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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과 리마토르의 식사는 누가 봐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잘 구워진 냉장 푸아그라에 듬뿍 얹어진 발사믹 소스, 소완 특유의 섬세한 성격을 반영한 정밀한 조각이 올려진 카나페, 멸망 이후 엄청난 사치품이 된 소비뇽 블랑 와인 모두가 오롯이 사령관 한 명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반면 리마토르의 몫인 컵밥 하나는 바로 맞은편에 앉은 상대의 만찬에 비하면 조촐하다 못해 부끄러울 정도로 큼직한 종이컵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마저도 수급이 쉬운 닭고기조차도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김치와 달걀 지단, 김가루가 조금 뿌려진 게 전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군. 사령관 입장에서는 명백한 상하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할 필요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식욕 부문에서 이런 극명한 차이를 보여줄 필요까지 있었으려나.’


리마토르는 속으로 사령관의 조치에 불만을 표했지만, 그 감정을 밖으로 끌어내는 순간 숙청당하는 건 시간 문제였기에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김치의 빨간 양념이 밥과 달걀에 골고루 물들 정도로 비비자 참기름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올라와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래도 참기름을 뿌려주는 건 보면 아주 기초적인 예의조차 내다버린 건 아니군.’


평소라면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었겠지만, 일단은 오르카호 최고 통수권자가 준비한 만찬인 만큼 예의를 차려 조금만 떠서 입에 넣고 씹었다.


‘맛은 나쁘지 않구만. 음식물 쓰레기를 준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네.’


그가 나름대로 맛을 음미하며 식사를 하던 중, 사령관이 그에게 나이프와 포크를 들이밀며 말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저만 먹기 죄송하니 같이 드시죠.”


나이프와 포크로 집은 두툼한 푸아그라가 거절할 새도 없이 그의 그릇으로 떨어지자 리마토르는 급히 말문을 열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사령관님이 드시는 게 맞죠.”


“제가 죄송한 겁니다. 소완에게 만찬을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할 줄은... 사죄의 뜻이라기에는 작지만 받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것 참... 감사히 먹겠습니다.”


사령관의 겸연쩍은 웃음을 받은 리마토르는 하얀 푸아그라를 숟가락으로 썰어내면서 생각했다.


‘사령관이 지시한 바가 아니라면 주방장의 독단으로 봐야하는 건가. 아니야, 이미 경호를 명목으로 날 쥐도새도 모르게 죽이려는 전적이 있는 남자야.


이 역시 나에게 모욕을 준 걸 전부 주방장의 책임으로 돌리고 푸아그라를 나눠준다는 행위로 호의적인 인상을 심어주려는 고도의 계략일지 몰라.


정말이지 무섭구만... 이 정도는 해야 수많은 바이오로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사령관이란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인가...’


사람을 다루는데 매우 능숙한 사령관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자칫 방심하면 아무 혐의나 씌고 숙청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건네진 푸아그라 한 조각마저도 자신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을 거라도 생각하니 도무지 식사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안 먹는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었기에, 그는 잘라낸 푸아그라를 입에 넣었다.


‘이... 이럴 수가....!


므와아아시이써어어어!!!!!!!!


간 요리 특유의 비린 맛을 잘 잡아냈어! 거기에 이 고소한 우유맛의 부드러움! 마치 버터 같아!


발사믹 소스의 새콤함이 자칫 느끼할 수 있는 푸아그라의 지방 맛을 상쇄해주면서 기분 좋은 고소함만을 남기고 있어... 여기에 소비뇽 와인을 곁들이면 풍미가 더욱 올라가겠지.


소완...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솜씨를 갖추고 있었어. 괜히 사령관이 만찬 준비를 믿고 맡긴 게 아니었군.


좋아, 정말 대단해. 내 밥도 이런 식으로 잘 만들어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


속으로 감탄을 아끼지 않던 리마토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령관의 시각을 깨닫고 곧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입맛에 맞으신가요?”


“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맛이군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계시길래 혹시 맛이 안 맞나 싶었거든요.”


“아.”


그제야 리마토르는 자신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에 묻어나는 투명한 눈물이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울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런, 추태를 보였군요. 맛이 훌륭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나 봅니다.”


“그게 뭡니까, 하하.‘


그렇게 두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인들이 보기에는 유쾌한 장면 같았으나, 사령관과 리마토르 모두 웃는 입과 달리 눈은 냉철하기 그지 없었다.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소완의 음식이 맛있다고? 연기가 덴세츠에서도 감탄할 정도군. 이렇게까지 해서 날 방심시키려고 하나본데, 리마토르 널 신뢰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과한 연극을 하면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사령관 당신은 정말이지 철두철미해. 웃음마저도 계산된 타이밍에 터뜨리다니. 여태까지 당신이 한 걸 생각해보면 여기서 내가 제안을 던지기 좋도록 판을 깔아줄 거라 의심해도 충분해.’


서로의 눈치를 확인하던 두 남자는 이윽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말을 꺼냈다.


“저기-”


“그러고-”


말과 말이 부딪치는 순간의 침묵. 또 다시 이어지는 양보.


“아 먼저-”


“방금 뭐-”


다시 침묵. 방금 전까지 있었던 유쾌함을 대체한 어색함에 그 광경을 보던 주변의 브라우니들은 멸망 이전의 멜로 드라마를 겹쳐 보았다.


‘상뱀, 이거 그 밀당 아님까?’


‘브라우니, 그거랑 이거는 달라요.’


