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시체와 포탄, 고철들이 어지러이 흩어진 전장에, 중간에  밟히는 게 적다는 것을 제외하면 도로 밖 진창과 다를 바가 없는 길을 걸었다. 레프리콘은 자기 몸무게만한 군장을 맨 채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계속 앞사람의 제대로 결속하지 못해서 딸랑거리는 반합통만 보고 있기도 심심해서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버려진 155mm 장약통을 '길'과 평행하게 박아넣어서, 진창과 길의 경계를 만들었다. '길'이라 불리는 진창은 축축하고 발이 푹푹 빠지기에, 바깥쪽 진창에 무심코 발을 넣어보니 똑같았다. 


 레프리콘은 한숨을 쉬고 계속해서 걸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처음 보는 광경이,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돌려야 했지만, 그 잔혹함이 레프리콘의 눈과 뇌를 유혹해 놔주지를 않았다.


 시체는 참 다양한 곳에 널려 있었다. 유기된 워커에 밟혀 있는 시체, 전차 옆에 누워있는 시체. 그 수많은 시체들, 혼을 잃은 창백한 수천개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온 몸이 박살나서, 시체보다는 살조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도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물들에게 제 살을 내주고, 살아있었다면 귀찮다며 밟아죽였을 벌레들에게 뜯어먹힌 텅 빈 눈구멍과 마주하면, 그들의 텅 빈 눈동자에 레프리콘 그녀의 혼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앞에서 온다! 길가로 가!"


 "앞에서 온답니다!"


 "앞에서 온답니다!"


 선두에 선 인솔 담당자가 소리치고, 뒤에서 따르던 병사들이 그 이야기를 뒤로 전달했다. 군장을 맨 신병들이 양 길가로 흩어지고, 어디서 누가 오나 궁금해하던 레프리콘은 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아있지만 그 처지가 진창 속의 혼 없는 이들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어쩌면 더 끔찍한 이들과 마주했다. 붉은 십자가 완장을 단 의무병들과, 그들 위에서 날아다니며 부상병들을 스캔하고, 나노머신을 잔뜩 뿌리는 드론들을 제하면 전부 부상병, 심하면 병신들이었다.


 걷지 못해 트럭에 실린 이들은, 시체를 실은 것인지 병자들을 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걸을 수 있는 이들이라 해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온 몸에 미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아서 화상 자국을 숨긴 병사, 양 팔이 잘려나가서 양 발로 걷는 병사. 혼이 나간 채, 그저 다른 이들을 따라 걷는 병사. 그들 중에는 손가락을 잃었거나, 눈 한쪽을 잃은 것처럼 '그나마' 멀쩡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레프리콘은 그들의 공통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블랙 리버의 군인임을 나타내는 군복은 그들을 스쳐간 총알과,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아진 강철 우박에 찢겨나가고 이곳저곳 솔기가 터졌다. 군복의 앞면은 그동안 살을 맞대고 부볐을 진창의 색에 덮어씌워졌고, 뒷면은 핏물이 검게 배였다. 


 "으으... 으아아아윽!!"


 "얘 또 시작이야!"


 부상병들의 행렬에서, 그나마 팔다리도 멀쩡하고, 눈도 둘 다 멀쩡히 달려있던 부상병이 보였다. 온 몸이 박살난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했기에 완장을 잃어버린 의무병이라 생각했지만, 레프리콘과 눈이 마주치더니 광증이 재발했다.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면서 길가에 토사물을 쏟아내고, 의무병들이 그를 말리려 달려들었다. 하늘 위로 고개를 돌리니, 어디서 시체라도 태우는지 수많은 연기가 푸른 하늘을 가르는 광경이 보였다.


 지옥일 거라고 들었고, 지옥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프리콘은, 이제야 그녀가 전쟁에 대해 생각하던 막연한 '지옥'이라는 관념이, 실제로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전쟁이 무엇인지 털끝만큼도 설명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전쟁은 지옥이 맞았지만, 레프리콘이 생각한 지옥은, 이곳에 펼쳐진 것에 대면 개념조차 못 되고 그저 '단어'에 불과했으니.


