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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눈을 떠보니 어느새 밤이 되어있었다.



분명 해가 떠 있던것 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두통이 심한걸 보면 아무래도 후순년이 디저트에 넣은 약 때문에 기절했었나보다.



격렬했다고는 하지만 밤새도록 해댔다고 쓰러질 체력은 아니니까 약이 아니면 설명이 안됐다.



옷은 어느새 병원용 환자복이 입혀 있었고, 팔에는 약물 중화제가 꽂혀있었다.



얼마나 디저트에 쎈걸 탔으면 이시간이 되도록 약물 중화제를 꽂고 있어야 했을까.



후붕이 의사를 존중해서 살려줬더만 이 년은 도리어 날 죽이려고 했나?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년이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후붕이 뺏어보겠다고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들어?



감정이 끓어오르자, 또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이제는 후순년이 먹인 약이 문제가 아니라 약물 중화제가 문제인듯 했다.



간호사를 호출해 약물 중화제를 빼달라고 요청했다.



간호사는 중화제를 빼내고 영양 수액으로 교체했다.



그나저나 후붕이는 어디로 간거지?



어디에 있길래 보이지도 않는걸까?



내가 병원에 있는 걸 보면 분명 같이 왔을텐데, 왜 보이질 않지?



약때문인지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왔다.



나야 워낙 강골이라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후붕이는 어쩌면 더 안좋은 상황일지도 몰랐다.



서둘러 주변을 돌아봤다.



후붕이는 내 옆 침대에 누워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누워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제가 생긴거면 어쩌나 싶어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후붕이에게 다가갔다.



"후붕아...?"



후붕이는 내 목소리를 듣자 서서히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내 쪽을 멍하니 바라보던 후붕이는 갑자기 눈이 커졌다.



"야, 얀순아! 정신이 들어?"



후붕이는 말까지 더듬으며 물어왔다.



자기도 후순년 약에 당해서 누워있었으면서 나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죽은듯이 누워 있길래 죽은 것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응,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



후붕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후붕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밝게 웃었다.



후붕이는 신발도 신지 않고 내 침대로 넘어와 안아주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걱정하지마, 이 정도로 안죽는거 너도 잘 알잖아."



후붕이는 나를 안은 채로 울었다.



정말 심하게 걱정하고 있었나보다.



자기 몸보다도 더 나를 아껴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정말 너를 잃는줄로만 알았어. 너는 모르겠지만 후순이가 치사량에 가까운 약물을 주입해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대."



아니 진짜로 사람 죽일라고 그랬다고?



이년이 진짜로 미쳤나?



아무리 눈에 뵈는게 없어져도 그렇지, 선은 지킬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그냥 넘어버렸단 말이야?



이쯤 되니 내가 손해본 기분이었다.



후붕이 뜻을 최대한 존중해서 위법적인 일은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이 년은 이미 마음이 떠난 후붕이 붙잡아 보겠다고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짓거리를 저질렀다.



이렇게 된 이상 사정 봐줄 필요가 없었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영원히 우리와 떨어트려둘 필요가 있었다.



후순건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 몇 가지와 이번에 이년이 저지른 짓을 같이 터트리면 사형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하게 나락으로 보내버릴 수는 있었다.



두고봐.



넌 내가 반드시 보내버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보내버릴거야.



"얀순아, 마주 안아주는건 고마운데, 풀어주면 안될까? 숨을 못쉬겠어."



"아, 아... 미안해. 후순년 생각을 했더니 힘이 들어갔네."



그제서야 후붕이의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후붕이는 아직까지도 약물 중화제를 맞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맞고 있는거야?"



"응, 의사선생님 말로는 복합적인 약물이 들어가서 중화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대."



이 년, 수면제로도 모자라서 미약까지 섞어놨나보다.



그래, 어쩐지 후붕이가 고삐 풀린 말처럼 격렬하게 한다 했어.



평소의 후붕이라면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하지 않았을텐데, 이 년이 미약을 타서 후붕이를 짐승으로 만들려 했구나.



그렇게 해서 후붕이를 자기 옆에 붙잡아 두려고 했구나.



자기가 했던건 생각을 못하고 후붕이를 어떻게든 자기 옆에 붙잡아 두려고 했구나.



생각하면 할 수록 괘씸하고 추악한 년이었다.



후붕이가 만들어준 모든 추억을 욕망에 팔아넘겼으면서 염치도 없이 자기 곁에 붙잡아두려고 하다니.



지금까지는 후붕이를 내 던져놓고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니 이제와서 사과하는 척, 후붕이를 생각하는 척 하면서,



후붕이를 위해 준비했다느니, 오로지 후붕이만을 위한거라느니 하는 말이 얼마나 위선적인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걸로도 모자라 후붕이가 철벽을 치니 강제로 붙잡아 두려고 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했다.



이걸 진짜 살려둬야할 의미가 있나 싶지만,



살려둬야 이 년이 더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내가 이 년이 후붕이에게 저지른 짓을 보면서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 되고자 다가오는 후붕이를 계속 밀어냈던 것이나, 



그 이후에도 친구 정도로 거리를 유지 하려 했던 것에 극심한 후회를 했던 것 처럼,



이 년은 과거에 저지른 일에 짓눌려 살아도 산게 아닌 그 느낌을 받아봐야 했다.



누구하나 의지할 데가 없는 감옥속에서 자기가 저지른 죄악에 짓눌려 숨쉬는 것 조차 잘못처럼 느껴질 죄책감에 시달려봐야 했다.



"얀순아."



후붕이의 목소리에 솟아오르던 증오가 다시 가라앉았다.



후순년을 향해 피어오르는 분노보다 눈 앞에 있는 후붕이의 부름이 더 중요했으니까.



