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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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그 지저분한 수염 좀 깎으라고 내가 말 안 했던가? "



가뜩이나 사람이 많은 주점이다.

느닷없는 말 한마디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와중.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날 보면서 대답했다.



" 아, 또 왜 그래. "


" 아까 마을로 들어오면서 들은 건데, 사람들이 네가 아니라 쟤를 용사인 줄 알더라. 오죽하면 그러겠냐고! "



내 손가락 끝에 앉아있던 훤칠한 미남이 눈을 마주치자 멋쩍게 웃었다.


게임에서는 루트를 잘못 타면 플레이어에게 NTR 이벤트를 선사하던 유명한 친구였으나 지금은 그냥 동료인 우리 파티의 창사.


뒤풀이한다길래 억지로 불려온 놈한테 다짜고짜 삿대질이라,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겠는가.

자기 관리에 돈을 아끼지 않는 미남에다, 키도 크고 얼굴도 봐줄 만하다. 아무리 봐도 이놈이 더 용사 같았다.


그런 창사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럴 수도 있지, 왜 화를 내. "


" 근데 지나가던 애들이 너보곤 그냥 아저씨래. 그것도 수염이 안 어울리는. "


" 내 수염이 뭐가 어때서. 걔들이 이상한 거야. 멋있잖아."


" 아니, 멋있어 보이는 건 다 네 얼굴 때문이지 수염 때문이 아니라니까? "


" 모르는 소리. "


" 야, 내가 너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알지.   "



그렇지만 우리 진짜 용사님께선 극도로 실용성을 추구한 탓에, 창사랑 달리 멋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복장을 입고 있다.

하도 오래 봐서 그런가 그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지만, 남들한테 이놈이 얕보이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래, 지금 말대꾸하고 있는 이놈이 용사다.

내가 빙의한 게임의 주인공이며, 원래라면 지금쯤 수많은 여자를 홀리고 다녔어야 할 카사노바 말이다.


지금은 용사의 증거인 성검까지 다른 장검의 검집으로 가려서, 겉모습으론 용사처럼 안 보이지만.



" 부탁인데, 제발 밀어주면 안 되냐. 네 얼굴을 숨기는 건 국가적 손해라니까? "


" ...그렇게 말해도 안 돼. "



그런 놈이 지금은 수염으로 제 빛나는 외모를 가리고 있으니.

이쪽으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용사가 가능한 많은 여자를 꼬셔줘야 해피 엔딩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국가적 손해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용사의 성검이란 게 하필 용사가 꼬신 여자 수만큼 강해지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용사가 제 외모에 어울리지도 않는 수염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했다.


용사에겐 날 귀찮아 할 것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반드시 용사의 고집을 꺾어야만 했다.


설정상 용사의 오랜 악우이자 동시에 소꿉친구 포지션인 원작의 나는, 해피 엔딩을 보지 못하면 후일담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노말 엔딩이든, 배드 엔딩이든. 엔딩 이후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말이지.


물론 해피 엔딩에서도 스스로 몸을 감췄다는 언급 말곤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 살아는 있으니 몸을 감추는 게 아니겠는가.

왜 몸을 감췄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 우리 이리나도 가끔 너만 보면 웬 산적이 여기 있냐고 깜짝 놀란다니까? "


" 그 정도는 아니거든? "


" 아니긴 뭐가 아냐, 당장 나도 너 밤에 마주치면 칼부터 빼 들 것 같은데. "  



믿기지 않았는지 용사는 평소에 눈도 못 마주치던 파티의 성녀, 이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리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이리나는 내 장난에 어울려준 것뿐인데도, 용사는 억울한 마음에 소리치려다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그래, 문제는 수염뿐만이 아니었다. 저 용사는 나 없이는 여자 가까이도 못 다가가는 숫총각이다. 

이리나한테 항변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재주까지 없어서, 높은 분들이나 상인과 대화할 때면 내가 대신 나서야 할 수준.


