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 웃기지 마. "


 눈 앞에 드리운 압도적인 형체.


 그 검은 형체는 한없이 빛나는 호박색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것을 바라본 그 순간 미쳐버릴 정도의 압도감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의를 다진 듯 스스로의 손에 쥐여진 검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을 뿐이었다.


 " 그대가 지켜야할 모든 것은 사라졌다. "


 검은 형체는 주변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들을 가리켰다.


 시체들은 마치 잠들어버린 듯 평온히 쓰러져있었지만, 모두가 복부에 큰 구멍이 난 채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수도복을 입은 젊은 여성도, 큰 방패를 든 난쟁이도, 갑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도, 모두 한치의 예외도 없이.



 " 만약 여기서 나를 죽일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대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그대들을 사지로 내몰고 자신들은 백성을 버리고 한 순간의 사치와 향락에 찌들은 채 병들어 버린 왕국?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뒤로는 신도를 성적으로 착취하며 썩어버린 교회?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 하나만으로 주변 모든 것을 배척하다 결국은 멸망의 길을 택한 난쟁이들의 마을?


 혹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그대를 '용사'라는 이름의 제물로 바친 고향으로? "



 " ... 입닥쳐. "


 그는 입술을 깨물며 검은 형체를 노려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것이 하는 말들은 맞는 말이라는 것을.


 더 이상 자신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는 것을.


 마치 모든 것이 운명처럼 정해졌다는 듯이 여기까지 끌려왔을 뿐이다.

 

 어떤 책임감도, 의무감도, 사명감도 없었다.


 그저 매순간 살기 위해, 발버둥쳐왔을 뿐이다.


 " 그래도. "


 그는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 쟤네는 동료였어. 나처럼 바쳐지고, 버려지고, 구르고, 그냥 한순간 한순간을 살아온. 


 돌아갈 곳이 없어도, 그냥 저녀석들과 이곳 저곳을 방랑하면서 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


 말을 하면서 점점 격앙되어가는 목소리.


 그들을 추억하며 넘쳐흘러버릴 듯한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그는 외쳤다.


 " 그걸... 그걸... 니 새끼가 다 없애버린 거잖아아아아아!! "


 그 말을 들은 형체는 아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대꾸할 뿐이었다.


 " 그러니 말하고 있지 않는가. 더 이상 그대가 지켜야 할 것은 없다고. 


 더 이상 미련을 둘 것이 뭐가 있지? 검을 내려놓아라. "


 그의 발악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대체 무엇을 고민할 필요가 있는 거지? 너에게는 복수를 해낼 힘도 없을 것이다.


 그저 모든 걸 포기한 채 내게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될 뿐이지 않나? "


 검은 형체는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증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도 알고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저 괴물의 변덕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의 안에서, 그의 동료들이 한순간에 죽어버린 것 만으로 모든 것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순간이나마 느꼈던 희망도,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절망조차도.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모든 증오와 저주를 저 역겨운 괴물에게 퍼부은 끝에 쓰러져 갈 이 목숨 뿐이었으니.


 " ...끝까지, 포기 할 생각은 없어보이는군. "


 한없이 진중하기만 했던 말투가 한 순간 슬프게 들려왔다.


 " 뒤져어어어어어어어어!!! "


 내지른 함성과 함께 달려간 그의 몸뚱이는, 그 발버둥이 무색할 정도로 한 순간에 쓰러져버렸다.


 주변의 시체들처럼,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그를 바라보던 호박색의 눈동자가 잠시 감기더니, 검은 형체가 찢어지고 휘감기며 점점 그 크기가 작아졌다.


 그리고 잠시 후, 휘감겨있던 그림자 속에서 흑발의 앳된 소녀가 나타났다.


 찬란히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서 빛나고 있었다. 


 사뿐히 주변의 시체들을 즈려밟으며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쓰러진 그를 조심히 들었다.


