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패 잡은 지도 1년 반이 되어 간다.


처음에 뮤지쿠스 싹 다 번역한 거 들고 간 걸로 시작해서, 아페이리아, 백일몽, 하츠유키, 발드 스카이, 월희 리메이크 순으로 했다.


별로 많이 하지도 않긴 했는데, 사실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고, 그냥 몇 개 한두 개 깨작거리다 말 줄 알았는데 시간만 빠르게 간다. 돈이나 벌고 싶은데..


이 똥글에선 그냥저냥 내가 번역 잡는 조건이나 한패한 작품 개대충 소개만 할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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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잡는 조건


1. 모든 구간이 고점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개재미없진 않을 것


나는 소위 빌드업이란 거에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굉장히 부정적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못 쓴 부분을 빌드업이란 단어로 포장한단 생각밖에 안 든다.


이게 거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2. 내가 하고서 재밌는 거

당연한 전제 조건. 나는 랭킹 세우기, 평점 주기 같은 걸로 작품 간 우열을 일방적으로 가리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게 평가란 건데 그걸 고정해서 뭐 해?


비교란 작품을 즐기는 것의 기본이지만, 그건 여태까지 쌓은 개인의 모든 누적과 비교하는 거지, 작품 간 1:1 비교를 일방적으로 수치화해서 정하는 게 아니라 본다. 평가를 어떻게 할지야 물론 개인의 자유긴 한데, 모쪼록 평점에 지나치게 휘둘려서 작품에 이상한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품지 않길 바란다. 평가를 내리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 몫임. 그래서 나도 내 판단으로 작품이 재밌는지 아닌지를 가린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번역을 잡는 재미의 마지노선도 있다. 내 기준으로는 일단 백일몽의 청사진이 딱 마지노선에 듬.


3. 한국어화하는 맛이 나는 거

이건 아페이리아나 발드 스카이가 해당된다. 번역기로만 플레이하면 센징밴 등의 번역이 안 되는 구간이 있어서 완벽하게 즐기기 힘든 작품.


4. 문장력에 심각하게 하자가 있으면 거름

노라토토, 사쿠모유가 해당된다. 사쿠모유야 이미 한패 있지만 예시로 듬.


둘을 예시로 들었는데, 이 둘은 거르는 방향성이 다르다.


일단 노라토토는 어.. 뭐가 엉망인지 정확히 꼽기도 힘들 만큼 문장이 엉망이임. 싸이월드 명대사집을 게임으로 만든 것 같았다.


사쿠모유는 문장 구성을 갖추곤 있지만, 그 특유의 답답하게 질질 끄는 문장이랑 무한뇌절 치는 것 때문에 보는 나는 극한의 짜증을 느꼈다. 


5. 용기사 거름


6. 사쿠라이 히카루 거름


7. 자극적이기만 한 작품 거름

소위 '매운맛'이란 게 작품 내에서 별 의미도 없이, 특히 작품 외부의 사정 등으로 나오는 걸 되게 안 좋아함. 그래서 고어물, 잔혹동화 등 매운맛이 그냥 장르화된 건 바로 컷함. 당연히 그냥 캐릭터 괴롭히고 싶어서 괴롭힌단 게 티 나는 것도 마찬가지.


8. 의리

가끔씩 지킬 의리가 있으면 조건에 안 맞아도 잡는 것도 있음. 하츠유키 사쿠라가 그랬다.


9. 주제의식이 강할 것

7번이랑도 이어진다. 별다른 목적성 없는 작품은 썩 선호하지 않음. 그러고도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대로 평가하긴 하는데, 그러고 재미까지 없으면 끔찍하다.


이걸 뒤집어서 재미없고 주제의식만 있는 작품도 선호하지 않음. 내 지론이 뜻 깊은 소리는 개나 소나 써재낄 수 있으므로 그 소릴 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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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작 간략 설명

뮤지쿠스


밴드물. 단독 번역. 번역 33일컷. 하지만 으레 밴드 하면 나오는 청춘 같은 건 루트 하나에만 있고, 나머지는 숨 턱 막히게 하는 세토구치식 묘사가 일품.


판타지적 요소에 일체 의존하지 않고, 주인공 케이를 통한 이래저래 삐딱한 사고관과 여러 캐릭터들이 논하는 개똥철학이 강압적이지 않으면서 생각 많이 하게 만듬.


