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할 정도로 아득한 지평선의 검은색과 모래의 황갈색과 드문드문 보이는 초목의 초록색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 하지만 그래서인지 내 정신은 또렷하게 눈떠있다. 외로움이 맑은 영혼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내 옆에 있는 유일한 온기가 마음을 채워져서 그런 것일까.


나와 칸은 잠시 이 황량한 길을 걷고 있다. 오늘 오르카는 전체적으로 휴식을 가졌다. 철충의 동면기에 맞춰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세력도 잠시 조용해졌다. 혹시 무슨 간계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다소 있었으나 대부분은 오랜 전쟁에 지쳐 짧은 휴식이라도 가져야만 했다. 게다가 오르카의 병력은 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나니 지금 이렇게 나도 사랑하는 연인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사령관. 춥진 않나? 사막의 바람은 만만한 것이 아닌데."


사막의 조용한 환영에 넋이 나간 내 옆에서 걸음을 맞춰 가던 칸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번 고개를 돌려 얼굴을 바라보니 평소 무표정한 표정에서 살짝 눈꼬리가 처진 모습이었다.


"괜찮아. 나도 평범한 몸은 아니잖아? 이 정도는 끄떡없다구."


"훗. 내 남편은 대단도 하군."


내 멋없는 센 척에 칸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조금 머쓱하긴 했지만, 칸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수치는 몇 번이고 견뎌낼 수 있다.


"그래서.... 이 사막에 대한 감상평은 어떻나? 기분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조용한 게 내 마음에 드네. 주변에 있는 게 딱히 없어서 나 혼자 있으면 심심할 것 같긴 해."


칸에 질문에 최대한 성실히 답해준다. 종종 칸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탓으로 돌리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를 이상적인 지휘관으로 만들어준 습관이겠지만, 같이 있을 때는 될 수 있으면 보고 싶지 않은 습관이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최고로 빠른 바람이잖아? 그러니 이 정도 바람은 산들바람 정도지."


"하하하. 그게 뭔가. 역시 사령관은 가끔 이상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래서, 싫어?"


내 재미없는 농담에 고맙게도 크게 웃어준 칸은 팔짱을 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


"아니. 당신이 좋다면.... 나도 좋다. 당신은 재밌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일 테니 나도 재밌다."


음. 딱히 재밌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 다음부터는 이런 어이없는 농담은 줄여야겠다. 이러다가 내 시원찮은 대답에 전부 웃게 되면 그것도 그것대로 어색하리라.


내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니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해진 머리는 다시 이 사막을 다시 가득 담았다. 자연스레 감탄하게 되는 풍경이다. 이게 자연의 위엄인가.


"칸은 어때? 이곳이 마음에 들어?"


"음... 거의 매일 보던 곳이어서 솔직히 큰 감동은 없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라면 미안하군."


대답자체는 딱히 이상할 건 없는 대답이다. 칸에게는 이 전장이 마치 직장이었을 것이고 파쇄기의 종이와 프린터기의 잉크만이 휘날리는 평범한 직장과 달리 이곳은 피와 살점이 튀는, 종종 들리는 비명과 폭음이 배경음악으로 깔린 곳 아닌가. 싫어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게 정상적일 테지.


"칸."


"음? 무슨...일이지?"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칸이 나를 쳐다본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 휴가 동안 금지. 난 칸이랑 놀러 온 거지 사과받으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만 미안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 알겠다. 미안.... 앗, 저기, 그...... 어......."


칸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의외의 모습을 보는 것은 항상 즐겁다. 그 대상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라면 더더욱.


"큭큭, 됐어, 됐어. 방금건 무효. 앞으로 잘 적응해봐."


내 웃음에 칸은 심통이 난 표정이다. 아마 내가 놀려먹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재미있게 칸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도중 한순간에 칸의 표정이 풀어졌다.


"후후.... 도대체, 언제 이렇게 달콤한 남자가 되었나. 분명 처음에는 내 관등 성명만 들어도 벌벌 떨었던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거늘."


사실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생각해봐라. 칸처럼 키도 크고 딱딱한 말투의 여자가 내게 무슨 명령이건 간에 내리기만 하라고 하면 쫄지 않을 남자가 얼마나 있겠나. 그 짙은 워 페인트도 한몫했고.


"글쎄. 나도 좀 적응이 되었나 보지. 아니면 성격이 많이 바뀐 거일 수도 일고."


