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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작은 카페에서 첫사랑 후순이와 만났다.


쓰디쓰지만 시럽 한방울에 본연의 맛을 잃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후순이.


나에게 예쁜 눈웃음을 짓던 그녀에게 난 첫눈에 반했다.


우리 둘은 종종 카페에서 만났고, 그때마다 후순이를 따라 시럽을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시럽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게 미소짓는 후순이 때문인지, 커피가 너무나 달았다.


만남은 계속되어 인연이, 인연은 우리를 지인으로 만들었고, 거기서 만남이 또 계속되니 친구, 친한 친구,


"후붕아... 우리, 사귈래...?"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



첫여친인 후순이는 정말 나에겐 과분한 여자였다.


"오오, 우리 후붕이 멋지게 입고 왔네~"


항상 나를 칭찬해주고,


"음... 거기보다는 여기 어때? 이곳이 이렇고 저렇고... 해서 더 좋을 거야. 아, 이곳 간 다음에는 이 식당에서..."


데이트 명소를 잘알아 항상 센스없는 나를 대신해 데이트 장소를 골라줬고,


"너 또 그 여자랑 놀러가? ...응? 화 안내냐고? 내가 화를 왜내ㅋㅋㅋ, 너도 너만의 인간관계가 있는데 그럴수도 있는거지. 괜찮으니까 친구들끼리 잘놀아 ㅎㅎ"


내가 다른 여자와 친근하게 지내도 질투나 의심은 커녕 항상 날 믿어줬다.


항상 나를 배려해주고, 이해해줬다.


"후붕아... 우,우리 집에서 라면 먹지 않을래...?"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


낮에는 손을 잡고 데이트를, 밤에는 허리를 잡고 서로의 몸을 탐하며 사랑을 불태워갔다. 우리의 끈끈한 사랑은 몇년이 지나도록 애정이 식지도, 그 흔한 다툼도 거의 없었다.


어떻게 너와 있으면 이렇게 행복하기만 할까. 


후순이는 내 인생을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시럽같은 여자였다.


그렇게 연인관계가 된지도 4년이 넘은 어느날,

우리 둘의 관계가 바뀌는 사건이 생겼다.


"후,후붕아, 나 임신했나봐...!"


갑작스런 소식이었고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어차피 나와 후순이는 결혼도 생각했었고, 단지 그 순간이 빨리 찾아왔을뿐이다.


상견례 자리를 가졌을때는 후순이네 부모님이 격노하실까봐, 혼전임신이라는 상황 때문에 분위기가 안좋을까봐 걱정도 했지만,


후순이네 부모님은 나를 혼내거나 질책하기는 커녕 딸을 잘부탁한다며, 따뜻하게 대해줬고, 원만하게 끝났다. 


며칠뒤 후순이가 찾은 결혼식장에서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리며, 속도위반 결혼은 별탈없이 끝났다.


모든 일들이 물흐르듯 자연스레 흘러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제 후순이가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는 사실에, 나와 후순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후순이의 배가 점점 불러갔고, 우리의 사랑도 커져갔다.


애가 발길질을 할때쯤, 후희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매일밤 애한테 클래식음악을 들려주며 후순이에게 달콤한 키스를 나눌때만 해도, 


후순이가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119 대원들과 함께 병원으로 갈때까지만 해도,


수술실을 나온 의사선생님이 건강한 딸이 태어났다며 축해줬을때도,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자고 있는 작은 새 생명, 나와 후순이를 가족으로 이어주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내 딸 후희를 바라볼때만 해도.


난 내 아내 후순이를 누구보다 믿었고, 그녀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저기... 후순 산모 남편분 맞으시죠...? 네, 저기 그... 다름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의사선생님이,


"그... 뭐라 말하기가 힘드네요... 남편분, 아무래도 따님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친딸이 아닌것 같습니다."


그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

.


발칵 뒤집혀 졌다. 모든게.


"후붕아... 그렇니까... 내,내 말 좀 들어줘..!"


