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24568964 전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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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나는… 도대체…


두통이 일어 머릿 속이 혼탁했지만 의식은 맑았다.

저릿한 눈꺼풀을 힘겹게 뒤집어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맑개 갠 하늘에 몽글몽글하고 아담한 구름이었다.

그 구름 사이사이를 햇살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누워 있는 건가? 등과 다리에 푹신한 것이 느껴져 손바닥을 더듬어 보니 그것은 잔디였다.

보드라운 털을 가진 융단이라고 착각할 만큼 매끈한 잔디를 한움큼 쥐어 코로 가져가본다.

싱그러운 향이 폐부를 가득 메워 아직 가시지 않은 두통을 말끔히 씻어내준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산뜻함이다.

그 산뜻함을 충분히 만끽하고서 나는 저려오는 다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잔디를 쥐었을 때 예상했던 대로 이 곳은 초원이었다. 아주 넓다.

군데군데엔 만개한 자줏빛 꽃이 수줍은듯 숨어있다.

먼 발치의 동산에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그 너머에는 녹음진 숲이 울창하게 자리하고 있다.


초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으니 지저귀는 작은 새 두 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낯이 익다. 기억은 안나지만 언젠가 본 것 같은 새다.

저 새를 보니 왜인지 조금, 몸이 달아오른다.

그래도 마침 불어온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달아오른 몸을 식혀준다.

그 적절히 배합된 온도가 상쾌한 쾌감을 선사한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초원은 아름답지만, 이상하게 현실성이 없다. 

마치 한 차원 너머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 처럼.

이런 곳은 본 적이 없다. 꿈에나 나올 법한 곳이다.

꿈? 그래. 꿈이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 꿈에 들어온 거지?

꿈을 꾸기 전엔 뭘 했지?

뚝뚝 끊긴 선을 이어붙이듯 기억을 더듬어본다.


나는 분명… 사령관한테서 도망친 다음…


"아…"


아, 나는…


"미안… 나앤…"


또, 약에 손을 댄거구나.

나앤과의 약속을 어겼구나.



죄책감에 얼굴이 시큰거려온다.

손이 부르르 떨리고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그래서, 이제 막 주저 앉으려던 참이었다.


[대장 님!]


"어?"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대장 님! 여기에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 거린다.


[여기라구요! 여기!]


두리번 거려봐도, 누가 어디서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탁 트인 초원에는 숨을 만한 곳도 없다. 

있다고 한다면 동산 끝에 위치한 저 나무다.

나는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대장 님!]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장 님!]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났다.


"지니야?"


나무까지 절반 정도 남았을 때였다.

기억을 떠올리자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지니야가 눈 앞에 나타났다.


[대장 님! 오랜만이에요!]


지니야는 죽었는데?

 

"안녕. 지니야."


지니야의 양 손에는 옥수수가 하나씩.

이런 때에, 이런 곳에서도 옥수수 인거니.

해맑게 웃는 지니야는 내게 옥수수를 하나 건넨다. 

나는 그 옥수수를 받아들고 한 입 베어문다.

어지간히도 단게 설탕을 가득 넣고 쪘나보다.


"지니야."


[왜요 대장님?]


"다른 대원들은?"


[다 죽었어요!]


"너도 죽었잖니."


[네. 저도 죽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있니?"


[여기가 어딘데요?]


"내 꿈이야. 내 꿈 속의 초원."


[여기가 왜 대장님 꿈이죠?]


대답한 건 지니야가 아니었다.

목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니, 그 곳엔 다이카가 있었다.

다이카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다.


"안녕, 다이카."


[안녕. 대장님.]


"여기가 내 꿈이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무슨 말씀이세요?]


"방금 네가 그랬잖아. 내 꿈이 아니라고."


[아뇨. 대장님 꿈이 맞아요.]


다이카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따라 옆을 돌아보니, 그 곳엔 실피드와 밴시가 있었다.


[우리가 죽었다니,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대장님.] 

실피드가 말했다.


"아니야. 나앤이 분명 그랬어. 전함에서 모두 죽었다고."


[저는 리리스에게 죽었어요.] 

밴시가 말했다. 


"아, 그랬지."


[대장님. 죽든, 죽지 않았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네 명 중 누군가가 말했다.


"중요… 하지 않을까?"


[그럼, 저희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하세요?]

목소리에 노이즈가 낀다.

그래도 네 명 중 누군가가 말했다.

확실하다.


"…아니, 몰라. 기억이 안나."


[그럼 중요하지 않은 거에요.]

대원들이 내게 다가온다.


"그런거니?"


[그럼요.]

대원들이 나를 에워싼다.


"알았어."


대원 모두가 열 손가락을 꾸불대며 내 얼굴에 가져다대고 매만진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다만, 기쁘다.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게 중요한거죠.]


그러나, 이것은 꿈이다. 금방이고 사라질 싸락 눈 한송이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그래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꿈인지 아닌지, 자각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그런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대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것.


[가요. 대장.]


나를 품어주던 대원들이 내 손을 맞잡아온다.


"그래."


하늘은 오렌지빛, 몰려오는 것은 싯푸른 검보라빛.

그런 검보라빛을 다시 뒤덮는 건 맑은 푸른빛.

손에 손을 맞잡은 우리는 일렬로 선다.

동산 너머로 굉장히굉장히굉장히 빠르게 빠르게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본다.

우리는 그 해가 저물고 다시 떠오르길 네 번 정도 반복한 사방의 방향으로 천천히, 천천히 걸어간다.

얼굴에 내리쬐던 차가운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다시 차가워지고 다시 뜨거워진다.

회백빛을 띄기 시작한 동산은 몇 번 명멸하더니 햇살을 양분 삼아 팔을 꺼내든다.

자줏빛 꽃들을 양껏 꺾어든 손들은 하늘에 꽃잎으로 된 비를 뿌려댄다.


[아름답죠? 대장.]


누군가가 말했다. 목소리의 노이즈가 심해져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실피드 일까.


"응. 예쁘네."


절박하게 내몰린 몽상같은 그 광경에, 나는 솔직히 답했다.

대원들의 목소리에 끼던 노이즈는 명멸하던 동산으로 퍼져나간다.  


[대장을 위한 거에요.]


"고마워."


노이즈가 심해진다. 동산이 흐릿해진다.

