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편

2편






하늘은 무척 어두웠다. 지구는 푸르렀다. 모든 것이 아주 잘 보였다.

- 유리 가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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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갈라지고 철충들이 떨어진 다음 한동안은 밤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사방이 불타느라 밝았고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도시, 마을, 전기가 순서대로 사라지자 지금은 러시아의 한복판에서도 몽골의 초원에서,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보았던 것만큼 맑은 하늘이 보였다. 바이오로이드의 좋은 눈은 내게 말 그대로 1만개가 넘는 별들이 하늘 가득히 들어찬, 잊을 수 없는 광경을 선사해주었다.


장군의, 아니 대령의 막사에서 나와 마주한 하늘도 별이 촘촘하게 박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우리의 천막 앞에는 내 명령대로 대기하고 있는 워울프 상사와 퀵 카멜 소령이 보였다. 


취하진 않았겠지만 생각이 많았기에, 언덕을 느긋하게 걸어 올라갔다.



"추워요 대장."


천막으로 다가가 카멜과 마주 서서 이야기 할만한 거리까지 닿자, 카멜이 느긋하게 걸어온 내게 불만을 토했다. 동계작전용 외투도 다 잠그지 않고 있는 것으로 봐선 진짜 추워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바이오로이드가 이 정도 날씨에 추위를 탈 리가 없지.


"우와 대장 이제 술도 먹나보네."


"그래? 냄새가 많이 나나?"


"아니. 그래도 딱 보면 알지. 애주가 눈은 못속여."


워울프는 내가 술을 마신 것이 흡족한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카멜의 얼굴에는 화가 반, 걱정이 반이었다.


"아이 정말. 뭐 할 얘기도 없다는 듯이 가시더니 몇 시간동안 술이나 드시고. 별 일 없으셨죠?"


"별 일 없었지. 재밌는 얘기는 좀 들었고. 우리 부관에게도 알려줘야 할 것이 많다."


"그래요? 여기서 얘기할까요? 아님 산책이라도?"


"안에 있는 대원들은? 자고 있나?"


"몇 명은 자고 몇 명은 안자고... 평소랑 같네요 뭐."


"그럼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내 제안에 카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이란 말에 반응한 워울프 상사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나도 같이 가?"


"아니 워울프 자네는 불침번을 서야지."


"에이...."


불침번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워울프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어쩔 수 없지. 이야기가 워울프 상사의 귀에 들어갔다간 내일 점심 즈음엔 우리 대원들 전부 내가 말한 내용에 대해 떠들고 다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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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이 초병들을 숙영지에서 꽤 멀리 배치해놓은 모양인지, 주둔지 경계를 지나치지 않고도 우리 천막에서 적당히 멀리 걸어나와 아무도 오지 않을만한 건초더미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쯤에서 얘기하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렇구만.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저희가 안전한지부터요?"


"안전은 모르겠다만, 일단 그 전차장은 우리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더군."


"전차장이요? 소콜롭스키 소장?"


"아 그래. 그것부터 이야기하지. 그 사람 장성이 아니야."


"그럼요?"


"대대장이었다는군. 중령이었고, 여단장이 사망한 이후 진급해서 대령 계급을 달았다고 했다."


"그럼 그 장성 계급장 달려있던게 자기 옷이 아니고 죽은 사람 옷이었다고요?"


"생각해보니 그런 셈이군."


"으... 꺼림칙 하네요."


카멜은 질색이라는 듯 팔짱을 끼고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럼 소콜롭스키는 자기 이름이 아닐테고, 본명은요?"


"마슬로프. 마슬로프 대령. 전차대대 대대장이었고 원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주둔 중이었다는군."


"상트페테르부르크면 우리가 치기 전엔 블랙리버 영향권에 있었잖아요."


"그 사람이야 명목상 삼안 아래에 있는게 아니고 러시아 정부 아래에 있으니 상관 없지."


"우리한테 지랄하던 것도 그거 때문일까요?"


"애초에 이 사람들은 기업 소속이 아니니 블랙리버와도 상관이 없다만. 기업과 상관 없는 민간인들이 기업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니 그렇겠지."


"음. 으음."


우리 부대원들이 민간인들을 볼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 카멜은 민간인 얘기가 나오자 얼마 없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이 고심했다.


"하긴 그랬던 것 같네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군사 조직이 아직도 남아있다니."


