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호에 돌아온 지 하루가 지났다. 이 곳 부대원들도 하나둘 원래자리로 돌아가며 저항군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갔다. 사령관은 충분한 회복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아직도 전용 수복실에 감금되다시피 입원해있지만 반면 나는 내 쪽 애들을 설득한 덕에 하루만에 퇴원하고 자유롭게 함내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설득이 안먹혀서 땡깡부렸다. 피곤한 것 빼곤 딱히 다치지도 않아서 밥 먹고 잠만 푹 자면 되는건데 하여간 과잉보호라니깐.


내 방에 나도 모르게 설치된 카메라와 도청기에 관해서는 칸이 책임지고 탈론페더에게 징계를 내리고 카메라도 금방 치우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탈론허브 서버실 인질삼아 인질극 벌이는 꼴 보기싫으면 빨리 처리하라고 으름장놨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방에서 나온 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AGS 격납고였다. 오르카호 안에 들어온 뒤 트레저를 한번도 못봤기에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한 거였다. 사실은 사령관한테 할 말이 있어서 사령관부터 찾아가려고 했는데 십중팔구 아직도 수복실에 갇혀있을테고, 또 생각해보니 거긴 사령관 간호(?)할 바이오로이드들로 꽉 찼을 것 같아서 나중에 시간 지나고 사람도 좀 빠지고나면 갈 생각이다. 


근데 정작 AGS 격납고에 도착했을 땐 내가 찾던 애들은 안보여서 정비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수리용 드론들한테 무슨 광선 마사지를 받고있는 포트리스와 알바트로스, 로크를 찾을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부사령관님. 포츈 정비사께선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나를 인식한건지 포트리스 몸체의 발광부에 초록빛 불이 들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과묵히 수리받고 있던 알바트로스와 로크 또한 뒤이어 불이 들어왔다.


"안녕 포트리스. 지금은 니들 보러 온 거야. 몸은 좀 어때?"


"앞으로 약 2시간 뒤면 장갑 교체 작업이 완료되어 다음 임무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어... 너한테 또 임무를 맡길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쾌차해라."


"이런이런, 로봇한테 쾌차라는 표현은 별로 적합한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옆에서 듣고있던 있던 로크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며 대화에 참여했다.


"사소한 걸로 따지지 마셔."


"큭큭큭... 그러도록 하지요."


"말 나온 김에, 로크 네 몸은 좀 어때? 여기서 가장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이런 부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프라이드에 금이 간 게 제일 크죠. 알바트로스 지휘관과는 달리 각하를 구한다는 임무에 실패했으니 말입니다."


"실패는 무슨. 듣자하니 추격자라는 연결체 처리해줬다며? 니가 타이밍 좋게 나타나지 않았으면 사령관은 오메가한테 잡히기도 전에 죽었을걸. 철충 추격대 싹쓸이한것도 너라고 들었고. 너도 제대로 한 몫 했으니 가슴 펴도 돼."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군요. 저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부사령관 당신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알바트로스 지휘관께서 당신에게 묻고싶은 게 있다고 하더군요?"


로크가 고개를 까딱해 알바트로스 쪽으로 내 시선을 유도했다. 알바트로스는 푸른빛이 감도는 발광부로 말없이 날 주시하고 있었다.


"으, 어젠 라비아타랑 칸이 이러더니 오늘은 니들이냐... 뭔데?"


"레모네이드 감마와 레모네이드 오메가, 그리고 오메가 산업의 회장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묻고싶다."


"뭐? ...아, 그거."


사실 나에겐 오메가, 감마, 그리고 회장까지 끝장낼 기회가 있었다. 호라이즌의 지원으로 오메가 본진에서 탈출한 뒤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감마를 알바트로스한테 명령해 죽이고 갈 수도 있었고, 오메가와 포로교환이 끝난 뒤 발포명령만 내렸으면 오메가와 회장을 골로 보낼 수 있었다. 그 대신 내가 내린 결정은 감마를 그 곳에 남겨둔 채 떠나는 것과, 오메가의 군대가 철수하는 동안 지켜보기만 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궁금해지더군요. 당신은 무슨 불살주의자라도 되는겁니까?"


"그럴리가 있냐. 솔직히 거창한 이유같은 건 없어, 펙스와 결판을 짓는 건 사령관 손으로 해야할 일이기 때문이야. 나 말고 걔가 주인공이 되야지."