이윽고 동산은 형체를 잃어 지직이는 노이즈만이 눈을 가득 메운다.

그래도 괜찮다.

달리기 시작한 다리는 꺼지는 일 없이, 확실히 노이즈를 딛고 있다.

그거면 됐다.

이 모든게 꿈이더라도,

다 같이, 계속 달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헉… 헉…"


[대장, 드디어 도착 했네요.]


노이즈를 따라 계속 달려 도달한 곳은, 어느 산이었다.

탁 트인 산의 꼭대기.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싯누런 바다.

나는 그 절경에 감탄을 금지 못하고 대원들에게 외쳤다.


"얘들아! 저기 봐! 금으로 된 바다야!"


[대장, 저건 바다가 아니에요. 피 섞인 고름이에요.]


"느껴지니? 달콤한 냄새! 저건 금이 아니라 꿀이었나 봐!"


[고름에 떠다니는 부패한 악취에요.]


"어! 저기! 바다 위에 뭐가 있어! 근데 잘 안보여!"


[진정하세요. 저 바다에 있는 건 시체들 뿐이에요.]


"무슨 소리하는 거야. 시체가 저렇게 커?"


[대장. 저 시체가 뭔지 정말 모르겠나요?]


"……모르겠어."


[저건 범고래의 시체잖아요.]


[금속으로 된 범고래요.]


[아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얘, 얘들아…"


[저 범고래는 당신이 죽였잖아요.]


"왜 그래… 이러지 마. 이런데서 밀지 마…!"


[당신이 죽였잖아.]


"싫어! 떨어져! 저 바다로 떨어진다고!"


[우리 모두.]


"으… 으으…!"


[너 하나 살겠다고 죽은 거잖아.]


대원들은 웃고 있다. 입도, 눈도, 코도 없었지만 웃고 있다.

나는 절벽으로 내몰린다.

온기를 찾아 꿈으로 왔건만, 결국 내게 허락 된 것은 가파른 낭떠러지에 매달리는 것 뿐이었다.


[메이.]


"살려 줘! 얘들아! 제발 살려 줘!"


[제대로 봐요.]


"아악! 안 돼! 그만!"


다이카의 다리가 내 왼 손을 짓밟았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손은 오른 손 뿐이다.


[메이.

위를 봐요.

맛있는 허기에요.

하늘에서 가득 내리는 굶주림이죠.]


밴시가 다리가 내 오른 손을 짓밟고 비벼댄다.

나는 입을 질끈 깨물고서, 손가락이 짓이겨지고 터져가는 고통을 견뎌낸다.


[당신의 추한 머릿 속에서 나온 것들이지.]


실피드의 다리가 내 머리를 가격했다. 

아찔해진 머리를 뒤흔들어 다잡고 나는 왼 손으로 밴시의 발목을 잡았다.


[대장. 대장.]

지니야가 말했다.


[이거 보세요.]

지니야가 복부로 손을 가져가 가슴과 배를 열어젖힌다.

뱃속은 텅 비어있다. 

내장이었던 작은 고깃 쪼가리는 아무것도 감싸고 있지 않은 늑골에 대롱대롱 처량하게 매달려있다. 


"…"


[나이트 앤젤 대령님이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나 때문에…"


…맞아. 나앤이… 나를 살리겠다고.


치지지직-

또 다시, 눈에 노이즈가 낀다.


[나이트 앤젤은 어딨어?]


지니야의 두 손이 내 얼굴을 세게 감싸쥔다.


[어디있냐고.]


눈에 어린 노이즈는 코로, 입으로 퍼져간다.


[어디 있냐고!]


그래서, 대답 할 수가 없다.


[@$#$!@@#]


노이즈는 귀까지 퍼져간다.


[메@#@#!!@!]


마침내, 노이즈는 머릿 속 깊은 곳 까지 스며들어

나는 내맡기듯이,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았다.



///



"으…"


나는… 도대체…


두통이 일어 머릿 속이 혼탁했지만 의식은 흐리고, 맑았다.

저릿한 눈꺼풀을 힘겹게 뒤집어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구불거리는 하늘이었다.

형형색색으로 난잡한 만화경을 연상케 하는 하늘은 여기도, 저기도, 그 기분 나쁜 만화경으로 뒤덮여 일렁인다.  

그 일렁이는 만화경 사이사이를 섬모 같은 촉수가 비집고 들어와 흐물거리는 점액으로 축축히 적신다.

누워 있는 건가? 등과 다리에 푹신한 것이 느껴져 손바닥을 더듬어 보니 그것은 @*#!였다.

눅눅한 생고기 같기도 하고 썩은 돼지창자 같기도 한 그것을 양껏 쥐어 코로 가져가 본다.

진득하고 강렬한 악취가 폐부를 가득 메우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몸 곳곳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만 같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산뜻함이다.

그 산뜻함을 충분히 만끽하고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을 쥐었을 때 예상했던 대로 이 곳은 @*#!이었다. 아주 넓다.

군데군데엔 만개한 겹눈들이 수줍은듯 숨어있다.

먼 발치의 @*#!에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커다란 @*#!가 한 덩이.

그 너머에는 붉고, 노랗고, 끈적이는 @*#!가 수북하게 자리하고 있다.


@*#!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으니 지저귀는 작은 @*#! 두 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낯이 익다. 기억은 안나지만 언젠가 본 것 같은 @*#!다.

@*#! 보니 왜인지 조금, 기분 좋은 구토감이 차오른다.

그리고 마침 불어온 습하고 밀도 높은 악취가 구토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 적절하면서도 넘칠 정도로 과한 @*#!가 역한 쾌감을 선사한다.  


나는… 왜 이런 곳에…


@*#!는 아름답지만, 이상하게 현실성이 없다.

마치 한 차원 너머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 처럼.

이런 곳은 본 적이 없다. 꿈에나 나올 법한 곳이다.

꿈? 그래. 꿈이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 꿈에 들어온 거지?

꿈을 꾸기 전엔 뭘 했지?

뚝뚝 끊긴 선을 이어붙이듯 기억을 더듬어본다.


나는 분명… 


"아…"


분명… 분명…


"미안… @*#!…"


기억이 안나.


왜인지 얼굴이 시큰거려온다.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두 다리에는 힘이 넘친다. 

그래도, 주저 앉으려던 참이었다.


