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위협 속에서 기나긴 하루를 보내버렸다.


모든 일이 끝나자마자 나는 생각할 것도 많고, 정리해야 할 일도 많건만, 권속에게 최소한의 응급처치만 해 놓은 뒤에 그대로 내 관으로 돌아가 드러누워 버렸다.


하루동안 너무나도 격한 일이 많았던 나머지, 과부하가 오고 만 것이다.


그나마 그런 와중에도 어렴풋하게나마 심하게 다친 권속에 대한 걱정만은 잊지 않았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불멸의 삶이 계속 되다보면, 가끔은 스스로도 놀랄만치 냉혹한 행동을 하게 될때가 있으니 말이다.


평소에는 드러낼리가 없는 없는, 위기에 몰렸을때나, 혹은 마음에 여유가 없을때나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괴물과도 같은 냉혹한 본성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때론 영혼보다도 소중한 것 조차 헌 신짝처럼 내던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그 아이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또 스스로 저도 모르게 조금씩 사그라드는 인간성을 억지로나마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아이를 불러냈다.



한 이틀 정도만 내리 잤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의 싸움으로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던 저택은 '어디선가 빌려온 수 많은 일손'덕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그 난장판이 아주 없었던 일은 아니라는 듯이, 나와 권속이 비열한 암살자 녀석과 처절한 사투를 벌인 곳 만큼은 전날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 자리에, 다른 인부들과 함께 그 날 도망쳤던 동생 일행이 핏물이 밴 얼룩을 열심히 지우고 있었다.



"끄응~ 이거 잘 안닦이지 말임다? 암만 핏자국이라고 해도 이거 원래 이렇게 안지워지는 거였음까?"


"흡혈귀 피라서 그래. 정 안되면 이걸로 닦아봐."


"잠깐."



나는 내 선반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약병을 자신의 권속에게 건네주는 동생을 제지했다.



"아, 일어났네."


"둘째 주인님, 좋은 저녁임다. 간밤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들고있는 그 병 어디서 났느냐?"



동생은 저의 무뚝뚝한 얼굴에 짜증나는 미소를 살짝 머금으면서 능청스럽게 입을 가렸다.



"본인 물건이면서 그것도 몰라? 푸푸…――"


"알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구나, 이것아! 그게 얼마나 귀한 재료가 들어간 산화제인데 고작 핏자국 닦는데 쓰려는 것이냐!"



나는 뻔뻔스럽게 웃고있는 동생의 손에서 산화제 병을 낚아챘다.


병을 흔들어보니 이미 제법 많은 양을 청소에 사용한 모양이었다.


동생의 얼굴을 보니 적반하장으로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 아이의 눈 앞에 위협적으로 주먹을 쥐어 흔들어 보였다.


동생은 재빨리 자신의 권속 등 뒤로 숨어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뭐, 뭐야!? 간만에 집안일 좀 도우려 했더니……."


"……그게 그렇게나 귀한검까?"


"재료도 재료지만 이거 한 병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느냐? 이 한 병을 만드는데 네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의 세 배는 들었을 거구나."


"…………."


"이 만한 순도의 산화제는 온갖 섬세한 조정이 필요한 약품에 사용된단 말이다. 


정 어쩔수 없다면 모를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만한 수준의 산화제를 고작 핏자국 치우는데 사용하는건……――."


"그치만 흡……의 일족의 핏자국은 잘 안닦인단 말야."


"흡…의 일족은 또 뭐냐 이것아. 거기다 표백제는 뒀다가 뭐하느냐? 청소 만이라면 요즘 나오는 현대 약품들이 값도 싸면서 효과도 좋지 않더냐?"


"그래도 역시 그거만큼은……――"


"――갈(喝)!"



내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치자마자, 동생은 움찔거리면서 다시금 자기보다도 작은 자신의 권속 등 뒤에 몸을 숨겼다.


동생의 권속은 나와 녀석의 안색을 번갈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귀한 물건이라 하시니, 둘째 주인님의 기분은 알겠슴다."


"너, 너어!?"



동생은 여전히 그 아이의 등 뒤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그 아이의 의외의 발언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동생의 권속은 동생이 그러거나 말거나, 눈길만 한번 슥 주고는 다시 내 쪽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여기선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되겠슴까? 제 주인님도 간만에 의욕을 내셨지 않슴까."


"…………이제 너도 주인들을 말로 구슬릴 줄도 알고, 제법 성장했구나."