내가 아닌 사령관이 라오 원작의 주인공이라 걔가 나중에라도 활약하게 비켜줬던거지만 포트리스가 그 판단의 문제점을 짚어줬다.


"비논리적인 판단입니다. 레모네이드 세력은 시급히 처리해야 할 거대한 적대세력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레모네이드가 더 경계심을 갖추고 태세를 굳힌다면 나중에 더 상대하기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 뭐, 좀 안일한 생각이긴 하지... 그래도 오메가는 집도 지하실 빼고 다 날아갔고 병력도 제법 줄어들었으니 머리만 놔줬을 뿐이지 피해는 제대로 입혔잖아?" 


"피해를 입은 건 오르카도 마찬가지다 부사령관."


"...음, 생각해보니 우리쪽도 그렇긴 하구나."


나랑 사령관이 고립돼있는 동안 오르카와 펙스 병력은 서로 사령부를 뺀 상태에서 전면전을 벌였었다. 오르카는 북미대륙 안으로 진입해 사령관을 구하기 위해, 펙스는 오메가가 사령관을 잡을 동안 그걸 저지하기 위해. 그 결과, 오르카를 막으려던 오메가 휘하의 AGS 병력 중 절반 이상이 둠브링어 특제 불지옥을 맛보고 소멸됐으나 댓가로 오르카호 부대원들도 겨우 사상자만 없지, 사령관 지휘 없이 싸우느라 부상자가 넘쳐났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사령관이 있는 전용 수복실을 제외하면 일반 수복실은 꽉 차서 각자의 숙소에서 치료받고 요양해야 할 지경이었다. 평소 화력을 아끼던 둠 브링어마저 미국 지형을 바꿀 정도로 미사일을 퍼부었으니 창고의 탄환, 포탄도 바닥을 보일 정도로 줄어들어버렸다. 거기다 수복비용도 있으니 사령관이 돌아온 뒤 안드바리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이 6:4 비율로 나온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당분간은 강제 휴전 상태겠네. 이 틈에 철충이 습격한다면 곤란해지겠지만 마침 철충쪽은 내전 벌이느라 바쁠테니 이 참에 숨죽이고 쉬지 뭐. 그리고 또 생각해봐, 사령관이 무력하게 붙잡힌 동안 내가 걔를 구할뿐더러 펙스까지 무너뜨리면 어떻게 되겠냐? 나랑 그녀석의 입지가 뒤바뀌거나 하다못해 동등해지는 미친 결과가 나올거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어차피 각하와 당신이 현재 단 두 명 밖에 안남은 최후의 인류인데."


"그런 게 있어. 난 여기서 더 크면 나중에 힘들어져. 그나저나, 트레저는 어디있는 거야? 걔도 여기 있을거라고 생각했는..."


"어머머, 우리 동생! 여긴 어쩐 일이니? 누나 보러 왔다고 대답해주면 굉장히 기쁠 것 같거든!"


마침 정비실에 들어온 포츈이 한 팔로 이마에 맺힌 땀을 슥 닦으며 다른 팔을 붕붕 휘둘러 인사했다. 나를 '우리 동생'이라고 부르는걸 보니 원래부터 오르카에 있던 포츈이 아닌 내가 옛날에 오메가의 본진에서 데려온 포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원래 있던 포츈을 도와 이곳에서 AGS 정비 및 점검 일을 하고있었다.


"아, 어서와. 포츈 너도 찾고있긴 했지만... 정확히는 네가 정비를 담당하고 있는 트레저를 찾아온 거야."


원래 트레저의 셀주크 몸체를 정비하는 일은 사령관 쪽 포츈이 하던 일 중 하나였으나 내 쪽 포츈도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하던 일을 일부 넘겨받았었다. 트레저 정비 담당도 인수인계받은 일 중 하나였다.


"트레저라면 오늘 새벽에 정비반장 언니랑 닥터가 데려갔거든? 아직까지 안오고 있는 걸 보니 많이 바쁜가봐."


"정비반장이면 사령관네 포츈? 이랑 닥터? 무슨 일로...? 감마한테 맞은 손상이 그리 심했던건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트레저가 쓰던 셀주크 몸은 필요없다길래 내가 도로 가져왔거든. 이게 그거야."


포츈이 손가락으로 정비실 구석에 방치된 셀주크를 가르켰다. 전원이 꺼진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크레인에 걸려있었으며 몸통 밑면의 해치가 휑하니 열려있었다. 그 안엔 빛이 들지 않아 그늘만이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트레저 어디있어."


