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호에 특화된 컴패니언 부대는 복원되자마자 언니인 블랙 리리스의 지시하에 제갈민의 경호 스케쥴을 짜기 시작했다. 포츈에게 듣자하니 자신들이 복원된 이유는 자신들의 주인님이 전투에 앞서 나갔다가 어깨에 총상을 입은 걸 계기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복원 사유를 듣자 리리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였다면 절대로 총상을 입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주인이 전투가 아닌 지옥에 앞서가더라도 주인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니까. 주인님이 전투에 앞서 나간다면 주인님보다 먼저 앞서 나가 주인을 노리는 총탄에서부터 그를 지키고 소중한 주인님에게 총을 쏘는 어리석은 적들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줄 것이다. 

 

‘너무 걱정 마세요, 주인님. 리리스가 왔으니 이제 주인님은 안전하답니다.’

 

오른팔에 흰색 붕대를 칭칭 두른 채 어색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넨 주인을 떠올린 리리스는 주먹을 꼭 쥐고 모인 동생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원이 별로 없으니 일단 페로가 홍련씨와 함께 서류작업을 도와주렴. 하치코는 페어리의 동생분을 도와 가사일을 돕고, 스노우페더와 펜리르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을 도와주렴. 당분간 주인님의 경호는 내가 맡을게.”

“언니. 죄송한데 손님이 찾아왔어요.”

 

흰올빼미의 유전자가 들어간 스노우 페더가 비행장치를 펼치고선 자그마한 소녀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리리스의 앞으로 날아왔다. 동생의 품 안에 안겨있는 밀짚모자 소녀의 정체를 알아챈 리리스는 작성 중이던 스케쥴을 조용히 접고선 무릎을 굽혀 자그마한 소녀와 눈을 마주했다.

 

“어머나, 더치걸이잖아요? 이 시간에 여기엔 무슨 일로 왔어요? 저희 하치코와 놀고 싶어서 왔나요?”

“레아 언니가 리리스 씨와 얘기하고 싶어해. 화원으로 와줬으면 좋겠어.”

“페어리의 레아씬가요? 저와 할 얘기가 있다면 레아씨가 직접 오라고 하세요. 전 지금 주인님의 경호 문제로 매우 바쁘답니다.”

“레아 언니 말로는 꼭 둘이서만 나눠야 하는 대화라고 해서..” 

 

스노우페더의 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겁먹은 얼굴로 눈치를 보는 더치걸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편인데다가 작은 소녀를 괴롭히는 취미까진 없었기에 리리스는 이마를 붙잡았다.

 

“알았어요. 실내화원말이죠? 그럼 페로. 나머지는 네게 맡겨도 되겠니?”

“네, 언니. 맡겨만 주세요.”

 

똑 부러지는 동생이라면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믿은 리리스는 작성중인 스케쥴표를 페로에게 넘기고선 더치걸을 따라 실내 정원으로 향했다. 

 

안 쓰는 폐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실내정원은 이제 원래의 흉물스런 모습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페어리들의 손길과 포츈의 기술을 몇 번 거치자 콘크리트 외벽은 강화유리로 바뀌어 있었고, 담을 기며 제멋대로 자라나던 담쟁이들은 오래된 멋을 잘 살릴 수준으로 잘 정돈되어있었다. 

 

조명이라곤 유리 너머로 비치는 창백한 달빛이 전부인 실내 정원에 들어가자 하얀 테이블에 앉아있던 오베로니아 레아가 블랙 리리스의 앞으로 사뿐히 날아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리리스 씨. 오신 김에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레아씨. 꽃만 가꾸는 누군가 들과는 달리 저는 매우 바쁜 몸이여서요. 방금까지도 주인님의 경호계획을 짜느라 매우 바빴답니다?”