아마 후자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절대로 자상한 성격이 못 된다. 여자에게는 더 그랬고. 나는 남들 앞에서 쉽게 입을 닫아버리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여기서야 내가 입을 다물면 진행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고 말은 사람의 성격을 바꾸기에 충분한 힘을 가졌기에 이런 성격이 돼버린 게 아닐까 싶다.


"혹시 성격 바뀐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좀 큰일인데..."


"아니, 좋다. 아주 좋다. 내가 말솜씨가 부족한 게 후회스러울 정도로 좋다."


어느 새 칸이 내 품에 파고들었다. 쌀쌀히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과 대비되는 작지만 뚜렷한 온기. 술의 온기처럼 날 취하게 하는 온기다.


"사랑한다. 사령관. 이렇게 옆에 있어다오."


"나도 사랑해. 당분간은 이렇게 있자."


밤은 길다. 적어도 이 바람이 멎을 때까지는 기다려주리라.




바람이 멎어 들고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만히 안고만 있어도 행복했지만 그래도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더 낭만적이지 않나. 걸어도 걸어도 풍경은 변함이 없다. 언덕의 형태가 다르게 보인다든지, 보이는 초목의 숫자의 차이가 있다던 가의 사소한 차이점 외에는 어딜 보나 다 비슷비슷한 풍경이다.


칸은 왜 이런 황량한 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나는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칸은 오랜 시간 동안 이 전장에서 살아왔다. 수많은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 중에는 불가피하게 사상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적은 강하고 아군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칸은 모든 죽음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수많은 생명이 지나쳐갔지만, 칸의 마음에는 그들의 기억이 못 박힌 채 남아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무리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본인이 조금만 무리를 하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칸은 조금은 무리해도 문제없을 만큼 강한 힘을 가졌으니.


육체의 문제는 없다. 하지만 정신의 문제는 어떤가? 나는 아직도 칸이 큰 슬픔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과거의 기억에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정신도 육체만큼이나 강건하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고통스럽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사령관은 사막을 생각하면 뭐가 떠오르나?"


걱정 섞인 적막을 깨트린 것은 칸의 목소리였다. 무슨 말을 원하는 걸까. 단순히 내가 이 사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음.... 살기 힘든 기후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발전으로 점점 더 사막이 넓어졌다는 것?"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답 또한 아닐 것이다. 사실 인간관계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나는 내 대답으로 칸의 생각을 알고 싶어 일부로 사전적인 답만 말했다.


"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쓸모없는 땅은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의 수고가 녹아난 장소지."


호흡을 다가듬는 숨소리가 들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


"몽골이 대제국으로 위용을 떨칠 때도 이 사막을 가로질러 아시아를 정복해나갔었고, 그 이후 제정러시아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정복활동을 펼쳤을 때도 이 사막을 이용했었지. 이 쓸모없는 땅에는 수많은 피의 역사가 잠들어있다."


칸의 표정은 알기 힘들 때가 많다. 저렇게 무표정할 때는 화가 나 있는지, 슬퍼하는지 알기 힘들다. 나는 최대한 말에 귀를 기울여 그녀의 감정과 생각을 알아내려 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많은 전쟁이 있었다. 연합전쟁과 여러 테러 단체의 파괴 공작이 있었지. 그 모든 것이 이 모래 아래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흠...."


"이 아래에 묻혀있는 것 중에선.... 내 전우들의 것도 있다. 그들의 시신이나 생전 사용한 물품 등이 있지. 그렇게 그들은 여기 묻혀있지만 나만 아직 운 좋게 이 땅 위에 살아있지."


"그렇게 많은 생명이 이곳을 거쳐 갔지만.... 보이다시피 변함없이 그대로지. 이런 부분은 바다와 비슷하겠군. 차이점이 있다면 많은 생명이 태어난 곳은 바다고, 사막은 많은 생명이 죽어간 곳이라는 게 차이점일까."


"칸은.... 사막이 싫어?"


"글쎄.... 지금 와서는 딱히 싫지 않다. 조용하고 쓸쓸하니 생각 정리하기에 좋지 않나. 이렇게 사령관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지 딱히 슬픈 생각도 들지 않는다."


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주었다. 어쩐지 눈물이 보이는 이유는 바람 때문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날 걱정해주는군. 생각해보니 그때 위로도 참 도움이 많이 됐는데."


