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lastorigin/31553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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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리스님...?! 으, 아, 어떡하지..."

 

레프리콘은 정신을 잃은 인간 남성과 반쯤 정신이 나간 리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줄 몰라했다.

 

그 때, 무언가를 결심한 듯 노움이 평소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102번 레프리콘! 정신 차리세요!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저항군의 동료들은 철충들에게 쓰러지고 있어요!"

 

노움의 호통에 허둥대던 레프리콘이 침을 꼴깍 삼키고 차렷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폈다.

 

"지금 최우선 과제는 지휘부와 연락망을 구축하는 겁니다. 메인 주파수 외에도 예비 주파수로도 통신을 해봤나요?"

 

"네, 넵! 예비 주파수 외에도, 가용 가능한 모든 회선으로 접촉을 시도해 봤지만, 접촉이 불가능 했습니다..."

 

"저희에게 하달된 예비 집결지 좌표는 어디죠?"

 

"음, 이 근방의 해안가에 있는 등대 지하입니다. 현재 위치로부터 거리는 약 16km 정도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거기가면 퇴출 수단이 있을거라고..."

 

"좋아요. 그럼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죠. 제가 인간님을 업고, 리리스양이 척후로, 레프리콘양이 후방에서 화력 지원조로 움직일 예정이니 이동 준비 하도록 합니다."

 

노움의 신속한 지시에 레프리콘은 스틸라인식 경례를 하며 "넷!" 이라 대답한 뒤, 아까의 소란으로 이리저리 흩어진 군장 품목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레프리콘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 노움은 여전히 주저 앉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 리리스 양의 앞으로 다가갔다.

 

"리리스양! 정신 차리세요."

 

"주인님은... 흐윽... 바이오로이드를 미워하셔... 난 더 미워하셔... 죽는것 보다 더..."

 

"아뇨,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노움의 말에 리리스는 "네...? 하... 하지만..." 이라 힘없이 대답하며 노움을 바라보았다.

 

"만약, 인간님이 바이오로이드를 정말 싫어하셨더라면 저를 인질로 잡을 필요도 없이 제 총을 잡은 순간 저를 쏘셨을 거에요. 하지만, 굳이 인질로 잡으려고 하신것을 보면, 정말 심성이 나쁘거나 바이오로이드를 미워하실 분은 아니라 믿어요."

 

"하지만, 난... 난 더 미워하시는데... 흐윽..."

 

"리리스님은 저 인간님을 뵌적이 있나요?"

 

"네...? 무슨... 당연히 없죠..."

 

"그렇다면, 저 인간님이 리리스님을 싫어할 이유는 없죠. 그렇지 않나요?"

 

노움의 말에, 리리스의 눈에 생기가 살짝 돌아왔지만 그것도 잠시, 리리스는 바닥을 보며 우물거렸다.

 

"하, 하지만 분명 블랙 리리스를 싫어하신다구...."

 

"그건 다른 '블랙 리리스'죠.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리리스님이 아니라."

 

노움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의 리리스 님들을 저는 잘 모르지만, 높은 인간님들의 지시에 의해 무서운 일들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마 저 분도 그때의 리리스님들에게 안좋은 기억이 있으신 거겠죠."

 

"하지만, 제 눈앞에 계신 리리스님은 누군가가 휘두르는 공포의 도구가 아니에요. 저항군에서 손꼽히는 강자이고, 남들을 지켜주며, 컴패니언의 든든한 맏언니죠. 그런 리리스님의 솔직한 마음을 인간님께 계속해서 보여주신다면, 언젠가 인간님도 분명 리리스님을 과거의 기억과는 다른 '리리스'로 보게 될거에요."

 

노움의 말에, 리리스는 잠시 고민하다 눈물을 닦고 힘겹게 일어섰다.

 

"훌쩍.... 그래... 그래요. 제가 이렇게 주저앉아 있어 봤자, 주인님은 저를 과거의 망령들과 겹쳐 볼 뿐이겠죠..."

 

일어선 리리스는,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돈한 뒤,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블랙 맘바를 양 손에 들었다.

 

"...후, 스틸라인 여러분께는 컴패니언의 리더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는 못 볼꼴을 보여드렸군요.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노움양께는, 제가 큰 빚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양 손을 다소곳이 모은 뒤 꾸벅 인사를 하자, 이번엔 노움이 다시 수줍은 표정으로 허둥댈 차례였다.

 

"아, 아니에요. 가족이라면... 힘들때 일수록 도와야죠."

 

그 때, 옆에서 군장을 모두 챙긴 레프리콘이 노움에게 칼같이 경례를 하며 말했다.


"492번 노움 상병님! 이동 준비 완료 보고 드립니닷!"


"그, 그렇게 갑자기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어요, 레프리콘 양..."


다시 평소의 순둥순둥한 표정으로 돌아온 492번 노움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방금 말씀하신 걸 보니 역시 20년 복무기록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역시, 제조된지 겨우 4년 된 저같은 개체와는 차원이 다른 판단력 이십니다! 실로 저희 스틸라인의 귀감 이십니닷!"


"아, 아니에요. 자매님들과 그렇게 딱딱한 관계로 지내고 싶지는 않아요..."


"...!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492번 노움 상병님이 편하게 느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으으...."


스틸라인 자매간의 해프닝을 보면서, 블랙 리리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 때는 세계 최고의 석학들과 자본들이 투입되었지만, 지금은 을씨년 스러운 백색 콘크리트와 철근 뼈대의 정글에 불과한 삼안 생체 연구소를 뒤로하고, 21 스쿼드의 호위팀은 다시금 예비 집결지인 등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푸른 빛을 발하는 로자 아줄을 띄운채로 앞서가는 블랙 리리스의 뒤로, 차마 털어내지 못한 발포 콘크리트 가루가 덕지 덕지 붙은 환자복을 입은 채로 의식을 잃은 남성을 업은 노움과 기관총을 후방 경계 상태로 겨누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레프리콘이 뒤를 따랐다.


"492번 노움 상병님? 힘드시면 제가 인간님을 업고 후방 경계도 하겠습니다! 저에게 그정도는 오히려 포상입니다! 전혀 불편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 이래서야, 레프리콘이 브라우니가 되버린것 같잖아요...'


그렇게, 세 바이오로이드와 한 인간의 행렬은 저 멀리 보이는 등대를 향해 착실히 전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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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5년 5월 13일, 한강 방어선의 용산 방어지점에서 삼안 산업의 제198, 210, 218, 308 혼성여단과 스카이나이츠 13항공단, 스틸라인 222보병사단의 공세에 맞서 구 대한민국 육군 9보병사단 28, 29보병여단의 인간 장병들이 돌파된 지점을 막고자 신속히 이동하고 있다. 구 대한민국군의 AGS가 100%에 가까운 손실율을 기록하고, 인간 기간병들까지 대부분 전투에 투입될 정도로 한강 방어전은 극도로 치열했다. 용산 방어지점은 촬영 후 4시간 뒤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