후순이는 울면서 매달리고,



"이 우라질 새끼들아!!!! 계집년 교육을 어떻게 시킨거야!? 친딸이 아니라니 엠병할, 저 창녀년이랑 짜고 친거지? 내 아들 호구새끼로 만드니까 기분 좋냐!!?"


평소 성질이 불같았던 아버지는 몽둥이를 휘두르며 후순이네 부모님한테 처들어갔고,



"이후순, 이게 무슨 일이야? 또 연애할때 여우짓 한거니? 대답해, 도대체 뭔짓을 한거야!!!"


후순이네 부모님도 상당히 당황하며 화내셨다.



알아보니 후순이는 예전부터 남자관계가 복잡했고, 나 몰래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고 있었다. 그것도 3년전부터.


검사결과가 말해주듯 당연히 후희는 내 애가 아니고, 


결혼도, 후순이가 속인 거다. 뻔히 내 애가 아닌거 알면서.



"후,후붕아! 내 말 좀 들어줘! 잠만, 잠만!! 이거, 전부... 어, 아 그래. 그, 그 새끼 때문이고, 사실 어... 그렇니까... 그 결혼도 말이지..."


허나 그녀가 날 배신했단 사실보다는, 끝까지 거짓말과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거짓말이 나쁜 이유가 뭘까? 진실을 가려서? 아니다.


진실을 만드는, 믿음을 부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했던 걸까?

데이트때 해주던 칭찬들은 전부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데이트 명소를 잘아는것도, 그 새끼랑 바람 펴서 잘알았던 거겠지?

내가 다른 여자랑 어울려도 뭐라하지 않았던게, 자신도 다른 남자랑 만나니까, 찔리니까 그랬던거야.

나와 관계를 맺을때 좋다고 한것도 거짓말일걸. 

결혼식날 사랑한다는 그 멩세도 더러운 거짓말이었겠지, 시발.


추억들에 의심이 싺 트고, 불신으로 자라 거짓말이 됐다.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내 애도 아닌 후희한테 공주님, 공주님 거릴때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을까.


내 진심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시럽같이 달콤했던 그녀와의 추억이 모두 깨지고, 쓰디쓴 배신감이 남으니 모든게 허무하고, 끝내고 싶어졌다.


여기가 미국이었다면 아버지가 말릴 틈도 없이 내 머리에 총을 갈겼겠지만, 여긴 한국이다. 마포대교 가는걸 아버지한테 들켰고,



"병으로 네 엄마 먼저 보내고, 너만 보고 살았다. 제발... 넌... 너만큼은 떠나지 말아다오.... 이 애비는 너도 없으면, 그땐 진짜 죽어... 제바알....."


한강에 영원히 잠수할려던 나를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뜯어말리셨다.


내가 5살이었을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도 친척도 하나 없이 나만 보며 20년을 넘게 사셨는데, 나까지 죽으면 그땐 진짜 미쳐버리시겠지.



결국 죽는건 포기했고, 변호사로 일하시는 아버지 지인을 만났다. 


그분의 도움으로 깔끔하고 신속하게 이혼하고, 후순이에게 접근금지 처분도 내렸다.


오랜만에 후순이와 처음 만났던 카페에 들러, 그때처럼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쓰다.


시럽을 넣었지만, 커피는 너무나 썼다.


.

.


"옳지, 옳지, 울지마렴... 아가...."


후순이는 밤새도록 우는 후희를 토닥이며 달랬다.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시럽을 잔뜩 넣어 몇잔이고 마셨는데,



쓰다. 너무 쓰다. 


졸리다. 너무 졸리다.


그 이가 옆에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겠지....


사랑하는 후붕이를 몇달전, 아니 몇년전에 배신해 버렸다.


그저.... 잠깐의 일탈을 위해... 잠깐, 아주 잠깐만 옛날처럼 놀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잠깐이 계속되니 바람이, 불륜이 되버렸다.


겨우 잠깐의 일탈과 쾌락에, 모든걸 잃었다.


