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받아서 작업한 소설임


*바이오로이드들의 제약을 풀어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싶어한 사령관이 인간이 되는 약을 만들고 난 후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다루고 있음


*이전화: 에밀리 비컴 휴먼- https://arca.live/b/lastorigin/54225302   티아멧 비컴 휴먼- https://arca.live/b/lastorigin/56276794





T-8W 발키리의 하루 일과는 비교적 단순했다.


출격임무가 없는 날에는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체력단련실에 운동을 하고, 안드바리와 함께 알비스를 깨운 후 레오나로부터 아침조회를 들었다. 


그 이후의 대부분의 시간을 발키리는 사격훈련을 하는 데에 할애했다. 전투모듈을 이용해서 싸우는 바이오로이드라고 하지만, 발키리는 묵묵히 정해진 시간만큼 정해진 탄을 쏘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보통 숙소에 머물며 자매들과 놀아주거나, 숙소를 청소하거나, 개인실에서 인형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인류의 멸망 이후 각자의 즐거움을 찾아 향유하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 비하면 틀에 박힌 하루하루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애시당초 과묵한 성격의 발키리는 이러한 삶을 썩 마음에 들어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어느날 자신의 방에 찾아온 사령관의 말에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을 꿈뻑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제가......말입니까?"


"응."


혹시나 싶어 되물어보았지만,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다시 말할 뿐이었다. 


"다음 인간화 약은......발키리 네가 먹지 않을래?"



***



사령관은 발키리의 조금 커진 눈과 살짝 올라간 눈썹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평소에 표정을 잘 짓지 않는 발키리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아마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유를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각하."


한참 후 발키리가 서로 다른 색의 눈으로 사령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의 머릿결처럼 적갈색의 와인을 담은 듯한 한 쪽 눈과, 설원의 눈꽃을 새겨넣은 듯한 다른 눈. 


색은 다르지만 어느쪽이든 그녀의 잔잔한 아름다움을 부각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보석들이었다. 


한없이 흔들림 없고 한없이 진지한 그 눈을 보며 사령관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음, 이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너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할까나."


꿈뻑. 발키리의 눈이 다시 닫혔다가 열렸다. 


"고마움이라면......"


"내가 처음 오르카에 왔을 때, 그때는 아직 어리버리해서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발키리 네가 부관으로 도와줬었잖아?"


"그건 각하의 부관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던 것뿐입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사령관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발키리 너 처음에는 온갖 출격임무까지 다 수행하면서 부관일까지 같이 했잖아. 그건 전혀 당연한 게 아니지."


"......"


발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쑥스러운 듯 사령관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 개발한 인간화 약은 발키리 네게 제일 먼저 권하고 싶었어."


"제일 먼저?"


"아, 앞에 둘은 정확히 내가 권한 건 아니었으니까."


고개를 기울이며 못말리다는 표정으로 웃는 사령관은 발키리 이전에 사고로, 그리고 스스로의 요청으로 먼저 인간화 약을 먹은 에밀리와 티아멧을 떠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티아멧 씨는 그 이후로 조금 괜찮아졌습니까?"


티아멧이 인간화 약을 먹은 후 부작용으로 마음에 묻혀있던 인류에 대한 증오가 한 번에 터져나왔을 때, 그녀에게 사령관의 메시지와 식사를 가져다주던 발키리는 티아멧의 그 이후 상태가 궁금했었다. 


"응. 많이 좋아졌어. 이제 나랑 같이 있어도 별로 힘들어 하지도 않고."


"다행입니다."


"아, 만약에 부작용이 걱정되는 거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닥터가 그 이후로 부작용을 없애려고 엄청 개량을 많이 했거든."


"괜찮습니다. 저는 어차피 멸망 후 재생산된 개체라 인간들에 대한 악감정도 별로 없고......"


아늑하게 꾸며진 발키리의 방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깨고 다시 먼저 입을 연건 사령관이었다. 


"음, 그래서......어때? 에밀리나 티아멧을 보면서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배워서, 이걸 고마움의 표시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건 알아. 어쩌면 그냥 내 고집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싫으면 거절해도......"


"아, 싫다는 건 아닙니다."


