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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준결승전의 첫번째 대결은 샬럿과 소완이었다. 애초에 이 경기의 원인부터가 둘의 경쟁심리였으므로, 사령관이며 관중은 물론 싸우는 본인들도 손꼽아 기다리던 차였다.


"후후. 감히 제게 도전장을 내다니."


"그야말로 소첩이 할 말이옵니다."


"검술로는 라비아타 공도 한수 접어주는 제게 도전하신 건 칭찬해 드리지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않겠습니까."


도발을 주고받은 둘은 시합 개시를 알리자마자 격렬하게 달려들었다. 요리만큼이나 검술의 달인인 소완은 과연 최고의 검객 샬럿에 부끄럽지 않은 적수였다.


소완은 이번엔 실력 가늠이 우선이라는 듯이, 전술이나 속임수로 상대를 유인하기보다는 대놓고 어울려 합을 겨루는 편을 택했다.


그리하여 수십 합이 지나도 승부가 판가름나지 않았다. 지켜 보는 이들 모두가 내내 손에 땀을 쥐고 있는데, 한참 싸우던 소완이 별안간 멀찍이 물러 서서 단검 한 자루를 날렸다. 그녀는 정면 승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었다. 샬럿은 가볍게 칼을 피하고는 소완의 앞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 순간 소완은 단검에 연결된 와이어를 교묘하게 조종해 샬럿의 몸을 꽁꽁 묶었다.


"앗."


샬럿이 와이어에 몸이 묶여서 당황하는 사이 소완이 맹렬히 달려왔다. 이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샬럿은 단검 하나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소완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살럿은 자유로운 한 팔을 움직여서 목검으로 와이어를 잘라내 버렸다.


뜻밖의 결과에 소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실제 무기에 달린 것처럼, 강철만한 인장력을 지닌 와이어를 목검으로 자르다니. 몸이 자유로워진 샬럿은 멈칫한 소완을 향해 달려들어 목검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페로가 승부 끝이라고 외쳤다.


소완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쓴웃음지었다.


"소첩의 계략보다 샬럿 양의 검술이 한층 위였군요. 인정할 수밖에 없겠사옵니다."


"진검이었으면 다를지도 모르죠."


"진검이면 제가 이렇게 싸울 수도 없었사옵니다."


칭찬을 주고받은 둘은 깔끔하게 승부를 인정하고 물러섰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어차피 소완으로서도 사령관에게 자기 실력을 보여드리는 것이 목적이라 별반 아쉬울 것이 없었다. 몸 한번 잘 풀었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이제는 다음 번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펜리르와 용 또한 우승자 후보여서, 격렬한 승부가 예상되었다. 사령관은 물론 관중도 기대하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대련이 시작되자 펜리르는 선공을 취해 용에게 달려들었다. 용도 맞서서 나무 검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둘이 어울려 싸우기를 삼십 합이 지났다.


펜리르의 쌍검이 무서운 기세로 용을 노리고 소나기처럼 날아들었다. 용은 침착하게 펜리르의 공격을 방어하고 역습을 가하는 식으로 싸웠다.


용은 오랫동안 냉동 수면된 상태였으나, 그 수십 년간의 수면 동안 가상현실로 검을 수련해 와서 역시 솜씨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문자 그대로 용과 호랑이의 싸움이라고 할 법했다. 모두는 정신이 팔려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자 펜리르의 숨이 거칠어지고,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싸움을 지켜 보던 펜리르의 자매 포이는 걱정해서 외쳤다.


"늑대 언니! 검을 아껴. 지친다고."


하지만 곁에 있던 장녀 리리스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과연 그럴까? 펜리르는 내 동생이야. 저 정도가 아냐."


"응?"


용은 경기 내내 일부러 펜리르의 검을 받아내며 체력 소모와 빈틈을 유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기대대로 펜리르는 지친 기색이 보였다. 쉴새 없이 공세를 퍼붓던 펜리르도 어느새 용의 반격을 막느라 급급한 듯했다.


펜리르는 한참 싸우던 중 돌연 살짝 거리를 벌리고 가만히 용을 살폈다. 그녀의 숨이 다소 늘어져 보였다.


이에 용은 펜리르가 결국 지쳤다고 판단하고, 아예 빈틈을 보여 유인해서 이길 작정을 했다. 사실은 공격을 잘 막아내던 용 또한 체력이 계속 소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이 한바탕 검을 크게 휘둘러 일부러 빈틈을 만들었다. 이제까지의 패턴대로라면 펜리르가 금방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펜리르는 용의 빈틈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다. 용은 칼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한바퀴 더 돌아 펜리르에게 한발 먼저 역습의 검을 휘둘렀다. 분명 펜리르는 이번의 베기를 막지 못할 것이리라.


그렇게 용이 생각했지만, 펜리르는 공격하던 자세 그대로 몸을 눕혀서 스치듯이 용의 검을 피한 다음, 오히려 용에게 역으로 카운터를 먹였다.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윽."