"지도층의 대부분은 삼안 측에서 말 잘듣는 인사들로 채워두긴 했다만, 애초에 이 나라가 삼안 산업의 관심을 끌 것이라곤 시베리아의 자원 뿐이니 그렇게 됐겠지. 애초에 유럽 러시아는 삼안과 블랙리버의 완충지대이기도 했고."


"별 볼일 없는 뒷골목이라고 쥐 떼를 방치한 것과 다름이 없네요."


"그리고 우리는 그 쥐에 물려버렸고. 밭쥐도 큰 놈은 팔뚝만하게 자라는데 본 적이 있나?"


"으으. 그 얘기 10년에 한 번씩 하는거 알아요?"


카멜이 질색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카멜 말대로 한 10년마다 한 번 정도 보는 귀한 표정인 것도 같다.


"그래? 내가 이 얘기를 세 번이나 했나보군."


"네. 진짜에요."


"그렇다면 미안하다. 뭐 그래도 지금 상황을 보면 10년 뒤에 이 이야기를 또 듣고 싶을텐데."


"음. 그건 부인하기 힘드네요."


내가 무안함에 멋쩍게 웃어보이자, 카멜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었다. 속 깊은 부관을 둔 덕분에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편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부대까지 세바스토폴로 간다구요? 아무리 경로를 줄여도 2000km는 될텐데요."


"그만큼 급한 것이겠지. 삼안도 무질서하게 호드 부대들을 소환하는 중 아닌가. 삼안 산업의 영향권 안에 있는 정부들도 나쁘면 나빴지 더 좋은 상황일 수는 없겠지."


"저쪽도 나쁘군요 상황이."


희망적이지 않은 소식에 막막한 기분을 털어내려는 듯 카멜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맞이하는 하늘은 티 없이 맑았고, 카멜도 나와 같이 한없이 쏟아지는 별들을 넋놓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내 어깨 너머의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카멜이 마음이 정리됐는지 다시 먼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 대대장이 우리에게 원하는게 뭐라던가요? 왜 굳이 협박까지 해가면서 저희를 끌어들인거죠?"


"별 것 없고 다만 우리의 전투력을 원하는 것 같더군."


"전투력이요? 그런 사람들이 왜 대장한테 그렇게 까칠하게 굴죠? 명령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장의 협조를 구해야 할 판에. 우리야 삼안의 지휘권 있는 임원들 말만 들으면 되는거잖아요."


"듣기로는 이 인간들의 부대가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굉장히 적대적인 분위기인 것 같았다. 그래서 지휘관인 그 남자도 우리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거지."


"그럼 그 마슬로프 대대장 영감탱이는 바이오로이드에 호감이래도 있대요? 바이오로이드 권리 운동이라도 했나? 아니면 대장 미모에 반했나? 으...."


카멜은 제 스스로 말해놓고도 소름이 돋는지 다시 팔짱을 끼었다. 나도 꺼림칙한 기분이었고.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마라 카멜."


"예에. 제가 생각해도 좀 그러네요."


"그래. 그런데 자네 예상과는 달리 마슬로프 대령도 딱히 바이오로이드를 고운 시선으로 보는 것 같진 않았다."


"지 입으로 그렇게 말하던가요? 위협해서 단순히 압박만 하려던게 아니라고?"


"아니.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오히려 사과를 받았지."


"사과요? 의외네요. 그 정도면 진짜로 바이오로이드에 호감 있는 사람 아니에요?"


"나도 조금 놀라긴 했다. 사과 뿐만 아니라 손님 대접도 받았고. 그런데 마주대할 때의 태도나 눈빛을 보면 딱히 바이오로이드를 곱게 보거나 그런건 아닌 것 같더군."


"그래요? 음...."


카멜이 뭔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오른손만 올려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려댔다.



"그으... 런데 그러면, 대장은 뭘 보고 그 사람이 우리를 해치려는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건가요?"


"아. 그게 오히려 쉬운 질문이지."


"뭔가요?"


"공포." 


호드의 대장으로써, 호드의 선봉으로써, 내게 희생당하는 적들이 보였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왔고 더없이 익숙한 것이였다. 그리고 마슬로프 대령의 눈동자에서도, 그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은은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은 도움을 구할 때 거짓말 할 여유가 없는 법이니."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501번 퀵 카멜 소령은 나와 30년을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해왔고, 아마 내가 그와의 대담에서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면..."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노회해진 나의 부관은 그 뒤에 숨겨진 뜻까지도 충분히 읽어낼 역량이 있었다.