나는 동생의 권속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원래 같았으면 천둥 벌거숭이마냥 위 아래도 모르고 길길이 날뛰면서 제 주인을 감쌌겠건만


성장하는 속도를 보건데 이 아이, 제법 밤의 사회에 적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 두 아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무엇인가 뾰족한 것이 내 볼을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스웨터를 걸치지 않은 내 권속이 내 볼을 찌르면서 싱긋 웃고 있었다.


마치 그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 아이의 평소와 다를것 없는 태도에, 나 또한 평소처럼 그 아이의 손가락을 잡고 천천히 비틀면서 힘을 가하는 것으로 되돌려 주었다.



"아, 아아아아아! 주, 주인님! 제 연약한 손가락을 그렇게 비트시면 기껏 돌아온 제 손이, 손이이이이!?"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대체 왜 그런 건방진 손가락을 그만 두지 못하는게냐? 사실 이렇게 하는 게 마음에 든게 아니더냐?"


"아아, 아아아, 아아앙……♡ 그럴 리 없잖아요오오오오~"


"……후우.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거람?"



나는 그 아이의 이상한 반응에 한숨을 내쉬면서, 적당히 그 아이의 손가락을 쥔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내려놓는 대신 그 팔을 살짝 당겨서, 손 끝에서부터 찬찬히 그 아이의 뻗은 어깨까지 시선으로 훑었다.


오늘 잠에서 깨고 나서야 든 걱정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아이의 절단되었던 양 팔은 밤의 귀족 특유의 회복력으로 흉터없이 잘 붙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가슴에 은탄으로 인한 치명상을 입은 전적이 있는 만큼,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듯 보였다.



"저……, 주인님?"


"……."


"제 맨살을 그렇게 빤히 보시면 조금 부끄러운데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갈까?"


"네."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그대로 저택에서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을 으슥한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동생이 내 등 뒤로 불만 가득한 혼잣말에 가까운 꿍얼거리는 소리를 날렸다.



"청소 아직 안끝났는데……. 그거 좀만 더 쓰면 안…――"


"갈! 갈! 가알!"


"히익!?"



동생은 내가 연달아 내지른 진심 호통에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권속의 품 안에 안겨들어갔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잠시 놀라있던 동생의 권속은, 곧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주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내가 그 묘한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니, 어째선지 동생의 권속은 내게 감사하다는 듯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윙크를 날렸다.



.

.

.


빛이라곤 작은 창문 하나 외엔 들어오지 않는 다락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것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권속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물어봐야 겠구나."


"……? 무슨 일이신가요?"


"네 녀석, 내가 전날 네게 준 영약을 기억하느냐?"



내 질문에 권속은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정말 다행이지 뭐에요. 그 날 제 품에 그 약이 없으면 큰일날 뻔 했지요? 주인님께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을땐 저도……"



나는 팔을 높이 들어 그 아이의 턱을 붙잡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녀석과는 제법 신장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까치발을 들어야 해서 영 모양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것 만으로도 권속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데는 충분했다.



"으붑!?"


"나는 분명 네게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고 했었다. 그렇지?"


"우에에……우붑."


"조용히 하거라. 내 말이 끝나지 않았으니."


"……."



내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권속 녀석은 더 이상 입을 움직이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녀석에게 나를 두려워 하는 기미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늘 사랑하는 아이긴 하지만, 정말 이럴 때면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되려 내가 두려울 정도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약을 내게 사용했지? 


권속의 몸으로 도망치지도 않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밤의 귀족에게 싸움을 거는 것도 기가 찬다만, 


두 팔이 잘리고도 그 약을 사용하지 않은건 어째서느냐?


그 정도로는 위기도 아니라는 게냐? 생각이란게 있는게냐? 내 명령이 말 같지 않다는게냐? 네가 그렇게 똑똑하느냐?"


"……."



나는 권속의 턱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대답을 기다리다 내게 턱을 잡힌 상태로는 대답을 하기 어려울거라는 데에 판단이 미쳤고, 그제서야 나는 그 아이의 턱을 놓아주었다.


내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악력에 의해, 그 아이의 턱에 내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멍자국이 생겼다.


그렇지만 그 정도는 그 아이가 배워야할 교훈의 가치에 비하면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기에, 가엾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나는 이 일에 대해서 화가 나 있었다.



"그치만, 그치만 그 여자는 정말로 주인님을 죽이려고 했단 말이에요!


주인님을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주인님은……."


"그건 어디까지나 내 판단 미스로 일어난 사고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누누히 말했건만 너는 고작 내 소유물일진대, 내 명령에 의문을 제기할 셈이냐?"



