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후붕아... 얼마 전에 네 여친이 다른 남자랑..."


친구녀석이었다.

걱정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왔다.

눈물이 흘렀다.

알고는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야, 분명 그녀는 변했으니까.

하지만 그녀 스스로 말해주길 바랬다.

그랬다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


나는 항상 가면을 써 왔다.

누구나 가면을 쓴다고 하지만, 나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던 것 같다.

전교 1등의 모범생이어야 했으니까.

친구들을 잘 챙기는 반장이었어야 했으니까.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릴때부터 그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왔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라고 깨닫게 된 날, 나는 무작정 뛰다가 이 공터를 발견했다.

아무도 없을거라고 확신 하게 된 나는 맘껏 욕을 퍼부었다. 그날은 유난히 힘들어서, 그렇지 않고는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뒤로 그 공터에 가서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건 내 방과후의 일과가 되었다.

학교와 가까웠지만 생각보다는 거리가 있었고, 학교 근처의 상가거리는 언제나 한사람의 소리침보다는 시끌시끌 했기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녀를 만난 건, 그러기 시작한지 1년쯤 되는 날이었던 듯 했다.

그날도 스트레스를 풀러 공터로 달려갔을 때, 나는 학교에서 가장 예쁘고 다정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녀가, 마구 세상을 저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조용히 모르는 척 하고 돌아갔어야 될 일이었지만,

순간 당황해 다리를 떼지 못했다.


그녀가 인기척에 놀라 말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봤다.


"ㅎ...혹시 다 보신걸...까요?"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나를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푸훗.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음은 오랜만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왜 웃는건데!! 야 너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죽는다?"


급격한 태세전환.

그녀도 결국 계속 가면을 쓰고 있던 걸까.


"알았어. 뭐 결국 나도 똑같은 짓을 하려고 왔던거니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놀란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보니 너, 전교 1등이었던 후붕이...였었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서로 발설하기 없기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만족했다는 듯 공터를 떠났다.

나도 그날은 왜인지 굳이 공터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고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


학교에서는 별 일이 없었다.

나도 내 자리를 유지했고, 후순이도 항상 그렇듯 상냥한 캐릭터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는, 가끔씩 후순이와 공터에서 만나게 되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가면을 쓸 필요 없는 시간을 보내왔다.

그랬던 우리가 서로에게 끌리는 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너의 가짜 웃음보다 오히려 투박하다고 할 수 있는 너의 진짜 웃음이 예뻐보였고,

다정한 너의 말보다 나에게만 털어놓는 푸념들이 더 듣기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하게 되었다.

서로에게만은 가면을 쓰지 말자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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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학교에는 우리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우리는 굳이 그것까지 숨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서도 서로를 자주 볼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우린 서로에게 사랑을 쏟았다.

마냥 좋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일까. 너는 바뀌어 갔다.

나를 보는 너의 표정에 조금씩 가면이 섞여갔다.

그게 무엇의 표식인지, 알아채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믿었다.

정말 그런 일이라면, 나에게 말해줄거라고.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결국 그 일을, 난 나의 친구의 입으로 들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



처음 후붕이를 마주봤을때는, 오만 생각이 휘몰아쳤다.

이렇게 내 가면이 벗겨지는 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이미지가 이렇게 어이없게 무너지는 걸까.

그래서 처음보는 그의 '진짜'웃음을 봤을때는 많이 당황했다.


그는 공부잘하기로 유명한 뭐랄까, 전형적인 모범생? 이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웃으며 대답해주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정확히 지적하는, 그런.

하지만 그 웃음과는 달랐다.

정말 상황이 어이가 없어 웃는 그의 웃음은, 좋은 말로도 품위 있다고는 할수 없는, 그런 투박한 웃음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그 웃음이 가슴에 와닿았다.


나도 내 이미지를 지켜야했다.

그도 그의 이미지를 지켜야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학교에서는 가면을 썼다.

그렇지만 우리 둘만의 공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서로 다 아니까.

그래서 서로에게만은 절대로, 가면을 쓰지 말자. 그런 약속이었다.

서로에게만은 편했다.

우리는 서로의 안식처였다.

그 뒤로는 공터에서 소리를 질러댈 필요는 없었다.

사실 그러는 것버다 서로에게 털어놓는 것이 더 좋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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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날이 문제였다.

그날도 공터로 걸어갔다.

그 즈음 서로 공식적으로 사귀게 된 남친, 후붕이는 그날 학생회 일로 조금 늦었다.


오랜만에 그 공터에서 욕을 내뱉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심심했을지도.