"잠깐잠깐, 표정 풀어. 우리 동생이 걱정하는 일은 아닐 거-"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할 일이지, 트레저 어디갔어!?"


"닥터의 연구실에... 아, 잠깐만!"


포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정비실을 나가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연구실 문앞에 도착하자 자동문 센서가 나를 인식하고 문을 휘잉 열어줬다.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갔으나 때마침 안에서 나오던 누군가와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아야..."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평범한 바이오로이드의 입에서는 나올 리가 없는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매우 낯익은 목소리였다. 그것도 스피커를 통해서가 아닌 목구멍에서 직접 나왔기에 기계음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


통증에 찌푸리고있던 눈을 껌벅거리며 뜨자 내 눈 앞에는 나보다 키가 큰 건장한 남자가 서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무런 말도 못하며 그 남자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보다가 그 손을 잡자 남자는 팔을 당겨 나를 일으켜세워줬다.


"너...?"


"음, 이상하게 익숙한 상황이네요... 아, 이게 아니지."


내가 어버버하는 사이 남자는 꼿꼿하게 경례 자세를 취하고 힘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승리! T-1 고블린, 트레저! 복귀 신고합니다!"


"트레저... 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경례를 받아주지도 못한 채로 그의 뺨을 꼬집거나 가슴팍을 두드리거나 하다가 이내 가장 먼저 든 생각부터 솔직하게 내뱉기로 했다.


"...잘 돌아왔다."


트레저의 허리를 양팔로 안자 트레저도 슬쩍 경례하고 있던 오른손을 내리더니 두 손으로 내 등을 감싸 포옹했다.


"헤헤, 허그는 참 오랜만이네요."


"...이번엔 베어허그 안해?"


"어... 형님이 전에 그거 숨막힌다고..."


"눈치없게 굴지 마 짜샤. 어서."


트레저가 잠시 눈치를 보더니 내 겨드랑이 밑으로 양손을 쑥 집어넣고선 나를 번쩍 들어올려 있는힘껏 껴안았다.


"형니임! 이것 좀 보십쇼! 드디어 제게 다리가 생겼지 말임다!"


"하하! 그래, 나도 보여! 정말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원래대로는 아님다, 완전히 쇠로 된 의족이라서 말임다."


"...잠깐, 뭐?"


"서프라이즈~"


트레저의 어깨 너머로 보인 닥터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 닥터 너도 있었구나."


"당연하지! 여기가 누구 연구실인데."


트레저가 날 도로 땅에 내려놓은 뒤 주변을 보자 이 방 안에 포츈과 아자즈도 있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그녀들 모두 나와 트레저를 훈훈한 눈빛으로 보고있었다.


"이렇게 감동적인 상봉이라니, 누나 눈물이 나올 것 같거든?"


"아...하하... 그렇게 감동적이라고 할 건 아닌 것 같은데..."


"흥미롭네요. 이게 브로맨스라는 건가요?"


"브로맨스란건 또 뭐야!?"


포츈, 아자즈와 간단하게 말을 나눈 뒤 다시 트레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그 다음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자 까만 바지를 입고있는 그의 하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실례한다고 한마디 한 뒤 그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근육의 단단함 정도가 아닌 진짜 쇳덩이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이거... 하반신은 완전히 기계인거냐?"


"예에 뭐 그렇게 됐슴다. 저보단 닥터한테 설명을 듣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슴다."


"오케이! 거기서부턴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보시라! 기계와 바이오로이드의 완벽한 융합, 사이보그 고블린 마크2!"


"사이보그?"


바톤을 넘겨받은 닥터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오르카 공순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둘째 오빠도 알다시피, 기계로 하반신 만들어주는 건 원래부터 가능했어. 그동안 그러지 못했던 건 트레저 오빠의 몸 상태가 너무 처참해서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놓을 수 없는 상태였기에 대형 AGS에 병상까지 통째로 집어넣었던 거고. 그런데 이번에 검사해보니 생명유지장치가 정지된 상태였더라고. 밖에서 레모네이드 감마한테 정통으로 맞았다고 했지? 아무래도 그 때 충격으로 망가졌었던 모양이야."


"잠깐 그러면... 대체 어떻게?"


"뭐라고 해야하나, 1년 가까이 치료용액 속에 담궈놓으니 몸이 많이 회복된 모양이야.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내도 괜찮을 정도로. 천만다행이었지... 아무튼 더이상 셀주크 몸체 안에만 있어야할 이유도 없으니 제대로 하반신을 만들어서 붙인거야! 허리까지는 원래 몸이지만 밑에 골반부터는 전부 기계로 이루어져있어."