권속은 내가 호통까지 쳐 가며 화내고 있음에도,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모양인 듯 했다.


딱히 바락바락 대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금도 기가 죽은 기색도 없이 내 말을 계속해서 맞받아쳤다.



"주인님을 죽게 내버려 두는 권속이 어디 있나요? 자신의 주인님을 보호하는건 권속의 의무 아니었나요?"


"네가 그런 식으로 내 명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어길때마다 내가 짜놓은 계획에 차질이 생긴단 말이다!


내 의사는 분명 네 놈이 목숨만큼은 부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바램을, 내 명령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 명령에 어떤 계산이 있을지 알고 그리 행동하느냐? 


주인의 명을 그대로 받들어 지키는게, 그것이야말로 권속된 도리 아니느냐?


도대체 권속이란 것이 무슨 이유로 하늘같은 주인님의 명령을……――"



여기까지 말했으면 녀석도 더는 할 말이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그 아이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내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당한 이유라면 있어요."


"뭐라?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망발을! 


밤의 세계 어디에 네 녀석의 적법한 주인인 내 명령보다도 우선하는 원칙이 있단 말이냐?"


"경우에 따라선 있을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아이의 눈가에는 어느 새 오랫만에 보는 기이한 광기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분명 나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아이만의 불가해하고 기이한 욕망에 기인한, 주인인 나 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밑바닥 없는 심연과도 같은 광기었기에, 불안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뭐, 뭐라? 그런, 게 있을 리……."


"주인님의 말씀은 '권속이란 신분'은 분명 계약에 따라 자신을 가족으로 맞아준 장본인에게 귀속된다는 얘기시지요?"


"……."


"분명 그 말씀에는 틀린 부분이 없긴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지 않으셨나요?"


"……그게 무어냐."


"권속의 신분은 자신의 주인님에게 귀속되긴 하지만, 그 이전에 주인님이 속하신 가문 전체의 소유물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게 대체 어쨌다는 거냐?"


"주인님께서 저를 그토록 사랑하듯이, 저도 주인님을 사랑하고, 또 저희 가문에는 저 만큼이나 주인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있고, 그 분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인님을 지키기를 바라신다는 얘기에요."


"아까 전부터 그게 대체 무슨……."



그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아까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흥, 햇병아리 치고는 제법 옳은 판단을 했다고 봐주니까 이렇게 기어오르기는. 


짜증나니까 이제 그만 질척거려줄래?"


"실례했습니다, 큰 주인님."


"언니!?"



언니는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나를 와락 하고 끌어안았다.


나는 언니에게 붙잡혔다는 공포감에 온 몸이 굳어서, 발버둥 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너, 정신을 차렸으면 저딴 어디서 대충 줏어온 근본도 모를 얘보다, 너를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진한 피로 이어진 이 언니부터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니?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언니……."


"후훗. 언제 봐도 가슴 따뜻해지는 자매네요."


"너, 너이씨, 웃어? 웃는거야? 건방지니까 그딴 식으로 웃지마! 조금 이쁨 받는것 정도로 우쭐해가지고!"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부터 두 분을 방해하지 않도록……."


"가만, 기다리거라! 내 말은 아직 끝나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니의 금속제 공구와도 같은 억센 팔이 내 몸을 옥죄였다.


상해만 입히지 않는다 뿐이지, 내게 가해지는 폭력이나 마찬가지인 강압에, 나는 발버둥은 커녕 마음대로 입을 놀릴 수조차 없었다.



"흑흑……. 그깟 유물 조각 같은거에 눈이 팔려서, 세상에서 하나 뿐인 동생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니…….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 건방지고 음흉한 지지배 말대로 나는 언니 실격일지도……. 으앙~"


"……저 아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나요?"


"했어! 분명히 했어! 안했어도 마음속으로 그런 소리 해가면서 비웃었어!"


"……그냥 저와 언니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을 뿐인……――"


"시꺼!"


"히얏!? 네, 넷!?"



언니는 호통을 치면서, 나를 우악스럽게 끌어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줘서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더욱 부담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내게 기대고 부벼대기 시작했다.



"비록 이 언니가 자주 집을 비우고 여기저기 다니고 있다지만, 이게 다 너……아니 너희들을 위해서 위해서 발품 팔고 다니는 거잖니.


조금 정도는 이렇게까지 노력한 언니한테 칭찬의 한 마디 정도는 해 줄수 있는거 아니니?"


"언니……."


"내가 그렇게 밖을 쏘다니면서도 얼마나 너를 보고싶었는지 아니? 노력한 이 언니에게도 그 애한테 해주는 것처럼 뽀뽀도 좀 해주고 그러지 않으련?"