발키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각하와 함께 나란히 설 수 있다는 건......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영광이니까요. 다만,"


발키리의 진중한 눈이 다시 사령관의 것을 비추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사령관이 발키리에게 인간화를 제안한지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이 지날 동안 발키리는 아직 이렇다할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마음 한 켠으로는 사령관이 자신을 위해 제안해준 만큼 빨리 답을 정해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자기가 아는 사령관이라면 대답을 재촉하기보다는 자신의 진심이 담긴 답변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을 고쳤다. 


그리하여 발키리는 다시 자신의 방에서 묵묵히 토끼봉제인형을 만들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똑똑.


자신의 상념을 깨는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 때 쯤 문을 열고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걸어들어왔다.


"대장님."


발키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레오나는 손을 살짝 들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됐어. 공적인 일로 온 거 아니니까."


"그럼......?"


자기 등 뒤로 문을 찰칵 닫은 레오나는 문에 기대고 팔짱을 끼며 발키리를 지긋이 응시했다. 


설원 그 자체를 담은 듯한 차가운 표정은 살갗을 그대로 베어낼 것 같았지만, 그게 딱히 화난 표정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발키리였기에 그녀는 가만히 레오나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너, 사령관이 인간화 약물을 주겠다고 했다며?"


대장급인 레오나는 약물과 그것이 사용되는 바이오로이드들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발키리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왜 거절했어?"


"거절한 것이 아니라 잠시 생각할 시간을......"


"그거나 그거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죄송합니다."


"너한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들어보려고 그런 거야."


레오나는 눈을 감고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발키리의 맞은편에 살짝 앉았다. 


"내가 아는 너라면, 이런 문제가 주어지면 남들한테 상담 같은 건 절대 안하고 혼자 끙끙대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레오나는 그렇게 말하며 발키리의 뒤로 산처럼 쌓인 봉제인형들에 눈길을 줬다. 


"......"


레오나를 따라 인형들의 산을 바라보던 발키리가 인형에 눈을 둔 채 입을 열었다. 


"그냥, 과연 제게 인간화 물약이 꼭 필요한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발키리가 다시 바라본 레오나는 다음 말을 요구하듯 한 쪽 눈썹을 살짝 올리고 있었다. 


"저는 지금 제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일과에 따라 훈련을 하고, 그리고 돌아오면 사령관 각하와, 대장님과, 그리고......자매들이 있는 이 평범한 하루가요."


발키리는 바느질을 하고 있던 토끼인형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알비스나 안드바리와 함께 놀아주고, 이렇게 쉬는 시간에는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만드는 이 별 것 아닌 일상이 저는 좋습니다."


"사령관 각하께서 제게 인간이 될 기회를 제안해주신 건 정말 큰 영광이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기쁘지만......저 혼자 덜컥 인간이 되어버리면, 제가 지금까지 누리던 이 일상이 제게서 멀어질까 저는 그게 조금 걱정됩니다."


"......"


발키리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동안 레오나는 가만히 발키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쌀쌀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발키리를 세심히 뜯어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전장의 형세를 분석하는 냉철한 지휘관처럼 보였지만, 레오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부하를 위하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무엇을 선택해야할 지 몰라......조금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발키리가 말을 끝낼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레오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 난 사령관의 그 계획, 별로 마음에 안들어."


발키리가 눈을 아주 조금 크게 떴다. 


"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레오나가 피식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네 기억모듈 속의 오래된 기록들을 찾아보면, 옛날에 사령관에게 제일 많이 반대표를 던지던 사람이 나라는 걸 금세 다시 알 수 있을텐데 말이야."


발키리가 추억을 회상하듯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랬었죠."


"지금은 제법......나한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단순한 암컷처럼 그 사람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는 소리는 아니야."


"그럼 대장님은 인간화 계획에 반대하는 건가요?"


발키리의 말에 레오나가 손을 휙 내저었다. 


"마음에 안든다고 했지, 반대한다고 한 적은 없어. 사령관의 의도는 알겠지만......자기도 이런 건 처음이라 좀 어색해 하는 게 싫단 말이지."


레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벌써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


레오나가 치마를 톡톡 털며 가볍게 말했다. 