"...무슨 메카 프리저도 아니고..."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저 분의 하반신을 만들 땐 터미네이터라는 고전영화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만들어봤어요. 나중에는 위에 인조 피부라도 만들어서 씌워보려고요. 비스마르크의 아라크네처럼 사람 모습을 한 AGS를 만드는 데 쓰인 기술을 확보하면 가능할거에요. 참, 그건 그렇고. 저 하반신은 사실 아직 완벽한 건 아니에요. 소화기관 및 배뇨기관은 갖췄지만 성기능은-"


"아자즈 언니, 거기까지 말해주진 않아도 돼..."


닥터가 까치발을 들고 설명을 덧붙이려던 아자즈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자즈가 하려던 말은 아마 얘가 아직도... 고자 상태라는 거겠지. 불쌍한 놈...


"아하하하하핰!"


...벽 모퉁이 너머에서 리디아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발끈한 트레저가 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뭐가 그리 웃기냐!"


"니 거시기 임마!"


"이런 좆같은 년이!"


"니꺼 본 지 오래되서 좆이란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나지!?"


"아오!!!"


"자자, 그쯤해둬. 사람들 보고있는데서 싸우지 말고. 쟤는 나중에 내가 한 마디 할테니까 참아. ...근데 리디아 넌 언제 온거냐?"


이름을 불린 리디아가 모퉁이 너머에서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태연하게 걸어나왔다.


"형님이 정비실에서 어디로 급하게 달려가는 거 보고 뭔일인가 해서 따라왔지. 야, 휠체어에서 내린 거 축하한다."


"내 셀주크 바디를 휠체어 취급하지 마! 그건 바퀴도 안달려있다고!"


"알았으니까 둘 다 거기까지. 아무튼, 이제야 인간과 고블린과 장발브 조합의 근본 파티로 돌아왔네."


"그렇슴다. 이렇게 있으니 옛날 생각나지 말임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네요."


"생각해보니 그 때 우리 셋이서 같이 다닌 기간은 일주일도 안되네. 형님, 점마 다리도 생겼으니 언젠가 셋이서 어디 놀러갈래?"


"어흠, 흠...!"


어느새 대화에서 잊혀졌던 닥터가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아, 미안 닥터. 네가 있다는걸 깜빡했네."


"하여간 정말이지... 그래도 뭐, 필요한 설명은 다 했으니까, 트레저 오빠는 이걸로 퇴원! 이제 가봐도 돼. 우리가 만든 특제 의족이니 왠만해선 고장나진 않겠지만 불편한다던가 하면 찾아와, 조정해줄게."


"잠깐만, 가기전에 하나만 물을게. 사령관한테 가서 해야 할 얘기가 있는데, 걔는 언제쯤 퇴원할거라 생각해?"


"의사 입장에서 말하자면 크게 다친 데도 없고 트라우마 증세도 없으니 당장 퇴원해도 되지만, 오빠를 아끼는 여동생 입장으로서는 일주일은 더 쉬어야 할 거라고 생각해."


"...지금 농담하는 거지?"


"히힛, 난 언제나 진지하다구! 사실 더 쉬게 해주고 싶은데 오빠가 그 이상 쉬면 오르카호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테니 일주일로 타협본거야."


"너무 오래 걸리는데. 난 사령관 병실에 못들어가잖아."


"그럼 전화하면 되지!"


"나 폰 잃어버렸는데. 미국에서."


"내꺼 빌려줄게 형님."



*



"그럼 다들 이견은 없는거지?"


한편 사령관이 전세낸 전용 병실에선, 사령관이 방을 나가지 못하는 관계로 회의실 대신 이 안에서 진행되었던 지휘관 회의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마지막으로 지휘관들에게 의견을 묻자 다들 입을 모아 찬성표를 던졌다.


"물론입니다. 각하."


먼저 불굴의 마리가,


"소관도 동의하오."


그 다음은 무적의 용,


"흥, 좋아. 한번 해보자고. 단단히 각오해야할걸."


멸망의 메이,


"드디어 그 분이 제대로 이 저항군의 부사령관이 되는 거군요."


그리고 라비아타까지.