"저, 저기 갑자기 그런 말을 하셔도……."



언니의 부담스럽게 가까워진 얼굴이 더욱 가까워지더니, 입술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은 내 온 얼굴을 사정없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네가 안해주면 내가 할거야. 응츄~ 츄~ 츄~"


"웃, 웃, 우웃……."



난 대체 여기까지 와서 뭘 하고 있는걸까.


분명 내 말을 듣지 않는 권속을 훈육할 요량으로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자리를 마련했건만,


그 아이는 제대로 반성하기는 커녕 역으로 나를 가르치려 들지를 않나, 


괘씸하게도 언니에게 나를 팔아먹고 자리를 피하질 않나.


나는 그대로 언니에게 붙잡힌 채로, 나를 언니에게 버리다시피 던져놓고 도망친 야속한 권속이 사라진 자리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언니의 과도한 애정표현이 잦아들 무렵, 나는 슬슬 언니의 격해진 감정이 진정되었다고 판단했기에 살짝 밀어서 떨어트려놓았다.


언니는 포옹을 계속하려 했지만, 내가 계속해서 밀어내자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천천히 밀려났다.



"언니, 저도 슬슬 볼일이 있기 때문에 이쯤해서 실례할게요."


"히잉~……. 언니에 대한 태도가 너무 차가운 것 아니니? 조금만 더 안고 있어도, 아니 이대로 계속 안고 있는 채로 하면 안돼?"


"아까 충분히 안고 계시지 않으셨나요?"


"자매끼리의 애정표현에 충분한 게 어딨니……."


"……그리고 이제부터 저는 인간측 정보원이랑 연락을 하려고 하거든요."


"응……. 그렇구나. 그렇겠네. 이 언니는 괜히 곁에 있어봐야 방해만 된다는 얘기지? 


……동생이 기껏 기특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데 도움은 못 줄 망정…….


이런 쓸모 없는 언니는 방해되지 않도록 나가 있을게……."


"……."



내가 굳이 가문의 성역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유 중 하나가 새삼 떠올랐다.


언니는 어차피 타인에게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는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주제에, 


굳이 이런 의사를 존중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면서, 특히 나에게만 끈질기게 자신의 의사를 밀어붙인다.


요컨대, '네 의사를 존중하는 척은 해줄테니, 알아서 잘 기어라.' 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파악한 언니는 그런 존재였다.


이대로 언니를 내버려두면 이후에 피곤하게 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에 마음의 각오와 함께 언니를 불러세웠다.



"후우……. 곁에 계시고 싶으시면 계셔도 상관은 없어요."


"그, 그래? 그렇지? 역시 언니가 곁에 있어주길 바랬던거지? 요 새침떼기 같으니~"


"대신 교신이 시작되면 조금 떨어――"


"떨어……지라는 말이구나. 응……. 그러네……. 아무리 자매라도 그렇게 달라 붙으면 기분 나쁘겠지……."


"……거리를 둬 주세요. 피 벌레를 사용할거라, 누군가 곁에 있으면 간섭이 발생할테니까요."



언니는 내 말에 손가락을 턱에 괴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고 물었다.



"피 벌레? 피 벌레를 이용해서 교신을 하려는거야? 너 답지 않은 수단을 쓰는구나? 


넌 다른 건 몰라도 피 벌레를 몸에 심는 것 만큼은 너무 잔인하다고 했잖니."


"딱히 심고 싶어서 심었던 건 아녜요. 이건 감히 저를 습격한 멍청이들에 대한 일종의 체벌이기도 하니까요."



내 말에 언니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기울어졌다.


방금 전까지 내게 보여주었던 얼빠진 듯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세간의 동족들에게 '밤의 여제'라는 이름으로 각인된 괴물의, 본래의 그녀의 모습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아하……. 그러니까 저번에 감히 겁도 없이 너를 사냥하려 했던 그 놈들이라는 말이구나?"


"……언니."


"그러고보니 나도 이제껏 궁금하기는 했지. 어떤 겁도 없는 천하의 천둥 벌거숭이들이 감히 내 사랑스러운 동생을……."


"언니."


"……왜 그러니? 이 언니는――"


"그 마음은 저도 이해하지만, 이전의 일이야 어찌 되었든, 이래뵈도 지금은 중요한 협력자에요.


부디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여, 역시 이 언니는 방해가 되는걸까!?"


"만약 여기서 화를 내신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


"……."



