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작성자님께 조언을 해준 그 누군가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하지만... 일단 질문 주신 부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하 내용은 MtF를 기준으로 작성하였고 혹여나 FTM이실 경우는 맨 아래쪽에 적어둔 '제가 꼭 드리고픈 말'만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2차성징 지나면 차이 없다 와 최대한 빨리 시작해라 둘 모두 일정부분 맞는 말입니다.
인간의 신체 발달은 겉으로 보이는 변화 속도가 느리고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2차성징이 끝난 이후로도 한국나이 기준 24~26세까지 천천히 나타납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턱선, 코, 눈두덩이 등등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 부위의 성장이 완료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2차 성징 끝난 뒤에는 차이 없다"라는 말은 키, 어깨, 몸 근육, 등등 신체 전반에 걸쳐서는 맞는 말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신체부위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최대한 빨리 시작해라"는 말은 그저 장단점이 뒤바뀔 뿐입니다.

다만 작성자님의 상황이 가진 특수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안 좋은 점부터 말씀드리자면 예비 고3이라면 HRT를 시작했을 때 수반되는 정신적 변화를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향한 욕구가 치솟으면서 학업에 지장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흔히 복권이라 부르는 흉부 가챠... 에서 당첨을 뽑았을 시에는 고등학교 생활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내내 고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고작 턱걸이 A를 뽑았음에도 한여름에 반팔 셔츠와 조끼에 반바지를 교복처럼 입고 다녀야 했을 정도로 잘 안 가려졌습니다. 차라리 살이 쪄서 가슴이 나온 척 하는게 편하겠다 싶어서 키빼몸 100을 맞추고 나니 그나마 주변의 시선이 줄어들었고, 현재는 다이어트중입니다. 작성자님의 키와 신체스펙이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저보다 더한 고생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한 후술할 장점들이 대학 생활을 보내며 술에 찌들어서 제대로 안 나타나거나 간손상으로 인해 전체 HRT 기간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제 장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HRT는 반년만 진행해도 몸 선의 변화, 얼굴 라인 변화, 상하체 지방 재배치, 피부 개선(역으로 나빠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이 빠르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는 HRT 기간이 이르고 또한 길어질 수록 더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초기 반년~1년은 호르몬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변화가 드라마틱하고, 그 이후 기간에는 디테일한 부분이 변화합니다. 이 디테일은 주로 체모 감소, 체내 단백질 관련 체계 변화(머리카락, 손톱, 근육의 성장 내지는 손실과 유지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상의 장단점을 잘 고려해보시고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내리시면 되겠습니다. 이하로는 제가 꼭 드리고픈 말을 적어두겠습니다.

성 지향성과는 다르게 성 정체성 분야는 항상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누구는 자기 몸에대한 확실한 혐오감과 남들과는 다른 관심사, 사회활동 양상을 통해 일찍이 확신을 가지지만 다른 누군가는 언제나 고민을 떠안고 이 길이 옳은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아니 고민해야 합니다. HRT 및 SRS는 기존 인생으로부터 너무나 큰 변화이고 그 만큼 리턴도 크지만 그 모든 걸 결정하기에는 항상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작성자님의 글을 읽어봤을 때, 절대 전자의 경우는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분들은 일상이 망가져서 고민이고뭐고 없거든요. '확신을 가진 사람'과 저 그리고 작성자님이 다른 점은 '정신적 여유가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분들께 잔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남들이 타고난 운명이라 부르는 것을 열심히 거스르며 평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합니다. 네. HRT 시작한 이후에도 저는 이런 생각을 몇 달에 한 번 꼴로 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부모님께 손자를 안겨드리고 부모님의 웃는 얼굴을 너무 때가 늦기 전에 볼 수 있다면, 남들이 안 하는 이 외로운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더이상 이 개같은 자아성찰에서 벗어나서 남들처럼 취업이나 내 집 마련 혹은 다음 달 가챠게임 예산이나 고민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요. 너무나 달콤하지 않나요?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내가 무너진다면? 가정해 봅시다. 20살의 제가 HRT를 포기하고 지정 성별대로 살아가서 취업하고 연애하고 저축하다가 40살의 어느 날, 딱 하루, 넘쳐버린 우울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후회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때 조금만 더 고민할걸 하고요.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그간 지정성별로서 쌓아온 사회적 지위와 돈, 안정된 삶을 포기하기엔 40살의 우리는 너무나 겁쟁이일 수 있습니다.

작성자님, 부디 오래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당신께서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이 문제는 오직 당신을 위한 것이며 당신만이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제는 절대 선택의 기로가 아닙니다. 모순된 말일 수 있지만 이미 이 고민을 가지셨다는 것 부터가 작성자님 인생에서 언젠가는 거쳐가야 할 운명입니다. 작성자님이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