 

둘 사이에 몰아치는 싸늘한 분위기에 리리스를 안내한 더치걸은 바들바들 떨며 레아의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 뒤로 몸을 숨긴 더치걸을 잘 달래 화원에서 내보낸 오베로니아 레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가꾸는 건 꽃뿐만이 아니에요. 주인님의 정원이라면 꽃이 되었던 기계가 되었던 열심히 가꾼답니다. 그런데 그 정원에 해충 한 마리가 날아들어서 매우 곤란해요..”

“해충이요?”

“네. 해충이요. 겉으로는 착한 척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체는 저희의 정보를 캐내는 아주 괘씸한 해충이랍니다.”

 

정보를 캐낸다는 말까지 듣자 리리스는 레아가 왜 그제야 그녀를 불러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인님과 함께하는 이들 중, 외부의 첩자가 있다. 주인님을 배신하려 드는 괘씸한 해충은 대체 누굴까. 곱게 휘어진 황금색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래서 절 불렀군요. 그래서 그 해충이 누군가요?”

“한 번 알아맞춰 보시겠어요? 리리스씨 능력이라면 문제 없을 텐데.” 

 

레아의 말을 들은 리리스는 맨 처음 자신을 만난 제갈민이 공단 안에 있는 모두를 소개했을 때를 떠올렸다. 일단 브라우니, 레프리콘, 블러디 팬서는 아니다. 그녀들은 여기 오기 전 울진이란 곳에서부터 주인님과 함께 여기까지 걸어서 내려온 가장 오래된 멤버들이다. 그 충성심만큼은 리리스로써도 인정했고, 무엇보다 군용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들이 첩보를 할 이유가 없다. 

 

페어리 시리즈도 리스트에서 제외해야 한다. 첩보원이 숨어들었다고 알려주는 레아가 첩보원일 리가 없을뿐더러 대기를 휘저어 뇌우를 불러낼 만한 능력이 있는 그녀가 고작 첩보일 만 할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페어리 시리즈는 외부에서 불러온 인원이 아니라 그녀들이 속한 컴패니언처럼 주인님이 직접 복원한 개체다. 

 

포츈 또한 제외해야 한다. 수석 엔지니어인 그녀는 공장의 온갖 궂은일들을 맡아 해주고 있다. 그녀가 첩보원이라면 정보 수집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사보타주를 했을 것이다. 더치걸은 애초에 첩보 능력이 없으니 예외로 치고. 

 

첩보 능력을 가장 잘 갖춘 건 최근에 합류한 홍련이지만 합류한 시간이 너무 짧다. 몇 번 고민한 끝에 리리스는 첩보원 용의자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외부에서 합류한 인원이자, 타인의 발걸음이 잘 안 닿는 곳에서 일하고, 정보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을뿐더러 도주까지 쉬운 인물.

 

리리스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해충은 탈론페더 씨로군요?”

“정답이에요. 탈론페더 씨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처리하진 말아 주세요.”

 

첩자가 있다는 걸 안 순간 리리스는 허리춤에 찬 블랙 맘바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레아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리리스는 당장 뛰쳐나가 탈론페더를 붙잡고 알고 있는 걸 전부 불게 한 다음, 미간에 총구를 겨눴을 것이다. 

 

“왜 당장 처리하지 말라는 거죠? 페어리 시리즈는 첩보원을 보고도 그대로 놔주나 보죠?”

“저도 당장이라도 해충을 구제하곤 싶지만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어서요..게다가 주인님께서 탈론페더를 아끼시니 저로써도 어찌할 방법이 없답니다.”

“방금 말은 물증만 찾으면 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그녀를 감시 선상에 놔주세요, 리리스씨. 저도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감시할 테니까요.”

“알았어요. 만약 감시하는 도중, 외부와 내통한다는 물증이 발견 된다면..”