‘아무리 봐도 맞는 거 같슴다. 인류 재건은 이미 실패한 걸지도 모름다.’


‘호오, 그거 흥미로운데? 게시판에 한 번 써봐야겠어.’


사령관과 리마토르가 모르는 사이 음모론이 퍼져나가는 동안, 둘은 제대로 대화를 이어가는데 성공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개인 연구실의 보장과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자료에 관한 부분이라면 제가 거의 모든 부분에 한해 열람을 허용해드리겠습니다. 리마토르님께서 안드바리에게 가시면 보관된 서적 대부분은 자유롭게 보실 수 있으십니다.”


‘대부분. 그렇다면 그 안에는 내가 열람해서는 안 될 자료가 있다는 뜻이겠지. 이 부분은 오히려 내가 권한을 포기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안전하다.’


“허가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제가 필요한 자료는 딱 철학과 연관된 문서면 충분합니다. 그만큼의 권한이면 됩니다.”


‘일부러 권한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리마토르 너는 이런 쇼를 할 필요까지 해서 뭘 얻으려는 거냐. 넌 연구만 해주면 된다.’


“뭐,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안드바리에게 철학 문서만 따로 분류해둘 테니 그곳의 자료를 마음대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구가 진척 되는대로 리포트를 작성해서 보고 올릴 테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리포트까지 써주시려고요? 바쁘실 텐데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리마토르는 원하던 권한을, 사령관은 리마토르의 방향성을 알아내며 만찬은 끝을 향해갔다. 사령관의 접시와 리마토르의 컵이 모두 텅 비었을 때쯤 식당도 비었고, 사령관과 리마토르도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그러던 리마토르를 붙잡은 건 소완이었다. 식사도 끝났는데 그녀가 자신을 부른 것에 의아했던 리마토르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런 그에게 소완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며 말했다.


“만찬 때 컵밥을 드린 소첩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사과의 뜻으로는 미약하지만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준비했습니다.”


“아니 뭐 이런 걸... 신경쓰지 않았는데 챙겨줘서 고맙습니다.”


“아니옵니다. 다음에도 소첩의 식사를 드시러 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이건 사령관님을 위한 딸기 로마노프를 넣은 수플레 크레이프이옵니다.”


“이건 또 언제 만든 거야? 잘 먹을게 소완.”


바로 눈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빅엿을 먹은 리마토르는 속으로 어이 없는 감정을 소완에게 쏟아부었다.


‘젠장, 끝까지 나를 멕이면서도 화를 내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감정을 건드는군. 이러다가 나중에는 아주 밥에 약이라도 타서 괴롭히겠어.’


리마토르는 소완을 자신의 요주의 인물 목록에 올려두고 식당을 나왔다.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가던 중, 그는 얼마 걷지도 않았건만 시야가 흐려지며 어지러움이 자신을 덮치는 걸 느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지? 먹은 거라고는 컵밥이랑 바닐라 아이스크림 밖에 없는데...’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 벽을 짚고 간신히 쓰러지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퍼질러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의식조차 점점 깜빡이고 있었다.


‘안돼... 의식이... 설마 진짜... 밥...에... 약...을...’


그의 의식이 완전히 날아가자, 식당에서 고개를 비스듬하게 내밀고 있던 소완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와 쓰러진 그를 들쳐 업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우로라와 포티아도 들어오지 못하는 소완 그녀의 개인실에 의식을 잃은 리마토르를 눕힌 후, 그녀는 가늘고 고운 손에 달라붙는 하얀 고무장갑을 꼈다.


“이해하시옵소서. 소첩은 리마토르님이 주인께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 검증해야했사옵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으나, 결국은 그녀의 사심에서 비롯한 월권행위를 저지르는 중이었다. 소완은 장갑을 낀 손으로 리마토르의 뺨을 적당한 강도로 치더니 물었다.


“일어나시옵소서.”


“...어... 응...”


리마토르가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갔다.


“귀하의 이름과 소속을 말하십시오.”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소속은... 블랙 리버 3541 군사기지... 연구팀...”


“무슨 연구를 진행했습니까?”


“바이오... 로이드들의 사상... 인간에 대한 자유...”


리마토르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소완은 놀랐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대로라면,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에게 종속될 의무를 만든 에머슨 법을 무력화하는 연구를 진행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믿지 못했던 그녀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진술을 수정하십시오. 당신이 진행한 연구는 무엇입니까?”


“...바이오로이드들의 자유... 권리에 대한 투쟁... 인간이 창조한 대상을 핍박하지 않는... 사회를 위한 연구였습니다...”


소완은 놀람을 넘어선 어떤 경외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자백제를 사용해서 얻어낸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받을 정도지만, 아무리 몽롱한 정신상태에서 정신력을 쥐어짜내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그 악독한 구 인류라면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었을 테니, 소완은 그가 가진 사상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연구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립은 파멸을 부릅니다. 존중과 공존만이 평화를 가져옵니다.”


“하하하.... 믿을 수 없군요.”


소완은 더 이상의 심문을 진행해봤자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렸다. 어쩌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평범한 인간의 사상을 초월한, 고대의 성인군자에 더 가까울 정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백제에 취해있는 리마토르를 들쳐 업고 아까 그가 쓰러졌던 그 자리에 던져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사령관에게 약물을 사용했다가 발각되었던 일을 떠올리더니 혼잣말을 읊조렸다.


“소첩은 주인복을 타고 났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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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완이 8화에서 '경계를 모두 풀 수 있는 요리'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부분이 복선이라면 복선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