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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좋았다.

 지휘관들도 다들 좋아했고, 마키나를 비롯한 기술 인원들도 찬성했으니까. 심지어 아자즈는 오버홀을 총괄하고 있는 바쁜 몸인데도 재미있겠다며 기꺼이 참여해줬다.

 

 의도 역시 좋았다.

 언젠가 맞닥뜨릴 미지의 괴물에 대해 미리 대비책을 세워놓자는 것이 어찌 나쁘게 들리겠는가. 제안자인 용은 물론이거니와 이 제안이 가능할 정도로 여러 분야의 바이오로이드들을 결집시킨 내게 찬사 아닌 찬사가 쏟아졌다. 예상치도 못하게 얼굴에 금칠이 치덕치덕 발리는 꼴이었다. 진짜 거기까진 정말 좋았다.

 

 그런데 과정이 나빴다.

 

 “…….”

 

 그것도 너무 나빴다, 정말로.

 

 “…금란아, 거기 패널에 방금 전 모의 전투 데이터 좀 띄워 줄래?”

 “알겠사옵니다.”

 

 곧 패널엔 방금 전의 처참한 패배가 고맙게도 아주 세세한 과정까지 포함해 주르륵 떠올랐다. 속이 쓰렸다.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스스로도 평소에 비해 과음한다는 걸 알면서도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주인님, 약주가 과하시옵니다. 옥체를 생각하시는 게 어떠실런지요.”

 

 아까부터 내 손만 신경 쓰고 있던 금란이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하기야 불안하겠지. 이전에 꿍쳐놨던 보드카를 연거푸 쭉쭉 마셔대고 있으니까. 후각도 예민한 모양인지 내가 술 한 잔 마시고 숨을 내뱉을 때마다 금란은 점점 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금란을 봐서라도 그만 마셨겠지만, 아니 평소라면 술도 분위기를 타서나 마시겠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신경을 써줄 수가 없었다. 술이라도 없으면 지금 내 안쪽에 가득한 비참함과 자괴감을 씻어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것까지만 마실게.”

 “하오나…….”

 “부탁이야.”

 “…알겠사옵니다. 허면 안주라도 드시옵소서. 속을 버리실까 걱정되옵니다.”

 “…….”

 

 타협하는 셈치고 난 금란이 내민 호두 따위를 받아 으적으적 씹으며 패널을 노려봤다. 지금까지 시도해 본 몇 가지 작전들이 전부 붉은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패배로 붉은 선은 하나 더 죽 그어진 상태였다. 참고로 입안되지 않거나 실현 가능성이 적은 작전은 그 몇십 배에 달했다.

 

 글라시아스 등의 지원으로 별의 아이를 얼음에 가둬버리는 작전은 실패였다. 실제로 시행해보니 얼음 따위에 저지될 전투력이 아니었다.

 

 용의 함대를 이용해 수중에서 타격을 입히고, 별의 아이가 수면으로 부상하면 얼음으로 발판을 만든 뒤 육상과 공중에서 함께 화력을 퍼붓는 작전 역시 실패였다. 넓은 지역을 단번에 얼릴 정도로 이쪽의 전력이 충분하지도 않았거니와, 별의 아이의 공격 한 방에 얼음지대가 박살이 나니 그 위에 있던 육상 전력은 전력대로 쓸려나가고 기동성은 기동성대로 떨어졌다.

 

 그러면 아예 오르카를 미끼로 던져서 별의 아이를 해안가까지 유도해보자는 작전도 조금 전을 포함해 수차례나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의미가 없는 게 결국 지상 병력의 기동성이 한정되는 거야 매한가지라 전투 시간만 좀 더 늘어날 뿐이었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금란아.”

 “부르셨사옵니까.”

 “그때 기억나? 별의 아이와 싸웠을 때 말이야.”

 “소첩이 어찌 그걸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주인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전투 내내 마음을 졸였사옵니다.”

 “최전방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걱정은 무슨…….”

 “그러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불초 금란, 이렇게 간곡히 청하오니 다음부터는 곁에 누군가를 꼭 남겨주시옵소서.”

 “하하, 다음이 과연 그럴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놈의 다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될 거란 건 내가 아르망이 아니라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별의 아이와 네스트의 공멸은 정말 하늘이 도와줬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나길 바라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근데 내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책망하는 걸로 들렸는지 금란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아니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금란아…….