 거미줄 같이 얽힌 전장의 도로 위에서, 레프리콘은 자신의 목숨이 전쟁이라는 거미줄에 얽매였음을 깨닫자 레프리콘의 두 발에, 공포가 진흙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저 멀리서 둔탁하게 퍼져오던 포성과 총성은 가까이 다가가자, 바라보는 이들의 눈을 찌르는 햇빛처럼 귀를 강타했다. 멀리 퍼져나갈 리가 없는 고주파음이 가까이 오자 점점 귀에 가해지는 부하를 늘렸다. 그동안 참고 있던 진흙 속 썩은내가 불쾌해서 구역질이 날 때쯤, 레프리콘은 진창 한복판의 물자들을 잔뜩 쌓아놓은 진창에 도착했다.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탄약고와 유류고, 흰색 페인트로 H자를 적어둔 자갈밭이 이리저리 널려있는 게 이곳이 평범한 진창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포인트 폭스트롯 알파" 팻말을 박아둔 진창은 그래도 다른 진창보다는 나았다. 어디선가 통나무를 잔뜩 베어와서 바닥에 깔고, 통나무가 없으면 없는 대로 빈 통조림을 깔아놓아서 앉아도 바지적삼이 갈색으로 물들 일도 없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보다도 특수하게 시끄러웠다는 것 정도일까.


 "와, 나 저렇게 큰 헬기 처음 봐."


 "저게... 훈련소에서 CH-171이라 배운 거 같은데."


 그들이 앉아있는 짧은 시간 동안 헬기가 수십대나 오가면서 물자를 내리고, 온 몸이 박살난 시체인지 부상병인지를 싣고 다시 떠올랐다. 수백대의 트럭과 전차, 워커들이 오가며 진창에 자신의 길쭉한 발자국을 다양하게 남겼다. 그 정도면 매연만 좀 먹으면서 불평했을 것이다. 하지만...


 "꺄악!?"


 "포격이다!"


 "잠깐! 아냐! 우리 편 거야! 저기를 봐!"


 포인트 폭스트롯 알파 근처에는 포대가 널려있었다. 진창 위에 흙을 쌓아 보강한 발판 위에서 수많은 셀주크들이 적진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 폭음이 워낙에 큰 나머지 누군가는 적 포격으로 착각해서 진창에 사양 않고 대가리를 처박았지만, 레프리콘은 그 대신 셀주크들을 바라보았다.


 180mm 쌍열포를 장착한 그녀가 잘 아는 평범한 셀주크, 커다란 미사일을 쏘는 셀주크, 수백발의 다연장로켓을 한번에 쏟아내는 셀주크, 정확한 구경은 모르겠지만 여튼 180mm보다는 훨씬 두꺼워보이는 포를 쓰는 셀주크. 그 장중한 합창곡 사이에, 대공미사일 소리와 자주대공포가 수백발의 대공포탄을 토해내는 소리가 자극을 더했다.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받은 황동색 탄피 무더기가, 저 수많은 대포에 죽어간 사람들의 혼을 먹고 빛나는 것만 같았다.


 "..."


 어디에 적들이 얼마나 많이 있다고 저렇게 포탄을 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프리콘은 저 수많은 포격이 무슨 일을 일으킬지 생각하며, 아무리 적이지만, 적이라 해도 정말로 끔찍한 상황에 빠졌을 그들에게, 닿지 않을 작은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레프리콘은 끝없이 펼쳐진 수많은 포대에서 눈을 돌렸다. 장교 계급장을 단 이들이, 레프리콘을 비롯한 신병들을 바라보며 뭐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인간도 있고, 바이오로이드도 있었다.


 "슈워츠코프, 당신 대대가 이번에 스파르탄 프로토타입을 대대급으로 배정받기로 했다면서? 그건 언제 온다나?"


 "나야 모르지. 기자들한테 설명해야 한다고 아예 이름도 철인대대로 바꿔놨더니만, 철인은 니미, 완전히 정육점 대대가 되었다고."


 "지난번에도 그쪽이 제1파로 들어갔으니까. 다음 작전에는 내 대대 애들 보내겠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만. 이 년들은 다음 공세 때 몇 명이나 살아남으련지."


 "던져보면 알겠지. 노가리는 그만 까고, 애들 데리고 가자고. 야! 애들 불러모아라!"


 "네! 알겠습니다!"


 대대장들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행정병들이 경례를 붙이고, 병사들을 하나 둘 분류하기 시작했다. 브라우니 시리얼 번호 90000부터 90100까지는 여기로, 레프리콘 시리얼 번호 47181부터 47300까지는 여기로. 시리얼 번호가 불린 이들이 자신의 자리로 찾아갔다. 어떤 대대에는 백 명 넘는 이들이 몰렸고, 어떤 곳은 서른 명도 겨우 채웠다. 


 "와 ,우리는 300명이 넘는데?"


 "그만큼 많이 죽었다는 거지.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걸까?"


 "잘 됐네. 죽은 사람 많으면 우리는 바닥이 아니라 꽤 높은 급으로 시작하는 거잖아?"


 "...생각 편하게 해서 좋겠다."