 

리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소 지은 레아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푸른 눈은 페어리들의 여왕이라는 이명에 걸맞는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레아를 바라보는 리리스의 눈 또한 황금색으로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만약 탈론페더가 이 광경을 봤다면 바로 오르카 호에 보고한 다음, 오르카호가 있을 일출봉을 향해 전속력으로 도망쳤을 만한 광경이었지만 아쉽게도 탈론페더는 침실 속에서 꿈나라를 여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저기, 다프네. 이 약 말고 다른 약은 없어?”

“그게 가장 잘 드는 약이여서요..힘드셔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진통 효과는 좋지만 이거 약빨이 너무 센데. 간호사 복을 입은 다프네에게 녹색 알약 한 개를 받은 나는 붕대에 칭칭 감긴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브라우니의 적절한 응급치료덕에 출혈은 멎었고, 총알이 뚫고 지나가 찢어진 살갗도 다프네가 꿰매 주었지만, 구멍 난 어깨뼈가 욱신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뼈를 재생시켜준다는 약과 함께 진통제를 처방받긴 하는데..진통제가 너무 세서 탈이다. 고작 한 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정신이 멍해지니 도저히 서류에 집중할 수가 없다. 

 

아직 까지는 나 대신 홍련과 페로가 서류 업무를 해 주고 있지만 나도 서류작업을 해야 하는 데다가 오늘은 바깥에 나가서 아직 쓸 수 있는 물품들을 수거해와야 하는 날이다. 제정신일 상태에서도 총을 맞았는데 약을 먹고 헤롱거렸다간 어떻게 될진 안 봐도 뻔하다. 

 

“저기, 오늘은 외부로 나가야 하는 날인데..좀 약한 약은 없어? 헤롱거리는 상태로 나갔다간..”

“걱정 마세요, 주인님. 리리스가 곁에 있잖아요? 리리스가 곁에 있는 한, 어딜 가도 주인님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그...래... 얘가 있었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바짝 몸을 밀착시키는 리리스를 알아챈 나는 살포시 웃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아와 포츈말에 따르면 리리스는 삼안 최고의 경호원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경호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옆에 날아다니는 푸른 드론이 좀 신기하긴 하지만 블러디 팬서처럼 든든한 외골격이 없는 그녀가 경호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좀 걱정되긴 한다. 

 

“저기, 리리스. 넌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날 따라가는 것보단 여기에 적응할 겸 기지를 지켜주는 쪽이 어떨까 싶은데?”

“리리스는 잘 할 수 있어요. 주인님. 제발 리리스를 믿어주세요.” 

“리리스씨는 꼭 데려가셔야 해요, 주인님.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매우 강하답니다.”

 

다프네까지 저리 말하니 거절할 수가 없구만. 왼손으로 뺨을 벅벅 긁은 나는 내 옆을 지키는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슬퍼보이는 눈을 한 채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나쁜놈이 된 것 같잖아. 난 리리스가 걱정되서 그런 건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 한번 데려가 보자. 삼안 최고의 경호원이라고 하니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만약 위험에 빠지더라도 팬서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거야. 

 

손바닥에 있는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키니 식도를 타고 몽롱한 기운이 전신에 퍼져간다. 휘청거리는 몸을 부축해주는 리리스에게 희미하게 웃어준 나는 다프네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어줬다. 

 

“그럼 우리 다녀올게.”

“몇 번씩이나 말씀드리지만 조심하셔야 해요, 주인님. 아무리 오래된 물건이라고 해도 저희에게는 주인님보다 소중한 건 없답니다.” 

“알았다니까 그러네.”

 

몇 번 좀 아팠다고 어느새 잔소리가 늘어버렸구나. 예전에는 나긋나긋한 미소로 배웅해주던 아이였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내가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우려가 섞인 시선으로 날 배웅하였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리리스를 좀 걱정해줬으면 좋겠는데. 내 팔을 잡고 부축해주는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잘 해낼 수 있으려나.

 

 

*

 

 

“와...리리스씨 개쩜다.”

“그러게. 개 쩌네.”

“주인님! 착한 리리스가 전부 처리했어요!!”

