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편 갈아엎고 썼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어젯밤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매니저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가 전부 사양했던 묵직한 선물들을 정리했고, 코디가 1대1로 밀착해서 그녀를 위로했지만 턱도 없었다.
그녀가 나서서 병문안을 가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할 줄은 그녀 옆에 있던 이들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으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흐윽...흑..."
가끔씩 그녀가 어떻게든 감정을 참아내다가 지쳐 눈물을 보이곤 했었지만 그건 모두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자책하는 모습이었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 때문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 이들은 더욱 착잡한 기분이었다.
한참을 위로받던 그녀는 주변에 있던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혼자서 넓디 넓은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고는 조금씩 몇 달 동안 그와 나눴던 대화들을 되새김질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몇 달 전 그는 장문의 사과문을 보내며 정말 죄송하다고 빌었었다.
그녀와 동문임을 주장하며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리고, 이런저런 듣도 못한 이야기들을 줄줄 풀어나가는게 우스워 그녀가 고소하겠다고 말하자마자 날아온 대답이었다.
물론 그와 고등학교 동문은 맞지만, 그가 인터넷에 풀었던 썰들은 다 하나같이 과장되고 터무니없었던 이야기였기에 늘상 하던 대로 법적 대응까지 고민한 건 맞지만, 곧바로 글들을 지우고 싹싹 비는 것이 재밌어보여 그녀는 변덕을 부려 그와 DM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처음엔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하라는 대로 해! 식의 일방적으로 진행되던 막무가내 대화는 점점 같은 나이에 엇비슷한 관심사를 둔 두 남녀간의 대화로 변했었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야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로 변했지만 그때 그와 주고받았던 친밀감 넘치는 DM들과 곤란해 하면서도 마지못해 웃던 그를 보고 지었던 장난스런 표정,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찬찬히 떠올리며 그녀는 마침내 하나의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내가 얀붕이를 좋아했구나..."
그녀는 그냥 주변에서 들이대는 남자들에 질려 온순하고 자기 말을 잘 듣는 얀붕이 마음에 든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툭 내뱉은 따스한 한 마디에 호감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이제 어쩌면 그녀는 얀붕을 좋아하는 이유따윈 필요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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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이 울먹이면서 떠나가고, 한동안 엄마와 주변 사람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추궁받았다.
가까스로 그녀가 연예인 김얀순이 아니라고, 그냥 같이 일하던 후배 알바생이라고 속여서 넘어갔지만, 그녀의 슬픈 눈빛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았다.
차라리 대충 괜찮다고 말하고 받아줄 걸, 섭섭한게 있었으니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걸, 하는 후회가 떠올랐다.
"..."
갑자기 되려 미안함을 느끼다가 내가 뺨을 한 대 탁 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유명세나 이름이 어찌됐든 피해를 입은 건 내 쪽이다. 그건 확실히 해야 돼.
나 말고는 별로 대화할 상대가 없다고 몇 번이고 얘기한게 떠올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 주위엔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격에 맞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 나름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일을 하면서 조만간 멀쩡해질 거라고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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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엄마는 아침이 밝자마자 웬 작고 고급진 흰 상자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뭐긴 새 폰이지, 예전 건 깨졌다며?"
상자를 여니 과연 엄마의 말대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새 폰이 수줍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곤 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최신식에 걸맞게 엄청나게 커진 스크린과 용량, 무심하게 '5G'를 가리키며 돌아가는 데이터를 보니 절로 "엄마 사랑해." 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하긴 4년이나 썼는데 바꿀 때도 됐지, 하며 싱글벙글이던 나에게 엄마는 무심하게 두 마디를 툭 꺼냈다.
"일단 니 통장으로 샀다, 이제 안 깨먹고 잘 써."
참 내돈주고 산 것만 빼면 정말 좋은 폰인데.
아무튼 폰도 다시 받았겠다, 예전에 깔려있던 어플과 클라우드에 있던 사진까지 다 깔았지만 아직 카카오톡같은 SNS 어플은 아직 깔지 못했다.
폰을 바꾸면서 전화번호가 바뀌어 문자나 전화는 오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SNS는 계정이 남아있는 상태였으니 무심결에 깔다가 곧바로 저번처럼 악플이 달리는 걸 보기는 싫었다.
"..."
괜히 설치했다가 계속 DM 날아오고 그런 거 아닐까, 걱정이 앞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문득 어제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분명 회사의 변호사가 다 정리해준다고 했었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조심스럽게 김얀순 마이너 갤러리에 접속했다.
김얀순 마이너 갤러리
133.184 : 210105 김얀순 공항 입국 직찍(스압)
까망베르 : 이쯤에서 재업하는 고소당한 호감고닉 모음^^
26.101 : 갤주 일정표 나왔다!! 참고하셈
갤주에의자 : 섹스하고싶다
124.253 : 어제 병원에서 갤주 봤다는넘들 왤케 많음?
18.218 : 움짤게이도 고소당했냐? 요새 안 올라오네
"진짠가..."