"이 엉성한 계획의 제안이 너한테도 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한 번 찾아와본 건데......굳이 내가 걱정을 해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말이야."


"예?"


의미를 알 수 없어 발키리가 되묻자 레오나는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발키리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말했잖아. 사령관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색해 하는 거 같다고."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까지나 고민하는 걸 봐서 안심이라는 거야. 내 부하가 아무 생각도 없이 주는 걸 덥석덥석 받아먹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상관을 좀 더 제대로 되먹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부관이라서 말이야."


레오나가 발키리의 뒤에 쌓여있는 토끼 인형들을 가리켰다. 


"만족스러운 게 만들어질 때까지 멈추지마. 만약 사령관이 네게 재촉한거나 하면, 내가 직접 철분 보급해주겠다고 말해."


허리춤에 달린 권총을 톡 치며 레오나가 그렇게 말하자, 발키리는 한껏 더 풀어진 눈을 살짝 휘어보였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감사하면 잘해~이번에도 나보다 선수쳤으면서 제대로 못하는 꼴 보기는 싫으니까."


"앗, 대장님 그건......"


반쯤 진담이 섞인 농담에 발키리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레오나는 그저 손을 휙 흔들어보이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


다시 홀로 남은 발키리는 잠시 레오나가 떠나간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반쯤 완성되었던 토끼인형과 바늘을 집어들었다. 


바느질을 하는 발키리의 손길은 레오나가 찾아왔을 때보다 제법 가벼웠다. 


레오나는 만족스러워질 때까지 계속 만들어보라고 했지만, 발키리는 왠지 이 인형이 지금의 마지막 인형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



"먹겠습니다."


돌연 자기를 찾아와 그렇게 말하는 발키리를 보며 사령관이 눈을 꿈뻑거렸다.


"어......정말로?"


사령관이 되묻자 발키리는 특유의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인간화 약물을 먹기를 원하셨던 것 아닙니까?"


"어, 맞기는 한데.....이렇게 갑자기 먹겠다고 할 줄은 몰랐지. 조금 고민해보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레오나 대장님도 많은 도움을 주셨구요."


"레오나가......?"


사령관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발키리가 후후, 하고 가볍게 웃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저희들을 많이 신경써주시는 분이니까요."


사령관에게 한 발짜국 다가간 발키리가 가슴에 살짝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사령관 각하가 하사해주시는 인간화 약물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대신......"


"대신?"


"보답, 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으니. 부탁이라고 하는 게 맞겠죠. 각하, 제가 인간화 약물을 먹으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사령관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발키리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떤 부탁을 할지 물어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발키리가 나한테 이상한 부탁 같은 걸 할 사람은 아니니까."


사령관이 그녀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모처럼 발키리가 부탁하는 건데, 조금 무리한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싶거든."


"각하......"


사령관의 말에 발키리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부탁이란 건 뭐야?"


"제가 인간이 된 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함께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발키리의 부탁에 사령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사령관은 조금 긴장된 얼굴로 선반에서 투명한 병에 담긴 액체를 가져왔다. 


조심스레 약물을 건네는 사령관을 보고 발키리가 입을 살짝 가리고 쿡쿡 웃었다. 


"벌써 세 번째일텐데, 어째 각하께서 저보다 더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긴장되지. 내 고집으로 시작한 일인데. 게다가 이전 두 번이 그렇게 순탄했던 것도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라 제가 뭐라 하진 못하겠군요."


"그렇지? 레오나도 이거 보고 뭐라 그러지 않았어?"


"마음에는 안들지만,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불길한 애매함이네......"


"후후, 저는 괜찮을 겁니다."


발키리가 사령관의 손에서 약물을 받아들고는 안심하라는 듯 살짝 웃어보였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키리는 병 안의 내용물을 단숨에 마셨다.


"......"


몇 분, 몇 시간 같은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때?"


참다 못한 사령관이 침묵을 깨고 물어보았다. 


"음......"


발키리는 입맛을 조금 다시더니 사령관의 눈을 살짝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단 맛이 강하군요."