"그때라면.... 낙원 사건 때 말이야? 난 그때 그냥 안아주기만 했는데? 위로는커녕 제대로 말도 못 해줬어."


스쳐가는 바람이 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은 깨어지는 보석처럼 찬란히 흩어진다.


"나는 내 버팀목이 필요했을 뿐이지, 말은 필요 없었다. 고맙다. 사령관..... 덕분에 나는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어."


서로 다가온 입술이 포개어진다. 서로의 온기를 가슴속에 나눠주는, 짧은 교환식이 있었다.


"지금은.... 다 괜찮아졌어? 이제는 옛 기억들이 아프진 않아?"


"그래. 다 괜찮다. 지금은 그저 이 짧은 휴가를 즐기고 싶다. 한탄 들어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


"아냐.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 언제나 내가 필요한 때 말해줘. 그러기 위해 같이 서약도 한 거니까."


"하핫. 알겠다. 그때는 큰 목소리로 불러주마. 그러니 항상 어느 정도는 시간을 비워두라고?"


"물론이죠, 아내님. 그럼 슬슬 잠자리를 만들어볼까요?"


"...네, 당신.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요."


어색한 존대 이후에 우리는 큰 소리로 웃었다. 모든 슬픔이 가려질 정도로 기쁜 웃음이었길 나는 바란다.











"칸?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치는군. 역시 전직 여행가는 뭔가 다른 건가?"


"여행가는 무슨... 돈 모일 때마다 여행가고 시간 생길 때마다 캠핑가는 놈팽이였는데 뭐."


사령관은 텐트를 치고 나는 밥을 준비한다. 사령관은 능숙하게 해냈지만,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요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전투식량을 데우는 정도가 가장 큰 작업이었다. 휴가를 오기 전에 오르카의 요리사들에게 간단히 요리를 배워왔지만, 막상 하려니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지 막막하다.


"읏차... 여긴 다됐어. 칸은 어때?"


"이쪽은... 음...... 준비 중이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오늘 저녁 메뉴는 비프 스튜와 같이 곁들여 먹을 빵과 샐러드다. 빵이나 샐러드는 자르거나 섞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메뉴지만 메인 메뉴인 비프 스튜가 문제였다. 재료도 많이 필요하고 조리법이나 조리 시간도 꽤 까다로웠다. 적어도 요리치인 네게는 그랬다.


"그럼 나는 빵이나 썰고 있을게. 칸은 하던 거마저 해줘."


"그래. 미안.... 아니, 고맙다. 맛있는 저녁 식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보지."


식사 준비는 본디 내가 하고 싶었건만, 미안하게도 사령관의 손을 빌리게 되었다. 메인 메뉴를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욱 샘솟았다.


잠시후, 빵과 샐러드를 만들고 빤히 날 쳐다보던 사령관이 입을 떼었다.


"난 다했는데... 좀 도와줄까? 아무래도 같이 만들면 빠르않겠어?"


자상하다. 모든 언행이 나에 대한 배려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지금은 아쉽게도 그 배려는 사양하고 싶었다.


"말은 무척이나 고맙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서 해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걸 대접하는 재미를 알아버렸거든."


이 말을 들은 사령관은 작게 소리 내며 웃었다. 해본 적 없는 말을 하니 묘하게 쑥스러웠는데, 저 미소를 보니 기쁘기만 하다. 언제 이렇게 사랑에 쉬운 여자가 되어버렸을까.


사령관은 내게 다가와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우리는 소곤소곤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오르카에서의 생활이나, 작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야기가 끝을 보이던 중 어느 새 요리가 거의 다 완성되었다. 남은 것은 고기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뚜껑을 닫고 옆을 보니, 오늘 많이 돌아다녀서 힘들었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사령관은 얕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그의 긴 속눈썹이 먼저 보였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은 아마 처음 일터이다.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옛 기억에 빠지기 시작했다.


케시크, 내 원래 이름이다. 나는 이 이름을 가졌을 때가 그나마 멸망 이전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단순히 돌격하고 적을 죽이고 아군을 살리며 됐으니까. 죽음에 가까운 삶이었지만, 언제는 그렇지 않았나. 많은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을 때, 나는 가장 행복했다.


그러다 우연하게 나는 지휘관이 되었다. 내 전장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본 인간들의 결정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불만을 품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었고 내가 더 많은 전우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기쁠 정도였다.