이번 회의 내용은 바로 이 자리에 없는 부사령관에 관한 것이었다. 부사령관은 말이 부사령관이지, 전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지휘는 전혀 안하고 내정업무도 조금만 할당받아서 처리하는 이름뿐인 직위였다. 그동안은 부사령관 본인이 이러한 대우에도 별 말 않고 지내서 그대로 냅뒀었지만 어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어제, 탈론페더 덕분에 부사령관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본 사령관은 눈물을 한바가지 쏟은 뒤 그를 허울뿐인 부사령관이 아닌 진짜 부사령관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사령관은 부사령관을 제외한 간부들을 불러모아 머리를 맞대고 부사령관을 그 자리에 걸맞는 인재로 키우기 위한 계획을 짰다. 그를 인정한 지휘관들 역시 몸소 그를 가르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부사령관 육성을 위한 특급 교육 코스가 완성됐다. 회의 결과를 알리기 위해 부사령관에게 연락하려던 그 때 마리의 오르카폰이 울렸다.


"아, 실례합니다."


"괜찮아. 누구 전화야?


"리디아로군요... 어쩌면 부사령관에 관해 얘기할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그래? 받아봐."


"알겠습니다. 각하.


마리가 통신을 수락하자 화면 위에 뜬 건 리디아가 아닌 부사령관의 얼굴이었다. 살짝 놀란 마리가 무슨 용건이냐고 묻자 사령관을 바꿔달라기에 사령관에게 폰을 건네주자, 그는 부사령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부사령관!"


[그래 나야. 넌 아직도 병실에 갇혀있냐? 한 배 안에 타고있는데 전화통화 해야한다는게 말이 돼? 게다가 니 폰은 왜 또 수신거부 상태인건데?]


"하하... 그렇게 됐어. 다들 너무 날 걱정한다니까. 직접 만나러오지 못하다보니 전화도 자꾸 오고.... 아무튼 마침 잘 연락했어, 안그래도 너한테 알려줘야 할 게 있어서 연락하려던 참이었거든."


[응? 뭐야, 어떤건데?]


사령관은 부사령관에게 자기들이 준비한 지휘관 교육 과정을 말해줬다. 사령관이 신난듯이 설명하고 있는 반면 부사령관은 마치 남일처럼 추임새만 조금씩 넣으며 떨떠름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라는거야. 이제부턴 네가 오르카 저항군의 2인자가 되는거지! 우리 둘이 힘을 합친다면, 이번에야말로 펙스를 몰락시킬 수 있을거야!"


"음! 모든 교육과정을 밟고 나면 부사령관 각하께서 얼마나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하실지 벌써 기대되는군요!"


[어... 그게 말이지...]


"...왜그래?"


[생각을 좀 해봤는데, 난 이제 부사령관직에서 은퇴하려고.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고, 곧 아니면 나중에...]


"뭐? 어째서!?"


[지쳤어. 두번씩이나 오르카호 밖에서 살아남기 해보면서 느낀건데, 펙스든 오르카든 그런 위험한 데서 멀리 떨어져야 좀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앞으로의 싸움에선 난 빠지고 싶어.]


"아니... 정말로 이렇게 떠나려고?"


[당장 떠나겠다는 것도 아닌걸. 요안나 아일랜드가 남아있었다면 냅다 가서 짱박혔을텐데 유감스럽게도 거긴 망해버렸으니 다른 적당한 후방기지 세워지면 거기로 이사갈 생각이야.]


"...부사령관, 지금은 전시상황이야. 너같은 특급 인재를 놓칠 생각은 없어."


[푸핫, 발렌타인 카드에 그렇게 써주지 그러냐.]


"농담하는거 아냐. 넌 정말로 오메가의 허를 찔러서 단숨에 형세를 뒤집은데다-"


[이것봐, 난 그냥 운 좋은 민간인일 뿐이야. 이번엔 내 목숨에 여유가 생겼으니 다른 사람들 좀 챙기려 한 것 뿐인데... 너무 무리했나봐. 이제 정말 한계야.]


"하지만..."


[이번에 오르카호 사령관 구한 공도 있는데 은퇴 하나 못시켜줘?]


사령관이 고민하며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있자 이번엔 불굴의 마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사령관 각하, 그럼 2인자 자리는 어떡하시려는 겁니까?"


[거긴 원래부터 라비아타 자리였어,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냐.]


"하지만 부사령관 각하께서도 충분히 성장하셨-"


[그래, 그것도 문제야. 아무래도 내가 좀... 과하게 큰 것 같기도 해. 민간인 입장으로선 과분한 자리지. 굳이 군권에 머리가 2개씩이나 생길 바에야 내가 빠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앞으로는 그냥 두번째 인간 발견하기 전에 해왔던 것처럼, 사령관 네가 최후의 인간으로서 오르카호를 이끄는 거지.]