과연 그 말대로 나 때문에 실시간으로 불타던 얀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한 갤러리가 되어버렸다. 기존에 갤에 상주하던 고닉들은 거의 90% 가까이 사라지고 파딱도 세 명에서 한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남아있는 유동들도 고소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대는 걸 보니 정말 대규모로 고소를 진행한 모양이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이번에 카톡, 페북, 인스타를 설치해서 확인을 해봤지만 기존에 왔던 악플만 남아있고, 잠잠한 상태였다. 오히려 사족처럼 악플 뒤에는 꼬리처럼 무언가가 길게 달려서 왔었다.
bjsansTV : 병신ㅋㅋ 나가뒤져라ㅋ
bjsansTV : 미국응딩이 따숩은데 고소나 함 찔러보샘ㅋ
bjsansTV : 형 저는 얀봉초등학교 4학년 2반 14번 박양봉인대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재 엄마가 학교로 와서 제가쓴것들 다 읽고 혼났어요ㅠㅠㅠㅠㅠㅠㅠ 아빠한테 일르기 전에 빨리 형한테 사과받으랫는데ㅠㅠ 죄송합니다ㅠㅠ
발신자표시제한 : 별찐따같은새끼가뭐가잘났다고설쳐시발련아죽어이호로새꺄카악퉤
발신자표시제한 :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얀진구에 사는 금태양입니다. 우선 저의 욕과 스팸문자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용서는 최고의 미덕이라는 말도 있는데 꼭 선처해주시면 평생 반성하면서 살겠습니다.
"하, 씹새끼들이..."
하여튼간에 고소를 하지 않았으면 팝콘이나 뜯었을 놈들이 이렇게 파리마냥 빌어대는걸 보니 코웃음이 나왔다.
얀갤을 보니 대충 외국에서도 '김얀순이 팔로잉했다고 병신들이 설치네ㅉㅉ 나라의 수치'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나에 대한 욕설이 자제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결과적으로 얀순이가 저지르고 스스로 치운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온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하나하나씩 지워가던 중 우연치않게 뒤늦게 그녀에게서 온 DM을 볼 수 있었다.
ysun97kim : 얀붕아 화 많이 났어?
ysun97kim : 미안해... 장난이 너무 심했지
ysun97kim : 한국 도착하면 맛있는거 많이 사줄게 화 풀어...
"..."
얀순이의 DM과 어제 고개를 떨구고 사과하는 그녀의 표정이 계속해서 겹쳐보였다.
정말 지금에서라도 그녀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때였다.
인스타에서 'kYANs'의 라이브가 시작되었다고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알림을 눌러 얀순의 라이브 방송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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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헤, 반가워요~. nice to meet you~."
그녀는 낮부터 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까딱거렸다.
라이브가 시작된 지 30초만에 2만 명의 팔로워들이 연신 좋아요를 눌러 호응하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싱긋 웃으며 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실 그녀의 팬들이 예상했던대로 그녀는 어제 새벽부터 싫어하던 술을 입에 잔뜩 가져다대어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그녀에 대해 걱정하는 팬들이 연신 무슨 일이 있느냐며 그녀에게 물었고, 얀순은 "그냥 한잔 했어요~. 답답해서..." 라며 얼버무렸다.
"요새 자꾸우~쓰읍, 제 마음대로 잘 안 되구우~ 외로워서 마셨어요~."
얀순은 그러면서도 자기 주변에 널부러져있던 양주잔을 집어들고는 다시 벌컥 들이켰다.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와 달리 잔뜩 흐트러진 만취 상태로 화면을 향해 싱긋 웃는 그녀에게 팬들은 더욱 걱정스러운 눈치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언니ㅠㅠ 힘들어도 몸 좀 챙기셔요ㅠㅠㅠ'
'힘들어도 화이팅!!!'
'never give up!'
"다들 고마버요~. 딸꾹, 이제! 괜찮아요~."
그녀는 방금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대다가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대낮부터 안주도 없이 혼자서 몇 병을 마신건지 그녀조차도 까먹어버렸다.
강을 이루듯 연달아 쏟아지는 하트를 한몸에 받아도, 그의 호감 한 번 가지는 데 실패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모든걸 가졌다는데, 정작 그녀는 평범한 남자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괜찮아요..."
'언니!!! 요새 'hyojayanbunbun'계정 팔로잉하셨는데 누구에요??'
'김얀붕이란 사람이랑 무슨 관계에요??'
'김얀붕이 누구에요?'
"김얀붕...?"
그녀는 채팅창 사이에서 보이는 그의 이름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다, 아직 얀붕이 언팔 안했구나? 분명 언팔하고 해명까지 해주기로 얀붕이랑 약속했는데.
"김얀붕이요?"
'그, 미안해.'
'나가주면 안 될까.'
"...싫은데."
이건 전부 얀붕이 너가 잘못한 거야.
얀순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는 물음표를 던져대는 팬들에게 다시 물었다.
"글쎄...? 왜, 궁금해요?"
'진짜 뭐에요?!?!!!'
'ㄷㄱㄷㄱㄷㄱ'
'???????????????'
얀순은 카메라를 향해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을 수도 있는 그에게 향하듯 진득한 눈빛을 보냈다.
분명 그녀는 얀붕의 마음을 얻는 데에 실패했다.
하지만 대신 모두에게 이 사랑을 인정받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도 1141만 8235명의 사람들에게.
"얀붕이, 제 남자친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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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아 저번 5화 너무 병신같아서 싹 갈아엎어버렸다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