 

수많은 철충의 잔해 위에 서 있는 리리스는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우아하게 내 곁으로 걸어왔다. 최강의 경호원이라는 의미가 위협할 것들을 미리 싸그리 제거해서 최강의 경호원이라고 한 건가? 고작 권총 두 자루로 대 학살을 일으킨 리리스를 보자 나는 물론이고 옆에 선 브라우니마저 멍하니 박수만 보냈다. 

 

레아가 자연재해를 불러온다면, 리리스는 인간 재해 그 자체였다. 공장내에 있는 철충을 발견하자마자 리리스는 명령을 부탁하였고, 난 그녀에게 철충을 섬멸하고 아군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부탁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자아줄이라는 기계로 철충들의 총알을 막은 리리스는 권총 두 자루를 치켜들더니 마치 크리스챤 베일 주연의 어느 영화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으로 공장 내에 있는 철충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철충을 전부 쓸어버린 리리스는 총을 교차시키는 멋진 마무리까지 보여줬다. 

 

여러 명의 입에서 그녀의 능력과 힘을 들었지만 이 정도로 셀 줄은 몰랐는데. 내 옆으로 다가와 아름답게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헛웃음만 나왔다. 거 참.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한 건지. 

 

“고마워, 리리스. 네 활약덕분에 오늘도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공장 안에 있는 물건들을 회수 할 수 있겠어.”

“이 정도는 준비 운동도 안되는 걸요. 앞으로도 주인님은 리리스가 지켜드릴게요.”

“그래..고맙다..그리고 리리스 말고도 모두 수고했어. 이제 물건들 회수하고 빨리 뜨자.”

 

오늘 우리가 온 곳은 바로 식료품 공장이었다.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기에 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었지만 규모가 제법 크고 다른 일도 많았기에 뒤로 미뤄두고 있던 곳이다. 블러디 팬서의 지시를 받은 레프리콘과 브라우니가 창고 문을 열자 초콜릿들과 치즈를 포함한 각종 가공식품들의 산이 철충을 뚫고 온 우리를 반겨주었다. 게다가 가져갈 때 쓰라는 듯이 냉동 컨테이너가 달린 트럭들까지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초콜릿 몇 개를 집어 내 옆을 지키는 리리스와 브라우니에게 건네준 나는 팬서와 함께 만족스런 눈으로 식료품들을 훑어보았다. 일행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며 빈 공장들과 도시를 돌며 식료품과 생활용품들을 털고 다니니 마치 만주벌판을 달리던 마적떼나 대항해시대 해적떼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식량을 확보하려면 어쩔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선 마적이던 해적이던 되야하는 시기니까. 이 정도면 당분간 식량 걱정은 없을 것이다. 

 

식량을 실을 수 있을만큼 잔뜩 실은 트럭들을 끌고 기지로 돌아오자 컴패니언의 자매중 한 명인 페로를 대동한 레아가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날아왔다. 내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며 혹시나 다친곳은 없는지 확인한 레아는 내 옆에 서 있는 리리스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리리스씨? 교대시간이에요. 제가 있었을 때는 별 일 없었답니다.”

“어머나 아쉽네요. 별일 있었으면 했는데. 그럼, 주인님? 리리스는 아쉽지만 이만 물러나 볼게요. 페로? 주인님을 부탁한단다.”

“네, 언니. 주인님.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백색 꼬리를 한 차례 살랑거린 그녀는 라디오 타워로 향하는 리리스를 한번 바라보더니 날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리리스처럼 내 옆에 따라붙었다. 총상을 입은 직후 내 곁에는 항상 컴패니언 자매들이 따라붙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리리스가 따라붙었지만 가끔씩 그녀가 자리를 비울 때면 페로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고, 페로마저 자리를 비워야 할 때가 온다면 나머지 컴패니언이 따라붙었다. 화장실까지 따라오려고 하는 리리스보단 페로가 그나마 낫지만 그래도 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말이지. 