[메이!!!!]


가래가 끓고 거품이 부글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가 저편에서 부터 곧장 나를 향해 달려온다.


"지니야!"


지니야? 내 입이 멋대로 나불댄다. 

아, 맞아. 저건 지니야다. 

나는 지니야와 해후한 것이 너무나 기뻐 곧바로 등을 돌렸다.


[거기 서! 이 씨발년아!!!!]


"꺄아아악! 따라 오지 마!!"


지니야의 모습을 한 @*#!가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속도를 높혀 달려온다.

나는 달린다. 도망친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춘다면 저 @*#!에게 붙잡힌다.

절대 잡히면 안된다.

잡히게 된다면 분명… 

…모르겠다. 어쨌든, 잡히면 안된다.


[대장님대장님대장니임!!!]


또 다른 @*#!가 눈 앞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기어온다.

마치, 다리가 네 개 뿐인 절지동물 같다.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머리 부위로 보이는 곳에는 촉수가 여러가닥, 단발 모양을 취하고 있다.

그 단발 모양으로 보건데, 저 @*#!는 다이카다.


"비켜!! 다이카!!"


나는 만면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이카의 모습을 한@*#!를 피하지 않고 달려간다.


[살려줘어!!!!]


가까이 다가온 @*#!는 앞 다리를 번쩍 치켜들고 내려치려든다. 

나는 피하지 않고 @*#!를 들이받았다.


[갸아아아아!!]


부글거리고 그르륵 거리는 가래 낀 비명과 함께 다이카의 모습을 한@*#!는 펑- 하고 풍선 처럼 터져버렸다.


"아하하하하하하!!"


몸에 튄 @*#! 육편이 역겨워 절로 표정이 찡그려진다.

찡그리려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나 자신도 놀랄 정도의 광소였다.


[메이메이메이메이!!!!]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공중.

그르륵 거리는 목소리는 한 명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밴시의 모습을 한 @*#!가.

@*#!는 허리에 달린 양 팔을 기동장비 삼아 퍼덕거리며 곧장 내게로 날아온다.


"싫어! 저리 가!!"


날아드는 @*#!는 휘적대는 내 팔에 맞아 다이카의 모습을 한 @*#!와 다를 것 없이 터져나간다.  


"가라고… 가라고 했잖아!!"


경고 했어…  난 경고 했다고…


"꺄악!"


정신 없이 도망치던 나는 고꾸라진다.


[혼자 가려는 거야…?]


원인은 내 발목을 움켜 잡은 눅눅한 촉수 같은 @*#!.

그르륵 거리는 목소리로는 구별 할 수 없었어도, 그 촉수가 실피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니야의 모습을 한 @*#!는 여전히 멈출 줄 모르고 나를 쫓아오고 있다. 


"실피드! 이거 놔! 지니야가… 지니야가 쫓아온다고!"


[또 우릴 버리려는 거야…?]


실피드는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구불거린다.


"버리다니! 내가 언제 너희를 버렸다는 거야!"


[우리도 데려갈 수 있었잖아.]


"몰라… 실피드…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아니. 넌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어야만 해.

 기억 나지 않는다면 기억 날 때 까지…

 널 찌르고 벨거야.

 찢어서 모두 먹어치울거야.]


발목을 움켜잡던 촉수가 뱀의 대가리 처럼 팽팽히 날을 세워


"아아아악!"


내 뱃속을 가르고 들어온다.


"흐갸아아… 아아아…!"


뱃속이 엉망진창으로 찢기고 휘저어지는 걸 바라보고 있으니


[메이…]


어느새 지니야 까지 쫓아왔다.


[우리가 널 반겨줄 줄 알았어?]

 

또 다시 노이즈가 낀다. 눈에, 귀에, 입에, 머리에.


"…또 다시?"


[넌 여기에 와선 안됐어.]


지니야의 두 손이 내 목을 감싼다.


"윽… 크윽…"


[아까 처럼 웃어 봐.]


들쑤셔진 뱃 속은 엉망인데 더해 이제는 숨쉬기도 어렵다.


[다이카를 죽였을 때 처럼 웃어 보라고.]


"하… 하하… 아하하…"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따를 수 밖에.


[이젠 도망 못 쳐.]


지니야의 과할 정도로 쩍 벌어진 입이 내 얼굴로 서서히 다가온다.


[네 몸을 가지면 살아날 수 있을까.] 


"그으으윽…!"


먹혔다. 얼굴이 뜯어 먹혔다. 눈과 코, 입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보인다.

지니야가 내 얼굴을 맛있게 씹어먹고 있는 것이 생생히 보인다.

@*#!들은 모두, 내장으로는 만족 하지 못했는가 보다.


유일하게 남은 귀에서 치지직 하는 노이즈가 점점 강해진다.

익숙한 노이즈다.


"빨리… 빠… 빨리…"


맞다. 잊을 뻔 했다.

꿈, 이건 꿈이다.

그런데 이상해. 너무 아파.

왜 아픈거야. 이건 꿈이잖아.

이젠… 못견디겠어. 

정말로 죽을 것 같아.

빨리, 빨리 꿈에서 깨게 해 줘.


잘못 했어. 두번 다시 여기에 오지 않을게.

실피드, 지니야… 이제 충분히 먹었잖아. 

너희가 나를 먹는다고 해서 내가 될 순 없어.

그러니까 제발, 이젠 그만 놔 줘.

그만 놔 줘.

나를 놔 줘.

놔 줘.


제발…


 



///



메…이…


머릿 속이 파도처럼 넘실댄다.

그 파도 위엔 머나 먼 옛 일 같이 느껴지는 것이 하나.

보지 못했어도 선명하고, 기억하지 못해야 함에도 기억하는 기억.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잊을 수 없다.

절규과 함포, 솟구치는 비명과 아드레날린, 사방으로 튀는 피와 땀으로 푹푹 찌던 날.

그 전함에서, 나는 내 대원들을 죽였다.


…메이!


내 손으로 직접 죽였느냐고? 

아니.

직접 죽인건 나앤이다.

다이카를,실피드를,밴시를,지니야를 죽인건 나앤이다.

나앤의 독단이었다.

지시도, 명령도 하지 않았다.

나는 축 늘어져 나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럼에도 모두 보았다. 보았을 것이다.

