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조별과제는 분명 결원 없이 4인 과제였을 텐데, 우리 조는 2인 과제를 치뤘다.

사람으로 칠 수 있는 것이 나와 지예 딱 둘 뿐이었다는 뜻이다.

핑계라도 대는 정성을 보였다면 니들이 그렇지 뭐. 하고 짧은 체념의 시간을 가진 후 쓸쓸히 인력거를 끌어나갔겠지만, 우리 조원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피해다녔다.

태생이 아싸였던 내가 쪽팔림을 감수하고 다른 동기들에게 번호를 수소문해 단톡방을 만들었음에도 채팅방의 읽음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 다 뒤엎어버리는 사이다패스식 전개를 꿈꿔보기도 했지만...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아싸처럼 지내질 않았겠지.

잠깐 화 좀 풀어보겠다고 좁은 인간 관계를 작살내는 것보다야 곱절이 된 일감을 떠맡는게 차악이었다.

그래도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어떤 동기에게 물어봐도 번호가 없어서 연락이 닿지 못했던 지예가 찾아와 말을 걸었다.

눈을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 커튼을 치고 있는 앞머리와 80년대에도 구식이었을 법한 촌스러운 롱스커트가 인상적이더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는데, 단 두 마디만에 동류의 냄새를 맡아버렸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수업에 빠졌는데, 조별 과제가 있는 걸 여태 모르고 있었다'

그 짧은 말을 뱉으면서도 쉴새없이 떨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동공. 마스크보다 사회적 거리두기란 컨셉에 효과적인 괴악한 패션.

그녀 역시 사교성이 없어 친구와 인생 모두를 갈아먹고 있는 MS 중 한 명이리라.

그런 와중에 먼저 다가와 조별과제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니 배신뿐이었던 대학 생활에 처음으로 성선설이란 것을 믿게 되었다.

아무튼간에 그렇게 시작된 두 명의 조별 과제는 여러 사건을 지나 기적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나는 인생 처음으로 여사친을 갖게 되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썸녀라 할 만한 관계라면 좋았을텐데. 스스로 꾸밀 줄도 모르는 지예랑 썸? 연애? 그건 아니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줘야하는 것 투성이라 조별 과제 내내 차라리 혼자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생각한 게 몇 번이었는지.




"자. 건배하자."

"응."

하지만 그런 고민도 이제 끝. 조별 과제가 끝나면 조장으로서 지예를 챙겨줄 필요도 없으니까.

멀리서 바라보며 연락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는 순간 내 인생은 희극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술자리도 어쩌면 그것을 축하하기 위함일지 몰랐다.

"고생 진짜 많았어. 둘 뿐이라서 할 일도 많았는데."

"으응. 힘들기는. 승우 네가 훨씬 많이 했잖아. 오히려 폐만 끼친 것 같아서 미안해."

"아냐. 네 덕분에 힘이 났던 것 같아. 혼자보단 둘이 훨씬 좋지. 그치?"

맘에도 없는 빈말을 읊으며 티끌 하나 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내 덕분에.. 혼자보단 둘.. 응. 그치."

지예도 환한 미소로 답했다. 음침한 외양이지만 웃는 모습이 귀여운 아이다.

소심녀 속성이 왜 이리 수요층이 많은 지 좀 이해할 수 있었달까요. 같이 기분 나쁜 품평도 해보고.



지예는 방긋방긋 웃는 낯으로 술을 들이켰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도 단답으로 잘라내는 통에 쥐어짜낸 대화 소재들이 떨어져갈 때쯤 나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제발 뭐라도 말 좀 해봐. 나만 20분째 떠들고 있는 것 같잖아. 벽 보고 테니스 치는 것도 아니고..

취기가 오른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술게임을 꺼내들었다.

"술게임?"

어느덧 머리핀으로 앞머리를 정리한 지예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지만, 흔들거리는 의자와 테이블에 균형을 잡기도 버거워하던 와중이었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응... 그러니까. 어차피 조별 과제 끝나서.. 끅. 거리낄 것도 없으니 솔직히 털어놓잔 이야기지."

"재밌겠다."

"그럼..."

어느덧 다 마셨던 술병을 바닥에 탈탈 털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지예는 씩 웃었다.