"아니 맛 말고, 뭔가 이상한 기분은 안들어? 나나 인간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는다거나, 존재의 회의감이 심하게 든다거나, 자아가 분열될 거 같이 머리가 아프다던ㄱ......"


"괜찮습니다."


안절부절해 하는 사령관을 발키리가 싱긋 웃으며 안정시켰다.


"그냥 평소와 같습니다. 오히려 약이 제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어......그, 그래?"


발키리의 평온한 반응에 이번에는 사령관도 고개를 갸우뚱 했다.


"발키리, 명령이다. 당장, 어......내 발을 핥아봐."


"음, 그건......진심으로 하시는 명령입니까? 그렇다면......"


"그럴리가 없잖아. 어때, 막 명령을 따라야겠다는 압박이 아직 있어?"


잠시 말없이 잠잠히 생각하던 발키리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법 신기한 감각이군요."


"......이렇게 쉽게 성공해버리니까 오히려 더 이상한 걸."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발키리가 병을 도로 책상에 올려두고는 사령관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어......응. 나도 잘 부탁해. 발키리."


"그럼, 이제 부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고개를 들어 사령관을 바라보며, 발키리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



"그래서 발키리가 하고 싶다는 게......"


발키리가 바이오로이드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그녀가 속한 부대,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숙소였다.


"분명 오늘 하루는 저와 함께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발키리는 입꼬리를 슬쩍 올려보이고는 숙소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폭발처럼 들려오는 누군가의 외침.


"아!! 발키리 언니다!!"


그리고 마치 거대한 눈뭉치 같은 무언가가 대포알처럼 쏘아져나와 발키리의 품에 안겼다.


"발키리 언니! 살려줘! 안드바리가 날 처치해버리려고 그래!"


"누가 처치한다는 거예요!"


뒤이어 들리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제가 저번에 초코바 여분까지 다 챙겨드렸는데, 그걸 다 먹고는 또 창고에 손을 대려고 했잖아요! 발키리 언니! 언니도 따끔하게 혼 좀 내주세요. 자꾸 이러면 알비스 나쁜 버릇이 든다니까요?"


하지만 발키리는 푹신푹신한 알비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두 사람을 달랠 뿐이었다.


"알비스가 가져간 초코바는 제 껄로 충당하세요. 알비스, 제걸로는 조금 부족하겠지만 그걸로 참아주세요. 안드바리가 곤란해하잖아요?"


"와~! 발키리 언니 최고! 발키리 언니 천사!"


"정말, 언니도......"


"어, 안녕 얘들아."


타이밍을 보던 사령관이 뒤에서 슬쩍 나타나자 두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사령관 쪽으로 돌렸다.


"사령관님!!"


"저기, 발키리."


자신과 발키리를 둘러싸고 재잘거리는 두 바이오로이드를 보며 사령관이 발키리에게 귓속말했다.


"이건 대체......?"


"마침 오늘 제가 아이들을 돌봐주는 날이어서 말입니다."


발키리가 안드바리와 알비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처럼이니 각하께서도 함께 돌봐주시지 않겠습니까?"


"앗, 사령관님도 오늘 우리랑 놀아주는 거야?"


"사령관님, 괜찮으시겠어요? 바쁘신데 괜히 저희들이랑 시간 보내시는 건 아닌지......"


이번에는 자기에게 푹 안겨오며 방방 뛰는 알비스와, 자신을 생각해주는 듯 말하지만 내심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는 안드바리를 보고 있자니, 사령관은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물론이지. 괜찮아 안드바리. 오늘 하루는 여유로우니까."


발키리와의 약속도 있었지만, 귀여운 아이들과 노는 것은 사령관에게 있어서도 그야말로 힐링 그 자체였다. 


"오늘은 어떤 걸 할 건가요?"


발키리가 숙소 중앙에 깔린 매트에 앉으며 말했다. 


"아, 방금 전까지 안드바리가 가져온 보드게임으로 놀고 있었어!"


그러고보니 매트 한 쪽에는 주사위와 이런저런 지시사항이 담긴 카드, 그리고 커다란 보드판이 눈에 들어왔다.


"주사위를 던져서 도착한 칸의 지시사항을 따르는 게임인데, 오늘 있었던 좋은 일을 하나 말하랬더니 알비스가 초코바 이야기를 하지 뭐예요."