의식은 희미했어도, 나는 마치 놓칠 수 없는 영화의 명장면이라도 고대하는 양 그 생생한 현장을 모두 지켜보려 했다.


…메…이!


마침내 나앤의 손에 내 대원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

나는 울었다.

괴로웠다.

나앤의 품에 안겨 죄책감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그리고 그 안도와 죄책감과 괴로움과 대원들을 한데 모아 모두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도망쳤다.

온기로.

약으로.

꿈 속으로.   


"NG! NG! 똑바로 해욧! 벌써 4번째야!" 


"메이!"


"핫…!"


갑작스레 들려온 쩌렁쩌렁한 확성기 소리와 귓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괜찮아? 어디 안좋아?"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사,사사…"


사령관이다.


"사령관!?"


"뭐야…? 귀신이라도 본 것 처럼…"


역시… 라고 중얼거린 사령관은 내게서 거리를 벌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 옆에는 지금 막 다가와 그런 사령관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콘스탄챠가 있다. 콘스탄챠는 난처하다는 웃음을 짓고 있다. 콘스탄챠? 왜 여기에 콘스탄챠가 있지? 그러고보니 사령관도 여기에 있다. 


…여기?


"여긴 어디야?"


"어디긴, 갑판이잖아. 너 갑자기 왜 그래?"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


갑판? 사령관은 나의 어디가 이상한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서 나를 바라본다. 그런 사령관을 지나쳐 주위를 둘러보니, 꽃으로 가득한 순백색 갑판은 좌중으로 가득하다. 바닥에는 비단 같이 고운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그 카펫을 줄지어 서있는, 꽃단장을 한 오르카의 어린이들이 사령관과 다를게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대장, 멍하니 서있기나 하고 뭐 하는거죠? 벌써 4번째 NG에요."


인파 사이를 비집고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내게 다가온 것은… 나앤이었다. 나앤은 뒤돌아 카메라 뒤에서 씩씩대고 있는 페더에게 양해를 구하는 손짓을 해보였다.


"나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야? 나는 왜 이런 차림…"


허리께에서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신경쓰여 내려다 본 참이었다. 몸을 매만지며 살펴보니 나는 새하얀 숏 스커트 드레스 차림으로, 왼 손에는 꽃다발이 한아름… 부케를 들고있다. 


"…서약식?"


"그래요. 서약 씬. 영화 촬영 중이잖아요."


'정신 딴데 가 있어요?' 나앤 마저 사령관과 다를게 없는 표정을 지어보이고서 질린다는듯이, 다시 보라며 종이다발을 건넸다.




―5월의 신부―


#105 갑판, 야외, 낮.


푸른 바다와 그 바다 만큼 푸른 하늘의 아래, 오르카의 갑판에서 두 남녀의 서약식이 열리고 있다.

꽃단장을 한 어린이들의 에스코트를 받고 들어선 5월의 신부 메이는 먼저 입장해 있던 사령관과 나란히 선다.

좌중 일부와 둠 브링어의 대원들은 자리에 앉을 줄 모르고 감격에 겨운 시선으로 그 둘을 바라본다. 


사령관:(멋쩍은 웃음으로 소곤대며.) 드디어 이 때가 왔네… 메이.


메이:(수줍은 미소로 시선을 피하며) 오빠가 부끄러워 하면 어떡해…


소곤대는 두 남녀를 주례자인 라비아타가 불러 집중하게 한다. 어렵게 시선을 든 두 남녀는 담담히 주례사를 들어간다.

마침내 주례사가 끝나고 두 남녀는 부부로 인정 받는다.

맹세의 키스는 생략된다. 부부,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동시에 돌아선 부부는 손을 맞잡고 함께 퇴장하려 하지만 호라이즌과 발할라의 대원들로 이루어진 관문이 부부를 가로막는다.


네레이드:(힘찬 목소리로) 멈추십시오!


사령관:(눈가를 가리며) 이럴 줄 알았다…


테티스:(웃음기 없는 얼굴로) 예상하셨다면 얘기가 빠르겠죠. 사령관 님, 순순히 부부로서 인정 받으실 줄 아셨습니까?


사령관:봐 줘…


메이:(사령관에게 팔짱을 끼며) 그냥 보내주면 안 돼?


네레이드:(무시하며) 217x년 5월 5일. 인류의 희망, 오르카의 총사령관, 인류 저항군의 통수권자… 그리고…


테티스:(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오르카 유일의 남성! 그리고 그런 유일한 남성을 독차지하게 된 못된…


네레이드:(당황하며) 테티스! 대사대로 해! 대사대로!

(좌중, 웃는다.)

테티스:(무시하며) 무슨 말 인지 아시죠? 아닌 척 하더니 어느새 사령관 님 옆을 꿰차고서는… 절대 순순히 못보내요.


네레이드:(어이없어하며) 됐다… 에라이! 어쨌든 사령관 님! 그냥 못보내요! 메이 대장님도요!


사령관: 뭘 하려는건데!?


네레이드: 기개! 기개를 보여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사령관님이야 어쨌든, 메이 대장님은 곤란해 지실겁니다! 아직도 포기 못한 연적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시죠!? 

(좌중, 다시 웃는다. 몇몇은 분한 시선을 보낸다.)

테티스: 부끄러우시죠? 그러니까 빨리 빨리 진행할게요! 처음은 메이대장님을 태우고 팔굽혀 피기! 내려갈 때 '메이야!' 올라올 때 '사랑한다!' 총 10회, 쉬지 말고 하세요!


사령관: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메이, 올라 타!


메이: 오빠! 무리하지 마! 


     

……


……



       

베라: 메이 대장님을 들쳐매고서 스쿼트 20회, 확실히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금일 서약식의 모든 관문을 통과하셨습니다.


님프: 사령관 님, 메이 대장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좌중 모두 일어나 연호한다.)


좌중: 키스 해! 키스 해!


사령관: 아니, 잠깐…


메이:(사령관을 올려다본다.) 오빠… 난 준비 됐어…


사령관: 괜찮겠어? 일부러 뺀거잖아.  


메이: 괜찮아.


사령관, 머리를 긁적이다가 좌중을 둘러본다. 그리고 별 수 없다는듯 몸을 굽혀 메이에게 가볍게 키스한다.

메이, 가볍게 키스한 사령관을 끌어안고서 계속 키스해 간다.

