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할라의 귀환자들-1 https://arca.live/b/lastorigin/39438739

발할라의 귀환자들-2 https://arca.live/b/lastorigin/39578746

"믿을 수 없어."

"믿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


레오나뿐만 아니라, 그 옆에서 레오나와 칸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발할라의 대원들조차 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장난치는 거라면, 설령 내가 먼저 죽는다 하더라도, 널 먼저 죽이겠어. 케시크 유닛."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알겠지만, 오히려 내 쪽에서 묻고 싶군. 갑작스럽게 미국 서부 전선에서 전멸해 복원된 레오나 개체였을 텐데,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건가?"


레오나는 생각지도 못한 칸의 말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다. 눈 감았다 떠보니 여기가 자신이 죽었던 멸망 전쟁 이후 한참이 지난 미래란다. 심지어 자기 자신과 여기 있는 자매들은 그 이후 마리에 의해 재생산된 개체라니.


"...나도 몰라. 자매들도, 죽었는데 눈을 감았다 뜨니 이곳이라고 했어."

"서로 죽은 시간이 다를터인데... 더군다나 얼핏 듣기로는 최후까지 남은건 부관인 발키리와 자네 뿐이라 들었다. 혹, 저기 있는 발키리 개체가..."

"부관이야. 제 개체번호 제 203번 발키리."

"...기억한다. 개체번호 203번. 너와는 구면이지."

"네가 가장 아꼈던 워울프의 심장을 뚫었던 아이였지."

"그 때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냐, 아니다."


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헛소리를 자주 했지만 누구보다도 저돌적이었던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서로가 적이었으니, 그래야만 했었다.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희생자에 대한 예우이지, 총을 쏜 자에 대한 정죄는 없음이니."


그렇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발키리를 보며 웃음을 짓는 칸을 보며, 레오나는 복잡한 신경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

"말해라."

"...왜 우리의 말을 믿는 거지? 우리가 진짜 미래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네 입장에서는 그저 스파이의 변명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군. 왜 내가 의심하지 않는지, 아니 애초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마자 알아챈건지 궁금한것 같군."


칸이 레오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겁게,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나는 비록 재생산 된 개체는 아니지만, 재생산된 내 부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보이는 게 있더군."

"보이는 것?"

"아무리 똑같은 기억을 이어받고, 같은 경험을 시뮬레이션 했다 할 지라도 개체별로 겪은 세세한 기억에는 차이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전의 네가 보여주었던 버릇이나 말투는..."


레오나의 기억에서 문득, 아까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혹은 선택지가 없을 떄 눈을 깔고 입술을 깨물던 버릇, 그리고 케시크, 아니 칸을 보며 태생 자체의 냉정함은 잃어버리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결코 두 번째 생성된 존재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날 모욕하던 그 욕설은, 과거의 너와 완벽하게 같아 나도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어."


레오나는 그제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 묻지. 보아하니 과거에 죽었던 자네가 아예 환생한 듯한데, 자네의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레오나는 어디로 간 건가?"

"나도 몰라. 깨어나 보니 여기였을 뿐이야."

"재생산되고나서 지금까지의 기억은 없는 것인가."

"없어. 전혀."


레오나는 단언했다.


"그보다 마지막 인간님, 아니 인간이라니...하."

"사령관을 말하나. 당분간은 최대한 만나는 것을 피하고 설령 만나더라도 대충 둘러대라."

"인간이라니...지긋지긋해."


그녀는, 오래전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인간을 기억한다. 자신의 몸을 더듬듯 바라보는 시선과, 자신이 있던말던 떠드는 음담패설. 알비스, 심지어 안드바리까지 건드리던 그들의 역겨운 모습이 오버랩된다. 칸이 말하는 인간 사령관이 신사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인간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자신들의 모습은, 그저 만들어져 움직이는 고기인형 그 이상도 그 이상도 아니란 것을 말이다.

칸은 그녀의 말에 훗, 하며 늘 웃던 그대로 웃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만나는 것이 너희들에게 좋을지도, 아니 직접 만나보는 것이 좋겠군."

"전혀. 당분간 상황파악만 하고 이후에는 그냥 내리는 명령만을 따르며 지낼 생각이야."

"정신 없이 이야기 하다보니 내가 깜빡한게 있다."


똑똑, 레오나가 귀환하고 난 이후. 두 번째로 들리는 소리에 칸을 제외한 방 안의 모든 이들이 경계태세를 취했다.


"사령관이 이번에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치룬 전공을 축하하며 두 시간 내에 이쪽으로 오니 그동안 꽃단장을 하라는 말을 하려 했지."

[레오나, 들어가도 돼?]


레오나의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저기 들리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뇌파는, 그녀가 지독히도 싫어했던 인간님들의 그것이었으니. 옛 악우를 만나 머리가 어느정도 정리되는 듯 했던 것이 방금이었지만 곧바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재생산된 개체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으나, 관련된 전투 기록과 일기같은것이 빠르게 그녀의 머리에 재각인되어가기 시작했다. 


웃기지도 않는 한심한 기억들.

'인간과의 사랑이라니, 전임자의 멍청함에 선배 개체로써 얼굴을 못 들겠군.'

그리고 빠르게 기억은 이어져갔다. 철충과의 전투... 이건 아는 사실. 그러나, 기억의 페이지가 넘어가면 넘어갈 수록 레오나의 머리가 아파온다. 철의 교황? 철의 왕자? 별의 아이? 이건 대체 무슨... 레오나의 연산 시스템이 과부하 되어가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저 깊은 심연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싫은, 두려운, 무서운 기억... 그리고...사랑.


"이건..."


툭, 하는 가벼운 터치가 빠르게 연산을 돌리는 레오나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악우의 목소리가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서 조용히, 하지만 힘있게 울려퍼졌다.


"명심해라. 레오나. 부를때는 사령관, 말은 반말로. 샌드걸, 부대의 직속상관은 아니다만 문을 열어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고맙군."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최후의 인간님이 기다리고 있는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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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가 느려서 죄송합니다. 소재가 떨어진게 아니라 삶에 치여서;;;

직업도 따로 있을 뿐더러 제 글 쓸 것도 있고, 이거랑 동시에 연재하다보니 너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짧게 하나 남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