나와 언니는 잠시간 서로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언니는 비록 아직까지는 내 의사를 존중해서 별다른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동자 너머에는 이미 내가 늘 경계해왔던 살육의 광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언니가 갑작스레 분노로 발작할 것을 경계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구슬릴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천만 다행히도, 내가 뭔가를 하기 전에 언니는 스스로의 분노를 잘 추스렀다.



"……뭐, 좋아. 너도 어른이니까 알아서 얕보이지 않도록 잘 판단했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만……."



다행히도 언니의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한 분노는 수그러든 모양이지만, 이대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아직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언니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등 뒤에서 다시 내 몸을 끌어안았다.



"저기, 언니? 그렇게 딱 붙어 계시면 교신에 간섭이……."


"그치만 이대로는 납득이 안 되잖니? 적어도 어떤 놈인지 정도는 알고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사전에 아무 말도 없이 제 삼자가 교신에 끼어들게 되면……."


"혹시 이 언니는 들으면 안되는 얘기니? ……훌쩍."



나는 잠시 언니가 교신에 끼어들게 되었을때 생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래뵈도 언니는 다혈질 적인 면모에 비해,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감정 조절을 잘 하는 편이다.


다만 원한은 깊은 편이기에, 그들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기억한다면 언젠가 분명 위해를 가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벌어질 일 따윈 아무래도 좋기도 하고, 


그들 또한 피 벌레가 심어진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전문가 답게 치밀한 면모가 있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감염자 놈의 눈을 가려놓고, 목소리는 변조할 테니 그들에게도 그다지 피해는 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제일 좋은것은 역시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도록 사적인 부분을 철저히 배제하고 언니를 방에서 쫒아내는 것일테지만, 


이쯤에서 언니도 그들의 존재와, 그들과 나누고 있는 논의를 아는 편이, 당장 성가신 언니를 다루는데도 도움이 될 뿐더러 


이후의 이야기에서도 편리하게 작용할만한 여지가 있다는 데까지 판단이 섰다.



"뭐, 좋아요. 그 놈들이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아마 별 일 없겠죠."


"정말? 정말 나 여기 있어도 돼? 이대로 안고 있어도 돼?"


"대신 정말 듣기만 해주세요. 끼어드는 것은 안돼요?"


"……이 언니를 못믿는거니?"


"으음……. 그런 건 아니지만, 저도 제 나름대로 진행중인 교섭이 있어서 쓸데없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쓸데없이……. 히잉……."


"……아무리 떼를 쓰셔도 이것만큼은 양보 할 수 없어요."



언니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태도(을 가장한 강요)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내가 이 이상 양보하려는 기색이 없자 한숨을 내쉬면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래, 알았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너도 나름대로 많이 양보해준거지?"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한번 꾸벅 숙인뒤에, 교신을 시작했다.


집중을 시작하자 두 눈 사이에 긴장이 모이고, 곧 눈꺼풀로 덮인 두 눈알에는 터질것 같은 압력이 몰려왔다.


그 감각을 더욱 집중해서 머리 위쪽으로 천천히 옮기자 신경을 찌르는듯한 자극이 등줄기로부터 전신을 향해 뻗어져내려왔으며,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전신의 감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 내 몸으로 희미하게 연결된 피 벌레의 실재하지 않는 신경 가닥을 잡아당겨서, 그 육체가 있는 곳으로 내 정신을 옮겼다.



.

.

.

.

.




타인의 육체 안에서 눈을 뜨자마자, 검은 천으로 감싸인 익숙한 어둠이 나를 반겼다.


사냥꾼 협회장이 다소 날이 선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실례. 오늘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려무나."


"제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오늘 회의에 제가 모르는 누군가를 데려오셨군요? 맞나요?"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



협회장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역시 전문 흡혈귀 사냥꾼 답게 모종의 수단으로 피벌레의 교신에 무결성이 유지되고 있는지 감시할만한 수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아마 내가 계속해서 시치미를 뗀다고 해도, 속아 넘어가기는 커녕 나에 대한 경계심만 키우게 될 것이다.



"뭐, 좋다. 말해주마. 오늘 회의에는 가족 중 하나가 참견할 예정이니 그리 알거라."


"갑작스럽게 그런 소리를 하셔도 곤란합니다만……. ……가만, 혹시 그건 일종의 감시 같은건가요?"



나는 권능으로 연결된 정신체 가닥의 교접을 통해, 언니의 기색을 잠시 살폈다.


아직까지는 딱히 협회장의 날 선 태도에 대해 크게 불쾌해 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지만, 혹여나 교신에서 쫒겨나지 않을까 싶어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나 빠지는게 좋을까?'