그 일이 화근이었다.


그날 나를 목격한건 금태양 선배.

후붕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

선배는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는 나를 협박했다.

나는 무서웠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을텐데.

이미지따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것일텐데.

아마 그때의 나는 무서웠던 것 같다.

내 모든 노력이 날아가는 것 같아서.

다들 나에게 가식적이라 손가락질 할까봐.


지금 생각하면, 남의 손가락질 따위, 아프지도 않은 것이었다.

후붕이만 내 곁에 있었다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데.

그렇지만 그걸 깨달은 것이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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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솔직히 빠져들었을 지도 모른다.

협박당하고 있다는건, 바람의 좋은 핑계였다.

하룻밤의 쾌락은, 후붕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 가면을 벗겨주었다.


그렇게 되자, 후붕이와 만날 때는, 항상 거짓말이 따라왔다.

조금씩 조금씩 거짓말이 쌓이며, 나는 후붕이와 이야기 할때 표정을 억지로 짓기 시작했다.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분명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후붕이가 나를 보면서 힘든 표정을 짓기 시작했던 때가.

그러나 그때의 나는 몰랐다.

바보같은 나는, 쾌락에 미쳐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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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후붕이에게서 날아온 것은 이별선언.


《후순이에게》

후순아.

후붕이야.

뭐라고 시작해야할까...잘 모르겠네

사실 내가 뭘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하하

이야기를 들었어.

니가 윗학년 선배와 모텔을 갔다는.

사실 알고는 있었어.

나에게 숨기는게 있다는 것 쯤은.

그래도 믿었어.

너라면 알거라고.

서로에게 진실을 듣지 못하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래서 기다렸어.

그렇지만, 내가 들은건... 너에게 부터가 아니네.

응...하하...그냥 아무생각이 안나.

뭐, 헤어지자...라는걸까

그냥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지내자.

나도 얼굴 붉히기는 싫으니까.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뭐하고 있던거지.

후붕이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는데.

대체 무슨짓을 한거지.

엄청나게 구토했다.

역겨웠거든. 내가.

사과해야한다.

그냥 그런 생각뿐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거의 가능성이 없단것은 알았다.

그래도, 사과해야한다.

이게 후붕이를 위한 것인지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수작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


다음날, 학교에서, 나는 후붕이를 찾아갔다.

주변에서는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후붕이 성격에 소문을 낸 건 아닐거고, 나를 봤다는 그 친구가 퍼뜨린걸까.


후붕이는 나를 보면 어떻게 할까.

엄청나게 화낼까.

소리지르며 꺼지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무시당하는 걸까.

무릎 끓고 빌면 될까.

애초에 나는, 뭘 바라는 거지.

그가 아직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는건가.

그런 난잡한 생각이 휘몰아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후붕이를 불렀다.


"ㅎ...후붕아.."


그가 나를 돌아봤다.

눈을 질끔 감았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무서웠다.


"음? 후순아 안녕? 무슨 일 있어?"


웃었다. 그는.

가볍게 휘어 상대방이 말을 이어갈 수 있게하는 눈썹.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환한 웃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젠틀한 말투.


아아...아아...이건...하하...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잘된거 아니냐?"라고.

"웃어준거면 아직 좋아하고 있는거 아니냐?"라고.


하하...


적어도 우리 사이에선. 아니다.

가장 끔찍한 증표였다.

화를 내줬다면, 빌었을 것이다.

소리쳤다면,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했을 것이다.

무시했다면, 바지에 달라붙어서라도 빌었을 것이다.




그가 택한 것은, 가면이었다.


그가 나에게 지금 보여주고 있는것은, '누구에게나 다정한 모범생 후붕이'었다.


가슴에 바늘이 꽂힌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도, 내 거짓을 보고 이런기분이었을까.


눈물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울었다.


"왜 그래? 갑자기? 괜찮아?"


누가 들어도 다정한 말투.


하지만 그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그의 모습.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나에게 그렇게 선고하는 듯 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이제 그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더 이상 그의 본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을거라고.


"제발..제발...나... 잘할테니까...싫어...진짜가 좋아.."


빌었다. 빌기 시작했다.


그는 잘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그...음...잘 모르겠지만... 선생님 불러줄까?"


싫어


용서해주세요


안돼


유일하게,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사람이었는데


유일하게, 나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쾌락 따위에, 비교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는데


이제는, 나는 그의 본모습을 볼 수조차 없어


그저 모두에게와 똑같은, 상냥한 모범생인 그


내가 그에게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이런거...싫어요


제발...


한번만요...


나...잘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