이 캐릭터에 빙의해서 잘 살다가, 저놈과 눈을 마주쳤을 때 저게 용사라는 걸 깨닫고 지레 겁부터 먹은 내가 바보였다. 

애초에 난 비공략 캐릭터에 빙의한 거라서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그리고 그땐 오히려 저쪽에서 겁먹고 뒤로 물러났던 걸로 기억한다. 여자랑 얘기하는 게 힘들다나 뭐라나.


다행히 요즘은 내가 여자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보이는지, 나랑 대화는 곧잘 한다.

딱히 전생엔 남자였다고 말해준 건 아니지만, 알아서 결론을 내렸는지 대충 편하게 대하는 느낌이다.


어쨌든, 내가 해피 엔딩을 보고 확실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놈이 남자로서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원작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 그래도 멋있잖아. 수염이 사람 인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


" 그래, 잘 알지. 당장 저기 전사 양반만 봐도 딱 나오잖아. "


" 그럼. "


" 근데 너 같은 동안에는 수염이 안 어울린다니까? 멋이 아니라 관리 안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 그냥 지저분해. "


" ...내 마음에만 들면 되는 거잖아. 네가 무슨 상관인데. "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만 좀 봐도 뭐가 더 나은지 알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잘 모르겠네.


신은 대체 어쩌자고 저런 놈을 용사에 빙의시켰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성격이 원본이랑 비슷한 것도 아니고, 야겜 세계관에서 저런 놈을 용사랍시고 세워놓으면 그대로 세상이 무너질 게 뻔한데 말이다.


왜냐고? 얘 그나마 나랑은 이제 잘 얘기하는데, 아직도 우리 파티 성녀나 엘프만 보면 눈을 피한다니까? 

무려 여자친구든 뭐든 안 사귀면 세상이 멸망하는 야겜의 주인공께서 말이다. 이게 예전보다 나아진 거라는 게 참.


그리고 수염은 없는 게 훨씬 잘생겼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게임에서도 봤고, 이 세계로 와서도 몇 번이고 봤던 얼굴이니까.


대체 저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품속을 뒤져 단검을 꺼냈다. 

이런 용도로 쓰라고 만들어진 건 아니겠지만, 쓰려면 못 쓸 것도 없겠지.



" 됐어, 넌 그냥 그러고 가만히 있어라. 내가 자를 테니까. "


" 어허, 수염은 안 돼. 너 그거 들고 가까이 오면 성검 뽑을 거다. "


" 지랄. 너 아직 성검 잘 뽑지도 못하잖아. "


" 성검은 위기의 순간에 저절로 뽑힌다고 했거든, 지금 안 뽑히면 언제 뽑히겠냐. "



용사가 헛소리와 함께 검 위로 손을 올렸고, 당연하게도 성검은 뽑히지 않았다.




* * *




모처럼 휴일인데도 한량처럼 주점에 늘어져 있는 용사를 발견했다.


당장 스케줄이 비는 동료가 네 명이나 되는데 왜 혼자 궁상을 떨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왜 주점에서 술은 안 시키고 안주만 시켜서 집어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다.

그냥 주점에 앉아있을 거면 동료, 성녀나 엘프. 하다못해 남자인 전사나 창사라도 데려다 같이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용사의 앞자리에 걸터앉았다.

내가 나타나자, 용사의 초점 없던 눈에 이채가 서렸다.



" 새끼, 잘생겼네. 수염 좀 진작에 밀지 그랬냐. "


"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기른 건데 그걸 밀어버리면 어떡해. "


" 나도 이유가 있어서 민 거야. "



역시 수염을 밀어버리니까 훨씬 깔끔해 보인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제 얼굴의 은인도 못 알아보고 수염이 사라진 턱을 쓰다듬는 용사에게 말을 건넸다.