 그리고 레프리콘은 그들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배치된 쪽으로 몰렸다. 레프리콘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자기가 가게 될 부대에서 사람이 정말로 많이 죽어나갔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야! 잘 데리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들은 각자의 전술차량을 타고 먼저 떠나고, 행정병과 인솔을 담당하는 부사관이 그들을 인솔했다. 1km가 넘던 행렬이 그렇게 흩어지고, 레프리콘은 그녀가 죽을 자리에서 누구를 볼 지 궁금해하며 걸어갔다. 어쩌다보니 레프리콘은 행렬에서 맨 앞, 즉 부사관과 행정병의 바로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행정병은 콘크리트 수류탄 대신 클립보드를 들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노움이었고, 부사관은 나이 지긋한 여자였다. 


 "이봐, 너."


 "예! 상병 레프리콘-47183!"


 부사관이 레프리콘에게 말을 걸고, 레프리콘은 자신의 모델명과 번호를 부르며 대답했다. 부사관은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허허 웃었다.


 "군기가 바짝 들었구만 그래. 좋다. 아주 좋아."


 "감사합니다!"


 "그 군기가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지만."


 "...잘 못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냐. 다른 건 됐고, 저기 요새 같은 게 보이지? 저기가 니 새 집이다."


 부사관이 가리킨 지평선에 언덕이 보였다. 언덕에는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보였다. 육각형의 콘크리트 성탑이 각각의 높이로 솟아있고, 그것들을 콘크리트 장벽이 잇고 있었다. 레프리콘은 그 장관을 보고 감탄하려다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며 코를 찌르는 냄새에 자연스레 눈을 찡그리고 코를 막고 그 불쾌한 냄새의 진원을 찾았다. 


 진창에는 박살난 육각형 모양의 토치카들, 그 토치카들을 잇는 교통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진창에 수많은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배가 터진 시체, 팔다리가 날아간 시체, 목이 없는 시체, 시체도 다 같은 시체가 아니었다. 철조망에 걸린 채 죽은 시체, 진창 속에서 얼굴만 둥둥 뜬 시체. 그 시체들 위에서 웅웅대는 벌레 소리가 울음소리처럼 들려 코도 막고 귀도 막았다. 이곳은 신고식부터 끔찍했다.


 하지만 세상이 바이오로이드 하나의 감정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듯이, 전쟁도 레프리콘-47183의 감정과 역겨움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요새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시체는 점점 늘어나서, 아예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그 광경을 보니 사람만 없다면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프리콘은 어떻게든 참고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엄청 크다."


 "다들 떠들지 말고! 앞 사람 잘 따라가! 잘못하면 길 잃는다!"


 타냐 중사가 소리치자, 신병들은 입을 다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레프리콘은 이곳에 오기 전, 항만의 조병창에서 미리 지급받은 기관총을 꽉 잡았다. 그리고...


 타타탕!


 "히익?!"


 신병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주변을 경계했다. 타다당, 타타타탕, 꽝! 내부가 울리고 콘크리트가 울리며 먼지가 떨어졌다. 타냐 중사는 한숨을 쉬고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빨리 일어나! 갈 길이 멀어!"


 빨리 일어나, 일어나라고! 타냐의 노기 섞인 소리가 울리자 신병들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신병들은 타냐를 따라 콘크리트 복도를 걸으며, 진한 회색의 콘크리트 벽에 묻은, 그리고 앉아있는 전쟁의 흔적들을 마주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피를 머금어서 검붉어진 벽. 박살난 벽 사이로 보이는 철근, 폭발로 떨어져나간 경칩. 혼이 빠진 듯 가만히 앉아있는 병사들. 


 쿵!


 또다시 폭음이 들려오고 요새가 울렸다. 레프리콘이 잔뜩 겁먹어서 목을 축 빼자, 타냐는 그녀를 보고 물었고, 레프리콘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섭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솔직하니 좋다. 들어가서 짐 풀어. 어차피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익숙해질 거다."


 "...정말 그렇습니까?"


 "걱정 마. 익숙해지지 못하는 놈들은 미쳐서 죽거든."


 "...알겠습니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갈리는 이곳에서, 삶과 죽음을 천박한 농담거리로 삼은 타냐의 농담을 묵묵히 들으며 걸어 올라갔다. 레프리콘은 핏자국 같은 자극적인 부분 말고, 최근에 점령했다는 이 요새를 바라보았다. 레프리콘이 태어나면서 지닌 전술적 식견으로 볼 때, 이 요새는 잘 만든 물건이었다.


 각 방에는 두께가 2cm 이상 되는 강철 방폭문이 달렸고, 모든 방에는 안에서 열고 닫을 수 있는 강철 덧문으로 보강된 총안구가 달려서 복도로 침입한 적들을 쉽게 쏴죽일 수 있게 했다. 구석구석 벽에 나 있는 작은 틈바구니는 검게 물들어 있었는데, 레프리콘은 이곳에 클레이모어 같은 끔찍한 부비트랩들이 숨어있었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어, 저건 뭐지?"


