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집


"결국 에이다 씨도 대피소의 좌표 이외의 다른 정보는 없었네요..."


한산한 함장실. 앞에 놓인 책상 위에 놓인 대충 휘갈겨쓴 수첩을 다시 훑어보고는 삐걱이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하다못해 그 거대 철충에 대한 정보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그것도 지금으로선 완전히 수수께끼고. 지하 시설이라 내부 구조도 알 수가 없고...산 너머 산이 따로 없네요."


"전장의 정보를 그리 쉽게 얻기는 힘든 법이죠. 지금은 라비아타 통령이 숨어있다는 그 대피소의 위치를 알아낸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대원들이 직접 현지조사를 나가거나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겠죠."


옆에 앉아계시던 마리 씨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커피를 홀짝이셨다.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어렵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각하의 생각만큼은요."


마리 씨는 잠시 숨을 고르시고는 말을 이어나가셨다.


"프란츠 각하의 성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전에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대비해 놓은 다음 전투에 임한다.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들이 고려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의미는 아니죠. 가끔씩은 정확함보다 속도가 더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전 그렇게 미리 준비해놓지 않으면 머릿속이 하얘진단 말이에요. 이게 시뮬레이션이라면 또 모를까, 실전에서 그럴 수는 없잖아요. 아직 미숙한데."


"각하가 미숙하셨다면 이 함선에 있는 대원 전부가 아직까지 멀쩡할리가 없잖습니까. 자신을 가지십쇼. 게다가 각하를 도울 지휘관 개체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


마리 씨의 말도 일리가 있긴 하다. 아직까지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마리 씨 말마따나 곁에서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다른 지휘관 분들도...


"...'들'?"


"음? 모르셨습니까? 이번에 제조설비를 보수하고 개선하는 참에 꽤 많은 대원들의 복원작업도 진행됐다고 합니다. 그중에 지휘관급 개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마리 씨는 한참동안 책상을 뒤적이시더니 고개를 갸웃거리시고는 말씀하셨다.


"원래라면 오늘 오전중으로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복원한 대원이 많아 업무가 밀린 모양이군요. 공방으로 가서 관계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겸사겸사 그레고르 각하의 용태도 살펴보고요. 같이 가시겠습니까?"


"저야 좋죠. 어차피 여기 계속 앉아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이 김에 새로 복원된 대원분들과 인사도 좀 나누는 것도 좋겠네요. 특히 그 지휘관급 개체분이랑."


새 지휘관이라는 말에 발걸음을 재촉하기는 했지만, 괴팍한 분이 아니길 속으로 빌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3번 배양관 7분! 회수조 대기해주세요!"


"2번 배양관 작동 종료! 브라우니분들! 청소 진행하고 다음 유전자 씨앗 준비해주세요! 6번 박스에 있는거로!"


"누가 창고에서 이프리트 씨 박격포 좀 가져다 주세요! 안전장치 걸어놓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거 너무 무거워! 그냥 본인이 가서 들고가라고 해! 47호! 1번 배양관에 들어있는 대원 누군지 식별 돼?"


"몰라! 그냥 사진 찍어서 사령관님한테 보내!"


공방에 들어서자마자 나와 마리 씨를 맞이한 건 수많은 그렘린 씨들의 목소리와 요란한 기곗소리였다. 아무래도 한창 복원작업 중이라 부산스러운 것 같은데, 뛰어다니는 소리와 뭔가가 넘어지는 소리까지 합쳐져 공방 안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렘린 씨들이 합류했다는 보고는 서류상으로는 몇 번 보긴 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으시네요. 전장에서는 별로 뵈지 못한 것 같은데..."


"그렘린 같은 기술자들은 합류하면 대부분 이쪽으로 배치되고 소수만 전장에 나오니까요. 포츈 양도 최근에는 전장에 나오는 일 없이 여기서 일하는 게 대부분이고, 가끔씩만 손을 빌려주는 편입니다. 전문인력이 모자라다는 것 같더군요."


"사진 찍었어! 21호! 이거 사령관님한테 보여드리고 신원 파악해놔! 어, 마리 대장님이랑 프란츠 사령관님? 오랜만이시네요! 저 기억하세요? 저 그...아니, 됐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최근 복원된 바이오로이드 대원들의 명단을 보고싶어서 왔네. 오늘 아침쯤에 서류를 제출하겠다고 들었는데, 업무가 좀 밀린 모양이더군. 그리고 내가 자네를 못알아볼 거라 생각 말게, 그렘린. 자네가 만든 그 ALCM지뢰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잊을 테니."


ALCM지뢰라면 지난번 연구소 전투 때의 그 지뢰? 이 분이 만든 거였구나? 조금은 위험한 분일지도 모르겠다.


