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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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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붉은색


최대한 조심스럽게 포복하며 긴 풀숲을 나아가 땅에 쓰러진 통나무 뒤에 은폐했다. 조심스레 몸을 통나무 너머로 내밀어 총을 겨누고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댔다. 보이는 건 나이트 칙과 나이트 칙 실더, 그리고 런처. 그 외에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뒤에 후속 병력이 있을 수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지만.

 

 단순 위험도로는 런처 계열이 가장 높았기에 조심스레 그쪽을 겨냥했다. 십자선 한가운데에 녀석이 들어올 때 까지도 다행히 녀석들은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가만히 숨을 참고 방아쇠를 당기자 정확하게 머리(?)에 총탄을 얻어맞은 녀석은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바로 볼트를 당겨 약실에 차탄을 장전한 후 우왕좌왕하던 다른 런처를 겨누고 발사했다. 그 직후 내 쪽을 향한 발포염이 보였다

 

 급히 몸을 숙여 엄폐하자 조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곳을 총탄들이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기습은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이쪽도 나서 싸울 차례. 심호흡을 한 뒤 크게 소리쳤다.

 

 “공격!”

 

 고함친 직후 여기저기서 익숙한 발포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도. 다시 머리를 내밀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철충들이 보였다. 파괴된 나이트 칙의 잔해가 몇 개 보였지만 나머지는 실더의 뒤에 엄폐해 여전히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방패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총탄들이 불꽃을 튀겼다. 그러고 나면 방패들 사이에서 우리를 향해 총탄이 날아왔다.

 

 “수류탄 투척!”

 

 뒤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리자 나도 모르게 귀한 수류탄을 던져 버렸다. 굉음과 함께 지면이 울린 직후 다시 고개를 내밀자 적 대형이 무너진 게 보였다. 그렇다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다.

 

 바로 나이트 칙 하나를 골라 총탄을 먹여주자 녀석은 다시 쇳덩어리로 되돌아갔다. 다른 녀석들도 화력을 집중해 보호받지 못하는 나이트 칙들을 사냥했고, 이윽고 공격수 없이 실더만 남자 녀석들은 좋은 사격 표적이 되어 주었다.

 

 “적 전멸! 사격 중지!”

 

 한바탕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시고 나자 대량의 고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가증스러운 그 유충들도. 꾸물거리며 도망치는 녀석들의 뒤통수에 다들 총탄을 박아넣어 주었다.

 

 “이게 끝인가?”

 “아마도? 척후 녀석이 못 본 게 아니라면 말이죠.”

 “부상자는?”

 “아, 페-253이 복부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배를 관통당해 등 뒤로 내장이 튀어나와 버렸습니다. 방금 후방으로 보냈긴 한데 솔직히 그 녀석은 아마...카-47도 손에 총탄을 맞아 손이 반 정도만 남아 버렸지만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겠고...나머지는 스치거나 멀쩡합니다.”

 “그런가.”

 

 예상은 했지만 중상자가 나오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런처를 우선적으로 제거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제일 흔하고, 제일 약한 철충 상대로도 이 모양이다.

 

 “탄약은.”

 “인당 30발 전후로는 남았습니다. 더 싸울 것도 아니시면서 왜 그러시죠?”

 “아니. 그냥.”

 

 총탄도 넉넉히 쥐어주지 못하고 중상자가 생겨도 제대로 된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 지금이야 이 정도에 그치지만 만약 이곳의 이변을 알아차린 철충들이 만에 하나 대량으로 온다면....

 

 고개를 내저어 잡념을 떨친 후 잔해를 처리할 몇몇을 제외하곤 주위를 경계하라고 한 뒤 스코프를 통해 숲 속을 지켜봤다. 원래 스코프를 달도록 만들어진 총이 아니라 불편했지만 맨눈보다는 낫다. 이 총의 원주인에 비하면 내 눈은 단춧구멍이니까.

 

 귀에 들리는 건 적막이었고 눈에 보이는 건 붉게 물든 나무뿐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총을 다시 등에 메고 돌아섰다.

 

 “쓸모 있는 건 좀 챙겼나?”

 “대충 다 갈무리 끝났습니다. 탄약하고 부품 쓸 수 있는 건 전부 챙겼습니다.”

 

 철충의 대부분은 원래 AGS인 만큼 사체를 뜯으면 조금이지만 쓸 수 있는 것들이 나온다. 우리 입장에선 그야말로 귀중품이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충과의 교전을 바랄 수도 없다.

