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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어두컴컴한 장소네요. 내가 정말 이런 곳에서 연구를 했었다니..."


"본인이 지낸 곳이면서 그렇게 말하시니까 좀 웃긴데요."


"조용히 하세요!"


앙증맞다. 정수리에 꿀밤이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머리는 단단하니...


꽁!


"아악!"


"호호, 마녀의 꿀밤 맛이 어때요? 또 드시고 싶다면 언제든 주문해주시길."


마녀, 혹은 점원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 쥔 손에 하아― 입김을 부는 모습에 곧바로 무언가 마술을 부려 매운 꿀밤을 만들었음을 깨닫는다.

정수리에 박히는 순간 일순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을 정도니 그 매운 꿀밤 맛이 어느 정도인지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지만 아무런 항거도 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저항이 가느다란 시선으로 게슴츠레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니. 그마저도 마녀의 허니버터꿀밤에 탄압 당하고 마니, 결국 이 자리엔 아무 일도 없었음이라.


"그런 꿀밤을 한 번 더 맞으면 무조건 죽을 걸요."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그러니까 그 말은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까 지금 꿀밤 맞고 죽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내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치자, 그녀는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에이, 그런 뜻이 아니라..."


"어허! 접근 금지! 꿀밤의 사거리 내로 접근하지 마세요."


그녀가 손사래를 치면서 내게 다가오자 나는 팔을 뻗어 그녀를 제지한다. 정말로 저 꿀밤을 더 맞는다면 머리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존 본능이었고, 또 하나는 최근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거리낌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거리감이 줄어든 게 좋다. 너무 급격해서 문제지.


사실 이런 관계가 된 것은 마녀의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죄다 버려둔 채 징징대면서 도와 달라고 절실하게 호소를 한 이후였다.

그녀에게서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냈지만 많은 것을 잃은 내게 있어 당장에 복수는 요원한 일이었으니, 당장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정세에 대해 알아보고 주점 겸 여관 일을 돕기도 하면서 서로에 대한 것을 알아갔다. 겸사겸사 마녀의 세상 나들이를 위한 뒷바라지도 맡았지만 말이다.


마녀는 세상일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길 원했다. 세상 나들이란 말도 이래서 나온 것이었다. 개인적으론 용병 놈과 배신자 년을 바로 족치고 싶어서 그들이 향했을 왕도로 가자는 말도 꺼내봤지만,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있었는지 고개를 젓고는 나라의 끝자락부터 향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넌지시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평소 보이지 않던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지 않던가. 결국 무조건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미 주도권은 그녀에게 쥐어져 있고, 나는 그녀가 아니면 복수고 뭐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할 테니까.


그렇게 3달을 그녀와 함께 보내고, 주점과 여관은 그녀가 마을에서 두루 쌓아온 인맥을 통하여 안전하게 맡겨 놓았다.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녀와 함께 여관을 운영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가 되면 가게 이름도 바꾸면 어떨까. 지금은 생각해둔 게 없지만. 세상 나들이가 끝나고 내 목적도 달성한 채 다시 돌아온다면 누구던 좋으니까 가정을 꾸리고도 싶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다. 그저 막연한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마을 떠나자마자 찾아온 곳이 바로 그녀가 짧은 기간 머물렀다고 주장하는 던전의 내부였다. 2만금 짜리 아티팩트를 찾기 위해 그렇게 뒤지고 뒤지고 또 뒤졌던,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던전으로 말이다. 이미 7차 개척단까지 와서 내부의 온갖 장소를 샅샅이 파헤치고 아주 작살을 내버렸으니 그 무엇도 남지 않았을 게 뻔했다. 이런 장소에서 무언가를 찾겠다는 마녀의 말을 이해할 턱도 없고, 애초에 좋은 기억도 없으니 괜히 시간 낭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한 번은 그냥 떠나자는 말도 해봤지만 그녀는 자신이 연구하던 장소에서 무언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뭔가 하나라도 발견하기라도 했나? 당연히 아니다. 결국 불만은 쌓여가는데 마녀님은 여전히 고집불통이니 스트레스가 안 쌓일 수가 있나. 이러다 나도 모르게 마녀에게 심한 말을 내뱉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괜찮잖아요. 꿀밤 정도는. 아프지도 않고."


"본인이 직접 맞지 않으니 모르시네요. 그거 맞으면 진짜 머리 깨져 죽는다니까요."