 "전선들이 삐져나와 있는데..."


 다른 신병이 천장을 가리키자 레프리콘의 시선도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최소 50구경 이상은 되어보이는 총열이 달린 자동 포탑이 박살난 채로 누워있었다. 레프리콘은 이런 게 또 있나 싶어 옆을 바라보았고, 휘발유 냄새가 진하게 나는 화염방사기가 달린 자동 포탑과 마주했다. 구조상 평소에는 잘 접어놨다가, 적이 오는 순간 자동으로 전개해서 적들을 쏴죽이는 방어 체계 같았다. 그 다음으로는, 외부의 요새포와 연동해서 작동하는 전자 제어장치도 보였다. 


 "...왜 사람들이 다 죽을상이었는지 알겠군."


 "그렇냐, 레프리콘?"


 "레, 레프리콘 47183!"


 레프리콘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타냐 중사가 빠르게 받아챘다. 타냐 중사는 씨익 웃으면서 바짝 긴장한 레프리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주 지옥이었지. 아까 전에 요새 바깥에서 봤던 시체밭이 우리보다 먼저 앞서간 대대 애들이었어. 그 애들이 딱 요새 입구를 폭파하는 데 성공했고... 우리 대대가 들어갔단 말이야."


 타냐 중사는 무덤덤하게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곳에서 진짜로 싸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전쟁이 끝나고 버려진 요새의 진기명기를 가르쳐주려 온 가이드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앞서가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앞서갔던 녀석이 인계철선을 밟고 검댕이 됐다, 부비트랩이 없는 줄 알고 안심하고 가다가 대열 중간에서 화염방사기 터렛이 불쑥 튀어나와 1개 분대가 화염에 휩싸였는데 세 명이 타죽고 나머지는 전부 중상을 입어서 후송됐다, 저 안에서 농성하는 새끼들이 좆같아서 폭약 쓰는 대신에 총안구로 백린 연막탄을 밀어넣었다. 저 녀석들은 폭약이나 총도 못 챙기고 지하로 쫓겨났고, 우리 다음으로 들어온 대대가 지금 저 녀석들이랑 소탕전을 벌이고 있다. 


 "...는 거야. 대충 이해했지?"


 "네. 맞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워낙에 미로 같이 꼬아놨다보니 실제로는 더 걸리는 느낌이라서 이야기는 더 길어졌다. 이곳에서 싸운다면, 레프리콘은 방향감각 칩의 도움이 없이 제 힘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너한테는 약간 좋고, 아주 나쁜 소식이 있어. 우리 대대가 취사병, 행정병, 보급병, 뭐 그런 애들을 제외하고 순수 전투병력들은... 싹 다 죽어서 몇명 안 남았거든."


 "그렇게 말씀하심은..."


 "어, 너네는 기수로 따지면 위에는 몇 명 없고 아래에는 장차 후임으로 가득찰 축복받은 군번이란다. 그런데 이게 다른 말로 하면, 너네 같이 경험도 없는 신병들 붙잡아줄 애들 아무도 없다는 얘기거든. 그래. 너네 좆됐다고."


 "..."


 "어차피 지금 살아남은 애들도 브라우니 몇 명 뿐이야. 걔네가 전투경험 내세우면서 너 위에 기어오르려 하면 밟아버리고.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야, 다 울린다. 대답 작게 해."


 "예.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 다 왔다."


 미로 같은 요새를 돌다 보니 레프리콘이 소속될 대대가 주둔하는 구역이 나왔다. 수십개의 작은 방이 밀집된 곳에서 백 명, 큰 강당이 있는 곳에서 백 명이 빠지고, 레프리콘이 포함된 나머지 오십 명 정도가 큰 방 여러개로 나뉜 곳에서 멈췄다.


 "너부터 너까지, 여기로. 너부터 너까지. 여기로."


 신병들은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레프리콘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콘크리트로 마감한 벽에는 미처 찢겨나가지 못하고 남은 선전 포스터의 귀퉁이가 보였고, 소대장인지 뭔지 모를 사람이 방 안에서 단 하나 있는 책상에서 무언가 일을 보고 있었다. 몇몇 브라우니는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있었고, 위에는 창백한 방폭등 하나만 남아 미약한 빛으로 이 안의 어둠과 간신히 싸우고 있었다.


 "자, 군장 풀었으면 빨리 나와라!"


 "예! 알겠습니다!"