개인적으론 매우 뜻 깊게 한 작품. 그래서 혼자 모든 내용 번역하고서 한패해 달라고 가져왔음. 뮤지쿠스가 없었으면 애초에 게임 한패라는 걸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빛의 바다의 아페이리아


짝퉁 소아온. 단독 번역. 번역 38일컷. 주인공 아가리 터는 거랑 싱커의 존재가 하드캐리하는 겜. 얘네 둘이 짱구 굴리는 거 보는 재미가 좋은 편이다. 이래저래 SF 같은? 얘기도 많이 나오는 편. 나는 특히 마지막 부분 세계 해설이 되게 명쾌하고 인상적이었다. 결말은 좀 허무하지만 말이다.


종종 정신 나갈 것 같은 양자역학 설명충을 하는데 그것도 이해하면서 하면 재밌..나? 한패하면서 센징밴 조정에 특히 시간 들였는데 정작 그것도 알아보기 힘들다고 대충 넘기는 거 보면 좀 아쉽긴 함. 내가 봐도 설명 되게 지저분하게 한다 싶었지만.


백일몽의 청사진


S?F?물? 맞나? 아무튼 내가 맡은 건 케이스 0, 막간 부분. 번역 10일컷. 케이스 1, 2, 3으로 구성된 세 단편을 거쳐 케이스 0으로 완결되는 작품인데 정작 그 케이스 0의 평가가 애매하다. 반대로 다른 케이스 평가는 좋다. 뭐 나도 이거저거 쓸 말은 있지만 여기서 하면 스포가 되니까 삼가기로 함.


백일몽은 일단 흡입력이 좋은 작품이다. 글이 술술 읽히며 재미가 있는 편. 케이스1은 인생 현탐 온 중년 교사와 여학생, 케이스2는 운명에 짓눌리는 중세 극작가와 여배우, 케이스3은 어리숙한 소년이랑 삶에 목적이 없던 여자의 이야기. 케이스0은 카이토와 요나기의 이야기.


하츠유키 사쿠라


와! 니이지마 아시는구나! 내가 맡은 건 사쿠라 배드, 그래듀에이션, 맵 선택 자투리 부분(카네자키, 혼밥 같은 거). 번역 일주일컷. 난 니이지마한테 정말 별 관심이 없고, 하츠유키 사쿠라 자체도 무난한 작품 정도로 인식하지만, 지킬 의리가 있어서 작업했다.


작품의 전반적 테마는 복수와 졸업. 여기에 유령까지 소재로 꼬여서 호러풍 분위기가 짙지만, 정작 사가가 호러를 만들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하나도 안 무서운 작품이 됐다. 오히려 니이지마 특유의 유치함에 사가의 미묘한 연출이 맞물려서 황당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솔직히 하츠유키 가지고 욕 신나게 번역했다.


발드 스카이


후기 : https://arca.live/b/yuzusoft/32008166


SF물. 단독 번역. 번역 90일컷. 내용이 심플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질리는 부분 없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겜. 액션 게임이기도 해서 롸벗 액션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시스템적으로 좀 불친절한 부분이 다수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재미있다.


그거랑 별개로 한패하면서 정신 나갈 것 같았다. 한패 난이도로 치면 최강급.


월희 -A piece of blue glass moon-


후기 : https://arca.live/b/yuzusoft/35639040


전기물. 단독 번역. 번역 26일컷. 10년 넘게 기다려서 마참내 나온 월희 리메이크. 근데 분할임. ?????


웬만한 건 후기글에 다 써 놔서 쓸 게 없다. 페그오 2부 6장에서 나스 폼 전혀 안 죽고 더 성장했단 걸 실감했는데, 아마 월희는 2부 6장보다 예전에 썼을 것. 그래도 나스가 구작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성장했단 걸 똑같이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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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위에서 썼듯이 평점이나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본인 판단대로 결론을 내리길 바람. 그러니까 내가 써 놓은 작품 간략 설명에 휘둘리지 말란 뜻이다. 똥글이 괜히 똥글이겠나? 적당히 걸러도 되니까 똥글이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솔직히 한패를 더 할지 말지 고민 중인 상황이다. 직장도 못 얻고 있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냔 의문이 끊임없이 든다.


그래서 한패할 작품이 없는 건 아니어도 이제 선뜻 손을 대기도 망설여지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