'일단 계속 교섭해볼게요.'


"흠, 흠. 뭐 그런 셈이지. 나라고 해서 가문에 있어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나는 협회장과 언니, 어느쪽에도 중의적으로 해석될만한 여지가 있는 모호한 대답으로 둘의 반응을 떠 보았다.


언니는 내 대답이 본인을 적대하는듯한 뉘앙스라 다소 불편하게 느껴진 모양이지만,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한 연기라고 여겼는지 별다른 불만을 내뱉지는 않았다.



"흠, 네 뭐, 이해 해드리겠습니다만, 대신 민감할 수도 있는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지요?"


"그 정도면 충분하구나."



다행히 협회장도 내 요구를 적당히 받아들이기로 한 듯 보였다.


아마 어쩌면 저 딴에는 우리 가문에 대한 내부 정보를 얻어낼만한 좋은 기회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정기 연락도 아닌데 이렇게 먼저 연락을 해오셨다는건, 유물 조사의 건은 아닌 모양이죠?"


"이미 내가 무슨 소리를 할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구나."


"네. 워낙 눈에 띄는 거래였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었거든요."


"그럼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그제 밤에 밤의 귀족과 협력해서 나를 습격해온 그 놈들은 대체 무어냐?


협회의 사냥꾼들은 이번 사건동안은 설령 의뢰를 받더라도 나를 공격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느냐?"


"흡혈귀 사냥꾼이라고 해도 협회가 저희만 있는것도 아니니까요. 


관할이 아닌 사냥꾼까지 전부 통제할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분명 저희는 다른 협회에 거래가 있으니 협조해달라는 연락은 해 두었고, 대부분은 납득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그 놈들은 무어란 말이냐? 보아하니 분명 '대 흡혈귀 작전'을 할 줄 아는 놈들로 보였다만?


장비도 어중이 떠중이 민간 퇴치사들이 쓸만한게 아니더구나."


"네. 분명 그들은 흡혈귀 사냥에 있어서 아마추어는 아닐겁니다. 


다만 전문 흡혈귀 사냥꾼들은 아니고, 좀 더 다양한 오컬트적인 이물 전반을 상대하는 일종의 특수 용병이죠."


"특수 용병?"


"그렇습니다. 대 이물 작전 전문이라지만, 돈만 준다면 의뢰인 본인이 이물이여도 신경쓰지 않는데다,


굳이 대 이물 작전이 아니더라도 보수만 충분하다면 통상적인 전투도 수행하는 수전노 집단으로 유명하답니다."


"그래서 그 놈이랑 붙어먹고 덤벼들었던 거군."


"그 놈이라고 하신다면?"


"그 날, 용병들은 어디까지나 내 권능을 약화시키고, 성역에 포위망을 만드는 역할이었다. 진짜 공격은 내 동족이 수행했지."


"호오……. 그랬던 건가요? 어쩐지 그 용병들, 수전노 용병 치고는 당신같은 위험한 표적을 노리는 계약을 선뜻 받아들인다 싶었는데……."


"거기다 너희들이랑 다르게 화려하게 포격까지 해가면서, 내 성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아무래도 저희는 '사냥꾼'인 만큼, 저희……인간 세상에 혼란을 일으킬만한 소란은 피하자는 주의니까요."


"거기다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


"신경 쓰이는 점? 그게 무엇인가요?"


"너희들도 그랬지만, 내게 덤벼드는 놈들은 하나같이 내가 평화조약을 깨트리고 태양의 심장을 모아서, 검은 태양을 띄울거라는 뉘양스를 풍겼지.


이번 놈도 그랬다."


"검은……태양?"


"뭐야, '검은 태양'을 모르고 있었나? 어이가 없구나. 도대체 너희들은 지금까지 조사를 어떻게 해오고 있었던 것이냐?"


"……또 자기만 아는 소리를 하고."


"뭐라?"


"그냥 혼잣말이었습니다만?"


"후우……. 뭐, 좋다. 검은 태양이란 우리 밤의 귀족에게 빛을 가져다 줄 것이라 약속된……."


"……가만 그건 의식으로 소환하는 '검은 아버지'에 대한 설명 아닌가요?"


"뭐야, 그냥 저번처럼 잘못 읽었을 뿐이었나?"


"……."