 신병들이 군장만 간신히 내려놓고 다시 타냐 중사 앞으로 달려왔다. 타냐 중사는 그들을 쓱 둘러보고는 뒤로 물러나서 부사관 계급장을 단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 그리고 신병들 앞으로 장교들이 나왔다. 장교들 중에서, 중위 계급장을 단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그들을 쓱 둘러보고 자신을 밝혔다.


 "잘 왔다. 난 리처드 테일러 중위고, 철인대대 1중대장을 맡고 있다. 어차피 전쟁 다 똑같다지만, 그래도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사흘만 일찍 도착했어도 너희들 중 절반은 지금 오면서 본 길바닥에 누워있었을 테고, 나머지들 중 절반은 껌딱지마냥 바닥에 달라붙어서 사포로 긁혔을 테니까."


 "..."


 자신을 테일러 중위라 밝힌 중대장도, 타냐처럼 삶과 죽음으로 천박한 농담을 즐기는 사람일까. 신병들이 잠잠히 있고, 동요하는 표정이 보이자 테일러는 또 실패한 농담이라면서 한숨을 쉬고, 하던 말이나 계속하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우리 대대는 인력 손실이 너무 심했던 관계로 다음 주까지 전투력을 보충하면서 휴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언제 이 명령이 뒤집힐 지 모르니까... 거기 너, 어떻게 해야 할까?"


 중대장이 레프리콘을 지목했다. 레프리콘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굳었다가, 이내 표정을 고치고 관등성명을 대면서 대답했다.


 "상병 레프리콘 47183! 전투력 보충이라는 상급부대 명령 취지에 유의하여 휴식을 실시하여야 합니다!"


 "타냐 중사. 얘 봐요. 누가 보면 웨스트포인트 나온 줄 알겠어."


 테일러의 이야기에 간부들이 껄껄 웃고, 테일러는 잘 했다, 좋은 대답이다, 라고 레프리콘을 칭찬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 이 레프리콘이 말 잘 했어. 이 레프리콘이 말한 대로, 여러분들은 쉬면 된다. 그런데 쉰다는 게, 당장 전투에 나갈 일이 없다는 거지, 아예 아무 일도 안 하고 여기 가만히 누워있을 거라는 얘기가 아니란 건 알아둬라. 내 말은 여기까지. 각 소대 간부들은 병사들 생활화 교육... 이건 또 왜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알아서 하세요. 해산!"


 "네, 알겠습니다! 1소대! 이쪽으로!"


 "2소대 집합!"


 "3소대 생활관으로!"


 우르르 생활관으로 몰려가는 신병들을 따라, 레프리콘도 자신의 "생활관"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군장 앞에 앉았다. 남아있던 몇몇 브라우니들은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있다가, 소대장과 부소대장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나서는 침낭을 대충 말아놓고 앉았다. 소대장은 신병들을 둘러보더니 자신을 짧게 소개했다. 그리고 바통을 타냐 중사에게 넘겼다.


 "잘 왔다. 난 타오 소위라고 하고, 1소대장이다. 중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쉴 수 있을 때 쉬어둬라. 그리고... 부소대장? 얘기하시지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1소대 부소대장 타냐 중사라고 한다. 뭐... 딱히 할 말은 없다. 오면서 바깥쪽에 뭔 일 일어났는지 봤지? 거짓말은 안 하겠다. 너희들이 여기서 살아나갈 확률은 적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


 신병들의 불안한 눈빛이 뒤에 선 타오 소위를 향했다. 하지만 타오 소위는, 뭐라고 말려달라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에도, "사실인 걸 어쩌라고?"하는 느낌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타냐 중사는 그들을 보고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들으면서 이 미친년은 뇌에 필터란 게 없나 싶을 거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생존에 대한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게 헛된 일인 것처럼, 또 헛된 일이 있지. 휴식군기라던지, 무슨 쓸데없는 군기 잡는 일들 말이다. 난 그게 아주 싫어요. 그러니까... 타오 소위님. 애들 생활화교육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타냐 중사는 웃으면서 고개를 돌리고, 타오 소위는 씨익 웃으며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말하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타오 소위가 나가는 걸 본 타냐는 바로 신병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군장에 결속한 침낭 풀어서 펼친다. 실시."


 실시! 실시! 신병들이 허겁지겁 군장에서 침낭을 꺼냈다. 그리고 타냐가 명령한 대로 침낭을 바닥에 펼쳤다. 그리고 타냐는 그들에게 자세한 명령을 내렸다. 사실 복잡해보여서 그렇지,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참 간단했다.


 "저기 브라우니들이 해놓은 것처럼, 너희들도 총기를 바로 옆에 두고 침낭 안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어라. 그리고 거기 브라우니! 그동안 쉬고 있었으니까, 일어나서 문 앞에서 애들 총기 잃어버리는 일 없게 잘 감시해라. 알았지?"


 "네 알겠심다!"