 

 “칙 때문에 30mm 한정으로는 탄이 남아도니 30mm만큼은 실컷 쏠 수 있겠네요.”

 “30mm는 서쪽과 남쪽 방어선의 토치카에나 있잖아. 그걸 쓸 때가 온다는 것 자체가 큰일이지.”

 “그것도 그렇군요. 그나저나, 작업반 녀석들은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동남쪽을 바라봤다. 그 직후 녀석의 머리가 날아갔다.

 

 “...어?”

 

 머리를 잃은 베-56의 몸은 잠시 목에서 피분수를 뿜더니 힘없이 땅에 늘어졌다. 목의 단면에서 피가 꿀렁꿀렁 새어 나오며 땅을 적셨다. 붉은 빛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누가 밀친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앞으로 엎어졌다.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간신히 들어 뒤를 돌아보자 붉은색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구덩이가 보였다. 이런 게 생기는 건 하나밖에 없다. 칙 캐논의 곡사포다. 

 

 황급히 다른 곳을 보자 한 철충이 보였다. 램파트를 닮았지만 두 손 끝에 손가락 같은 유탄발사기가 달려 있는 철충. 센츄리온이 틀림없다. 그리고 방금 베-56을 죽인 건 아마 칙 스나이퍼. 이런 녀석들이 나왔다는 건 명백한 대규모 공격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화기로 이 녀석들은 무리다. 중화기가 필요하다. 

 

 “전원 퇴각! 방어진지로 퇴각해 그곳에서 적을 저지한다!”

 

 품을 더듬어 발사기를 꺼내든 후 즉시 하늘로 조명탄을 쏜 후 전력으로 달렸다. 몇 초 뒤 녹색 빛이 하늘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갈수록 들려오는 발소리가 줄어들고 비명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나무들 위로 새로운 붉은색이 덧칠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바이오로이드의 신체능력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까지 찰 즈음 숲을 빠져나왔고 그제서야 드디어 익숙한 콘크리트 구조물들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보였다. 내 모습을 봤는지 체-24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부반장? 무슨 일이야! 아까 터진 그 퇴각 신호탄은 또 뭐고?”

 “대규모 철충 습격이다! 당장 전원 전투배치로! 그리고 여기로 지원 요청해!”

 “아, 알았어!”

 

 숨을 고르는 사이 다른 녀석들도 하나 둘 숲을 빠져나와 합류했다. 척 보기에도 머릿수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그마저도 붉은색으로 물든 녀석들이 적잖게 그 속에 섞여 있었다. 다행히 녀석들도 눈치는 있는지 알아서 자기 위치로 가고 있었다. 

 

 “부반장!”

 “무슨 일이야?”

 “예비 인원 대부분이 작업에 투입돼서...이쪽으로 올 수 있는 건 십여 명 정도야.”

 “염병할!”

 

 분을 못 이기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씹어 버려 비릿한 맛이 감돌았지만 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할! 

 

 “토치카들은 멀쩡하지? 안의 기관포도?”

 “어.”

 “뒤의 고정포대와 기관총 진지들도?”

 “이미 인원 배치 완료했어.”

 “좋아. 모든 화기 끌어 모아. 탄약 아끼지 마라. 적이 보이면 바로 발포해.”

 

 그 말을 끝으로 나도 움직이려던 순간, 녀석이 갑자기 불러 세웠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날 뻔 했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말투가 사나워졌다.

 

 “뭔데?”

 “아니, 부반장 등 뒤에 파편이....”

 

 손을 등 뒤로 가져다 대자 통증과 함께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러자 갑자기 등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 손을 보자 장갑 끝에 붉은 얼룩이 조그맣게 생겨 있었다.

 

 “뭐냐.”

 “나무 조각 같은데....”

 “깊이 박힌 것 같지도 않고 움직이기 불편하지도 않다. 그냥 빼.”

 “아, 알았어. 셋에 뺄게. 하나, 둘, 셋!”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온몸으로 격통이 흘렀지만 다행히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녀석의 손을 보자 끝이 붉게 물든 단검만한 나뭇조각이 박혀 있었다. 아까 곡사포가 터질 때 날아와 꽂혔나 보다.

 

 “쳇. 따끔하네. 너도 이제 가서 애들 지휘해. 토치카에서 최대한 적을 저지해라. 그 사이 후방에서 최대한 화력을 쏟아 부을 테니까.” 

 “알았어. 부반장도 조심해.”