 

 “송구하옵니다. 소첩의 힘이 미력하여…….”

 “아니 그게 왜 네 탓이야. 별 거 아니니까 고개 들어. 내가……. 후우, 미안해. 금란아. 그냥 술주정이다 생각하고 한 귀로 흘려. 내가 너한테 정말 못할 짓 한다.”

 

 술의 영향일까, 어째 사고가 점점 더 비관적으로 변하는 거 같았다.

 

 별의 아이와 철충 네스트 사이에서 우리는 정말 총력전을 펼쳐야 했다. 내가 호위 병력은 남겨야 한다는 리리스에게 명령까지 내려서 오르카의 모든 인원을 전투에 투입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용의 함대의 위상이 너무 커서 묻힌 감이 있었지만 그때 금란의 활약은 대단했었다. 벼락처럼 꽂히는 네스트의 공격 사이사이로 유효타를 박아 넣는 몸놀림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미끼 역할을 자처해서 남들에게 공격 기회도 만들어줬으니, 어떻게 보면 네스트를 빠르게 해치우고 별의 아이에 대한 저격에만 집중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 숨은 공신 중 하나였다.

 

 “그때 별의 아이를 직접 본 감상은 어땠어?”

 

 실제로 전투를 벌인 건 네스트였지만 진짜 적은 별의 아이였으니까. 분명 그녀도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금란은 잠시 침묵하고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도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이오나…….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두려움이 먼저 앞섰사옵니다.”

 “…이런 말 내가 하긴 뭐하지만,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는 좀 달랐지?”

 

 날 위해 목숨을 아끼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나도 그 감각이 뭔지 알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내 생각대로 금란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소첩,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초개 같은 목숨 따윈 얼마든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사옵니다. 허나 그것을 봤을 때 마음속에서부터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솟아올랐사옵니다. 마치, 소첩이 가장 불안해하는 일이 현실로 닥칠 것만 같아서…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사옵니다.”

 “가장 불안해하는 일?”

 “…주인님께서 저희 곁을 떠나시는 일이옵니다.”

 “아.”

 

 내가 얘들을 냅두고 어디 다른 데로 갈 일은 없으니 아마 내가 죽는단 표현을 완곡하게 돌려 말한 거겠지. 아마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건 가정이라 할지라도 입에 올리기도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 바로 이게 문제였다. 별의 아이가 내뿜는 위압감과 공포감은 정말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물론이고 정신력이 강한 지휘관들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힘든데 휘하 전투원들이 제대로 싸우길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덩치도 어마어마한 주제에 어지간한 공격은 씨알도 안 먹이고, 촉수 몇 번 휘두르는 거에 이쪽은 전선까지 바꿔가며 악을 써야 하는데 광역으로 정신공격까지 한다라. 왜 이리 힘의 균형이 엉망일까? 아니 좀 어디 약점이라도 있던가! 가상 전투가 이럴진대 실제로 맞닥뜨리면 대체 어느 정도로 무시무시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아오, 속 쓰려. 없던 속병이 생길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핑

 

 그때 전자음과 함께 사령관실에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뭐지, 철충이라도 나왔나. 솔직히 별 중요한 일 아니면 그냥 혼자서 멍때리고 싶었다. 내가 미적거리는 걸 눈치챘는지 금란은 재빨리 대신 통신을 받았다.

 

 “부관 금란이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수고하시는군. 사령관은 거기 계시는가?]

 

 쿠당탕!

 

 용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체면이고 뭐고 책상 밑으로 숨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멋대가리 없게 나와버렸는데 지금 얼굴 맞대고 얘기할 자신이 없었다. 여유만만하게 용의 의견을 수락한 주제에 나 먼저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꼬락서니가 솔직히 말해 자존심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도 용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보기 싫은 사람도 용이었다.

 

 “주, 주인님께서는 현재 숙면을 취하고 계시옵니다. 혹 급보가 아니라면 제가 듣고 전달 드리겠나이다.”

 [음, 거기 계신단 말씀이시구려. 알겠소.]

 “요, 용 님?”

 

 망했다.