" 이러고 있으면 안 심심한가? 어떻게 쉬는 날만 되면 매번 이러고 있냐. "


" 이 세계에 달리 할 만한 게 있어야 말이지. "


" 여자친구라도 만들던가. "


" 또 시작이네, 어디 그게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냐. "



용사가 팔을 비적비적 움직여 제 귀를 막았다.

조바심에 계속 여자 좀 만들라고 말했던 게 역효과가 된 듯싶다.


네가 여자랑 멀면 멀수록 내가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하면, 과연 이놈이 들어줄까.

아니, 또 헛소리한다고 무시할 게 분명하다.



" 넌 그 수염에 집착만 안 했으면 인기 많았을 거라니까? 원본이 잘 생겼잖아. "


" 인기가 많으면 뭐하냐, 등신같이 말을 못 하는데. 그러는 넌 남자친구 안 사귀어? "


" 내가? 왜? "



나는 질색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 몸으로 지낸 지는 꽤 지났지만, 아직도 가끔 내가 여자가 됐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된다.

그런 와중에 내가 직접 남자친구를 만들겠다고 돌아다닐 리 있겠는가.

몸이 이 꼴이니 여자친구 만들기는 당연히 글렀고.


게다가 만약 내가 마음마저 여자가 됐다고 하더라도, 맨날 이놈이랑 붙어 다니는데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 하긴 너 같은 여자를 누가 데려가겠냐. "


" 얼씨구, 넌 누가 데려갈 것처럼 말한다. "



그렇게 한참을 서로 씹어대는 동안, 누군가 주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흰색의 성녀복을 휘날리는 여성, 우리 파티의 성녀 이리나였다.

그 뒤를 따르는 건 교단의 이름 모를 성기사.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찾는 모습에 괜히 내가 다 불안해졌다.

임무인가? 평소엔 데리고 다니지 않는 성기사까지 대동한 걸 보면... 역시 불안하다.


그때, 용사의 눈이 성녀를 쫓고 있는 걸 발견했다.

용사의 눈에는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흠모일지도.


그러고 보니, 전부터 묘하게 이리나가 안 볼 때 눈길을 보내거나, 멍하니 계속 쳐다보는 경우가 있었다.

여자면 무작정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말 섞고 눈 마주치는 것만 힘든 건가.

꼴에 남자라고 여자한테 관심은 있나 보다.


다행히 이리나랑은 제법 친분이 있는 몸이다.

이 둘을 소개시켜준다면 해피 엔딩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겠지. 


물론 그것도 이리나가 원해야겠지만, 글쎄. 거절할 것 같진 않았다.

이놈도 상대가 나만 아니면 제법 착한 녀석이니까.


어떻게 하면 둘을 이어줄 수 있을까 계획을 세우면서, 용사에게 가까이 붙어 앉았다.



" 이리나는 왜 또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냐. 관심있어? "


" 그럼 없겠냐. 얼굴 예쁘고, 가슴 크고. "



용사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실제로 별생각이 없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게 어디인가.

큰 가슴을 좋아하는구나. 이것도 메모해두자.



" 그건 그래. 소개시켜줘? 나 이리나랑 좀 친해. "


" 너... "



할 말이 있는지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용사에게 대답하려다, 새하얀 손끝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걸 깨달았다.

이 동네에서 섣불리 날 건드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누군지 대충 예상이 간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감추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 역시 여기들 계셨네요, 교단에서 임무가 내려왔어요. "


" 제발, 이리나. 휴일이잖아. "


" 신을 모시는 자에게 휴일은 필요하지 않답니다. "


" 이리나 넌 그렇겠지만, 난 성직자도 뭣도 아니란 말야. "



역시 이리나였다.

결국 일인가. 교단에서는 가끔 이렇게 뜬금없이 임무를 던져주곤 했다.

나는 아까까지 용사가 그랬던 것처럼, 원탁 위로 엎어졌다.


비공략 캐릭터일 거면 차라리 유능하지라도 말던가, 난 왜 유능해서 휴일에도 용사 파티의 임무에 불려가야 하는가.