 

“펜리르씨! 공장에서 베이컨과 소시지 가져왔는데 같이 드시지 말임다!!”

“브라우니! 펜리르씨는 지금 경계 임무중이시라고요!! 함부로 권유했다간 리리스씨가..”

“고기?! 나 배고파! 나 갈래!”

“자, 잠깐만요, 펜리르씨?!”

 

줄줄이 달린 프랑크 소시지와 베이컨을 들고 온 브라우니의 유혹에 그대로 홀라당 넘어가 자리를 비우는 펜리르를 바라보는 페로의 눈은 작전 중에 멋대로 먹을 것을 까먹는 브라우니를 바라보는 블러디 팬서의 눈과 놀랄 정도로 똑같아 보였다. 사람 두셋은 거뜬히 갈아먹을 눈빛으로 브라우니와 함께 주방으로 달려가는 펜리르를 지긋이 노려보던 페로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날 향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펜리르에게 한마디 해야겠군요. 펜리르를 대신해 죄송합니다, 주인님.”

“괜찮아. 마침 딱 배고플 시간이잖아? 날 봐서라도 이번 한 번 펜리르를 봐줘.”

“알겠습니다. 대신 리리스 언니에게는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호위에 공백이 생겼으니까요.”

 

그건...펜리르에게 더 무서운 일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페로에게 혼나는 것이 리리스에게 혼나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나아 보인다. 이번 일은 못 본 척 해달라고 페로의 주머니에 몰래 초콜릿을 찔러주자 초콜릿을 집은 그녀는 나와 초콜릿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하늘이 꺼질 기세로 한숨을 쉬었다. 

 

“블러디 팬서씨가 왜 착해서 탈이라고 하시는 지 알 것 같군요. 주인님의 지시니 일단 따르겠습니다. 절대로 초콜릿 때문이 아니라는 점 알아주세요.”

“나쁜 것보단 착한 쪽이 낫잖아? 그나저나 네 언니는 라디오 타워에 왜 간거야? 레아와 교대한다는 말은 또 뭐고?”

“글쎄요..페어리 시리즈의 레아씨와 무슨 대화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저로써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민해봐도 모르겠다. 같은 삼안의 바이오로이드인데다가 장녀 포지션이니 뭔가 둘 사이에 통하는 게 있겠지? 정 궁금하면 나중에 리리스나 레아에게 물어보면 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페로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은 나는 홍련이 기다리고 있을 제어실로 향했다. 

 

“어서오십시오, 민님. 마침 이 시설에 대한 보고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서류 더미를 들고 차곡차곡 책꽂이에 꽂아 정리하던 홍련은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더니 막 꽂아놨던 서류더미를 내게 내밀었다. 

 

“‘북부 전선 MRE’, ‘동계 전투 피복’..이거 혹시 여기 안에 있는 군수 물품 숫자야?”

“네. 현재 시설 안에 보관되어있는 모든 AGS들과 군수물자들을 전부 조사했습니다. 종류와 숫자까지 전부 조사해 수치화 시켰으니 보시는 데에는 문제없을 겁니다. 지금은 포츈씨와 AGS들의 도움을 받아 차례차례 종류별로 정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창밖을 보자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무인 크레인이 열심히 움직이며 트레일러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많은 걸 너희 둘이서 조사했다고? 리리스도 상식을 벗어난 초인이었는데 너희 둘도 상식을 벗어난 초인이구나? 너무 많아서 손을 놓고 있던 물건들을 전부 조사한 것도 모자라 종류별로 정리하는 홍련과 포츈에게 이제는 경이감까지 들 지경이다. 

 

“아니, 그냥 매우 많다고 알고 있으면 될 것을 일일이 조사하다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민님. 비록 제가 대테러부대 소속이긴 하지만 군수물자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물자는 하나의 빈틈없이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공장에서 가공식품들을 가져오셨더군요. 재고 조사는 하셨습니까?”