"이 사람들도 딱히 기대가 없는거군요."


"아쉽게도 그래 보였다."


내 대답에 카멜은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흐릿했던 것으로 보아 지평선이 아닌 그 너머를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지평선을 몇 번은 넘도록 달려왔고, 그럼에도 이 끝간데 없는 평원을, 러시아를 탈출하는 여정은 절반도 채 진행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대장."


"왜 그러나."


"대장도 걱정하고 있는거죠?"


"그래 보였나?"


"네. 우리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도 긴가민가 했는데, 대장 말을 듣고 나니 확실한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다면 다분히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다 싶은데."


"뭐... 저도 대장 분위기가 옮아붙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주세요."


퀵 카멜의 말을 듣고 카멜의 얼굴을 살피니, 약간의 걱정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생각하고 보고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오히려 카멜이 대장인 나보다도 다른 사람의 분위기를 파악하는데는 뛰어날테니 맞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카멜이 옳을까? 내가 마슬로프 대령처럼 두려움에 걱정을 하고 있는가?


내 기억 속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카멜이 옳았다.



"부관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거겠지. 부하들에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술에 취한 줄도 모르고 마음 속에 빈틈이 생겼던 모양이다."


"평소에 술을 안드시니 그럴지도요."


"워울프 상사도 눈치를 챘을까?"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죠. 워울프 애들이 눈치가 없긴 해도 대장보단 빠릿하니까요."


"섭섭한 평가구만."


"대장이 다른 사람 눈치나 보는 성격이었으면 우리 애들이 이렇게 따랐겠어요? 대장은 여장부 스타일이라서 멋진거라구요. 이렇게 고민 걱정 같은거 하고 계시면 안되는데에-"


방금 전만 해도 나한테 공포가 옮았니 어쩌니 하던 카멜은 어느새 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인 나는 웃을 여유 하나 없이 부관의 걱정이나 받고, 부하들이 대신 웃어주고 있으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너희는 내가 혈혈단신으로 전장을 해쳐나가는 줄 알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많은 힘을 받는지는 모를거야.



"한숨 자고 나면 좀 머릿속이 개운해지지 않을까요? 오늘은 다른 대원들 만나지 말고 그냥 여기서 주무시죠."


"여기 말인가?"


"아. 그냥 제안이었어요. 대장이 원하는대로 해야죠."


"아니,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애초에 밖에서 잔 것이 하루이틀도 아니니."


"네. 제가 숙소에서 침낭 가져올게요. 침낭 깔아놓고 이야기 마저 해요. 오랫만에 단 둘이 시간 좀 갖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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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푸르기보단 허옇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새벽이겠지.


딱히 규율잡힌 군인으로써 생활해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습관이 되었는지 항상 동이 튼 직후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는 했다. 오른편에서는 먼저 일어난 이미 카멜이 사용했던 침낭을 정리하고 있었다.



간밤에는 분명히 부아아앙 하고 울려퍼지는 기관포 소리에 잠을 깼었다. 침낭 속에서 보았던 풍경. 어두운 들판 위를 불꽃놀이처럼 수놓는 붉은 예광탄과 공중에서 산산조각나며 불타던 철충 비행체의 모습을 보았었다.


공습을 당할까 긴장하며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안락한 조건이므로, 기관포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귀를 침낭 속에 깊게 묻어버린 채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아무리 최고급 바이오로이드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극도의 긴장과 압박 하에 몇 주 이상 군사 작전을 지속하면 피로가 쌓이게 마련이니까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부하들의 체력은 꽤 신경 썼던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곯아떨어질 수 있는 상태라는걸 몰랐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아니 모른건 아니었지. 내가 무시했을 뿐.


"일어나셨어요?"


"어... 잘 잤나 카멜?"


"저야 항상 잘 자는걸요. 대장이야말로 오랫만에 진짜 푹 자는 것 같던데요."


"그랬나?"


"최근에 잘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길래 걱정을 좀 했거든요."


"걱정해줘서 고맙군."


카멜의 말대로 잘 잔 것은 맞다. 꽤 오랫만에 꿈꾸지 않고 편하게 잤으니까.


일주일 내내, 잘 때마다 추락하던 탈론페더의 무전을 다시 듣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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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드의 천막으로 돌아갔을 때 천막은 이미 정리가 되어있었다. 떠돌이 여행객에게 부지런함은 필수적인 미덕인 법이다.