" 아미. "


" 알았어, 그냥 후딱 가서 해치우자. "



이리나의 채근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지금부터 계획을 시작하자.



" 야, 나 먼저 간다. 어디서 모이는지는 알지? "


" 어? 어. "



여자 앞이라고 또 눈치 보기는.

정신 차리라고 용사의 등판을 한 번 때려주고 이리나한테 말했다.



" 이리나. 얘 좀 챙겨줘. 술은 안 마셨는데 아침부터 맛이 좀 갔네. "


" 네? 아. 알았어요. "



뒤도 안 돌아보고 주점을 빠져나왔다.

단둘이 있으라고 자리를 빠져나온 것도 있지만, 원래 갑자기 생긴 일은 빨리 끝내고 돌아와야 속이 편해지는 성격이라.

미리 마차라도 수배해놓을 생각이다.


아프네.




* * *




창을 든 리자드맨의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푸른 가죽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손을 적셨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생명을 죽이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나마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모습이었으니 망정이지.


내 손으로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는 울고 토하고 난리였다.



" ...괜찮냐? "



야겜답게 강간당할 뻔했던 걸, 용사가 짱돌을 들고 와서 강간범을 때려죽였었다.

뒤에 그놈이 용사로 각성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감옥행이었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


그때 용사 허리춤에 매달려서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우스운 일이지.

고맙긴 하지만, 이젠 좀 사라져줬으면 하는 기억이다.



" 그쪽도 끝났어? "



용사가 피 묻은 검을 털고, 납도 하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단검을 닦아서 검집에 고이 모셨다. 

야겜 속 세계에선 잘 벼려진 단검 하나가 나처럼 출신이 불분명한 여자보단 값어치가 높을 테니까. 

나름 애착을 가진 물건이기도 했으니, 소중히 다뤄야지.


다가온 용사는 나랑 다르게 온몸이 깨끗했다.

깔끔을 떤다기보단 실력이 되니까 괜히 옷을 더럽힐 이유가 없었겠지.


쟤는 주인공이고, 싸움도 잘하니까. 나처럼 매달려서 목 조르고, 눈에 모래에 뿌리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난 그렇게 해야 1인분을 할 수 있고.



" 엉, 별 건 없는데. 그냥 좀 거북하네. "


" 어쩔 수 없지. 이런 거 없는 세상에서 살다가 온 건데. 근데, 너... "


" 뭐. "


" 그러고 있으면 안 춥냐? "


" 적당히 따듯하게 입고 다니는 건데? 내가 아니라 저기 엘프한테나 물어봐. 안 춥냐고. "



난 부끄러워서 최대한 노출이 없도록 온몸을 꽁꽁 싸맸으니, 이 정도면 따뜻하게 입는 거 아닌가.


나는 저길 좀 보라며 활잽이 엘프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날 보다가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연두색 코르셋 드레스며, 아예 엉덩이까지 내다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답답하게 내 눈을 피하더니 뭐라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


" 왜, 뭐. 말을 해. "



계속 애먼 땅이나 하늘로 눈을 돌리는 걸 보면 이유가 있지 싶은데, 짐작이 안 간다.


평소에는 생리니, 뭐니 선으로 줄넘기하던 놈이, 갑자기 눈을 피하고 말을 고를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 몸에 피나 땀 말고 뭐 다른 게 묻기라도 했나 확인하기 위해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 아. "



새삼스럽지만 내가 빙의한 곳은 야겜 속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전투 중 피격당했을 때 가장 먼저 손상되는 부위가 신체가 아닌 옷이라는 걸 뜻한다.

그중에서도 다리나 허벅지, 가슴골이나 배 같은, 보이면 뭔가 야해 보이는 부위를 위주로 손상된다.


물론, 이건 여자 캐릭터에게만 적용되는 공식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여자 캐릭터에 빙의해버렸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찢어진 가슴과 허벅지 부위를 발견했다.