"병끝이 가리킨 쪽이 질문받은 거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하자. 못 하겠으면 한 잔 마시고."

"그래에."

빙그르르.

어느 새 내 쪽을 향한 병을 보며 나는 취한 사람답게 폭소를 터트렸다.

"내가 걸렸네."

"대답하기로 하면 솔직하게 대답하기야."

"숨길 것도 업숴용~"

내 주정을 보면서도 방긋방긋 웃던 지예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여자친구 있었어?"

"초장부터 그런 살벌한 소리를."

있어도 아니고 있었어는 뭐야.

"없을 것 같이 생겼어?"

솔직히 관상가가 아니라 동네 꼬마 선에서도 답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였다. 있겠냐고. 23년 인생 첫 여사친을 운운하는 수준에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있어?"

그런데 지예에겐 또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저리 되묻는 걸 보면.

어쩐지 앞머리 없이 마주하는 지예의 눈이 무섭단 생각을 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태솔로야."

"그치."

꺄르르 웃는 것이 아직 여고생 티를 못 벗은 것 같이도 보여 묘한 감동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예는 다시 술병을 돌리고 있었다. 이번엔 지예.

"너 친구 없지."

잔뜩 취한 나는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이었다. 불쾌하게 느낄 수 있는 질문이란 걸 내심 알면서도 그냥 들이받아버렸다.

"응."

"또 단답하네."

"싫어?"

"응."

대화는 캐치볼이라 했단 말야.

"너도 이러면 싫을 거잖아."

"그러네. 더 많이 말해주면 좋겠는데."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라고!"

"승우도 내 목소리 많이 듣고 싶어?"

"겁나 오해하기 좋게 말하시네요. 자, 다음."

다음은 내가 술병을 잡아돌렸다. 이번엔 나.

"아씨."

"뭘 물어볼까."

"편하게 해. 편하게."

"그러면.. 주말엔 뭐하면서 지내?"

집에서 애니 보면서 배 긁다가 딸치고 자요. 이미 취할 대로 취한 나는 솔직히 답해야한다는 것에만 신경이 몰렸고, 잠자코 한 잔을 들이켰다.

"가벼운 질문이었는데.."



그 뒤로 몇 번 시시콜콜한 질문을 주고받던 나는 고주망태가 되어있었고, 어느새 술병을 돌리는 과정조차 생략한 채 서로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고 있었다.

"다른 조원들 죽이고 싶단 생각 안 해봐써?"

"죽이고 싶단 생각?"

곰곰히 생각하던 지예는 어색하게 씩 웃더니 술잔을 들이켰다.

"내숭 떨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도 되는데."

"아무리 그래두. 그럼 내 차례네. 나랑 조별과제할 때 기분이 어땠어?"

"처음엔 좋았지."

"처음엔?"

다시 한 잔. 다음 질문을 고민하던 나는 씩 웃으며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나 좋아해?"

잔뜩 취한 상태에 흘리듯 물은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식겁하여 지예의 눈치를 살폈다.

"흠."

지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좆됐다.

농담~ 하고 넘겨버리기엔 너무 늦은 상황. 수습할 방법도 떠올리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던 나를 움직인 건 지예의 병나발이었다.

"갑, 갑자기 왜."

"마실 술이 다 없어져버렸네. 더 질문해도 돼?"

"어.. 어."

뭔가 기백에 눌린 느낌으로 멍청히 대답한 나를 보며 히힛 웃던 지예는 스마트폰 화면 속 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난주 금요일에 편의점에서 산 콘돔으로 뭐했어?"

아니. 시팔. 뭔데. 그냥 산 거야. 지갑에 넣어다니려고. 아무 대답 없이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지예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연락처에 동기들 번호 몇 개나 있어?"

"갑자기 이상한 걸 물어보고 그래. 무섭게."

"나한텐 중요한 건데."

탕.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친 지예는 박제된 듯한 눈으로 날 뚜렷히 바라보다가, 이내 생기를 되찾고선 씩 웃었다.

"요즘 연락도 잘 안 하더라. 무슨 일이야. 다른 여자 생겼어?"

"다른 여자라니."

기가 차네. 허허 웃던 나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너랑 나랑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대답이 없다. 다시 그 눈. 당장 테이블을 내려칠 듯 꽉 쥐어진 주먹.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점차 한기가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