 

 녀석은 이내 자기가 속한 토치카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나도 뒤쪽으로 달려가 준비를 시작했다. 인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뒤, 건물 하나에 들어가 창가에 앉아 저격 태세에 들어갔다. 스코프 너머로 붉은색 숲이 보였다.

 

 잠시 뒤,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팔랑스를 선두로 철충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토치카 전부에서 불꽃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치카들 안에 배치된 30mm 기관포는 지금까지 쓸 일이 거의 없던 데다가 나이트 칙에게서 노획한 탄약과 부품들에 힘입어 상태가 아주 양호했고, 그에 걸맞는 위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선두의 철충들이 산산조각나자 녀석들의 진군이 잠시 멈추더니 팔랑스들이 앞에 모여 일제히 방패를 들었다. 뒤의 철충들이 그 보답이라는 듯 토치카들에 공격을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두꺼운 외벽은 안의 녀석들을 훌륭히 지켜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선은 고착화되었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 나는 주저없이 소리쳤다.

 

 “발포하라!”

 

 그러자 건물 잔해 사이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물론이고 옥상 위의 대공화기, 길가의 급조된 기관총 진지. 엔진이 고장나 고정포대로 쓰는 옛 전차. 그 모두가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심하게 소모되던 팰렁스들이 순식간에 작살나더니 더 이상 유의미한 대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아군의 사격이 그 틈새에 꽂히며 뒤의 철충들을 침묵시켰다. 이 구역 전체의 화력이 녀석들에게 집중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나도 라이플을 들어 철충들을 하나 둘 저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방패들은 무시하고 뒤에서 이쪽으로 총탄을 퍼붓는 녀석들부터 노렸다. 런처, 레기온, 센츄리온. 그런 녀석들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동체에 구멍이 뚫리며 쓰러졌다. 방패로 총탄을 막으며 꿋꿋하게 총을 갈기던 팰렁스 하나가 순식간에 대공포의 집중사격을 맞고 박살나며 쓰러졌다. 실더 여럿이 모여 벽을 이룬 장소에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다. 방패는 물론이고 동체도 산산조각나며 녀석들이 바스러졌다. 구식 무기라도 전차의 주포는 화력만큼은 아직 쓸 만했다. 방패 뒤에 숨은 녀석들의 머리 위로 기관총탄이 무수히 쏟아지자 녀석들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찔끔찔끔 사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을 밀어붙이던 중 갑자기 기관총 진지 하나가 폭발과 함께 날아갔다. 그 주위가 붉은색 투성이로 변했다. 한 폐건물 내부에 은폐해 사격하던 녀석들이 사격하려고 몸을 내민 순간 몸이 산산조각 났다. 붉은색 덩어리가 창틀에서 떨어지며 회색 도로에 새로운 색을 칠했다.

 

 적도 바보는 아닌지 쉽게 부서지지 않는 토치카보다는 뒤의 사격 부대가 더 위험하다 판단한 것이다. 녀석들은 전략을 바꿔 후방에서 나이트 캐논과 칙 스나이퍼 같은 철충들로 이용해 우리들부터 처리하고 있었다. 

 

 “젠장, 이건 곤란한데...!”

 

 꿋꿋하게 버텨 주던 토치카들도 이제는 외벽 곳곳이 파이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후방에서 팰렁스와 실더 개조형들이 충원되는 탓에 앞의 방어가 강해져 갔고 그에 따라 뒤의 철충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사정거리 밖의 공격에 시달리던 우리들은 더욱 심해진 공격에 직면해야 했다. 이미 적과 우리의 상황은 뒤바뀌어 있었다.

 

 갑자기 나무 사이에서 명백하게 큰 발포염이 보이더니 토치카 외벽에서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 가루가 잔뜩 날렸다. 숲 속에서 나타난 거대한 철충 몇몇이 대열 앞에 서더니 이쪽의 사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거대한 캐논포를 토치카에 쏘아대기 시작했다. 육중한 발포음이 들릴 때마다 토치카의 외벽이 눈에 띄게 깎여 나갔다. 

 

 “포대 녀석들! 보이냐! 저 덩치부터 처리해! 날탄으로 갈겨!”

 

 내가 있던 곳 바로 밑 도로에 세워진 전차에 그렇게 소리치자 알아들은 듯 포탑이 회전하더니 굉음을 내며 포신에서 불을 뿜었다. 귀가 먹먹해졌지만 내 관심은 저 너머의 거대한 철충에게 쏠려 있었다.