좌중, 환호한다.




////



"이게… 진짜로…"


"대장, 진짜 왜그래요? 아까는 못하겠다고 도망치질 않나… 그렇게 주인공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요."


내가? 나는 다 읽은 각본을 나앤에게 돌려주고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긴장했는지 물을 들이키고 있는 사령관은 서약식의 교과서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다. 잘 다려진 하얀 와이셔츠, 그 위로 걸쳐입은 검은 색 정장, 거기에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앙증맞은 나비넥타이로 포인트를 줬다. 구두는 정장과 한맞춤이었는지 같은 검은 색에 적당한 광을 내고 있고 손목에 찬 시계는 메탈소재의 부담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다.


사령관의 차림새라면 필시 오드리가 코디 했겠지만 왜인지 영 오드리의 색깔이 묻어나오지는 않는 것 같은, 좋게 말하면 수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눈에 띄는 멋이 없다. 아마도, 사령관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탓일 거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딱 맞았는지, 페더의 옆에서 팔짱끼고서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는 오드리의 표정은 아쉽게도 보이고 언짢게도 보인다.


"대장, 괜찮은 거 맞죠?"


고개를 들이민 나앤은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다. 나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드레스의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래. 분명 영화촬영 중이었지? 호드 놈들이 기획한 거잖아. 저기 있는 페더가 감독인거고. 다 기억났어."


있는대로 전부 말해줬는데도 나앤은 미덥지 못한 기색을 거두지 못한다. 뭐가 문제지? 대사는 전부 다 외웠다. 이제 나앤이 할 일이라곤 저기 보이는 좌석으로 돌아가 나와 사령관이 찐하게 키스 하는 것을 손가락 빨면서 지켜보기나 하는 것이다.


"…기억났다고요?"


"그렇다니까? 문제 있어?"


"…아뇨. 마치 방금까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들려서요. 괜찮으면 됐어요."


흥, 가여운 나앤. 촬영이라지만 부러운거겠지. 나앤이 앉은 좌석 근처에는 사령관을 사이에 두고 나를 견제하고 또 견제하던 녀석들의 얼굴도 보인다. 용, 레오나, 마리, 칸… 이 녀석들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는 듯 보여도 아마 지금 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거다. 특히 레오나. 눈을 가만두지 못하는게 뭔가 탓할 거리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거 없어. 탓할 거라면 네 자신을 탓해야지. 나와는 다르게 귀여운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걸 말이야.


그 뒤로 보이는 면면들은 아주 화려하다. 리제에 앨리스, 샬럿, 소완, 거기에 더해 블랙 리리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프네까지. 아 리리스랑 눈 마주쳤다. 표정은 둘째치고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게 똥마려운 개 같아서 볼만 해. 눈깔은 재수없게 노래가지고 화만 나면 부릅부릅 떠대는게 가끔은 무섭단 말이야. 변태 같기도 하고.


부끄러움은 한 때다. 나는 되찾은 여유로움을 보란듯이 뽐내며 다소 모자란 요소를 채워넣고자 갑판 한 켠에 뒀던 손가방을 챙겼다.


내 손에는 아담한 크기의 향수가 한 병. 향수에 살짝 스냅을 준 뒤에 공중에 뿌리니 라이트 플로럴 계열 특유의 섬세한 향이 머무는 공간이 창조된다. 나는 부러움에 몸부림치는 가여운 녀석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 공간을 여유롭게 걸어간다. 탑 노트에 머무는 블루벨은 난간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찰떡궁합이라 시각과 후각 모두를 농후하게 채워주지만 베이스에 깔린 화이트 머스크는 사령관이 의식도 못한 사이 차분함과 포근함을 전달해 줄 것이다. 거기에 마냥 순하지만은 않은 야성적인 매력까지. 정말이지 메이라는 개체와 이보다도 어울릴 수가 없는 향이다. 분명 사령관도 만족해 줄 것이다. 아니, 확신해. 사령관은 분명 만족해.


"메이."


"응, 사령ㄱ…"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사령관은 바로 앞에 서서 너무나 따뜻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사람, 이렇게나 훤칠했었나?

시원하게 뒤로 넘긴 머리를 한 사령관은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사령관이 조금 낯설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머뭇대고 말았다.


"또 왜 그래, 메이?"


"아, 아니… 그게…"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몇 번이고 곁눈질하자 사령관은 내 눈치를 알아채고 뒤로 넘긴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역시… 별로 안어울려?"


"아니! 안어울린다기 보단… 좀…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 역시 내리는 편이 낫나…"


"아냐아냐! 그런 어색함이 아니라 그… 좀 낯설어서? ……엄청 잘어울려."


이,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했던 적이 있던가? 쥐어짜내 말하고 나니 코와 귀에서 김이 새나오지는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래서야 저 불쌍한 녀석들에게 보란듯이 행동한게 허사가 된다. 비웃음 사게 돼. 정신차려 메이. 이건 그냥 촬영이잖아. 진짜로 서약을 하는게 아니라고.


"그래? 고마워. 메이도 엄청 예뻐."


…이렇게나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건 반칙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지니까. 위험한 생각을 하고 마니까.

……조금, 욕심이 생긴다.

이게 촬영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나를 사랑한다면.        

그러면, 이 서약식은 진짜였을텐데.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나는 동침은 커녕, 입맞춤도 포옹도 아니라 손도 제대로 잡아 본 적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자리에 서서야 다시금 느껴진다. 나는 갈길이 멀구나. 저 불쌍한 녀석들을 불쌍히 여길 처지가 아니구나.

나앤이 매일같이 길길이 날뛰던 것도 이해가 된다.

쓴웃음이 지어진다. 

다행이도, 본 사람은 없다.           

그걸로 됐다.


다시 촬영하기 위해 사령관과 나란히 서자 사령관이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가볍게 끄덕인다.

덜덜거리고 땀이 뭍어나오기 시작한 손을 오므린다. 준비는 끝났다.


"자, 그럼. 키스신부터 다시 갈게요. 사령관 님이 먼저, 그 다음 메이 대장님이 리드. ok? 아셨죠?"


'마지막 씬이니까 제대로 집중하세욧! 3…2…1…'  신경이 곤두 선 페더의 울리는 목소리가 나를 한껏 긴장시킨다.


큐!