그리고 계속 말했지만 그녀는 마녀다. 마녀는 대체로 대인 관계가 심히 원만하지 않다. 눈앞의 미녀는 나름 주점과 여관 일을 오랫동안 맡으면서 절망적인 대인 관계를 고쳐나간 듯 한데, 이를 감안해도 그녀가 내게 취하는 태도는 너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가 내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별 다른 말없이 참은 거지. 그런 사정조차 없었다면 복수고 뭐고 단번에 목을 그어버리지 않았을까? 골똘히 생각해보니 내 자존심과 인내심에는 이미 충분한 생체기가 새겨지지 않았을까 싶다.


"농담도 잘하셔. 한 번 실험해볼래요?"


"전 아직 더 오래 살고 싶은 나이입니다. 창창할 청춘에 꿀밤 맞고 사망하는 위업을 세상에 남기고 싶진 않네요."


"에이."


지금이야 이런 식으로 농담처럼 흘려보낼 수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내가 그녀의 예기치 못한 꿀밤에 맞아 죽던가 혹은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던가. 둘 중 하나의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은 명백하다. 그녀는 나의 유일한 도움이니 마음대로 행동하게 두고 싶지만, 도무지 견디다 못해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기에 그렇게 되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교육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닿았다.


"그런데 어디까지 들어가는 거에요?"


"거의 다 왔어요."


마녀는 생각보다 깊게 들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던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으레 하는 질문이다.

사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야 하지만 내 기준에선 거의 다 왔으니까 뭐. 하지만 언제 도착하느니 뭐니 하는 것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게 있었다.


"앞서 이야기해드렸다시피 여기엔 이상한 녀석이 있으니까 조심하시고요."


"이상한 녀석이요?"


"이상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그런 놈이에요."


"어떻게 생겼는데요?"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연달아 날아오는 질문에 나는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최대한 비슷하게 그 이형의 존재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감싸여 물리적인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던지, 빛에 약하다던지 혹은 착각일 수도 있는데 여자처럼 생겼다던지 말이다.


"뭔가, 기억날똥 말똥~?"


"가서 보면 되겠죠."


19지점은 내가 처음부터 주의를 기울였던 장소기도 했고, 내부가 예상 외로 깔끔해서 놀랐던 곳이기도 하여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물론 그곳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은 년 놈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탓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뒤에서 마녀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빽 빽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나는 우는 아이 입에 사탕 물리는 마음으로 거의 다 왔다며 끝까지 거짓말을 고수했다. 그렇게 도달한 19지점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여전히 음산했고, 불길한 느낌이 가득했다.


"와, 진짜 들어가기 싫은 느낌이네요."


"여기 아니면 단서가 없어요. 되돌아가는 것도 시간 낭비니까 일단 들어갑시다."


"뒤따라 들어갈게요."


그녀는 19지점에서 풍겨져 나오는 불길함에 몸을 떨더니 내 등 뒤로 바싹 몸을 붙이고는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어쩐지 작은 새끼 새가 어미 뒤를 일렬로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라 썩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거기다 조용하기도 하니까 아까처럼 정신 사나웠던 분위기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애초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을 생각하면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겠지.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요?"


"..."


19지점에 들어서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앞서 나가더니 그녀가 대뜸 내뱉는다. 기시감을 넘어 그 용병 자식의 얼굴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오르고, 전율에 가까운 감각에 손발이 벌벌 떨리고 있다. 19지점이 생각보다 깨끗하다는 사실은 동의하지만 왠지 그런 말은 앞으로도 절대 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쨍그랑―!


"엄마얏!"


아니나 다를까,  적막함을 찢어내는 기분 나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어째서 불안한 느낌은 틀리는 일이 없을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소음이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과 동시에 등 뒤로 물컹한 느낌과 함께 묘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저기, 마녀님?"


"뭐, 뭐가 깨진 거죠?! 빠, 빨리 확인해주세요!"


"아니, 확인이고 자시고 저기 앞에 바로 나타났어요."


소음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향했을 땐 이미 익숙한 형체의 무언가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뒤였다. 그녀는 불길함을 조성하는 끈적한 어둠을 감싼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뻗고 나서 아차 싶었다. 단검, 내 단검은 이미 잃어버렸었지 참. 오래전부터 쓰던 물건이 없으니 이 어색함이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마녀님, 큰일 났어요."