"에헤헤......"


알비스에게 찌릿 눈총을 보내는 안드바리와 멋쩍게 웃는 알비스를 보며 사령관도 발키리의 옆에 앉았다.


"재밌어 보이는데, 나랑 발키리도 껴도 될까?"


"물론이죠! 오히려 부탁하고 싶은 걸요. 이거는 사람이 많을 수록 재밌거든요."


"언니랑 사령관님도 하는 거야? 와! 신난다! 이제 나도 이길 수 있어!"


"나보고 하는 말은 아니지 알비스?"


"사령관님, 게임은 잘 못하지시 않았나요? 저번에 브라우니하고도......"


"온라인이랑 보드랑은 다르거든?!"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 숙소의 분위기에 이끌려, 사령관과 발키리는 금새 보드게임에 참여해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또 졌다......"


사령관은 후두둑 떨어지는 카드들과 함께 풀썩 주저앉으며 신음했다.


몇 시간 동안 게임이 제법 여러 번 진행되었다. 그 때마다 승자는 항상 달랐지만, 꼴찌는 단 한번도 사령관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사령관님......저기."


"아하하하, 사령관님 엄청 못해!"


"그,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사령관님이 상처받잖아요 알비스!"


"안드바리 너의 그런 배려도 충분히 마음 아프단다......"


결국 이번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파산한 사령관은 잠자코 세 사람이 마저 게임을 진행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보드게임은, 꾸벅꾸벅 졸던 안드바리가 손에 든 카드들을 후두둑 놓아버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내일도 놀고 싶다."


알비스와 안드바리를 잠자리에 눕힐 때 알비스가 발키리와 사령관을 향해 말했다.


"오늘 같이 노는 거 엄~청 재밌었어."


"나도 엄청 재밌었다."


사령관이 알비스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사령관님은 지기만 했는데두?"


"어......응."


"에헤헤. 그럼 내일도 놀아."


"우선 내일 훈련부터 마치고요, 알비스."


발키리가 알비스의 이불을 덮어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려면 오늘은 일찍 자야겠죠?"


"응......후아암~잘자 언니, 잘자요 사령관님."


인사를 하고는 바로 꿈나라로 떠나는 알비스를 본 사령관과 발키리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누구랄 것 없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할까?"


숙소를 나온 뒤 사령관이 기지개를 쭉 피며 말했다.


"하루는 아직 안끝났는데."


"이 다음에는......"


발키리는 보일듯말듯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잠시 만지작 거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제 숙소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어, 어?"


"가, 같이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혹시 피곤하시다면......"


"아, 아냐아냐."


사령관이 팔을 휙휙 내저었다.


"가자, 응. 발키리 숙소로."


숙소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제는 여자 경험이 제법 된다고 자부하는 사령관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드,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숙소의 문이 열리고, 아담하지만 아늑한 발키리의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사령관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와, 이게 다 뭐야?"


방 한 구석을 가득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귀여운 토끼인형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귀의 모양이나 머리에 달고 있는 악세사리가 조금씩 다른 인형들이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발키리, 혹시 부업으로 인형을 팔 생각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사령관의 말에 발키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오르카의 인원들에게 제가 나눠주려고 만들고 있던 것들입니다."


"아, 혹시 그럼 아까 같이 만들고 싶다고 한 건......"


"네. 오늘 마지막으로 인형을 만들면 끝인데, 각하와 함께 해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혹시 뭘 만들고 싶어한 걸로 생각하셨습니까?"


"아, 아하하, 아니야 아무것도."


사령관은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바로 만들자고! 응, 토끼인형, 귀엽지."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바닥에 널부러진 바느질 세트와 반쯤 만들어진 인형을 집어올렸지만, 인형을 만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정교한 작업이었다.


"끄으응......"


인형에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바늘을 꿰고 있는 사령관을 보며 발키리가 조언했다.


"조심하십시오 각하. 바늘이 뾰족해서 찔리기 쉽습니다."


"나도 강화신체 가진 몸이야 이거 왜 이래."


사령관이 여전히 인형에 눈을 고정시킨 채 대꾸했다.