그때 언니가 묘하게 유치한 비웃음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언니는 선생을 자부하는 만큼 지식을 쌓는데도 성실한 사람이니, 고대어를 읽는 법에 있어서도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다만, 선생을 자부하는 사람이면서 굳이 어쩔 수 없는 무지에 유치한 비웃음을 보낸 데에는, 


그들이 나를 습격한 점이 있다는 점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 그걸 '검은 아버지'라고 읽는 놈들도 종종 있긴 했지. 그렇지만 '검은 태양'이 맞는 해석이다.


그 단어가 분명 아버지라는 뜻도 있긴 하지만, 문맥을 보면 태양이라고 읽는게 맞지 않겠느냐?"


"그럼 이상하지 않나요? 이제껏 예언들은 그것을 주체를 가진 존재로 묘사했던것 같은데……."


"네가 헷갈려 하는게 무리도 아니지. 오래된 문법체계에선 신적인 힘을 지닌 존재는, 물질이건 인격체건 주체를 가진 것처럼 표현하니깐……."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아, 그럼 그 문장도……? 


……어쩌면 저희측의 조사는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됐다. 잘 됐구나."


"……그래서 하시려던 말씀이?"


"아아, 그래. 습격자들에 대한 얘기를 하던 도중이었지.


아까도 말했지만 습격자들은 하나같이 우리 가문이 배신 행위를 하려 했다고 주장했지."


"그야 그럴만도 하지요. 금지된 유물의 파편을 모으는 중이시니까요.


그게 유물들을 회수해서 배신자들로부터 숨기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하시지만 말이죠."


"그래."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충분히 수상하게 보일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럴지도 모르지.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 만으로 확신하기엔 정보가 모자르지 않느냐?"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당신을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



어느정도 짐작은 했지만, 아직도 나와 우리 가문을 의심하고 있다고 이렇게까지 내 면전에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감시라는 명목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오늘처럼 갑작스레 돌발 행동을 하시면 저희도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



그건 확실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아무리 흡혈귀 사냥꾼 같은 적대적인 집단이라고 해도, 당장 협력이 필요한 시기에 이렇게까지 서로를 의심해서야, 


의심병에 걸려서 섣부른 의심으로 내게 덤벼온 그 놈이랑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놈들에게 조금 유화적으로 접근해서, 신뢰를 사지 않으면 앞으로의 협력에 차질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용병들이 우리 가문을 습격할 것을 알고 있었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통제까지는 못하더라도 견제나 훼방 정도는 시도하거나, 하다못해 사전에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내심 이 용병들이 나를 제거하기를 바랬던 거겠지.



"……그렇다면 좋다. 이쯤해서 이 쪽도 네놈이 우리 가문을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확신을 줘야겠구나."


"호오? 어떤 제안을 하시려는 것인지?"


"내 특별히 허락하마. 앞으로 너희들이 조사로 찾아낸 유물 조각은, 너희들이 보관할 수 있도록 해두마.


너희들이라면 나를 포함한 어떤 흡혈귀도 손을 대지 못하게 유물을 보관할 수단이 있겠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이 무슨 건방진……."



잠깐의 정적 후, 협회장은 쿡쿡 하고 작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의외로군요. 저희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아까도 말했다만 신뢰의 표현이다. 제안을 받아주지 않겠느냐?"


"그렇네요.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다만, 앞으로 몇개나 되는 유물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서……."


"그것도 그렇구나. 그럼 이건 어떻겠느냐? 우리 쪽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물 중 한 조각을 네놈에게 주마."


"……? 정말 그러셔도 괜찮겠나요?"


"그래. 목적이 목적이니 만큼 유물은 분산시켜 보관하는게 좋겠지. 거기다 우리가 그런 움직임을 보이면, 이제껏 내 목숨을 위협해온 오해를 푸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질문이다만, 너희는 그 날 어떤 확신으로 나를 습격했던 것이냐?"



그때 가슴에서 어떤 감정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피 벌레로 이어진 신경을 통해 전해졌다.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이는걸로 봐서, 육체의 주인인 사냥꾼 놈이 내가 모르는 암호로 협회장과 대화를 하고 있는 듯 했다.



"……걱정 하시는건 이해하지만 괜찮아요. 그래요, 무슨 확신으로 습격하셨냐고 물어보셨지요? 전에 말씀 드렸던 그대로에요.


당신네 가문에서, 특히 당신의 언니가 유물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그리고 당신의 동생이 인간계에서 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으니까 랍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 말이다.


이번에 나를 습격해온 암살자 녀석은, 우리 가문이 유물 조각을 모은다는 사실 외에도 다른 확신이 있어서 나를 습격해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언니의 가슴이 긴장감으로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목숨을 잃을 뻔 했다는 얘기를 계속 하는것이 불편하게 느껴진 모양이겠지.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이상하다마다. 원래라면 밤의 귀족들은 밤의 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기 마련이지.