“아니..그게..방금와서..”

“후우..알겠습니다. 브라우니양과 레프리콘양의 도움이 필요하겠군요. 블러디 팬서씨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팬서라면 아마 바깥에 세워놓은 트럭 근처에 있을거야.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아마 주방에 있을 거고. 방금 다녀왔으니 조금만 쉬게 해줘.”

“알겠습니다. 그럼 20분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20분이 뭐야, 한 시간은 쉬게 해야겠구만. 벽에 걸린 시계는 2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타이밍 좋게 벽에 스피커에서도 오후 두 시를 알리며 탈론페더의 정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후 2시부터 4시는 휴식 시간 겸 낮잠 시간인데.. 그 시간에 일을 시키는 건 좀..”

“..낮잠시간이요? 그런 게 있다고는 못 들었습니다.”

“팬서가 안 말해줬어? 우린 별 일 없으면 2시부터 4시까지 낮잠 겸 휴식을 가져. 12시서부터 2시까지는 점심시간이고.”

“그래도 조사는 해야 합니다.”

 

깐깐한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순간 기가 푹 꺾였다. 옆에 선 페로는 묵묵히 내 옆만 지킬 뿐.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적인 경호원이다. 그래, 따지고 보면 내 역할은 최종 결정을 내리는 역할이지.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하자. 서류를 들고 날 바라보는 홍련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나는 대신 나중에 그녀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줘야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제 남은 건 이 서류를 확인하는 일 뿐인데..약효가 지나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어깨를 몇 번 매만지자 옆에 서 있던 페로가 걱정스런 눈을 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주인님, 상처가 아프신가요? 다프네 양을 불러올까요?”

“아냐, 아냐..다프네도 많이 바쁠거야. 다프네가 준 약이 있으니까 이거면 충분해. 미안한데 물이나 한 컵 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대신 많이 아프시면 제게 반드시 말씀해주세요.”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꿀꺽꿀꺽 마셔 식도로 넘기자마자 약효가 훅 올라와 전신을 휘감았다. 몽롱한 감각과 함께 사지에 힘이 쭉 빠진다. 왼팔로 나른한 다리를 주무르려 하자 우려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페로가 날 쇼파에 눕히더니 손으로 내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제가 주물러드리겠습니다, 주인님. 혹시라도 아프시면 말씀해주세요.”

“고마워 페로..덕분에 좀 살 것 같아..”

“하치코까지 불러드릴까요?”

 

그녀의 자매를 떠올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미트파이를 잘 만드는 그녀는 아마 지금쯤 주방에서 다프네를 도와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열심히 하는 그녀를 불러다가 괜한 곳에 힘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다. 

 

“아냐.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몸에 힘을 빼시고 제게 맡겨주세요, 주인님.”

 

하얀 메이드복을 입은 그녀는 다리서부터 시작해 나른한 몸 이곳저곳을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다리에서부터 올라온 하얀 손이 허리를 지나 붕대를 두른 팔을 피해 어깨를 주무르고 목을 타고 올라 머리로 향했다. 고양이 유전자가 들어간 그녀여서 그런 걸까? 조심스레 머리를 누르는 손길이 마치 애완 고양이의 꾹꾹이 같다. 

 

나른하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 걸 느낀 난 페로의 두피 마사지를 받아 가며 홍련이 작성한 서류를 검토했다. 그녀가 힘들게 작성한 서류니까 달달 외우진 못해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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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스와 레아가 최애여서 그런지 등장빈도가 점점 높아지네. 어쨋든 탈론페더 첩보난이도 헬로 변함.


그리고 리리스에게 이퀼리브리엄 장면 따라해 보라고 하면 영화에 나온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따라할 수 있을 듯.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설정오류 지적도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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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373070

9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402274

10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599944

1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709272

12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158758

13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363544

14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558197 

15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054292

16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163165

17화 https://arca.live/b/lastorigin/47255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