허벅지에 목검을 맞은 용이 주춤했다. 페로가 팔을 휘저어 경기 종료를 알리고, 관중석에서 탄성이 일었다.


그제야 살펴 보니, 기뻐서 뛰어 다니고 있는 펜리르는 그다지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용은 자신이 펜리르의 계략에 당했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군사 지휘와 다르게 야성의 감각과 싸움 경험에서는 역시 진짜 사냥꾼의 상대가 되지 못한 셈이었다.


용은 땀을 닦으며 펜리르에게 다가왔다.


"정말 대단했네."


"아니야. 하마터면 아줌마한테 질 것 같아서, 연극까지 했는 걸."


"아, 아줌마? 으음……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머쓱하게 돌아온 용을 지휘관들이 반겨 주었다.


다가온 마리가 용을 보고 말했다.


"과연 부끄럽지 않은 싸움이었습니다.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봐 주니 고맙네."


다른 지휘관들도 용을 칭찬했다.


"싸움은 경호원이나 검객들한테 맡기고, 우리는 병력을 지휘하는 데나 신경을 쓰자고. 사령관도 그걸 더 원할 거야."


"물론. ……그나저나 역시, 사령관의 경호를 맡는 아이다워. 나중에 그 언니와도 맞붙어보고 싶군."


용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샬럿과 펜리르가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경기 전, 만전을 기하기 위해 둘의 체력을 회복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샬럿은 펜리르를 도발했다.


"어머나. 의외네요. 소완 공이나 용 공이 아니라 우리 귀여운 늑댕이가 결승전에 오르다니. 그렇다고 봐주진 않을 테니 조심하라고요?"


"글쎄. 오히려 내가 봐줘야 할 것 같은데. 언니는 어차피 리리스 언니보단 약하잖아?"


여유만만하던 샬럿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법 능숙하게 받아친 펜리르는 헤실헤실 웃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펜리르의 자매들은 달라 붙어서 이것저것 작전을 일러 주었고, 샬럿도 아르망 추기경이 붙어서 무언가 소곤거렸다.


모든 이들이 긴장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감히 내게 도발을 걸다니. 샬럿은 장갑을 던지고 진지한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펜리르도 호랑이의 눈을 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세 자루 나무 검이 공기를 가르며 엇갈리는 가운데 둘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며 솜씨를 겨루었다. 한 쪽은 최고의 검객이었고, 다른 쪽은 최강의 야성을 지닌 사냥꾼이었다.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백여 합이 지나도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역시 검술 말고도 속임수를 써야 하나. 샬럿이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펜리르의 목검 끝이 샬럿의 얼굴로 날아왔다.


"앗!"


샬럿은 간발의 차이로 펜리르의 검을 피하며 마주 자신의 목검을 내질렀다. 펜리르도 급히 목을 기울여 샬럿의 예봉을 피했다.


그런가 하면 샬럿이 팔방으로 베기도 했지만 펜리르는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으로 모조리 피해버렸다.


펜리르는 펜리르대로 용에게 한 것처럼 속임수도 써 보았지만, 걸려 줄 샬럿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둘이 검을 후려치고 찌를 때마다 날카로운 기합이 울리며 천장을 찔렀다. 싸움이 오래 지속될수록 지치기는커녕 더욱 맹렬해졌다. 지켜 보던 사령관 이하 모든 관중은 침을 삼키며 집중해서 구경할 뿐이었다. 앞서의 예선과 준결승도 대단했지만, 이번의 싸움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참 싸우던 샬럿은 별안간 검을 휘둘러 펜리르로부터 거리를 벌린 다음, 준비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펜리르는 샬럿이 경기를 포기하려나 싶어 덤벼들려다가 문득 위험을 느끼고 멈칫했다. 살펴보니 샬럿은 언제라도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자세였다. 카운터를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샬럿은 펜리르가 먼저 들어오기를 기다렸고, 펜리르는 샬럿의 빈틈을 찾으려 빙빙 돌았다. 그런 대치 상태가 십여 분이 넘게 이어졌다.


구경하던 관중도 침묵 속에 긴장하였다. 천일수 상태로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야성이 강한 펜리르한테 가만히 기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먼저 움직인 쪽은 펜리르였다.


참다 못한 펜리르는 예기치 못할 타이밍을 노려 돌연히 뛰쳐 나갔다.


"안 돼!"


지켜 보던 리리스가 안색이 변해서 소리쳤다.


펜리르는 이번 경기에서 최고로 혼신을 다해 쌍검을 휘둘러 베어 갔다. 샬럿이 피할 수 없도록 목검 하나는 수직으로 휘두르고 다른 하나는 수평으로 베어 갔다.


그러나 샬럿은 이미 펜리르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중제비를 돌아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검을 내리쳤다. 이미 큰 힘을 쓴 펜리르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에 목검을 얻어맞았다.


"아얏."


외마디 비명을 지른 펜리르는 눈물을 찔끔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승부는 그렇게 끝이 났다.