이 바보 같은 생각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얼마 가지 못했다. 내가 이끄는 호드는 이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더 많은 공적도 세워냈지만, 나에게는 자매들의, 부하들의 삶이 더 소중했다. 그러나 전쟁은 더 치열해져만 갔고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나는 격류에 몸을 맡긴 물고기처럼 나 혼자서 헤쳐나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더 무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리해서 작전을 수행할 때마다 적지만 확실하게, 희생자가 줄어들기는 했으니까. 무의미한 숫자라고 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무의미한 목숨 따위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만큼은 변함없다.


하루하루 무리를 해가면서도 작전을 수행하던 어느 날 발목을 다쳐 수복실 신세를 지게 된 일이 있었다. 기동력은 호드의 생명이었기에 기동력에 중요한 발목을 다쳤다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더라도 쉴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렇게 쉬는 동안 나는 부하들의 무사 귀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하지 않았으면 배신 받지도 않았을 텐데, 멍청하게도 기적 따위를 바라는 내게 잔혹한 현실이 들이닥쳤다. 내가 수복실에 있던 며칠 동안 이뤄진 작전은 호드 사상 최대 사상자를 배출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정예 부대원들도 전부 죽거나 전투 불가 판정을 받고 분해실 행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무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내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내 주제대로만 행동했다. 그 사이에 생기는 사상자는, 나 가슴에만 묻어두고 계속해서 진격해나갔다. 나를 향한 혐오감은 그때부터 쌓이기만 했다.


내가 더는 인간의 명령을 받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라면 철충은 우리를 죽이는 것 자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고, 그 때문에 병력 보존이 조금이나마 쉬워졌다는 점이다. 인간의 멸망이 내게 행운이라니. 참 웃기는 운명이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 인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곧바로 인간이 있는, 이 오르카라는 곳에 합류했다. 인간에게 다시 명령을 받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이 생겼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세뇌 모듈이 내리는 명령에 반대할 수 없었고, 많은 전투로 지친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인간을 맞이하러 갔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다른 인간과는 달랐다. 날 보기만 해도 무서워했었고, 말도 못 걸었으며, 다른 부대원들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휘둘렸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인간도 있나, 싶었다.


위화감은 계속 이어졌다. 우유부단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휘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지식은 부족할지라도 확실한 목표와 신념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좋은 상관을 만나 마음이 놓였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봐왔던 인간 중에서는 처음에는 저렇게 잘 대해주는 인간들도 있었다. 나중에는 언제 그랬냐 듯이 우리를 도구나 노예취급을 했었고 말이다. 저렇게 친절한 인간도 언젠가는 정이 떨어지든, 본색을 드러내든, 우리를 다른 인간들처럼 대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마음의 준비를 해가며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부관을 맡게 되었을 때도 친분이 쌓였을 뿐이지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저 좋은 말상대가 됐을 뿐이다.




이런 내가 생각을 바뀌게 된 계기는 신기하게도 내 실패에서 비롯됐다. 큰 작전을 우리의, 정확히는 내 잘못으로 그르친 적이 있다. 우리는 오르카의 주축 부대 중 하나이고 그 주축 부대의 임무 실패는 다른 부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내 실수와 잘못으로 오르카의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었고, 당연히 이에 대한 문책이 있을 예정이었다.


전에 나는 임무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멸망 전 세계의 임무에서 말이다. 그때 나는 징계를 빙자한 온갖 고문을 받았었다. 그때만큼은 바이오로이드 특유의 강한 생명력이 저주스러웠다. 오르카에서의 징계도 그때와는 다를 수도 있지만, 옛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나에게는 아주 괴로운 상황이었다.


가장 큰 괴로움은 오롯이 내게만 징계가 내려지지 않았을 경우이다. 내 부하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단지 멍청하고 덜떨어진 지휘관의 명령을 순종적으로 수행했을 뿐이었다.


나날이 걱정과 근심으로 살아가던 와중 사령관에게 개인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말이 요청이지 잘못을 저지른 내게 그 요청에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었다. 나는 그저 부대원만큼은 징계를 피할 수 있게끔 변명 몇 가지를 생각해갔다. 내 말이 부족하다면 내 목도 내어줄 생각이 있었다.


각오를 하고 사령관실에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다.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들어가니 전전긍긍해 하는 사령관의 모습이 보였다.


"어, 왔어. 빨리 왔네."


억지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생각보다도 더 큰 일임을 짐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선에게 끝내야만 했다.