아 그리고, 각본은 괜찮은데…


"ㅇ…"


역시 그 대사 만큼은 잘못 됐다.


"오, 오…"


사령관을 오빠라고 부르라고? 막상 하려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오…"


"메이."


"오… 응!?"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니 보이는 것은, 아니, 보였던 것은 사령관의 맑고 커다란 눈.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입술에서. 말랑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혀에서.

모두 하나같이 낯설다.


"읍!? 으읍!?"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던 나를 이해시켜준 것은 먼 곳에서부터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웅성거림이었다.


'애드리브.'


머뭇거리던 나를 보다 못한 것일까, 아니면 사령관 본인이 원했던 것일까. 나는 경직되버린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사령관의 어깨에 올려둔 손에 힘을 주고서 혀에서 느껴지는 혀에 모든 걸 내맡기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좌중이 조금 늦은 환호성을 열렬히 보내온다.


각본대로라면 촬영은 여기서 끝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 나는 속으로 읊조려본다.



이 서약이 진짜였다면.


좀 더, 그를 느꼈으면.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차라리, 시간이 멈췄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불가능한 것들을 바라고 있자 불현듯, 그 목소리는 들려왔다.


[메이.]


누구야?


[일단, 주위를 한 번 보겠니?]


언젠가 들어 본 목소리다. 

나는 그 목소리에 따라 눈을 뜬다.


[네 바람대로 됐어.]


"사령관?"


사령관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혀도 멈췄다.

내 어깨를 감싸안은 채로, 몸이 멈췄다.

사령관 만이 아니다.

휘파람을 불던 내 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던 모든 좌중들도,

꺅꺅대며 박수쳐대던 요정같은 어린아이들도.

모두 멈췄다.


[어때? 기뻐?]


"이, 이런 건…"


아니야.

멈췄으면 좋겠다는 건 이런 걸 말한게 아니야.


[아니야? 그럼 뭘 바란건데?]


"전부 멈췄으면 했다는게 아니야!"


[분명 시간을 멈춰 달라며?]


"이, 이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완전히 멈추게 하면 어떻게 해!"


[욕심이 많구나?]


"……너 누구야?"


[그게 중요하니?]


"중요하고 말고! 시,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흥. 겁쟁이 따위가 바라는 건 많아서.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누구냐고! 대답 해!"


[누구긴. 널 여기로 데려온 장본인이지. 기억 안 나?]


"몰라! 내가 기억하는 건 지금이 촬영 중이라는 거 하나…!" [하나? 정말로? 그 것 밖에 기억이 안 나?]


"…몰라."


[초원도, @*#!도 기억 안 나? 다이카,실피드,밴시,지니야도 기억 안 나?]


"……"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돌려 줘."


[응? 뭘?]


"다시 돌려 줘! 다시 움직이게 해 줘!"


[구체적으로 말 해. 또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시간을 되돌려 줘!"


[구체적으로 말하라니까? 언제 어디로?]


"사령관 옆에 있게 해 줘! 전부 잊게 해 줘!"


[…좋아. 그렇게 해줄게.]


"빨리! 빨리!!!!"


[분명 네가 말했어. 전부 잊게 해달라고. 옆에 있게 해달라고.]


"빨리 돌려 줘!!"


치지지직-


(noise)





//////





"NG! NG! 똑바로 해욧! 벌써 8번째야!" 


"메이!"


"핫…!"


갑작스레 들려온 쩌렁쩌렁한 확성기 소리와 귓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괜찮아? 어디 안좋아?"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사,사사…"


사령관이다.


"사령관!?"


"뭐야…? 귀신이라도 본 것 처럼…"


역시… 라고 중얼거린 사령관은 내게서 거리를 벌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 옆에는 지금 막 다가와 그런 사령관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콘스탄챠가 있다. 콘스탄챠는 난처하다는 웃음을 짓고 있다. 콘스탄챠? 왜 여기에 콘스탄챠가 있지? 그러고보니 사령관도 여기에 있다. 


…여기?


"여긴 어디야?"


"어디긴, 갑판이잖아. 너 갑자기 왜 그래?"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


갑판? 사령관은 나의 어디가 이상한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서 나를 바라본다. 그런 사령관을 지나쳐 주위를 둘러보니, 꽃으로 가득한 순백색 갑판은 좌중으로 가득하다. 바닥에는 비단 같이 고운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그 카펫을 줄지어 서있는, 꽃단장을 한 오르카의 어린이들이 사령관과 다를게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대장, 멍하니 서있기나 하고 뭐 하는거죠? 벌써 8번째 NG에요."


인파 사이를 비집고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내게 다가온 것은… 나앤이었다. 나앤은 뒤돌아 카메라 뒤에서 씩씩대고 있는 페더에게 양해를 구하는 손짓을 해보였다.


"나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야? 나는 왜 이런 차림…"


허리께에서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신경쓰여 내려다 본 참이었다. 몸을 매만지며 살펴보니 나는 새하얀 숏 스커트 드레스 차림으로, 왼 손에는 꽃다발이 한아름… 부케를 들고있다. 


"…서약식?"


"그래요. 서약 씬. 영화 촬영 중이잖아요."


'정신 딴데 가 있어요?' 나앤 마저 사령관과 다를게 없는 표정을 지어보이고서 질린다는듯이, 다시 보라며 종이다발을 건넸다.

 


………


……



"이게… 진짜로…"


"대장, 진짜 왜그래요? 아까는 못하겠다고 도망치질 않나… 그렇게 주인공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요."


내가? 나는 다 읽은 각본을 나앤에게 돌려주고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긴장했는지 물을 들이키고 있는 사령관은 서약식의 교과서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다. 잘 다려진 하얀 와이셔츠, 그 위로 걸쳐입은 검은 색 정장, 거기에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앙증맞은 나비넥타이로 포인트를 줬다. 구두는 정장과 한맞춤이었는지 같은 검은 색에 적당한 광을 내고 있고 손목에 찬 시계는 메탈소재의 부담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다.


사령관의 차림새라면 필시 오드리가 코디 했겠지만 왜인지 영 오드리의 색깔이 묻어나오지는 않는 것 같은, 좋게 말하면 수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눈에 띄는 멋이 없다. 아마도, 사령관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탓일 거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딱 맞았는지, 페더의 옆에서 팔짱끼고서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는 오드리의 표정은 아쉽게도 보이고 언짢게도 보인다.