"왜, 후붕아?"



"후순이한테 너무 신경쓰지마. 저지른 일이 있으니까 네가 말했던 것 처럼 제대로 처벌을 받겠지."



후붕이는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것이 신경이 쓰였나보다.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후붕이를 향해 빙긋이 웃어주었다.



후붕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슬퍼하지 않도록 웃어보였다.



하지만, 후붕이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 범죄자때문에 얀순이 인상이 나빠지면 안돼잖아."



후붕이는 주름이 잡혀있던 내 미간을 펴기라도 하듯 손가락을 가져와서 눈썹 사이의 공간을 꾹꾹 눌러주었다.



손 등에 바늘이 꽂혀있는데도 불구하고 꾹꾹 눌러서 펴주고 있었다.



저러다 다치지 않을까 싶어 미간을 누르고 있는 후붕이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괜찮아. 난 피부 탄력이 괜찮아서 인상 좀 썼다고 미간에 주름이 생기진 않더라고."



후붕이의 손등에 꽂힌 주사바늘과 튜브를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회복하는데만 집중해줘. 이러다가 혈관 찢어지면 후붕이 너만 고생해. 우리 곧 결혼할텐데, 손등에 반창고 붙이고 하기엔 그렇잖아?"



"아, 그것도 그렇겠네. 알겠어. 조심할게."



잠시 말이 멈췄다.



주사바늘이 꽂히지 않은 손을 맞잡은 채로 어두 컴컴한 병실 안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서로를 꼼꼼하게 살피며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빙긋이 웃어주기도 하면서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과 애정을 나누었다.



어떻게 보면 후순년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 밀어냈던 후붕이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후순년 덕분이었으니까.



그래도 후붕이에게 다시 한 번 사과를 해야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에 대한 사랑 표현을 해왔던 후붕이를 밀어냈던 것,



졸업할 때, 내게 해주었던 고백을 후붕이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서 거절했던 것,



졸업하고 나서 대학생활을 할 때도 종종 걸어오는 미련 섞인 전화도 친구로만 남자며 일어냈던 것,



후붕이에게 상처가 되었을 모든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했다.



"후붕아."



"왜?"



"지금까지 밀어내서 미안해."



후붕이는 대답 대신 나를 안아주었다.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얀순아. 난 지난 8년간 후순이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얀순이한테 받았는걸."



후붕이의 목소리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후붕이의 품 안에서 들을 수 있었던 심장소리도 느리고 안정적으로 뛰었다.



어딘가 불안해보였던 두 달 전의 후붕이와 달리 나를 감싸안아 줄 만큼 안정된 모습이었다.



"저, 후붕아."



"뭘 바라는진 알겠는데, 지금은 안돼. 나 속도 위반 결혼은 하기 싫거니와, 오늘은 일단 회복에만 전념했으면 좋겠어."



후붕이는 내 속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제재했다.



역시 후붕이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정말 천생연분이 아닐까?



"그럼, 같이 자줄수 있어?"



"그럼, 같이 자줄수 있지."



마침 주사바늘이 꽂혀있는 손도 후붕이는 오른손, 나는 왼손이었으니 한 침대에서 자더라도 큰 무리는 없었다.



간호사를 다시 호출해서 우리 침대를 합쳐달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반발할 법도 한데, 간호사는 군말 없이 합쳐주었다.



"...와 아무런 말도 안하네. 보통 이런건 제지하지 않아?"



"아, 그게..."



후붕이는 간호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대를 붙여준 이유를 알려주었다.



우린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여서 둘 다 병원에 왔을때는 사경을 헤맸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엠뷸런스에 실려올 때 처럼 손을 맞잡아주자 거짓말같이 불규칙적으로 뛰던 심박수가 안정 되고, 



보는 사람마저 불안해질 정도로 떨리던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여러 커플을 진찰해봤지만, 이정도로 서로를 믿는 커플은 없대. 이미 가족이나 다름 없다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되는것도 당연했다.



후붕이는 나와 여섯살 때 만났고, 중학교때 잠깐 갈라졌던 걸 제외하면 항상 붙어다녔다.



누구보다 깊은 유대를 쌓았고, 그만큼 서로에게 의지도 많이 했었다.



사실상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는게 맞았다.



"그러게. 내가 밀어내지만 않았더라면 계속 이런 상태로 지냈을 텐데. 후순년한테 후붕이 네가 크게 데일일도 없었을거고."



"결국엔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는거 아닐까?"



"그래도 후붕이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건 잘못된거야. 고등학교 졸업할 때 받아줬으면..."



후붕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후붕이가 맞았다.



내가 후붕이에게 상처를 줬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언제까지고 죄책감에 짓눌려서 결혼 생활 자체에 지장이 생기면 그것대로 큰 문제였다.



앉아 있던 우리는 주사바늘이 꽂히지 않은 손을 맞잡고 자리에 누웠다.



어느새 두통은 사라져 있었다.



후붕이가 보내주는 사랑 덕분인지, 영양 수액 덕분인지, 둘 다인지 모르겠으나,



사람을 힘들게 했던 죄악감이 옅어지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무겁게만 느껴지던 짐은 후붕이와 함께 들자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이젠 더 이상 퍼지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붕이는 그런 나를 보며 환히 웃었다.



아마도 내 표정이 밝아지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잘자, 후붕아. 내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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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이의 후일담 같은 느낌으로 적어봤는데 어째 분량이 가장 적네요. 그런데 적는데 걸린 시간은 어째 전편보다 더 오래 걸렸습니다. 


어째 끝부분으로 다가갈수록 늘어진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네요. 최대한 겹치는 부분은 만들지 않고 각 등장 인물별 시점 묘사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걸 읽으시는 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