 

 “그렇지!”

 

 다행히 녀석들의 조준은 양호해 바로 빅 칙 하나가 박살나 파편을 뿌리며 주저앉았다. 다른 곳에 있던 포대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다른 빅 칙도 포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렇게 토치카를 위협할 만한 녀석들은 제거되었다.

 

 “좋아, 이렇게만 한다면...!”

 

 그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눈이 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두 귀가 먹먹해지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적의 섬광탄이 터졌다는 걸 알아채고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잠시 감각이 마비되었다.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깜박여 댔지만 마비된 감각은 너무나도 느리게 돌아왔다.

 

 흐려진 시야가 어떻게든 돌아오자 나는 바로 토치카 쪽을 쳐다봤고, 끔찍한 걸 보았다. 방금 전의 섬광탄으로 아군 시야가 차단된 사이 칙 캐논들이 하나씩 토치카에 접근해 있었다.

 

 “안돼!”

 

 내 간절한 애원애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자신의 몸체 하부에 달린 화염방사기로 토치카의 총안구에 화염을 퍼부었다.

 

 그리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작았지만 확실하게.

 

 한 토치카의 입구가 열리더니 온몸이 불타고 있는 바이오로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 바이오로이드는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날아온 총탄들에 몸이 꿰뚫리며 산산조각났다. 저 토치카 안에는 체-24가 있었다.

 

 “이, 이 개자식들아!”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손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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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머니에서 클립을 꺼내려고 손을 뻗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허리춤에 권총이 있었다.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던 중 폭발이 일어났다. 일어난 폭압에 밀려나가 반대편 벽에 등이 부딪혔다. 앞을 보니 건물 앞이 무너진 채 전차가 찌그러져 불타고 있었다. 옥상에 있어야 할 대공포가 찌그러지고 붉은 얼룩이 묻은 채 전차 위를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철충들이 보였다.

 

 “하, 하하하하하.”

 

 손에는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아직 탄약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싸워야 한다. 그래, 그래야만 한다.

 

 온몸이 삐걱거리며 아파왔다. 보니까 왼팔 팔꿈치가 반대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그래도 오른팔은 멀쩡하다. 총을 잡고 겨누고 쏠 수 있다.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철충을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철충들의 가운데서 푸른 섬광이 내려꽂히더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늘을 보자 검은색 거대한 AGS가 떠 있었다.

 

 “오르카호 소속 AGS HQ1 알바트로스! 그대들을 지원하겠다!”

 

 그 AGS는 철충들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내며 연신 푸른 섬광을 쏘아 철충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번 섬광이 내려꽂히며 폭발이 일어나면 철충들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우리의 포화에 꿈쩍도 않던 개채들도 저 AGS 앞에서는 그저 큰 표적에 불과했다. 최소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가 치명적으로 줄어든 철충들은 숲 속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엔 움직이는 철충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주위에 남은 건 부서지고 불타는 철충의 잔해뿐이었다. 허무할 정도의 결말이었다.

 

 잠시 주위 상공을 돌던 AGS는 나를 보더니 내 쪽으로 날아왔다. 가까이서 보자 어마어마한 덩치였다.

 

 “흠. 당신은 ‘두나이’ 기종이 맞나?”

 “그래.”

 “이 구역의 이상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다. 방금 전의...지금 뭐 하는 거지?”

 “뭐긴 뭐야. 경고사격이지.”

 

 AGS의 약간 옆 허공에다 발포한 나는 AGS를 향해 말했다.

 

 “당장 이 구역에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경고 없이 사격하겠다.”

 “뭣?!”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된 총탄은 녀석의 주위를 감싼 역장에 맞고 튕겨나갔다. 게속 발포했다. 탄이 다 떨어졌다.

 

 다가가서 녀석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당연히 닿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휘둘렀다.

 

 AGS가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그만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졌다.

 

 내 주먹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난 AGS가 물었다.

 

 “왜 이러는 것이지? 나는 자네의 적이 아니네!”

 “적 맞아!”

 “...?”

 “허가 없이 이곳에 들어오는 녀석들은, 전부 적이라 판단하라고 명령받았다고!”

 

 왜일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넌 적이고. 내가 어떻게든 내쫒아야 할 대상이다....”

 

 그만 눈이 감기며 몸에 힘이 빠졌다. 경고사격 후에도 떠나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쫒아내야 되는데. 그래야...멀쩡하게 돌아갈 텐데...미안...합니다.

 

 이 땅에서...쫓아내지...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