 

 통신이 뚝 끊기는 소리가 무슨 내 명줄 뚝 끊기는 소리 같았다. 무슨 소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위치를 확인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금란의 안타까운 거짓말도 말하자마자 들통났을 게 뻔했다. 진짜 쉴려면 사령관실에 들어올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오더니 내가 채 의자로 기어 올라오기도 전에 사령관실 문이 윙 하고 열렸다. 아 맞다, 내가 용한테 오르카 마스터키 하나 줬었지!

 

 “용 님! 주인님께서 계십니다. 아무리 용 님이라 하셔도 이리 무례한 짓을…….”

 “무례를 용서하시오, 금란. 하지만 지금쯤 사령관께서 되지도 않는 고민만 하고 계셨을 것 같아 안 올 수가 없었소.”

 “용 님!”

 “…….”

 

 진짜 내 (비밀) 아내는 왜 이리 나를 잘 알까…….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그래, 사령관은 어디 계시오?”

 “주인님께선 지금 휴식 중이시옵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어서 나가주시지요. 아무리 용 님이라 하신들 주인님에 대한 이러한 무례는 용인될 수 없사옵니다.”

 “미안하오, 금란. 난 사령관을 데려가야겠소.”

 “그럼 무력으로라도 막겠나이다.”

 “잠깐잠깐! 아니 잠깐만!”

 

 무력이니 뭐니 하는 소리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하게 돌아가자 책상 밑에서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거 몇 초나 있었다고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져?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돌린 사령관실 입구엔 용과 금란이 바짝 마주 보고 있었다. 세상에 조용한 애가 화나면 무섭다더니, 금란은 내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투기를 풀풀 풍기며 한 치도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만해, 금란아!”

 “주인님?! 소, 소첩이 추한 꼴을 보여드렸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아니 얘는 왜 툭하면 죽는대? 거의 바닥에 엎드리려고 하는 금란을 보니까 피곤함과 더불어 애틋함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안 되겠다, 나중에 따로 시간 내서 면담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이거야 원…….

 

 “그게 왜 네 잘못이니, 내 잘못이지. 너 잘못한 거 없어. 가서…그래, 그……. 아, 점심 준비 좀 거들어줄래? 지금쯤 소완이 지휘관들 식사까지 준비해야 해서 엄청 바쁠 거야. 난 용하고 잠깐 얘기 좀 할게.”

 “하, 하오나…….”

 “정말 괜찮대두. 용하고는 내가 잘 말할게, 응?”

 

 겨우겨우 달래니 금란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선 사령관실을 나갔다. 용이 볼일이 있는 건 난데 중간에 금란을 끼게 해서야 면목이 서질 않는다. 쟤도 그냥 자기 일 열심히 하려는 것뿐인데 괜히 내 투정으로 애꿎은 용과 관계가 안 좋아질 필요도 없고 말이다. 사실 주방에 인원이 더 필요한가는 모르겠지만……. 뭐, 소완이 알아서 잘 배치해주겠지. 내가 알기론 금란이 요리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그리고 내가 그렇게 시덥잖은 생각을 할 때 용은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어느새 그녀 왼손 약지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와, 용이 화났을 때 반지를 낀다는 건 아주 안 좋은 뜻인데…….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방님.”

 “넵.”

 “고개를 드시지요.”

 “…넵.”

 

 그리고 내 결심은 용의 한 마디에 바로 깨졌다. 반항? 그런 건 대등할 때나 하는 거고.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는 용의 눈빛이 장난 아니었다. 용은 눈빛으로 화를 냈다. 지금 반지를 끼고 있단 건 내게 ‘사령관’으로서 화가 났다는 게 아니라 ‘아내’로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잠깐 갑판으로 나가시지요. 적어도 여기보단 바깥 공기를 맡을 수 있는 그곳이 훨씬 더 나을 겁니다.”

 “으, 응. 그…화난 건 아니지?”

 

 정말 부질없는 질문이었지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찔러나 봤다. 용은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아닙니다.”

 

 휴, 그나마 다행…….

 

 “농담입니다.”

 “…….”

 

 용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내게 오더니 내 팔을 꽉 잡아끌었다. 거의 내 팔을 짓이길 듯한 그 악력에 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일이 나쁘게 돌아간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아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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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은 너무 예민해서 문제라는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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