부모님은 날 쫓아내셨고, 애 아빠는 수소문 해보니 도박하다 감옥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후붕이는. 뭘하는지, 어딨는지도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해도 접근금지 처분 때문에 다가갈수 없다.


그리고 과연 다가가도, 진심이 닿을까. 


모든 추억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그동안의 애정을 배신감으로 바꿔버렸는데, 사랑을 산산조각 냈는데, 과연 내 마음이 닿을까.


"으으으.... 응애애...."


"후희야, 엄마 어떡해...."


그날 밤 후희가 잠들고, 후순이는 소리없이 울었다.


.

.


그 일이 있고 몇년후, 소개팅자리를 가졌다.


이유는 내가 후순이를 빨리 잊고 새 여자를 만나 행복하길 원하는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깊게 만날 생각은 없다. 그저 아버지를 위해 만남만 가질뿐.


후순이 일로 생긴 여자한테 믿음이 깨지고 그 자리에 불신감이 생겼으니까.


여자를 만나도, 


돈을 보고 만나는건 아닐까.

후순이처럼 바람피는건 아닐까.

저 미소도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들로만 가득해진다.



그렇게 후순이의 거짓말들이 떠올라 구역질이 날때,



"돈 많아요?"


"...?... 저기,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돈 많냐고 물었습니다만."


시럽 한방울 안넣은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후진이가 말했다.



김후진. 

그녀를 좋게 말하자면 솔직하게 얘기하는 여자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너무 직설적인 미친년이었다.


남들 일할때 일하고 놀때도 일하는 워커홀릭이었던 그녀는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에 어쩔수없이 소개팅을 보기로 했고, 몇없는 소개팅 대상들중 그나마 내가 적당해보여 골랐다고 한다.



"전 솔직히, 막 거짓말하고 괜히 아부하고 그런걸 별로 안좋아해서... 그냥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걸 좋아하거든요. 딱히 나쁜 뜻은 없었어요, 궁금해서 물어본거에요."


이건 직설적인게 아니라 무례한거 아닌가. 근데...


....

"풉... 푸흡..."


"?"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후순이의 시럽을 뿌린 듯한 역겨운 거짓말이 아닌, 살짝 이상하지만 솔직한 대답. 


초면에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쁜게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먹은 커피는 쌉싸름하면서도, 은은하게 달았다.


.

.


후진양은 정말 솔직한 사람이었다.


"후붕씨, 옷이 너무 구려요. 저희 할아버지도 이렇게는 안입어요."


빈말로도 칭찬은 안했고, 항상 솔직하게 대답했다.


"손 잡지마세요, 땀 나서 기분 나빠요. 그리고 해물은 별로 안땡기는데, 파스타집은 안되나요?"


좋고 싫은 것을 확실하게 말했고,


"남친 사귄적있냐구요? 그야 당연히 있죠. 후붕씨가 2번째에요."


진짜 뭐든지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이상한게,


"큽... 풉... 하하하하!"


"...?"


싫지 않았다. 솔직하게 이상하다고, 별로라고, 싫다고 해도 오히려... 안심이 됐다. 오랜만에 얼굴의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의 말은 좋든 나쁘든 거짓이 아니니까. 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솔직하다는건,


"그거 제가 추천해준 옷이네요? ...좀 감동했어요."


"손 잡아도 되나요? 그 부끄럽지만... 후붕씨 손을 만지고 싶어요."


"아뇨, 전남친은... 그 새끼 사귄지 2달도 안되서 바람폈어요. 제대로 된 남친은 후붕씨가 처음이에요. 이렇게 두근거리는것도, 키스도... 처음이네요."


사랑도 솔직하다는 거겠지.



거짓으로 가득찬 후순이와는 달리, 모든게 진실인 후진이가 사랑스러웠다.


물론 그녀와의 연애는 후순이때처럼 순탄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가끔은 부딫히고, 싸우고, 멀어졌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있기에 이해하고, 공감하고, 가까워져 갔다.