 잠자코 신병들을 쳐다보던 브라우니가 총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그리고 문 앞으로 가서, 총을 든 채 섰다. 신병들은 무슨 취지로 이런 짓을 시키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타냐 중사가 시키는 대로 침낭 안에 몸을 넣고는 타냐 중사 쪽으로 고개를 뺐다. 타냐 중사는 번데기처럼 안에 들어간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1시간 반마다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여길 지키고, 따로 작업 관련한 얘기가 없으면 그 안에서 쉬어라. 앉을 수 있는데 서 있지 말고, 누울 수 있는데 앉지 말고, 잘 수 있는데 누워있지 마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야, 니네들 목소리 울린다고. 조용히 말해."


 "예. 알겠습니다."


 신병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멀뚱멀뚱히 눈을 뜬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레프리콘은 훈련소에서 교관이 가르쳤던 내용을 떠올렸다. 우리는 블랙리버의 무궁한 이익과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이고, 군인과 용병을 가장한 깡패 군벌 폭력집단을 구별하는 것은 바로 규율과 제식에 있다고 강조했지. 그래서 휴식군기라는 개념으로 평소에도 허리를 곧게 펴고, 절대 눕지 말라고 명령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뿐이랴? 모포의 사소한 각은 물론이고, 보급 속옷을 접어서 관물대에 넣는 각을 자로 재서 1cm 이상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떤 병사는 사물함의 자물쇠 잠그는 것을 잊었다는 이유로 정말로 가혹한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은? 각 따위는 잡지 않았다. 타냐는 각에 대해서는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군인에게 있어 제일 중요할 삶과 죽음조차 천박한 농담거리로 소비하는 군인에게, 각은 농담거리조차 못 되는 쓰레기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던 천장을 타냐 중사의 머리가 덮었다.


 "히익?!"


 "우리 공주님. 잠이 안 오시나?"


 "아, 아닙니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상병 레프리콘-47183! 타냐 중사님께서는 앉을 수 있는데 서 있지 말고, 누울 수 있는데 앉아있지 말고, 잘 수 있는데 눈 뜨고 누워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답. 그런데 왜 우리 레프리콘은 안 자고 그렇게 버티고 있는 걸까? 내가 싫나?"


 "아닙니다!"


 "눈 붙여. 그리고 자.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렇지. 자라. 응?"


 "상병 레프리콘-47183! 네! 알겠습니다!"


 레프리콘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눈을 꽉 감았다. 타냐는 그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레프리콘은 눈을 감고 있다가 슬쩍 실눈을 떠서 타냐 중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차피 다 죽을 거라면서 나쁘게 말했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려다, 타냐 중사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레프리콘을 비롯한 신병들은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잤고, 누군가는 시켜서 자는 잠은 잠도 아니라서 자지 못하고, 그냥 뜬눈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레프리콘은 어떻게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 그 중간에 끼어있는 판이었다. 시간이 몇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근무를 서고 있던 브라우니가 레프리콘을 흔들었다.


 "...음..."


 "레프리콘-47183 상병님. 레프리콘-47183 상병님."


 "...으음...?"


 "근무 교대하실 시간입니다. 일어나셔야지 말입니다."


 "...으음..."


 레프리콘은 몸을 일으키고, 군장을 차고 들어갔던 터라 침낭 속에서 고치를 뜯고 나오듯 아주 고통스럽고 힘들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을 비비면서, 자기가 선잠이지만 어쨌든 잠을 자긴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프리콘은 브라우니를 바라보았다. 타냐 중사가 말한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은 브라우니로 보였다. 전투복은 전투에 해졌고, 그녀의 눈빛 너머에 보이는 영혼은 해진 정도를 넘어서서 갈기갈기 찢어진 것만 같았다. 


 "레프리콘-47183 상병님?"


 "아, 아닙니다... 일어날게요."


 레프리콘은 일어나서 자신의 SM10 경기관총을 붙잡았다. 그리고 아까 브라우니가 서 있던 생활관 문 앞에 서고, 브라우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하나가 규정이라고 생각해서, 규정과 FM을 좋아하는 레프리콘의 성미가 대충 듣고 말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누가 들어와서 총 가져오는 일 없게 잘 지키시면 되지 말임니다. 어차피 별 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짜로 러시아군 새끼들 쳐들어오면 굳이 레프리콘 상병님께서 뭐라 안 해도 알아서 다들 일어날 검다. 아니,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뜻이죠?"


 브라우니는 말없이 레프리콘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브라우니는 레프리콘을 바라보다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시게 될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레프리콘 상병님은 잘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승리!"


 "승리. 수고했어요. 브라우니."