다행히 중요 부위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말했던 대로 정말 아슬아슬해서 가리지 않으면 치녀로 몰릴 정도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가린 뒤에, 애꿎은 용사한테 소리쳤다. 



" 이런 씨, 진작 말했어야지! "


" 내가 그런 걸 어떻게 말해! "


" 아니, 왜 말을 못 해. 뭐 꼴리기라도 했냐? "


" 지랄, 몸매만 보면 무슨 통나무 같은 게. "


" 야, 암만 큰 게 좋다지만 그건 좀 너무했지. "



할 말을 모두 마친 나는, 냅다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차피 임무도 끝났는데 그냥 먼저 돌아가야지.

용사면 몰라도 파티원들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죽으라는 거랑 다름없었다.



" 안 되겠다, 야. 나 먼저 돌아갈게. 괜찮지? "


" 어, 괜찮겠어? "


" 아, 왜 이래. 나 용사 파티 멤버야.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니지. "


" 그래 뭐... 조심해라. " 



용사는 내게 손을 뻗다 말고 멈춰 섰다.


그래 인마, 동료를 좀 믿으라니까.

이래 보여도 게임에선 성능이 제법 되는 캐릭터였다.




* * *




오만이었다.


이 게임 속 세상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내가 좀 강해졌다고.


그렇게 착각했던 모양이다.

꼬리를 잡힌다는 안 하던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보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게 용사가 아니라 이 새끼들이었나.


하긴 용사랑은 빈민촌 시절엔 물 아끼려고 같이 목욕도 했으니, 내가 그런 것처럼 그놈도 나름대로 내 몸을 보는 데 익숙하겠지.


애초에 큰 걸 좋아하는 그놈이 내 몸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놈이 굳이 내 몸을 훔쳐볼 이유가 없다.


나는 나를 들쳐메고 걷고 있는 남자들을 둘러봤다.



" 형님, 이년은 어떻게 할 겁니까? 뭐 가진 것도 없고. "


" 글쎄다… 팔아치우기엔 얼굴은 제법인데 몸매는 영 아니라서. "



어디를 둘러봐도 농기구와 후줄근한 작업복이 눈에 들어온다.

먹고 살기 어려워서 도적질에 나선 농민들인가.

그중에서도 우두머리는 어디서 좀 굴러먹다 온 놈인지 검을 차고 있었다.


몸을 숨기고 우릴 보고 있던 놈도 이놈이겠지.

아까도 검을 휘두르는 꼴을 보니까 앞에 나서서 싸우기보단 비열하게 뒤를 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별거 없는 놈들이었다.

문제는 내가 더 별거 없었다는 거고.


내가 물리치지 못할 정도의 강적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 혼자서도 이런 놈들은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아직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다친 놈들이 끙끙대면서 걷고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난 충분히 분전했다.

열 명 중 거의 일곱 명 정도는 다치게 했으나, 거기에서 그쳤다.


급소를 노리기엔 각오가 부족했고, 열심히 작은 몸을 놀리다 바닥에 쓰러진 놈한테 발목을 붙잡힌 순간부터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직도 아까 얻어맞은 배가 욱신거린다.


이 세계 남정네들은 왜 그렇게 배빵을 좋아하는지.

덕분에 주점에서 훔쳐먹은 안주까지 다 게워낸 기분이다.


그래도 난 아직 괜찮다.

다행히 빈민촌에서 자란 덕에 맷집은 괜찮으니까.


그때 한 남자가 가장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한테 말을 걸었다. 우두머리인가?



" 이년이 가지고 있던 단검, 잘은 모르지만 좋은 물건인 것 같습니다. 가만 보니까 좋은 집 자식 같은데 몸값을 그냥..."


" 그거 줘 봐. "


" 에이, 형님. 제가 주워 왔습니다. "


" 줘보라니까. "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놈들이 재물에 욕심이 있다는 거다.

그냥 따먹고 죽이는 것보다 날 팔아치우는 게 더 이득이니, 내 목숨을 위협하진 않겠지.