"바늘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거든?"


"후훗, 그래도 찔리면 따끔하십니다."


"그러는 발키리는 신경 안써도 돼?"


발키리는 사령관을 바라보면서도 손을 거침없이 움직여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 하나도 완성되지 못한 사령관에 비해 그녀의 옆에는 벌써 새로 완성된 토끼 인형들이 몇 개는 놓여있었다."


"저는 익숙해서 말입니다. 이게 제 유일한 취미이다 보니."


"으으, 눈 빠질 거 같아."


혀를 이상한 각도로 빼물고 간신히 바늘을 꿰어서 다시 빼내는 사령관을 바라보던 발키리의 손이 잠시 속도를 늦추었다.


"각하. 너무 힘드시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제 고집이니까......"


"그럴 수는 없지!"


사령관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발키리 너도 내 고집을 들어줬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되겠어? 그리고 방금까지 알비스랑 안드바리한테 한 번도 못이겼는데 이것도 중간에 포기해버리면 사령관으로서의 지위가 좀 위태로워질 거 같거든? 그러니까 절대 포기 못한다 이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새삼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바늘을 토끼인형 안으로 찔러넣는 사령관을 보며, 발키리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발키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분은 언제나 저런 분이셨지.


그 이후 한동안 침묵속에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발키리 곁에 10개의 새로운 토끼들이 생명을 얻을 때쯤, 사령관이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를 들어올리 듯이 번쩍 손에 든 토끼인형을 들어올렸다.


"됐다아아!!"


척 보기에도 엉성한 티가 나는 토끼인형이었지만, 사령관은 적어도 하얀 솜이 터져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휴, 그래도 이거 남들한테 줄 수는 없겠는걸?"


사령관이 손에 들린 토끼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발키리 네가 만든 거에 비하면 완성도가 영......받는 사람한테 미안해질 거 같다."


"후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키리가 그렇게 말하며 사령관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건 저한테 주셨으면 하니까요."


사령관이 발키리를 잠시 바라보며 두 눈을 꿈벅거렸다.


"어, 너한테?"


"네."


발키리가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고 잔잔하게 말했다.


"제가 오늘 각하께 하루를 빌려달라고 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 되고 나면 무엇이 바뀌게 될지,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저는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무언가 특별한 것을 떠올리려고 해도, 항상 제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것은 이 오르카에서의 일상이었습니다."


발키리가 자기 옆에 있는 토끼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매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방에서 이렇게 저의 소소한 취미를 즐기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평범한 일상을 조금 특별하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된 후 제가 즐기는 첫 일상을, 사령관 각하와 함께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토끼 인형을 쓰다듬던 손길이 이번에는 사령관의 손에 들린, 어설프지만 특별한 그의 인형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특별했던 평범함을, 각하께서 만드신 그 인형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그것만큼은......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함이니, 제가 조금 욕심내도 되겠습니까?"


흔들림 없은 발키리의 두가지 색 눈을, 사령관은 잠시 묵묵히 바라보았다. 


눈은 가끔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을 대신 전해주고는 한다. 사령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형을 발키리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발키리는 인형을 소중히 받아들고, 인형의 조금 삐뚤어진 눈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그것을 품에 꼬옥 품었다.


"감사합니다 사령관 각하. 오늘 하루는......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하고 평범한 하루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령관은 인형을 건네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륵 움직여 발키리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각하?"


갑작스러운 접근에, 발키리가 흠칫 놀라며 사령관을 올려다보았다.


"발키리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데......그 평범한 하루에 내가 '처음'을 하나 더 얹어줄 수는 없을까 해서."


마주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자, 발키리의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조금씩 홍조가 피어올랐다. 


"앗, 그, 각하......오늘은......저 아무런 준비도 안했는데."


"괜찮아."


사령관이 몸을 기울여 발키리와 코를 맞대고 속삭였다. 


"그런 평범함도, 나한테는 특별하니까."


두 사람의 숨결이 허공에서 하나로 섞여 피어올랐다. 발키리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밤은, 아직 겹겹이 굽이쳐 깊어만 갈 뿐이었다. 







라스트오리진 잘 되게 해주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