 그의 시체는 눈도 감지 못한채, 그저 그녀에 대한 끝없는 증오만을 표출하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피에 젖어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녀는 그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 ... 그대의 돌아갈 곳도, 소중한 사람도, 희망도, 그 모든걸 가져갔는데, 그대는 왜, 꺾이질 않는가.


 몇번을, 몇번을 반복해도, 그대는... "


 


 " 당신은,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구나. "


 그녀는 중얼거렸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몸뚱이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온기를 그의 온기로 느끼며.

  

 그저 조용히, 어두운 동굴 속에서 끝없이 그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




 이제는 어렴풋이 흐려져버린 먼 옛날의 기억.


 그와 그녀는, 긴 전투 끝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마왕이라 불리던 자를 쓰러트렸다.


 그는 스스로의 사명감과 강인함을 무기로 악을 쓰러트려나가며 용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사랑으로 그와 함께 사람들을 도우며 성녀라고 불렸다.


 그 둘은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고, 자신들과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긴 여정 끝에 극악무도한 마왕을 처치한 것이었다.


 이야기의 끝은 분명히 해피엔딩이 될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


 하지만 마지막 발버둥으로, 마왕은 자신의 치욕과 분노, 그리고 증오를 담아 외쳤다.


 " ... 역겹다! 자신들이 진짜 선이라는 척하는 네놈들이 역겹기 짝이 없구나!


 한번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보지도 못한 주제에 믿음을 외치는 역겨운 위선자들이이이이!!!


 좋다, 그렇게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면, 몇번이고 '용사'가 되게 해주마.


 하지만 그 끝에는 항상 네년이 기다릴 것이다! 서로를 끝없이 증오하고, 증오하고, 증오하며!!!


 영원히 지옥을 맛보게 해주마아아아아!!!! "


 그 저주를 끝으로, 마왕은 죽었다.


 하지만 마왕의 사체에서 뿜어져나온 저주와 독으로, 그들도 이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리고 마왕의 목숨이 담긴 그 저주는, 마왕의 말처럼 영원히 그들을 옭아맸다.


 그는 수없이 생과 사를 반복하며 '용사'가 되었고, 그녀는 그때마다 그를 가로막는 악마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저주는 불완전했다.


 그의 기억은 죽음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사라지지만, 그녀의 기억만은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끊임없이 그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저주로 얽매인 운명은 계속해서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용사로 다시 태어나 자신을 찾아오면, 그를 잡아놓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기 시작했다. 


 몇번이고 그를 설득하고, 고문하고, 잡아놓아도.


 그는 그저 한없이 그녀를 증오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겪으며, 그녀는 그 이외의 사람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그녀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할 뿐이었다.


 그에게 절망감을 안겨 자신만을 보게 하기 위한 도구로.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죽지 않게 되었다.


 영원한 마왕으로, 괴물로 살아가며 그저 한없이 그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채,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녀는 그 끝없는 시간을 보내며, 저주를 건 마왕을 저주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으리라.


 자신이 죽지 않게 된 시점에서 그녀 자신의 저주는 풀려, 용사로 태어날 그는 그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를 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집착으로 변해버린 그녀의 광기어린 사랑이 그를 죽이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





 " ... 따뜻해. "


  소녀에게는, 몇번이나 느낀 그의 피의 온기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리고 그 온기가 차갑게 식어버리면, 그녀는 조용히, 그를 무덤에 놓고 눈을 감겼다.


 수십, 수백, 수천개의 시체들.


 모두 그의 것이었다.


 대부분은 백골이 되어 버렸지만, 일부는 형태가 남아있어 평온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눈을 뜬 상태로도, 자신을 저렇게 바라봐 줄 날이 올까. 그리고...


 " ... 당신이 다시 나에게 사랑을 속삭여주는 날이, 올 수 있을까. "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다시 무덤을 떠나갔다.


 무수한 세월이 지나 새로운 용사가 되어 찾아올 그를 언제나처럼 기다리며,


 길고도 긴 꿈을 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