야겜이니까 정조가 위험하지 않냐고?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 몸이 좀 애새끼 같아야 말이지.

소아성애자가 아니라면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은 빈약한 몸매란 말이다.


용사의 말을 빌리자면, 통나무 같은 몸매라고나 할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남자는, 내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좋네, 이건 내가 가진다. "


" 그럼, 대신 그 계집 맛이라도 좀 보여주십쇼. "


" 미쳤냐, 우리가 하는 건 사업이야. 상품 가치를 떨어뜨려서 어쩌려고. 돈은 줄 테니까 일단 건들지 마. "



누구 마음대로 가지겠다는 건지.


그래도 다행히 저 남자는 날 이 이상으로 해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야겜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최소한의 상식은 준수하는 모양이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물러난 청년을 마지막으로, 도적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쭉 직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숲속에 숨어있는 자그마한 마을.

그중에서도 가장 외딴곳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었다.



" 이 안에 가둬놔. "


" 예. "



우두머리의 지시에 따라, 남자들은 날 오두막 안에 거칠게 내려두고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면서 홀연히 떠나버렸다.


무슨 깡으로 안대랑 귀마개도 없이 날 여기까지 데려다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쟤들은 다 죽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 나가고 난 뒤 이야기지.

대관절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다리랑 팔은 묶였고, 단검은 뺏겼다.

마법사가 아니니 주문을 사용해서 빠져나갈 수도 없고, 뭔가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스킬 같은 걸 배운 적도 없다.


올린 거라곤 얼마나 올랐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단검 숙련도뿐.

어라, 나 큰일 난 거 아닌가?


그때 현재진행형으로 붕괴 중인 오두막의 잔해인지, 단면이 날카롭게 부러진 나무토막이 눈에 들어왔다.


신도 날 버린 건 아니구나.

나는 꼴사납게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나무토막을 잡았다.

이런 건 이제 부끄럽지도 않다. 보는 사람도 없고.


이걸로 밧줄을 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봐서 손해 볼 건 없겠지.

여기 가만히 앉아있는다고 해서 좋은 결말이 기다리진 않을 거 아닌가.




* * *




밧줄을 붙잡은 엄지손가락으로 자르던 부분을 매만졌다.

됐다, 거의 다 잘렸다.

조금만 더 자르면 힘을 줘서 끊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억지로 힘을 주면 끊을 수는 있겠지만, 단검술이라는 게 의외로 손목을 많이 쓰는 기예라서.

이런 곳에서 어이없게 다치면 빠져나간 뒤로도 문제다. 들키면 제압당할 테니까.


단검을 무슨 일이 있어도 회수해야 하는 나에겐, 그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다행히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길 찾아온 도적놈은 없었다. 덕분에 밧줄을 자르는 작업은 순조로웠고.

이대로 순조롭게 밧줄을 자른 다음에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손이 뒤로 묶이지만 않았어도 훨씬 더 빨리 빠져나갔을 텐데.

나는 낑낑거리며 다시 나무토막을 주워들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오두막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새하얀 달빛을 등진 얼굴이 어디선가 본 인상이다.



" 억, 시발. 취한다. "



아까 우두머리한테 내 단검을 뺏긴 청년이 저렇게 생겼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설마 들켰나 싶어 안색을 살폈지만, 딱히 내 수작질을 간파하고 달려온 건 아닌 듯했다.

대신 뭔가 눈깔이 이상했다.


조금만 더 서두를까.

저런 눈을 한 놈들은 보통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 오래 기다렸구나. "



청년은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동자에 끈적한 욕망이 번들거린다. 이쯤 되면 나라도 저 남자가 뭘 하러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야겜이면 빠질 수 없는 거 있잖은가. 능욕씬.



" 그 양반도 참, 쓸데없이 술에 강해. "


" 야, 그거 꺼내면 후회할걸. "



하필 지금 들어오다니, 운도 지지리 없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야 했다.