"아 대장이다."


상자에 짐을 집어넣고 있던 427번 하이에나 상병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좋은 아침이다 하이에나. 다른 대원들은?"


"몇 명은 변소 땅 파러, 몇 명은 아침 받으러 갔고 샐러맨더는 나랑 짐을... 어 얘 어디갔지?"


"내가 오다 봤다. 워커에 짐을 올리고 있더군."


"아. 그렇구나. 근데 대장, 어제 왜 안들어왔어? 워울프 상사가 대장이 술을 잔뜩 먹었다고 그랬는데 그거 때문이야?"


"술 때문은 아니었고 그냥 편히 자고 싶어서 지휘관 특실을 하나 받았지. 너희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안자고 떠들고 놀지 않았나?"


"에엥. 우리 때문에 안온거야? 어차피 우리는 서너시간만 자도 되잖아. 여덟 시간은 너무 길기도 하고. 불침번 끝난 워울프 상사가 신나서 대장 본 얘기 떠들던데."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으니 카멜 소령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지.


"그래. 험담 좀 하던가?"


"그럼. 불침번 끝나고 645번 카멜이랑 교대하자마자 시작했지. 대장이 자기만 빼놓고 카멜 소령이랑 놀러갔다고 입이 산처럼 솟아나와 가지고 떠들던데. 대장은 어제 뭐 좋은 술 좀 먹었어?"


"보드카였지. 뭘 기대하겠나."


"헤헤. 대장 안색이 좋아보이길래 무슨 약주를 드셨나 해서."


"내 안색을 보고 물어본게 아니고, 워울프 상사가 떠든 얘기 아닌가?"


"들켰나? 히히."


하이에나가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하고 웃었다.


"그래도 안색이 좋아보인다는건 진짜야. 요즘 잘 못쉬었잖아 대장. 우리 중에 대장이 제일 중요하니까 나도 걱정하는거지."


"그런가. 걱정시키지 않도록 하마. 미안하다."


"미안할건 없구. 나 일해야 돼. 가기 전에 짐 다 싸놔야지."


"알겠다. 수고가 많다 하이에나."


"응. 집합 시간에 봐."


대원들이 개인 정비를 하고 주둔지 정리를 하는 동안 나도 빠르게 개인 정비를 마치고 해야할 일이 있었다. 명목 상으로는 마슬로프 대령과 만나 지난 밤에 있었던 전달 사항에 대해서 들어야한다. 실제로는 저들의 동향을 파악한 이후 우리의 행동을 따로 또 결정해야겠지.


카멜 소령의 말대로 한숨 푹 자고나니 머리가 맑아져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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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슬로프 대령의 커다란 천막으로 가는 길은 어제와 별 다름이 없었지만, 분위기는 꽤 달라졌다. 아, 그 천막에서 나오는 장교단은 빼고. 여전히 내게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인지 적대적인 것인지 여러 감정이 뒤섞인 것 같은 태도를 보여주었다. 생각해보면 겨우 하룻밤만에 그들의 태도가 바뀔 이유도 없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는 길에 트럭 한 대와 욕지거리를 하며 땅을 파는 병사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군복을 입고 있지 않은 민간인들 같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온통 시커먼 옷을 걸친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금빛의 커다란 목걸이와 옷처럼 시커멓고 높은 모자, 게다가 한 번도 깎지 않은 듯한 회색 수염까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런 사람들을 볼 일은 거의 없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사제의 복장이었다. 아마도 정교회 사제겠지.


병사들이 천막을 정리하고 몇몇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대령의 천막 근처도 꽤나 소란스러웠다. 천막 입구 앞에는 어제 보았던 초병들 대신 오를로프 중위가 책상과 의자를 하나 깔고 앉아있었다. 책상이나 의자나 철제 뼈대에 나무로 판만 덧댄 물건이라 앙상하고 왜소해보였지만, 오를로프 중위 자체가 그렇게 덩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꽤 어울려보였다. 