아무래도 죽는게 무서워서 삶의 정상적인 순환에서 도망친 겁쟁이들이 다들 그렇지 않겠느냐?


그래서 누구 하나 똑부러지게 행동하지 않으니,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속고 속이는 암투가 끊이지를 않고 말이다."


"호오, 역시 그런 기조가 있었던 거군요."


"사냥꾼을 하는 이상, 네놈도 이미 알고 있을거라 생각한다만?


아무튼 그런데다 최근에는 새로 생긴 가문의 움직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첩자를 심은듯한 구도가 되어서 서로의 행동이 훤히 드러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유물을 모으는 것 외에는, 누구 하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대뜸 ……스스로 말하기도 좀 그렇다만 밤의 여제, 내지는 작은 여제라고 불리는 내게 감히 습격까지 감행하다니, 


대담해도 너무 대담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흐음……. 말씀을 들어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그래서 말이다. 조만간 실마리를 찾아 암살자 놈의 성역을 찾아갈 생각이다.


부탁받은 일도 있고……."


"그걸 저희한테 말하시는 건가요? 뭐, 저희한테는 좋은 일입니다만……. 혹시 교란의 일종……은 아니겠죠? 후훗."


"뭐라고 생각해도 좋다. 나는 분명 말 했으니까."


"뭐, 좋아요. 저희한테 굳이 말씀하시는걸 보니, 거기서 알아낸 무언가가 있다면 저희한테도 얘기해주실 계획이신가 보죠?"


"그래. 아무래도 우리들은 특성 상, 낮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취약하니, 가급적이면 네녀석들이 인간쪽 습격자를 경계해줬으면 하니깐."


"저희를 믿으시는건가요? 저희는 당신네들을 사냥하는 사냥꾼이라고요?"


"너네가 나를 믿지 않으면 어쩌겠느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내게도 너희들을 믿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아니면 온 밤의 사회의 의심을 사 적으로 돌리는 것도 무릅쓰고, 


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전 시대의 밤의 귀족들처럼 권속의 군단으로 만들어진 전쟁을 위한 거대한 가문을 조직하길 바라느냐?"



비록 눈이 가려져 있어서 나는 놈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작게 침을 삼키는 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 놈이 내 발언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확실히 재앙이군요. 알겠습니다. 당신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가능하면 저희 협회에서 당신과 당신 가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은 대답이구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징그러울 정도로 음흉한 미소를 내 보였다.


뭐 놈들은 반쯤 협박당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원래 협력 관계라고 해도 밤의 귀족과 사냥꾼은, 딱 이 정도 거리감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편이, 서로에게 편하고 좋다.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나는 머리 중앙에서 어딘가로 잡아당기는 듯한 긴장을 풀고, 다시 원래의 내 몸으로 정신을 가져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니가 여전히 내 몸을 끌어안은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 걔들 사냥꾼이잖아. 약속을 지킬거라고 생각해?"



나는 폴짝 뛰어서 언니의 품에서 빠져나온 뒤, 언니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믿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저 녀석들도 당장은 저희한테 의존하는 것 외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을테니까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이 언니는 걱정이야."


"언니께서도 저희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이 정도 위험은 감수 해야죠.


그럼 회의도 끝났겠다, 아까 말한대로 전 이제부터 암살자 놈의 성역에 갈 생각이에요."


"그래? ……정말 괜찮을까? 혹시 함정이면 어쩌려구……. 그게 그렇잖니. 걔가 얼마나 음흉한 얜데.


이번에도 나를 유물로 꾀어낸뒤에, 그 틈에 너를 습격하기나 하고……."


"언니 걱정은 이해하지만, 괜찮을 거에요. 자기 목숨을 걸고 위험한 함정을 파는 밤의 귀족 같은게 있을리 없잖아요?"


"그치만……."


"그리고……."



나는 그 날, 암살자 놈의 머리에 단검을 박아넣을 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죽음을 앞두고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호해 달라며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을, 


뻔뻔하면서도 진심어린 부탁을 해왔던 얼굴을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런 눈빛으로, 그런 거짓말을 칠 수 있는 괴물은 저희 밤의 귀족들 사이에도 있을 리 없을테니까요."



나는 단검을 내리쳤던 그 손을, 마치 손에 그 칼이 지금도 있는 것처럼 동그랗게 오므려, 그 감촉을, 그 무게를 다시금 몸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