"네? 무슨 일인데요!? 게다가 저, 저건 뭐죠?"


"저건 대충 어둠 슬라임이라는 녀석입니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그냥 그렇다고 이해하세요."


용이 발로 밟아도 안 죽는다는 던전의 터줏대감 같은 녀석이다. 마법사만 있다면 별다른 문제 없이 처리할 수 있지만 마녀는 어떨지 모르겠네.

애초에 저 시꺼먼 놈은 그냥 겉치레다. 슬라임에 내성이 있는 놈들은 저 녀석을 방어구로 대신 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눈앞의 그녀가 딱 그 꼴인 것이다. 설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리 쉽게 일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뭐, 언제는 일이 쉽게 풀리긴 했었나? 아마 평생 내가 지고 가야 할 업보인가 보다. 빌어먹을.


"설명 고마워요. 그래서 큰일이란 건 뭔데요?"


"제가 저 녀석을 처리할 수가 없어요."


"네?! 대체 왜요?!"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이가 없어서 내지르는 호통 소리가 던전 전체에 울려 퍼지고, 내 귀를 미친 듯이 강타한다. 귀청 떨어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무기가 없어요...."


"어디다 팔아 드셨길래?!"


평소엔 상큼한 미소를 짓거나 매력적인 모습으로 칵테일을 섞기 바쁘던 그녀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니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대답은 그냥 허리 숙이고 사과하는 것 뿐이겠지만, 어쩐지 억울하다. 너무 억울하다. 무기를 잃어버린 건 내 탓이 아니란 말이야.


"아마... 저 버리고 떠난 년놈들이 저 기절했을 때 따로 처리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악! 바보바보바보! 그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 챙기면 어떻게 하잔 거예요?! "


"그러니까, 마녀님이 마법을 쓰면..."


"마법이 그냥 나와라! 하면 뿅! 하고 튀어나오는 건 줄 알아요?! "


그녀가 답답함을 이길 수 없었는지 가슴을 팡팡 치며 소리쳤다. 나는 억울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철저하게 갑과 을이 나뉘어진 지금 상황에서 내가 말대답을 해봤자 얻을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대인 관계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마녀이지 않은가. 내가 이해해주지 못하면, 그녀에게 진심을 내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믿는다. 이미 내 모든 걸 보여준 사람을 믿지 못하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 그어어...?"


"저거 봐요! 저 마물도 얼마나 황당했으면 저러고 있어요? 바보! 진짜 바보!"


"죄송합니다. 위대한 마녀님에게 부족한 종자라서 죄송합니다."


"그, 그런 식으로 사과하지 말라구요!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아, 진짜 몰라! 마녀의 위엄을 보여드릴 테니 눈 똑바로 뜨고 보고 계세요!"


휴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3달 동안 그녀와 함께 하면서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많이 보았지만 가끔 씩 이유를 알 수 없는 히스테리를 부릴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나를 그렇게 노려보고 바보라고 외치며 자신이 답답함을 어필하는데 당최 이유를 모르니 나도 답답할 때가 많다. 그래도 이번엔 꽤 얌전하게 넘어간 편이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빛은 나를 배신했다!"


바로 자세를 갖춘 그녀는 손을 앞으로 뻗더니 뭔 요상하기 짝이 없는 주문을 왼다. 설마 저런 게 진짜 주문인가? 싶어서 그녀 말대로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설마 하던 순간에 갑자기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도 꽤 살벌한 형태로 말이다. 빛이니 만큼 한 순간에 뻗어나가긴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단순한 광선이 아니었다. 봐라!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아아아악! 헤아! 헤아!"


어둠 슬라임은 이미 온전한 형태도 유지하지 못한 채 바닥에 흘러 소멸하고 있었고, 어둠 슬라임이 감싸고 있던 형체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울음소리를 내지른다. 그래, 내가 기억한 대로다. 어둠 슬라임의 내부에는 무언가 인간의 형태를 한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효과 확실하네요."


"마녀의 주문이니까요. 괴팍하기 짝이 없는 아줌마한테서 배운 주문이지만 꽤 쓸만하네요."


괴팍하기로는 눈앞의 그녀도 만만치 않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괴팍하다고 말하는 인물이 있다니 살이 떨리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어쩌면 눈앞의 마녀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이유도 그런 괴팍한 마녀 아래서 자란 탓이 아닐까? 물론 마녀가 어떻게 생기는 지도 모르니 하는 농담이다.