오를로프 중위에게 마슬로프 대령을 보러 왔다고 말하자, 중위는 기다리라고만 답했다. 3분 정도 지나자 어제처럼 장교들이 나왔고, 그들은 앞서 말했듯이 어제처럼 나를 훑어보기만 하고 지나가버렸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오를로프 중위는 나더러 들어가십시오 한 마디를 또 했고, 그게 중위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마슬로프 대령의 천막에 들어서자 어제는 켜켜이 쌓아두었던 책상과 의자들이 방금 회의에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도열되어 있었다. 어제는 접어두었던 지도도 펼쳐져 책상들 중앙에 놓여있었고, 마슬로프 대령의 앞에는 술과 빵 대신 아마도 지휘용일 패널과 담뱃갑이 놓여있었다. 대령의 몸에서 희미하게 담배냄새가 났지만, 어제부터 천막 안에 담배 냄새도, 재떨이도 없었으므로 실내에서 피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 편한대로 앉으시게. 혼자니까."


"방금 보니 여기 드나들던 장교들도 영관들이던데. 대대장들 아닌가?"


"그렇네만."


"당신도 중령에 대대장이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가?"


"이 대열의 규모가 여단급이라는 것은 직접 봤으니 알겠지만... 글쎄 좀 혼란스럽군. 진짜 여단 편제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여단이 대대와 독립중대를 10개씩 달고 다니는가? 그리고 대대장 출신인 당신이 대대장들 사이에서 진짜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말하면서도 마슬로프 대령이 어떻게 반응할지 내심 걱정했었으나, 그는 의외로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편제는 아니지. 소모된 제대들이 모여 겨우 여단 한 개 어치 병력만 남은 것이니까. 리더십 문제는 외부인인 자네가 걱정할게 아니니까 신경쓸 필요 없네."


"그런 것 치고는 회의실 목소리가 좀 높던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말이지."


"협의란 원래 그런거다. 이런 저런 말이 오가는 법 아니겠나? 모두 닳을만큼 닳은 지휘관들이니 감정적인 문제같은건 걱정 놓아도 좋다."


"천막 안에 스타프카를 차리셨군."


"젊은이처럼 생겨가지고 고릿적 비유를 하나."


"외모는 그래도 당신과 나이가 비슷할지도 모르지."


"자네가 정중하게 나올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어. 앉기나 하게. 피차 잡담이나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어제 첫 만남부터 그런 소리를 해놓고 정중이고 예절이고 소리가 나오냐 따지고 싶었지만 그의 말따마나 한가로이 담소나 나누고 있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일단 앉았다. 마슬로프 대령과 한 칸 띄워서.


"아마 지난 밤에 직접 보았을지도 모르겠네만-"


대령은 패널을 두드려 흑백의 열영상 이미지를 띄우고는 내게 패널을 돌려 보여주었다. 철충에 감염된 펙스제 드론이었다.


"우리 대공포대에서 철충들이 조종하는 드론을 발견하고 격추했네. 우리 지휘관들은 지난 교전 경험에 따라 이 철충들이 정찰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런가? 좋아."


답변을 들은 마슬로프 대령은 패널을 다시 두드리더니 지도를 띄워 보여주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제대의 위치와 경로가 노출되었다고 판단하여 경로를 변경할 예정이고, 기존 경로에서 동쪽으로 40km 정도 이격된 이 도로를 따라 이동할 예정이다. 다른 제대와의 전투지경선이나 거리 문제는 없고, 병력들은 기습에 대비하여 높은 경계상태에서 고속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고속 이동하면 차량의 관리나 보급 상의 문제는 없는가? 일간 기동 거리는 증가하나?"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보급은 이미 다 고려를 해두었고, 다만 유지 보수와 휴식에 시간이 더 필요할테니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속도를 늘린 만큼 늘지는 않겠지. 그래도 우회하면서 늘어나는 이동거리를 벌충할 정도는 안될거다."


지도 위의 기호와 숫자를 이리저리 삿대질하며 말하던 대령은 패널을 내려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선두에 설 자네 부대도 교전에 대비하고 높은 경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거야말로 쓸데 없는 걱정이군. 우리는 그런 정도로 피로를 느끼진 않거든."


"그런가? 좋다. 아 그리고, 설마 그 악명 높은 호드 부대가 겨우 트럭들이 고속 기동한다고 못쫓아오는 일은 없겠지?"


"하하."


대령 입장에서야 확인차 물어본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 누굴 우습게 보는가?


"단 두 마디 만에 아까 것보다 더 쓸데 없는 질문을 만드는 재주가 있군."


"자신만만하구만. 전할 말은 다 했으니 볼 일 보시게."


"그래. 출발할 때 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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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