펜리르의 야성을 샬럿의 노련함이 제압한 셈이었다.


페로는 자매의 패배에 살짝 아쉬움을 감추며 샬럿의 승리를 선언했다. 경탄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흥분과 열광 아래서 샬럿은 두 팔을 벌려 최후의 승리를 만끽한 다음, 펜리르와 서로 껴안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야성과 본능만으로 검술의 달인을 몰아붙인 것을 보아 펜리르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펜리르는 풀이 죽어 돌아왔다. 지면 밥빼기를 한다는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미안해, 리리스 언니. 졌어……."


걱정과 달리 리리스는 별로 화내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냐. 괜찮아. 어차피 실전 경호도 아니고, 대련일 뿐인걸."


"밥빼기는?"


"당연히 안 하지. 최선을 다 했으니 밥빼기는 안 할거야."


펜리르의 표정이 금새 밝아졌다.


"응. 헤헤."


리리스 이하 포이와 하치코 등의 자매들은 다들 펜리르를 안아서 격려해 주었다. 땀범벅에 지쳐 있던 펜리르는 배시시 웃었다. 졌지만 기분이 좋았다.


시상식 자리에서 사령관은 본선까지 올라온 인원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자, 다들 잘했어. 8강에 올라온 모두한테 적당한 소원 하나씩 들어주마."


풀이 죽어 있던 리제와 드리아드가 얼굴을 들며 반색했다.


"앗. 정말요?"


"그래. 어차피 너희 실력을 보려고 대회를 연 거니까. 누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자리에 있던 대원들이 기뻐한 건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령관은 그 뿐만 아니라 예선에 참가한 모두에게도 포상을 내려 주었다. 덕분에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나자 실내 경기장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른 뒤. 사령관은 어쩐지 감회에 젖어 경기장을 밟아 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시끄럽고 열기에 넘친 장소였는데.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평소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포상 데이트 명목으로 그의 곁에 붙어 있던 샬럿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 한바탕 바람이 일더니, 검은 그림자가 사령관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RF-87 로크였다.


까마귀와 같은 실루엣의 로크가 붉은 시각 센서를 번쩍이며 말했다.


- 재미있는 구경이었습니다.


"로크도 봤어? 의외네. 지켜 보고 있을 줄은 몰랐어."


AGS 로봇들은 바이오로이드에게 관심이 없기 마련이었다.


- 과거, 앙헬 공이 보시던 게 떠올라서요. 바이오로이드 검투극 말입니다.


"아. 그랬던가?"


오르카호의 로크는 과거 앙헬 리오보로스라는 거물의 무덤을 지키던 로봇이었다. 앙헬은 인류 멸망 전의 인물답게 바이오로이드를 그다지 우호적으로 대하는 편이 아니었다.


로크가 다시 말했다.


- 앙헬 공은 투계, 투견을 보듯이 바이오로이드끼리의 검투와 살육극을 가끔 즐기셨지요. 멸망 전에는 인간들의 주요 구경거리 중 하나였으니까요. 정확히는 그것이 아예 투견과 투계를 대체했습니다만.


그러자 샬럿이 반발했다. 기사도와 명예를 중시하는 샬럿으로선 자신들을 비하하는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었다.


"로크 공, 투견극이라뇨? 저희는 저희의 실력을 가늠하고 모두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싸운 것뿐이에요. 우릴 그런 살육극의 주연으로 보지 마세요."


- 글쎄요. 제가 보기엔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습니다만.


"뭐라고요?"


발끈한 샬럿이 나서려는 찰나 사령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로크의 말대로,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한 인류는 고대 로마의 검투경기처럼 바이오로이드끼리의 살인극과 경기를 즐겨 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죄는 사령관이라고 무조건 모른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령관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로크. 왜 그렇게 생각해? 이건 억지로 시킨 것도, 피를 보는 경기도 아니었잖아."


- 그렇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녀들은 주인님을 위해서, 주인님이 원하는 대로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여전히 주인님의 엄지 하나로 생사가 결정될 수도 있었고요.


샬럿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로크. 우리는 억지로 나간 게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싸운 거예요. 싸움 뒤에는 모두들 승패에 상관 없이 즐겁게 받아들였고요. 무엇보다, 옛날의 그 피의 아레나와 다르게…… 싸움이 끝나고 죽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 말이에요."


애써 반론하는 샬럿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사령관은 서글픈 눈으로 샬럿과 로크를 번갈아 보았다.


"……."


잠시 뒤, 로크는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 확실히, 당신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쨌든 스스로를 위해 싸웠으니.


그가 말을 이었다.


- 어쩌면 저의 생각은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주인님. 샬럿 양.


로크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지듯 날아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남겨진 둘은 한동안 조용히 경기장에 서 있었다.


사령관은 풀이 죽은 샬럿을 달래며 경기장을 나왔다. 그날 하루는 그녀를 즐겁게 해 주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과거의 인간들과 다르게 행동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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