캐터펄트 충전 대기 중."


다이카보다 명랑한 목소리. 보통 통신 품질이 안좋은 무전기로 듣기는 참 편한 목소리 톤이다. 아... 애초에 바이오로이드니까 그렇게 설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매끈한 몸매처럼...


"관제실에서 하피 1에게, 준비되는대로 이륙해도 좋다. 이륙하여 다이카 1과 합류하고 기입된 비행 계획서에 따를 것."


메이 대장은 언제 표정 구겼냐는 듯 당당하게 무전을 날린다. 이렇게 일하는 모습만 보면 완전 담대하고 전문적인 지휘관인데 말이지.


"긴급 보고! 본 함 대공 레이더에서 정남동 방향 비행체 8기 포착! 오르카에서 거리 80해리, 고도 1000피트 이하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거의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어요! 상승 속도 초당 900피트!"


사령관과 무적의 용 대장이 있는 테이블에 관제실에 있었을 터인 세이렌의 홀로그램이 갑자기 나타났다. 수평선 상에서 갑자기 나타난 항공기가 급히 고도를 올린다라. 그건...


"조타실! 지휘관 자격으로 명령하오! 즉시 긴급 잠항 준비를 하라!"


... 그래 공대함 공격할 때 보이는 기동이지.


"잠깐 잠깐! 긴급 잠항이라니?"


"주군, 죄송하오나 설명드릴 시간이 없사옵니다! 긴급 잠항 준비!"


"이륙 중인 편대는 어쩌고? 이미 나가있는 다이카랑 탈론페더랑 그리폰은?"


"정신 차리십시오 주군!!!"


"..."


용 대장이 내지른 사자후 한 방에 지휘실 전체가 조용해지고 오르카호의 기계음만 웅웅 울리고 있다. 우리 사령관이 저렇게 쫄아있는건 라비아타 통령의 반역 이후로 처음 보는데. 사령관이 아무 말도 못하고 화면 너머의 세이렌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이내 함 내 스피커로 사이렌이 울린다.


용 대장이 카리스마 있는 바이오로이드인건 알았지만 사령관까지 저렇게 휘어잡을 수 있을 줄은... 


"갑판 위 모든 활동 중단하고 임무 없는 승조원은 함수로 이동하라! 모든 인원은 함의 기울어짐에 대비할 것!"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함 전체에 쩌렁쩌렁 용 대장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러자 사이렌 사이로 끼어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어온다.


"하피 1, 바로 이륙하겠습니다!"


"하르페이아! 언니도 동료들이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잠항 절차 중에는 캐터펄트가 작동하지 않는거거든!"


"필요 없어요! 하피 1 이륙!"


"메이 대장이다. 이미 함이 전방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어. 250m도 안되는 기울어진 활주로에서 어떻게 이륙하겠다는거야? 명령에 따라..."


"사령관이 우리 대원들을 걱정해주니까, 나도 내가 할 수 있는걸 해 줄거야! 간다!"


"이런 미친..."


함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제트 엔진의 굉음이 울리더니, 몇 초만에 사라지고는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서 사령관이 걱정하는 목소리로 무전기를 잡았다.


"어... 하르페이아?"


"와하! 바닷물에 들이받는 줄 알았네! 하피 1 이륙 성공! 다이카 1과 합류하러 갑니다! 사령관 있다가 봐!"


"응. 고마워..."


메이 대장과 역시 최고급 전투기는 다르긴 하다는 둥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휘실 문이 벌컥 열린다.


"주인님! 밀착 경호 할게요!"


어느새 활짝 열린 지휘실 문으로 블랙 리리스에 포이, 페로... 컴패니언 전체가 줄줄이 달려 들어와서는 사령관을 둘러쌓아 버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바닐라, 레프리콘, 워울프, 아르망, 엠프리스, 카엔... 소속 직렬 상관 없이 바이오로이드들이 줄줄이 함교로 들어와 각자 고정된 물건을 잡고 자리를 잡는다.


아... 우리 함교가 함수에 있었지. 그래서 임무 없는 인원들이 죄다 여기로 들이닥치고 있구나.