"대장, 괜찮은 거 맞죠?"


고개를 들이민 나앤은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다. 나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드레스의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래. 분명 영화촬영 중이었지? 호드 놈들이 기획한 거잖아. 저기 있는 페더가 감독인거고. 다 기억났어."


있는대로 전부 말해줬는데도 나앤은 미덥지 못한 기색을 거두지 못한다. 뭐가 문제지? 대사는 전부 다 외웠다. 이제 나앤이 할 일이라곤 저기 보이는 좌석으로 돌아가 나와 사령관이 찐하게 키스 하는 것을 손가락 빨면서 지켜보기나 하는 것이다.


"…기억났다고요?"


"그렇다니까? 문제 있어?"


"…아뇨. 마치 방금까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들려서요. 괜찮으면 됐어요."


흥, 가여운 나앤. 촬영이라지만 부러운거겠지. 나앤이 앉은 좌석 근처에는 사령관을 사이에 두고 나를 견제하고 또 견제하던 녀석들의 얼굴도 보인다. 용, 레오나, 마리, 칸… 이 녀석들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는 듯 보여도 아마 지금 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거다. 특히 레오나. 눈을 가만두지 못하는게 뭔가 탓할 거리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거 없어. 탓할 거라면 네 자신을 탓해야지. 나와는 다르게 귀여운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걸 말이야.


그 뒤로 보이는 면면들은 아주 화려하다. 리제에 앨리스, 샬럿, 소완, 거기에 더해 블랙 리리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프네까지. 아 리리스랑 눈 마주쳤다. 표정은 둘째치고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게 똥마려운 개 같아서 볼만 해. 눈깔은 재수없게 노래가지고 화만 나면 부릅부릅 떠대는게 가끔은 무섭단 말이야. 변태 같기도 하고.


부끄러움은 한 때다. 나는 되찾은 여유로움을 보란듯이 뽐내며 다소 모자란 요소를 채워넣고자 갑판 한 켠에 뒀던 손가방을 챙겼다.


내 손에는 아담한 크기의 향수가 한 병. 향수에 살짝 스냅을 준 뒤에 공중에 뿌리니 라이트 플로럴 계열 특유의 섬세한 향이 머무는 공간이 창조된다. 나는 부러움에 몸부림치는 가여운 녀석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 공간을 여유롭게 걸어간다. 탑 노트에 머무는 블루벨은 난간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찰떡궁합이라 시각과 후각 모두를 농후하게 채워주지만 베이스에 깔린 화이트 머스크는 사령관이 의식도 못한 사이 차분함과 포근함을 전달해 줄 것이다. 거기에 마냥 순하지만은 않은 야성적인 매력까지. 정말이지 메이라는 개체와 이보다도 어울릴 수가 없는 향이다. 분명 사령관도 만족해 줄 것이다. 아니, 확신해. 사령관은 분명 만족해.


"메이."


"응, 사령ㄱ…"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사령관은 바로 앞에 서서 너무나 따뜻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사람, 이렇게나 훤칠했었나?

시원하게 뒤로 넘긴 머리를 한 사령관은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사령관이 조금 낯설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머뭇대고 말았다.


"또 왜 그래, 메이?"


"아, 아니… 그게…"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몇 번이고 곁눈질하자 사령관은 내 눈치를 알아채고 뒤로 넘긴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역시… 별로 안어울려?"


"아니! 안어울린다기 보단… 좀…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 역시 내리는 편이 낫나…"


"아냐아냐! 그런 어색함이 아니라 그… 좀 낯설어서? ……엄청 잘어울려."


이,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했던 적이 있던가? 쥐어짜내 말하고 나니 코와 귀에서 김이 새나오지는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래서야 저 불쌍한 녀석들에게 보란듯이 행동한게 허사가 된다. 비웃음 사게 돼. 정신차려 메이. 이건 그냥 촬영이잖아. 진짜로 서약을 하는게 아니라고.


"그래? 고마워. 메이도 엄청 예뻐."


…이렇게나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건 반칙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지니까. 위험한 생각을 하고 마니까.

……조금, 욕심이 생긴다.

이게 촬영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나를 사랑한다면.        

그러면, 이 서약식은 진짜였을텐데.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나는 동침은 커녕, 입맞춤도 포옹도 아니라 손도 제대로 잡아 본 적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자리에 서서야 다시금 느껴진다. 나는 갈길이 멀구나. 저 불쌍한 녀석들을 불쌍히 여길 처지가 아니구나.

나앤이 매일같이 길길이 날뛰던 것도 이해가 된다.

쓴웃음이 지어진다. 

다행이도, 본 사람은 없다.           

그걸로 됐다.


다시 촬영하기 위해 사령관과 나란히 서자 사령관이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가볍게 끄덕인다.

덜덜거리고 땀이 뭍어나오기 시작한 손을 오므린다. 준비는 끝났다.


"자, 그럼. 키스신부터 다시 갈게요. 사령관 님이 먼저, 그 다음 메이 대장님이 리드. ok? 아셨죠?"


'마지막 씬이니까 제대로 집중하세욧! 3…2…1…'  신경이 곤두 선 페더의 울리는 목소리가 나를 한껏 긴장시킨다.


큐!


아 그리고, 각본은 괜찮은데…


"ㅇ…"


역시 그 대사 만큼은 잘못 됐다.


"오, 오…"


사령관을 오빠라고 부르라고? 막상 하려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오…"


"메이."


노이즈가 낀다.

사령관이 내 말허리를 끊었다.


"왜?"


"만약, 이게 진짜 서약이었다면 어땠을 거 같아?"


"에, 에?"


"말해 줘."


뭐야? 갑자기? 농담이 아니고?


"지, 진짜로?"


"응."


"…그, 글쎄. 조, 조조, 좋을 것 같은데…"

 

"그럼, 하자."


"진짜로?"


"당연하지. 자, 여기 반지."


사령관은 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낸다.

그 안에 있던 것은 그 말대로 진짜 반지. 그것도 에메랄드로 된 반지다.


"에메랄드가 5월의 보석이라고 해서… 음, 그래서 나름 신경 써 봤는데."


"……고마워."


"받아 줄래?"


무릎을 꿇고 내게 내밀어 오는 손에는 케이스에 담긴 에메랄드 반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지? 케이스 째로 받아야 하나? 반지만 받아야 하나?