"마녀님, 저거 보이세요?"


"뭐가요? 저 슬라임 안에 있는 저거요?"


"네, 저거요. 꼭 사람 같아서."


"비슷하긴 하네요. 물론 인간일 리는 없지만요."


그녀는 확신에 찬 듯 대답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싶어 되묻자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끼는 게 아닌가. 그녀가 이런 식으로 새로운 모습을 내게 보여줄 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참 여러모로 매력덩어리란 걸 느끼게 된다.


"인간이면 이미 저 검은 슬라임의 먹이가 됐겠죠."


"어둠 슬라임을 다루는 인간일 수도 있잖아요?"


"그랬어도 이미 인간이 아니었을 거에요. 저런 걸 다루려면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니까요. 자세한 건 비밀! 더 묻지 마세요."


그녀는 자세한 내용은 대답해주지 않고 비밀로 붙였다. 그리고는 코 끝에 검지를 가져다 대더니 쉿! 하고 동작을 취하는 모습이 앙증맞다. 

애초에 그런 걸 파고드는 성격이 아닌 나는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흐뭇한 감정에 아빠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물이요."


"음, 고마워요. 안 그래도 목이 좀 탔는데."


대충 전투가 끝난 것 같아서 식수통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더니 감사의 한마디와 함께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다.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니 역시 19지점은 이곳 던전의 다른 구역들과는 확실히 분위기부터 남 다른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여기가 그녀의 연구소였지 않을까? 물론 개척단들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눈에 띄는 건 다 가져갔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납득이 안되는 건 저 불길한 무언가의 존재였다.


"어쩌면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면 어딘가 숨어 있었겠죠."


"그럴지도요."


나는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렸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럴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말이 납득 못할 건 없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 존재는 나름 지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위험한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도 마물에게 있어선 꽤 높은 지능을 소지하고 있음을 시사하니 말이다.


"슬라임의 활동이 멈춘 걸 보니 안전해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음, 일단 해체해서 재료로 쓰는 게 좋겠어요. 어디 한 번 볼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방수 처리된 장갑을 착용한 채, 천천히 그 존재를 향해 다가갔다. 아직 거뭇거뭇한 부분이 남아있지만 그건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슬라임의 조각일 테니 무시하고 크게 덩어리 져있는 잔해들만 대충 치웠다. 헌데 점점 잔해를 치울 수록 드러나는 광경에 차마 입이 다물어 지질 않으니, 이런 나의 모습을 거리 벌린 채 바라보고 있던 마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뭔가 이상한 거라도 발견 됐어요?"


"...어, 아니. 이걸 뭐라 해야 할지..."


나는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며 마른 신음을 흘렸다. 이거 뭐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다.


"흐으으..."


"아니, 대체 뭐길래 그래요? ...응?"


내 모습이 답답했던 듯, 뚜벅뚜벅 선명하게 발 딛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시야에 모든 광경이 담기는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헉."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를 보게 된다면 어느 누구라도 제정신을 두기란 당장 어려운 일이란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담에 계쏙






오래끈 사죄의 뜻에서 즐거움을 해치지 않는 선 내로 뒷풀이를 좀 하겠습니다.

일단 이야기는 저번 편에 이어서 3달 뒤로 이어집니다. 주인공은 무력해졌고 마녀에게 휘둘립니다. 갑을의 관계가 형성되었죠. 

사실상 고구마 시즌2가 되겠지만, 가능한 답답하지 않도록 분위기는 가볍게 조성하려고 했습니다. 개드립 분량이 좀 늘었죠.


그럼 복수는 언제? 후회는 언제? 이건 당장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기에 차근차근 진행됩니다. 

저도 하루 빨리 히로인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만 제 예상과 다르게 이야기가 길게 끌리면서 약속했던 모든 걸 어기고 말았네요.

이 점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연모의 반지는 꽤 긴 연재 기간을 가지게 될 것 입니다. 그렇지 않고선 제가 구상하는 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많은 분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아마 이렇게 길게 쓰진 않았을 겁니다. 억지로라도 후회 요소를 넣어 금방 끝냈겠죠.

전적으로 여러분들이 있기에 제가 이렇게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빠른 시간 내로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