"적기 미사일 발사 확인! 대함 미사일 4발, 속도 마하 6! 피탄까지 70초!"


세이렌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상황을 환기시킨다.


앞으로 점차 기울어지며 물 속으로 가라앉는 범고래와 범고래를 향해 달려드는 작살의 경주. 오르카호가 긴급 잠항하는데 1분이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무사히 넘어갈 것 같긴 해서 다행이다만, 잠수하고 나면 그 다음이 문제다.


"주군, 이번에 보인 무례에 대한 처벌은... 이번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소."


"아 아냐 괜찮아. 우리 꽤 위험한 상황이었네. 필요한 조치를 다 해줄래?"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무전기를 잡는 용 대장.


"함내외의 아군과 비행 중인 전 대원들에게 알린다. 본 함은 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1분 후부터 무선 침묵을 시행할 것이다. 모든 무선 통신은 수신만 가능하므로 외부로 송신해야할 긴급한 내용은 바로 송신할 것. 다이카 편대는 임무를 변경하여 오르카 상공의 제공권을 확보한 후 무선으로 보고하라."


"응? 아냐. 다이카랑 하르페이아는 탈론페더랑 그리폰을 구해야지."


"주군. 더 이상 항공 전력을 투입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본 함 상공의 제공권이 우선이오. 오르카호가 적의 항공전력에 노출되어 다시 부상할 수 없으면 우리 항공기들은 집 잃은 새 꼴이 되는 것이요."


"오르카호는 무소음 항행하면 걸리진 않잖아? 탈론페더는 아까 무전 들어보니 급하게 쫓기는 것 같던데... 하르페이아! 우선 우리 정찰 편대를 도와줘."


"앗! 아니되오. 하피 1..."


"본 시간부로 모든 통신망은 함 내 유선망으로 전환되었거든. 개인이 소지한 무선 통신 장비도 사용 금지인거거든!"


"이... 이런..."


사령관이 기어코 사고를 쳤고 이제 어찌 되려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바이오로이드들이 바글바글 모인 지휘실 안을 둘러보자니, 지휘관들과 부관들의 표정들은 하나같이 어둡다. 몇 분 전만 해도 우리 대장에게 표정 좀 풀라고 권하긴 했었는데, 이젠 나도 못 웃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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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을 피하고 나니 내 쪽에 착 달라붙어버린 철충, 순순히 근접 선회전으로 들어와주었으면 지금쯤 기관포 맛을 보여줬을텐데 속도와 고도의 차이를 철저히 유지하면서 일방적인 공격 기회만 만들고 있어. 동료 세 놈이 죽는걸 보면서 교훈이라도 얻은건지, 원래 실력이 좋은 철충인건지. 철충도 공중전 훈련을 받는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전에 끝장낸 셋과는 다르긴 해.


원래대로라면 엔진 출력이 더 좋은 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에너지의 우위를 회복할 수 있어야하지만, 급선회를 동반해야하는 회피 기동이 단순히 고속을 유지하면서 뒤를 노리고 들어왔다 그대로 나가는 공격 시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사실을 놈이 아주 잘 써먹고 있어. 철저하게 계산된 주기로 내가 에너지를 쌓지 못하도록 고속을 유지하며 내 쪽으로 비행만 해주어도 나는 무조건 회피 기동을 해야하고, 만약 회피에 허점이라도 보여서 사선에라도 한 번 들어가면 나는 끝장나는거지.


... 그래 원래 공중전이라는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만 해도 반은 넘게 먹고 들어가는거야. 지금처럼 미사일도 없고 첨단 무기 뭣도 없이 기관포만으로 정정당당히 싸워야하면 더더욱 그렇지. 정정당당한 싸움은 싫은데... 아 이런 또 오네.


늘 하던대로 롤링을 하면서 선회 방향을 불규칙하게 바꿔주면, 나는 토할 것 같은 가속도와의 왈츠를 추고, 대신 이리 저리 적의 조준점을 피해갈 수 있는거지. 그렇게 예광탄이 내 옆으로 스쳐지나갔다면 성공.


[쐐애애애애애애액]

[드르르르르르륵]


느림보 음파가 전해다 준 소리까지 들었다면 무사히 회피한거지.