"으으으...너무 빤히 보지 말아주세요, 저도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요새 브라우니들 사이에서 자네에 관해 재밌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 같더만. 뭐, 지금은 넘어가도록 하지. 본론부터 말해서, 명단은 어디있지?"


"그거라면 바닐라 씨가 한창 작성중일 거예요. 저기 '연구실'이라고 쓰인 문 보이시죠? 거기로 가보세요. 다른 데는 한창 작업 중이니 함부로 들어가시지 마시고요."


"안내 고맙군. 그럼 우린 가보도록 하지. 문제 일으키지 말도록."


"반성하고 있다니까요..."


                                                                                         


"누군가 했더니 마리 대장님과 프란츠 주인님이시군요. 이곳에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에 앉아계시던 바닐라 씨가 우리를 맞이했다. 평소의 메이드복이 아닌, 간단한 와이셔츠 차림을 하신 탓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오늘 오전에 받기로 한 복원자 명단을 받으러 왔네. 아직 제출이 안돼서 말이야. 그나저나, 그 복장은 뭔가? 처음 보는데?"


"요 며칠 사이에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잠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명단을 찾는다고 하셨죠?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작성은 대부분 해놨으니, 출력해서 오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그레고르 씨의 상태도 살펴보려던 참이었으니, 저희가 직접 가서 확인할게요."


"주인님을 말이십니까? 그건 그리 추천드리지 못하겠군요. 지금 주인님께서는 저기 저 격리실 안에서 자신의 업을 청산하시는 중이니까요. 아직 머리에 꽂은 전선도 뽑지 않았고."


업? 격리실? 그게 무슨 의미지? 또 무슨 일이 터졌나?


"'또 무슨 일이 터졌나?'하는 표정이시군요, 프란츠 주인님.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그레고르 주인님께서 가만히 있기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시길래 제가 그동안 그분이 처리하지 않으셨던 밀린 서류들을 눈 앞에 들이댄 것 뿐이죠."


"서류가 산더미처럼 많다는 게 그런 의미였군. 얼마치가 밀린 건가?"


"얼추...3달치 정도려나요?"


"3달이요?!"


"그렇습니다. 다행히 그레고르 주인님께서는 수면이 꼭 필요한 몸이 아니시니, 24시간 내내 일하신다면 3주쯤 걸리겠군요. 그러니 되도록이면 만나지 않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인기척도 내지 마시고요. 방문객이 오면 또 그 핑계로 일을 쉬실 테니까요."


바닐라 씨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다시 기계들 사이로 사라지셨다. 나와 마리 씨는 바닐라 씨가 서류를 뽑아오시기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닐라 씨가 손에 두꺼운 서류 다발을 들고 오셨다. 


"받으시죠. 무거우니 조심하시고."


"이게 다 새로 복원된 대원분들이라고요? 이렇게나 많이요?"


"아니요. 복원된 대원들의 명단은 대략 맨 위의 10장이고, 나머지 서류들은 대원들에게 보급할 무기나 장비 목록, 자원 현황, 그리고 각종 연구에 대한 보고섭니다. 혹시 몰라 드리긴 했지만, 필요없으시면 세절하셔도 됩니다."


"고맙네. 나중에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그렘린 양에게 물어보면 알고싶지 않은 내용까지 전부 알려드릴 테니. 자, 그럼 서둘러 돌아가주시죠. 그레고르 주인님은 제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곧바로 딴짓을 하시는 분이라서요."


"고생이 많으시네요...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바닐라 씨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시고는 연구실의 문을 닫았다. 닫힌 연구실 문 너머에서 바닐라 씨의 한숨이 들린 건 기분 탓이었을까?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서류들을 상상하며 잠시 묵념을 했다.


"힘내세요, 두 분 다..."


내가 그렇게 문 앞에 멍하니  있는 동안, 마리 씨는 서류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고 계셨다.


"어디 보자. 캐노니어, 둠 브링어, 호드...는 없을 테고, 몽구스, 아머드 메이든..."


"뭘 그리 찾으세요, 마리 씨?"


"이번에 새로 복원된 지휘관급 개체가 누군지 찾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바닐라 양이 부대별로 분류해놓은 덕에 쉽게 찾을 것 같습니다만...아, 여기 있군요."


마리 씨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에는 한 바이오로이드의 사진과 대락적인 프로필이 깨알만한 크기로 적혀있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철혈의 레오나'?"


그리고는 그 밑에 붉은 글씨로 무언가가 추가로 적혀있었다.


"'주인님과 면담 후 정신적 충격으로 상태가 불안정해져 216호실에서 휴식중'..?


당연한 말이지만 난 이분을 아직 만나본 적도 없다. 그리고 나를 제외하면 이 함선에서 '주인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단 하나. 고로...


"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그레고르 씨..."


다음화

                                                                                         


글쓰기 힘들다

너무 힘들다

스토리 전개도 힘들다

처음에는 잘될 줄 알았는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