 브라우니는 경례를 붙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레프리콘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브라우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타냐 중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군대에서는 어찌 됐든 계급이 깡패니까 계급으로 찍어누르라는 조언이었다.


 '어차피 지금 살아남은 애들도 브라우니 몇 명 뿐이야. 걔네가 전투경험 내세우면서 너 위에 기어오르려 하면 밟아버리고. 알았지?'

 그 말을 듣고, 레프리콘을 실전 경험도 없는 백면서생이나,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라고 은연중에 무시할 것을 대비해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하고 연습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브라우니는 그러지 않았고, 군대의 세계에서 자신은 아래, 레프리콘은 위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브라우니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저 브라우니의 수십년간 겁에 질린 사람처럼 산 것만 같은 목소리부터, 태어나서 한 번도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아예 군장까지 풀고 침낭 안으로 몸을 구겨넣은 브라우니는, 엄청 피곤해보이는데도 잠을 자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부릅뜬 두 눈에 붉은색 그물이 올라와 있었다. 그걸 보니, 레프리콘은 다른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브라우니는, 레프리콘에게 내가 더 전투경험이 배우니 내 말대로 해라, 내가 선임 아니냐, 그런 식으로 기어오를 생각을 할 여유가 없는 것 아닐까. 그렇게 군대의 계급을 조금이라도 뒤집으려고 시도할 생리적인 여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계급은, 그녀가 목격했을 전쟁의 참상 앞에서는 너무나도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진 것 아닐까?


 "..."


 모르겠다. 레프리콘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6주간의 훈련소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선서했던 내용이 생각났다. 나는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 나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다. 나는 절대 비밀을 엄수하고, 내가 알아도 되는 것, 알아야 하는 것 이상의 내용은 알려고 하지 않겠다. 만약 알았다면 바로 잊어버리겠다,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래, 알려고 하지 말자. 알았어도 잊어버리자. 어차피 그 진실은, 조금 더 있으면 알게 될 텐데.


 "큼! 큼!"


 "응? 아, 1소대장님?! 승! ㄹ..."


 "에헤! 애들 다 깨겠다!"


 타오는 쉿, 쉿, 거리면서 레프리콘을 막았다. 그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건 이곳에서는 하면 안 되는 짓이었다. 타오 소위는 레프리콘에게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목소리를 낮추라고 주의를 주었다.


 "휴식은 참으로 중요한 거란다. 쉴 때 쉬어놔야 싸우거든. 그렇게 FM 좋아하던 새끼 다 뒤진다 이 말이야. 지금 여기 있는 군인들한테 중요한 건 저 러시아군 새끼들 싹 다 죽이고 이기는 거지, 목소리 크게 대답하는 게 아니에요.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말 좀 듣고, 어디 보자..."


 타오 소위는 레프리콘을 지나쳐서, 새로 들어온 신병들을 몇 명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노움 하나를 골라서 툭툭 쳐서 깨웠다.


 "노움. 일어나라."


 "으음... 으으음? 앗, 소대장님?"


 "일어나 봐."


 "아, 네! 알겠습니다!"


 노움이 일어나서 바로 섰다. 타오 소위는 노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얘는 수율이 좋군."이라고 말하고는 군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입고 있는 방탄복, 탄띠 같은 거 다 벗어봐."


 "네. 알겠습니다!"


 노움이 타오 소위의 명령을 따라 전부 다 벗자, 풍만한 가슴과 골반이 드러났다. 타오 소위는 그녀의 맨 몸을 한번 더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군장을 다시 싸라고 명령했다.


 "노움. 자네 시리얼 번호가 어떻게 되지?"


 "예! 상병 노움-8714!"


 "군장 싸라. 갈 곳이 있다."


 "예. 알겠습니다!"


 노움은 침낭을 말아서 엮고 다시 군장에 결속했다. 레프리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딱히 잘 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가까이 있던 사람도 아니기에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몰랐다. 그래도 떠난다니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움이 군장을 다 싸자, 타오 소위는 따라오라고 명령하고 노움을 어딘가로 데려갔다.


 "...레프리콘. 잘 지키고 있어라."


 "상병 레프리콘 47183. 예 알겠습니다."


 레프리콘은 타오 소위의 말대로, 그리고 브라우니가 알려준 대로 계속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타냐 중사가 말한 대로, 1시간 반이 지나자 자기 바로 옆에 누워있던 브라우니를 깨우고, 다시 그녀를 기다리는 국방색의 고치 속으로 들어갔다. 매트리스는커녕 단열 패널 하나 깔지 않은 곳에 침낭을 깔고 자는 게 옳은 일인가 싶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생활관의 신병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씩 한 명씩 교대했고, 어느새 식사 시간이 되었다. 식사 시간이 되자, 타냐 중사가 생활관으로 들어가서 몇 명을 고른 다음 식사를 가져왔다. 식사는 스튜라는 이름의... 뭔지 모를 잡탕이었다.