"사령관, 미안하다. 전부 다 내 실책....."


"저기. 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말을 끊은 사령관의 모습은 정말 불안해 보였다. 단순히 내 징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이지?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대답하지."


"음....."


미간을 쭈그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사령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의미로 몹시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아무 말 없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뭐?"


"아니, 나는 딱히 벌을 내리고 싶지 않아. 그때 상황은 병력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는데, 제대로 일 못했다고 벌을 주면 억울하지 않겠어? 오히려 사망자 하나 없이 복귀한 걸 칭찬하고 싶다고."


"......어...."


"근데 어물쩍 넘어가면..... 뭔가 반발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막상 뭐라고 하기에는 억울할 것 같고..... 참 애매하단 말이지. 그래서 칸의 지혜를 빌리고 싶어. 칸의 생각은 어때?"


전쟁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셀 수 없이 많다. 임기응변도 좋은 지휘관의 덕목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했다. 당연히 처음 겪어 보고.


"풉.... 하하핫....!"


"웃지 마.... 난 진심이라고....."


긴장이 풀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령관의 표정은 불쌍해 보였지만, 그 불쌍한 표정마저도 왠지 모르게 재미있었다.


"하하하.... 크흠, 웃어서 미안하군. 마침 내가 생각한 '변명' 중의 하나 적당한 게 있는데. 들어볼 텐가?"


"오! 뭔데 뭔데?"


"그건 바로...."


"바로...."


바로 기호품 보급 금지다. 우리 부대는 술이나 담대 같은 기호품이 다른 부대보다 소비량이 많다. 총 소모량은 크기가 작은 부대인지라 적어 보이지만 개인당 소비량은 1,2위를 다툰다. 그리고 대부분은 1위를 달성하곤 했다. 그런 부대에 기호품 금지라니. 부하들 처지에서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일 거다.


이 사실은 부대원들에게 널리 퍼지며 작은 절망감을 피워냈다. 특히 소형 카메라와 개인용 태블릿을 뺏겼을 때의 페더의 표정은 그야말로 톡치면 눈물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상태의 부하들에게 공적을 쌓으면 사령관과의 협상을 통해 다시 물품을 들을 가져올 테니 이번 달 지휘관 정기회의 때까지 열심히 하라고 했더니, 부대별 평가 1순위를 찍어버린 것은 재밌는 뒷이야기다.


다른 부하들의 기호품을 회수하고 마지막으로 페더의 태블릿을 회수하던 도중 정말 우연히 페더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는 별 관심이 없어 굳이 보진 않았었는데, 그 동영상들을 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화면속의 사령관은 흥분된 얼굴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고, 그 아래에 깔린 자매는 앙앙 신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복잡한 마음에 휩싸여 서둘려 동영상의 재생을 멈췄다. 난 아직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당혹감인지, 질투인지, 아니면.... 흥분인지 모르겠다.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절대 사랑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한 내가, 좋은 상관이라고만 생각한 남자에게 어느샌가 그 넓은 품에 안기고 싶은, 흠모하는 감정을 품고 말았다.


내 두근거리는 마음을 당장에라도 고백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나와 사령관은 너무 바빴고,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야속하게만 흘러갔다.


많은 자매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해갔다. 나와 같은 지휘관들도 물론이고 내 부하들도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선수를 뺏겨만 갔고 초조함은 늘어만 갔다. 더 두고 보면 내게 마음이 오기는커녕, 내 속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사령관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빼앗긴다니. 정말 추한 망상이다. 감히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과 부하들에게 그런 볼썽사나운 생각 따위를 하다니. 그렇지만.... 지휘관으로서의 나는 몰라도 한 명의 여자로서의 나는 기회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관을 맡던 어느 좋은 날에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모조리 고백했다. 왜 좋아하게 됐는지, 어떻게 사랑받고 싶은지, 그걸 위해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부끄러웠지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모조리 고백해나갔다.


"....사령관. 내 생각은 이렇다.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나?"


고백을 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거절당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 때문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내게 사령관은 내 품에 안겨주었다.


"사실 나도.... 너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사실 첫눈에 반했었거든. 언제 기회가 오려나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고백을 받을 주는 몰랐네. 정말 고마워."


사령관의 말은 꿈만 같았다.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니, 고백하고 싶었다니.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니.


"그럼 내 고백은 성공한 건가?"