머릿 속에 당황과 기쁨이 한데섞여 나는 어쩔 줄 몰라,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 나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이럴 때도 도움을 요청하는 내 모습에 나앤이 화를 내진 않을까 싶은 걱정이 일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풉."


짧지만 확실히 새어나온 웃음소리.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사령관?"


웃은 건 사령관이다.


"메이."


몸을 일으킨 사령관이 나를 내려다본다.

내려다 보는 사령관의 얼굴은, 없다.

그리고 흐물거린다. 마치 움직이는 토기의 무늬 처럼. 물결 처럼.


"진심인 줄 알았어?"


"어, 어?"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을 새도 없이, 사령관은 일변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내가 진짜 너랑 서약 할 거라 생각했어?"


"서… 아니, 잠깐, 사령관, 갑자기 왜 그래?"


"사령관? 내가? 내가 네 사령관이라고?"


"무서워… 사령관. 장난 치는거야?"


"제대로 봐. 내가 네 사령관으로 보여?"


사령관의 얼굴에 일던 흐물거림이 점점 잦아들더니 서서히 제대로 된 이목구비의 형태를 띄기 시작한다.


"…아."


"나 알지?"


마침내 다시 생겨난 이목구비는, 얼굴은,


"아아아…!"


"킥킥, 병신…"


그 악마의 얼굴이다.


"아아아아아아악!"




////// 




"NG! NG! 똑바로 해욧! 벌써 384903번째야!" 


"메이!"


"핫…!"


갑작스레 들려온 쩌렁쩌렁한 확성기 소리와 귓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괜찮아? 어디 안좋아?"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사,사사…"


사령관이다.


"사령관!?"


"뭐야…? 귀신이라도 본 것 처럼…"


역시… 라고 중얼거린 사령관은 내게서 거리를 벌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 옆에는 지금 막 다가와 그런 사령관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콘스탄챠가 있다. 콘스탄챠는 난처하다는 웃음을 짓고 있다. 콘스탄챠? 왜 여기에 콘스탄챠가 있지? 그러고보니 사령관도 여기에 있다. 


…여기?


"여긴 어디야?"


"어디긴, 갑판이잖아. 너 갑자기 왜 그래?"


기억이 안나.


갑판? 사령관은 나의 어디가 이상한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서 나를 바라본다. 그런 사령관을 지나쳐 주위를 둘러보니, 꽃으로 가득한 순백색 갑판은 좌중으로 가득하다. 바닥에는 비단 같이 고운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그 카펫을 줄지어 서있는, 꽃단장을 한 오르카의 어린이들이 사령관과 다를게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대장, 멍하니 서있기나 하고 뭐 하는거죠? 벌써 384903번째 NG에요."


인파 사이를 비집고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내게 다가온 것은… 나앤이었다. 나앤은 뒤돌아 카메라 뒤에서 씩씩대고 있는 페더에게 양해를 구하는 손짓을 해보였다.


"나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야? 나는 왜 이런 차림…"


허리께에서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신경쓰여 내려다 본 참이었다. 몸을 매만지며 살펴보니 나는 새하얀 숏 스커트 드레스 차림으로, 왼 손에는 꽃다발이 한아름… 부케를 들고있다. 


"…서약식?"


"그래요. 서약 씬. 영화 촬영 중이잖아요."


'정신 딴데 가 있어요?' 나앤 마저 사령관과 다를게 없는 표정을 지어보이고서 질린다는듯이, 다시 보라며 종이다발을 건넸다.

 


………


……




"메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싫어! 따라오지 마!"


각본을 모두 읽고 고개를 들자마자, 모두가 손에… 엔진톱을 들고서 나를 맹렬히 쫓기 시작했다.


"갈라 죽일테다! 이 씨발년아!!!! 거기 서!!"


"그만해! 진짜로 죽어! 그런 거에 닿으면 진짜로 죽는다고!!"


"죽어죽어죽어죽어!!"


갑판의 끝까지 몰렸다.

사령관과 그 악마가 보란듯이 하이파이브를 해보이고서 전기톱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는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서서히, 서서히.


"히히히. 씨발년."


다가올 만큼 다가오자, 내 애원은 웅웅대는 전기톱 소리에 파묻힌다.


"꺄아아아악!"


높이 치켜든 전기톱이 내게 내리 꽂히는 순간, 나는 비명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 


  

[NG! NG! 이 씨발 창년아!! 똑바로 하라고!!!  벌써 7534639번 째 잖아!]


[됐어! 때려 치워!]


[그냥 쳐죽여!]


[도망간다! 잡아!] 


[메이이!!!!!!!!!!!]


[또 전함 때 처럼 도망 칠 수 있을 줄 알아?! 도망 못 쳐! 이번엔 도망 못친다고!]


[산채로 찢어 죽여주마!!]


모르겠다.

모두가 왜 저러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상하다.


뛴다. 

달린다.

도망친다.

갑판에서 갑판으로.

또 갑판에서 갑판으로.

갑판에서갑판으로갑판에서갑판으로갑판에서갑판으로

끝도 없이, 또 끝도 없이.

잡히면, 그 때는 끝난다.

그리고 또 쫓긴다.

또 쫓긴다?

그래. 또 쫓긴다. 

페더의 모습을 한 그 악마의 말대로 7534639번 째로 쫓기고 있다.

다음은 7534640번 째로 쫓기겠지.

갑판이라는 이름의 사냥터에서.

서약식이라는 이름의 살육극에서.


끝 없이.

끝 없이.

끝 없이.


계속.

영원히.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어때. 메이?]


"…"


[이제 좀 정신이 드니?]


"…"


[도망치느라 대답할 틈도 없나보구나.]


"…"


[그냥 잡혀.]


"…"


[죽어.]


"…"


[그게 싫다면 계속 그대로 도망쳐.]



"…"


[영원히. 영원히.]


[그게 네게 허락 된 유일한 것이니까.]

  




///////




"…"


통신실에 들이닥친 발키리가 발견한 것은,


"…젠장."


머리가 터진채로 통신기 위에 엎드려있는 유미의 시체였다.





///////



오랫만에 왔음.


이제 진짜 엔딩으로 접어들었음.


약에 취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제정신이 아닌거 묘사하기가 어렵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