 "..."


 "이게 밥이구나..."


 신병들은 충격적인 식사의 비주얼에 놀라고, 그 다음으로 충격적인 식사의 맛에 두 번 놀랐다. 이런 걸 진지하게 먹으라고 준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먼저 와 있던 브라우니들은 군말 없이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먹어댔다. 아무리 전쟁터라지만, 격식을 없어져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강박적으로 퍼먹는 느낌이었다. 신병들은 그들을 보고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숟가락씩 뜨기 시작했다.


 "이게 밥이래."


 "아주 미쳐돌아가는구나."


 "..."


 "그런데... 47183이라고 했어요? 그쪽은 어디 공장 출신이에요?"


 "아, 저는... 애틀랜타 371인데."


 밥을 먹으면서, 레프리콘과 신병들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어디서 왔냐, 무슨 훈련을 받았냐, 성적은 어떻게 나왔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라 할 말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공감대를 찾으려 했다. 


 "아까 전에 시체들 봤어? 정말이지..."


 "밥맛 떨어진다. 죽는 얘기는 그만하자고."


 "...그래."


 "그런데 너네는 너네 이름 뭘로 할 거야?"


 서로 무슨 이름을 짓겠냐고 물었다. 레프리콘-47183은 이 문화에 대해 들어는 보았다. 모델명과 시리얼 번호로만 구분되는 이들이, 그 이외의 자신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위해서 이름을 짓는다고. 이름도 짓고, 얘기도 하다 보니, 레프리콘은 그 과정에서 배속된 분대 사람들과 저절로 친해지게 되었다. 


 "다들 이름은 다 정했어?"


 "그렇지 말임다. 레프리콘 상병님. 앞으로 잘 부탁드림다."


레프리콘-47183의 분대 구성은 이러했다. 일단 레프리콘-47183, "로자"가 분대장이자 기관총 사수였고, 같은 계급이지만 직급과 직책으로는 하위에 있는 노움-6814, "레나"가 있었다. 그리고 브라우니-578191과 578192는 각각 자신을 "레키", "리나"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먼저 와 있던 브라우니에게 물을 차례였다. 레프리콘은 잠자코 듣고 있던 브라우니에게 물었다.


 "브라우니. 브라우니는 이름 정한 것 없나요?"


 "...없습니다. 저는 브라우니-541116으로 불리겠슴다."


 "왜요? 이름이 싫나요?"


 "...보시면 알게 되실 검다."


 브라우니는 손을 펴서, 공손하게 타냐 중사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타오 소위와 타냐 중사가, 이름을 정하고, 분대끼리 모여앉은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고 있었다. 두 간부가 나타나자, 생활관에서 저들끼리 이야기하던 병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타냐가 말했다.


 "아니 왜? 하던 거 계속 해. 뭐 문제 있어?"


 "없습니다!"


 "문제 없으면 계속 이야기나 하라니까... 뭐, 그래. 조용해진 김에 얘기나 할게. 그렇게 서로 이름 짓고, 이름으로 부르고, 서로 친해지려고 하는 거. 하는 건 자유니까 말리지는 않겠는데, 권장하지는 않는다."


 "..."


 타냐 중사는 그들을 슥 둘러보고, 타오 소위와 눈을 맞췄다. 타오 소위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저었다. 타냐 중사는 그 표정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에게 말했다.


 "곧 알게 될거다."


 타냐 중사가 그렇게 말하고는, 타오 소위와 함께 나갔다. 생활관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다가, 누군가 "왜 저러셨을까?"라 말한 것을 시작으로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레프리콘은 왜 저랬을까? 궁금했다. 전우애는 이런 식으로 키우는 거고, 전우애로 이긴다고 배웠는데. 휴식군기를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표준과는 거리가 먼 타냐 중사의 스타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냐 중사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도 없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까 전에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그 이름까지 얘기하셨슴다. 로자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신 검니까?"


 "그 장미가 생각나서..."


 "로자 상병님 머리 색깔이랑 잘 어울리십니다."


 레프리콘-47183, 자신을 '로자'라 부르기로 결정한 그녀는 부하 분대원들과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순간 알아야 했다. 왜 타냐가, 이름을 지어내서 부르지 말라고 했는지. 하지만 그녀는 몰랐고, 어느새 잠에 들었다.



 레프리콘이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전장은 그녀와 상관 없이 시끄럽고 잔혹했다.


2차 연합전쟁, 즉 인류 멸망 직전 전쟁에서, 러시아 극동 전선에 투입된 블랙리버 소속 한 바이오로이드, "로자"의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