기쁨과 의구심으로 부끄러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다시 한번 사령관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 내게 사령관은 말 대신 키스로 화답해주었다. 첫 키스는 오랫동안 지나갔다. 도중에 숨이 막혔지만, 기절할 정도로 기뻤지만, 이 기쁨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꾹 참아냈다.


".....이것으로 대답이 되었을까?"


"물론이다, 사령관.... 고맙다. 내 마음을 받아줘서."


연예의 시작은 고됐지만, 출발선을 떠난 기차는 빠르게 속도를 냈다. 얼마 가지 않아 서약을 하고, 첫날밤을 보내고, 이렇게 신혼여행을 오게 된 것이다.


이 여행은 내가 사령관에게 건의한 것이다. 이 사막은 내게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기에 나와 사령관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무사 무탈하다.


"자. 슬슬 일어날 시간이다. 이 잠꾸러기 남편. 식사하고 자야 하지 않겠나."


회상을 마친 나는 내 옆에서 곤히 잠들고 있는 사령관을 깨웠다. 작게나마 코까지 골아가던지라, 깨우기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자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나.


"....음..? 나 잠들었어...? 언제 잠들었데...."


"하핫. 식사 준비는 이제 다됐다. 먹기만 하면 된다. 그릇을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고기는 부드러웠지만, 간을 좀 세게 했는지 조금 짰고, 너무 오래 끓여서 야채 밑바닥이 조금 탔다. 마냥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사령관은 맛있게 먹어주었고, 많이 배고팠는지 내 몫까지 먹었다. 일부로 양을 적게 덜어 먹었는데, 좋은 판단이었던 것 같다. 내 몫까지 뺏어 먹었다고 생각했다면, 저렇게 행복한 표정은 짓지 않았을 것이다.


"후... 배부르다. 고마워, 칸. 먹분에 맛있게 먹었어."


"그런 말을 들이니 기쁘기만 하군. 왜 주방장이 음식에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지 조금은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하늘을 쳐다봤다. 사막의 별은 밝게 빛난다. 분명 오르카에서 볼 수 있었던 별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많이 다르게만 보였다.


"별이 잘 보이니 별자리도 몇 개 보이네, 혹시 별자리에 대해 잘 알아?"


"흠. 슬프게도 잘 알지 못한다. 사령관이 몇 개 알려줬으면 좋겠군."


"음.... 어디 보자....."


사령관은 별자리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그 별자리와 관련된 신화나 설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진지한 모습은 볼 때마다 설레는 모습이다.


한 평생 사막에서 떠돌며 살아간 내게 사령관, 당신은 오아시스 같다. 척박한 세상에 생명줄 같은 존재이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오르카의 모든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 연인, 주인 등.... 그대를 수식할 단어는 너무 많다. 우리가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많이 있다.


가끔 나는 당신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걱정된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려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당신의 사랑을 원하니 내 곁에 없을 때도 많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 당신이 가깝고도 멀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저건..... 음? 무슨 생각하고 있어? 별자리 생각은 아니지?"


"그래. 사령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이렇게 보니 좀체 시선이 별들로 향하지 않더군."


"에이... 완전 콩깍지 껴서 그런 거야. 그래도.... 칭찬받으니 기분은 좋네."


많은 것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셀 수 없이 많은 세월이 내 곁에서 지나갔다. 이런 내게.... 당신마저 날 떠나가면, 그때는 정말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끝없이 무너져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바랄게 없을 텐데...."


나는 사령관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다시 사령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 나도 평생 이러고만 싶네."


내 소망을 밝은 미소로 응답해줬다. 우리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향했다. 내가 봐온 수많은 사막의 하늘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당신은 날 위해 많은 고생을 해줬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이제 그 보답으로 내가 그대를 위해 싸우리라. 이 행복만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수고도 웃으면서 받아들이리라.


하늘의 별들아. 그대들이 보기에 우리는 어떤가? 나는 보기 좋았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나?


별들은 대답이 없다. 아쉽군, 나도 저 별들처럼 빛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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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과 사령관의 사이는 아직 풋풋한 신혼입니다. 기본 스킨이랑 웨딩 스킨 사이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쓰다가 말다가 엄청 고민 많이 했는데 잘 쓴 것 같지는 않네. 요즘 따라 참 글이 안 잡혀서 걱정이거든요..? 무용까지는 쓰고 싶은데 말이죠.... 궁금한 점이나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