후순이와의 연애는 항상 행복했지만, 그녀의 배신 때문에 순수하고 풋풋했던 순간들마저 의심스럽고 믿을수 없지만,


후진이와의 연애는 괴롭고 씁쓸할때도 있지만, 믿을수 있었다. 행복한 순간도 괴로운 순간도, 난 그것들이 거짓이 아니며 믿을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마음에 와닿았다.


"저기 후진아."


"응?"


"우리 결혼할래?"


.

.


"후....후붕이다, 후붕아... 후붕아!!!"


후진이와 깊은 사이가 되었을때쯤, 후순이가 찾아왔다.


나를 보자마자 접근금지도 잊은채 내 다리에 매달리며, 용서해달라 울부짖는다.



그 일 이후 집안이 발칵 뒤집혀졌고 부모님은 후순이를 내쫓으셨다고 한다. 불행중 다행히 종종 부모님한테서 양육비도 오고 연락도 했지만, 집에는 얼씬도 못한다고 하며,


애아빠는 수소문해서 찾아보니 도박하다 감옥갔댄다.


지금은 있지도 않은 아빠를 찾는 후희를 달래며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알바로 근근히 살있으며, 친구를 통해 내가 여기 사는걸 알게 됐다고 얘기했다.



"후붕아... 미안해.. 흐끄윽.... 난 진짜 개년이었어.... 죽일년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 너한테 이렇면 안되는데, 매달리면, 이렇게 만나는것도 안되는... 으윽, 안되는거 아는데.... 그래도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제에발.... 흐윽, 난 너 뿐이야...."



내 두손을 꼭 쥔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한다.


그 사과를 들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샘솟았다.


분노? 짜증? 역겨움? 용서? 사랑? 배척? 아니.



"그 말 사실 맞아?"



의심.


"어...? 어...?"


"사실이냐고. 또 거짓말하는거 아냐?"


"아... 아으.... 후,후붕아... 왜 그래... ㅈ,진짜, 흐윽, 진, 짜야...."


"후희가 내 애였다고 말했던건 가짜 아니었나?"


"아....저,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너가 날 진짜 사랑하기 했었나? 솔직히 말해봐. 네 입장에서는 그냥 호구새끼 하나 잡은거 아니었어? 아니면 스릴을 느낄려ㄱ..."


"아니야!!!!"


후순이가 바닥에 무릎 꿇은채 울부짖었다.


머리를 바닥에 연신 박아대며, 어떻게든 자신의 진심을, 사실을 내 마음에 와닿길 빌었지만, 내가 동정해주길 바랬지만,


그녀의 마음은 닿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의심만이 피어날뿐.


경찰할때 끌려가는 순간까지 후순이는 자신의 진심을 소리쳤지만, 


난 그녀의 진심이 와닿지 않았다.


.

.


"후붕아, 나 아메리카노."


"후진아, 의사 선생님이 임신중에 카페인 섭취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치만, 너무 마시고 싶은걸. 딱한잔만, 의사 선생님도 한잔쯤은 괜찮으시다고 했잖아... 제발..."


"하아, 그래. 여기 아메리카노 2잔이요."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하지만 시럽은 필요하지 않다.


이제 나한테는 시럽보다 달콤한, 진실된 그녀가 있으니까.


오늘따라 커피가 달콤하다.


.

.


"엄마, 엄마."


"...응, 후희야. 왜 그렇니?"


"엄마, 왜 후희는 아빠 업써여? 얀진이도 얀붕이도, 엄마도 있눈데, 왜 저만 업써여?"


"그건...."


후순이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후희가 울먹이며 말했다.


"후희가... 나쁜 애라서 그래여...? 후희가 시금치 안먹어서 그런거에여...?"


"...아니야, 후희야. 넌 착한 아이야. 네 아빠는... 잠시 여행갔어..."


"여행이여?"


"응... 엄마가 너무 바보라서... 못된 애라서.... 멀리 여행간거야... 저 멀리...."


후순이는 조용히, 시럽을 잔뜩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분명 시럽을 잔뜩 넣었는데, 너무나 쓰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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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엉성한 글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