"...으으음..."



*



사령관은 아직도 내 의견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내 생각에 재고를 부탁해도 안바꿀거다.


나는 원래 이곳에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지금 폰 화면 너머로 통화하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는 게임 안과 밖이라는 벽이 있었었다. 지금은 그 벽이 허물어졌긴 해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령관과는 달리 난 우연히 무대 위로 올라온 관객, 두번째 인간이다.


최우선목표였던 생존문제가 해결된 뒤로는 가급적이면 원작의 역사를 크게 바꾸지 않으려고 했었다. 9지역까지의 줄거리는 다 알고있으니 원작 이벤트에 조금씩만 간섭하며 서포트했었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을 뿐이었다. 9지역 중 제타의 기습에 목숨을 잃을 난민들만 살리자, 그리고 빠져나오자. 딱 그것만 하려고 했는데 그동안 해왔던 일의 나비효과로 일이 틀어져버려서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원작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겨를 없이 깽판 좀 쳤더니 그 여파로 더 큰 나비효과가 씨게 왔다.


기존의 9지역 스토리와는 달리 오메가와 감마의 세력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사령관과 오르카호 또한 괴멸위기에 처했었다. 거기다 메이도 분위기로 보아 조만간 아다 뗄 것 같다. 내가 9지역 이후의 스토리는 모르니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라오 원작에 나왔던 사건이 올 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역사가 좀 많이 바뀌어버렸다.


라오 엔딩은 뭐 철의 교황 잡고 별의 아이 다 잡고 어쩌구저쩌구 해피엔딩 그런거겠지만 내가 섣불리 역사를 바꿔버렸다가 그런 엔딩을 못보게 될 수도 있다. 혹시 모르지, 철충에 맞서기 위해 펙스랑 동맹을 맺든 흡수하든 하는 게 원작에 나올 내용이었는데 내가 여기서 오메가 죽이고 펙스 몰락시켰어봐, 나중의 스토리까지 꼬이게 될거다. 막약 그렇게까지 될 경우 난 수습할 능력이 못될거다.


안그래도 밑천도 바닥났으니 앞으로는 원작내용 건드리지 않게 후방으로 물러나서 조용히, 안전하게 살 거다. 


"...사령관, 왠지 짐을 얹히려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괜찮아.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었는걸. 하마터면 너무 무리시킬 뻔 했네, 하핫... 어흠. 부사령관. 오르카호가 안정하되고 새 후방거점을 세우게 되면 그 때 네 은퇴를 허락할게. 대신... 앞으로도 친구로 있어줄거지?]


"그야 물론이지!"


"거봐, 내가 맞췄지? 이제 나한테 참치캔 빚진거다!"


"쳇, 방금 걸음마 뗀 놈한테 털리다니..."


[방금 뭐였어?]


내 뒤에서 두 명이 떠드는 소리가 작게 들리자 사령관이 의문을 표했다.


"신경쓰지마. 니가 내 은퇴를 받아주느냐 마냐 갖고 트레저랑 리디아가 내기했었거든."


"저기 형님, 이제 얘기 끝났슴까? 저 오늘 하루종일 굶어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거 같은뎁쇼."


[잠깐, 트레저? 쟤 언제 몸 되찾았었...!?]


"이만 가봐야겠다. 나중에 봐 사령관!"


저쪽은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지만 나도 배고파져서 그냥 전화 끊었다. 사령관 쪽에서 날 실컷 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큰일날뻔했네. 아무튼 얘기도 잘 끝났으니 이제 은퇴계획도 짜고 해야하지만, 먼저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지.


"어이 동생들."


"네 형님."


"뭐야, 뭔데?"



"츄러스 먹으러가자."


""아싸!""


그렇게 원래 라스트 오리진에 존재하지 않았던 두번째 인간과 고블린, 장발 브라우니는 오르카호라는 무대의 밖으로 걸어갔다.



1만자짜리 마지막화와 함께 두번째 인간의 오르카호 밖에서 살아남기! 마침내! 종료!

따지고보면 오르카호 밖 외부거점에서 사는 것도 오르카호 밖에서 살아남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사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 1부때처럼 후일담 콘문학 3화정도 더 쓸 거임. 

그 다음에 이 시리즈 진짜 끝. 3부는 없다, 아이디어가 다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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