문제는 이 지긋지긋한 회피 기동을 하고 나면 내 속도는 있는대로 줄어있고, 다시 적을 공격할 수 있는가 보면 철충은 빠른 속도로 진입한 강점을 이용해서 저 멀리 지나가 있는거야. 


이대로 가면 내가 당할지도 모르는 도박만 계속 하는 셈이니까, 이전까지 안하던 도박수라도 던져서 상황을 반반으로 돌려놓기라도 해야겠어. 


고도를 유지하면서 최대한 가속하며 기다리니, 저 멀리 돌아서 다시 내 쪽으로 향하는 철충. 지난 번처럼 얌전히 기다리는 척 하다가... 거리가 4마일이 되었을 때, 엔진 출력을 내리고 에어브레이크를 써가며 급선회를 하고 최대한 팔을 돌려 철충을 조준경 안으로 넣었어.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자 묵직한 반동, 위잉 하는 모터 소리, 그리고 폭발하는 화약의 굉음과 함께 총탄이 쏟아져 나왔지.


[브르르르르르르륵]


적 방향으로 마구 예광탄을 쏟아내자, 철충도 놀랐는지 급기동하며 탄막에서 벗어나려고 했어. 그래 이게 내가 노렸던거야. 놈이 급선회를 하면서 에너지를 잃었을 때, 최대한 따라붙어서 에너지 우위를 상쇄시키고 근접전에 들어가려는거지.


놈이 선회한 위쪽으로 쫓아가기 위해 다시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뒤를 쫓아...


[띵- 실속 경고]


뭐? 지금은 안돼... 안돼!


제트 엔진의 소음이 무색하게, 내 기체는 올라가지 못하고 선회하던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져. 아까 급선회를 하면서 기체의 실제 이동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추진했던게 문제였는지, 날개가 양력을 만들던 공기의 흐름을 잃고 난류 속에 퍼덕이며 기체가 떨어지고 있어.


기체가 비행기가 아니라 벽돌처럼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니 일단 실속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수를 아래로 향해야 해. 엔진 출력을 최저로 내리고 에어브레이크, 플랩, 공기저항이 될만한건 죄다 활용해서 기수를 아래로 떨어트렸어. 이제 아래로 속도를 충분히 얻어서 날개가 다시 양력을 얻어야 하니 최대한 엔진을 켜고 조종간이 말을 듣기를 기다려야지. 


문제는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적기는... 젠장...


고개를 돌려보니 실속한 내 꽁무늬를 향해서 강하하며 달려드는 철충이 보여. 이대로는 회피 기동도 할 수 없고... 안돼 못보겠어.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으니



[삐- 삐- 삐- 삐- 삐-]


... 이건 레이더 추적 경고음.


[드르르륵]


이건 기관포 소리.


[쾅!]

[쐐애애애애애애액]


폭발, 그리고 지나가는 엔진음... 나는... 












아직 멀쩡한데?


"잡았다! 팬케이크 1 괜찮아요?"


고개를 돌려 위쪽을 쳐다보니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는 철충과 저 위로 날아가는... 바이오로이드가 하나 보이네.


"대령님?"


"네?"


"탈론페더 대령님?! 도망 안갔어요?"


"아니 싸우는 중인데 도망을 가면 안되잖아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네... 고마워요."


"후후... 감사의 참치는 돌아가서 받을게요. 다시 오르카 쪽으로 방향을 잡죠. 강하 그만하고요."


"아. 실속했었는데... 조종면 돌아왔네요. 3만피트로 다시 올라갈게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그리폰이 상승하면서, 이번에는 선도기를 지켜내서 기쁜 한 편 적기를 다 격추했는데 왜 삐삐거리는 레이더 추적 경고가 꺼지지 않나 하는 의문을 떠올린 순간,


날개에 튀는 불꽃과 함께 그리폰의 몸이 고꾸라졌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드르르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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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폰 전용 장비 이름이 확장 AMRAAM 포드던데, 20세기 물건인 AMRAAM을 22세기까지 쓰게 되는건가... 참 무섭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