나는 술에 취했는지 낄낄거리며 바지춤을 내리는 놈에게 최대한 날 선 목소리로 경고했다.

놈이 주춤하면서 날 내려다본다.


이런 놈들은,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면 겁부터 먹곤 했다.



" 내가 말야, 용사 파티의... 읍. "


" 아이, 씹. 아직 안 자고 있었네. 깜짝이야. "



말하는 와중에, 느닷없이 확 풍기는 짙은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냄새다. 흔히 밤꽃 냄새라고 불리는 냄새. 

씻지도 않는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공기가 제법 지독하다.


고개를 돌렸음에도 시야 한 켠에 껄떡거리는 방망이가 눈에 들어온다. 



" 일단 입부터 써볼까. "



내 입가로 들이민다.

나도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내가 피하려고 시선을 돌려도,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놓는다.

저런 걸 보기만 해도, 그때 기억이 떠올라서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무섭다.


손끝이 떨려서, 아까부터 자꾸 헛손질하고 있다.

빙의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게 문제일까.


그때랑은 다른데도, 내가 눈앞에 선 이 남자보다도 훨씬 강한데도.

트라우마라고 해도 좋을, 몸에 각인된 두려움이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용사가 떠올랐다.

그땐 그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서 그런가.

그래서 이렇게 무서운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자르면 포박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대로 힘만 더 주면 만나러 갈 수 있다.


손목에 있는 힘껏 힘을 주다가, 다가오는 주먹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한순간 시야가 번쩍였다.



" 뭐해, 안 빨아? "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턱이 얼얼하다.


내 몸이 휘청거리면서 뒤로 넘어갔다.

놈이 주먹을 쥔 채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얻어맞았구나.

그때처럼.


그렇게 말한 청년은 몰래 훔쳐 온 건지, 아까 뺏겼던 단검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 됐다, 역시 씹구녕이 최고지. "


" 잠깐만. "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니,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무섭지? 다들 몇 번 맞으면 그러더라고.  "


" 그만해. "



씻지 않아 지저분한 손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놈의 손이 닿으니까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내 몸은 지금 떨리고 있었다.



" 이거, 여길 자르라고 표시까지 해뒀구먼. 고맙게. "


" 이익... 멈춰. "



내가 뭐라고 말하든,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남자가 든 단검은, 용사가 첫 임무를 마치고 받은 돈으로 사준 단검이다.

용사 말로는, 녀석이 용사라는 걸 알고 있는 돈 없는 돈 쏟아서 억지로 맞춰준 장검의 보답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애착을 붙인 소중한 물건인데, 그런 물건이 저런 놈의 손에 들려있다는 게 화가 나서 몸이 떨린다.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어도, 입이 열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입을 열었다간, 또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아서.

결국 또 트라우마가 문제구나.


단검이 상처 난 바지를 찢었다. 속옷도 함께.


내가 그렇게 보이는 걸 꺼려왔던 피부가, 소중한 곳이. 누군지도 모를 사내에게 보인다는 게 억울했다.


숨기고자 다리를 오므리니 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다음엔 배. 이것도 그때랑 똑같았다.


저항하면 어김없이 주먹이 날아온다.

이 세계 강간범들은 죄다 똑같은 행동 원칙을 따르나 보지.



" 한 번 대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



놈이 얻어맞고 엎드려 있는 내 배를 발로 걷어찬다.

내가 굴복할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 차겠지. 배애 멍들겠네.

이러다 이 몸으로는 아이도 못 만드는 거 아닐까.


내가 실소하니까, 화가 난 녀석이 한 번 더 발길질을 날린다.

아이 씨, 비웃은 거 아닌데. 억울하네 참.



" 콜록, 씹. "


" 우스워? 내가 우습냐고. 이 씨발, 내가 이딴 애새끼한테도... "



아까 먹은 걸 다 토해낸 덕인지, 뱃속에선 위액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젠 눈에 띄게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뿐만이 아니라, 고통까지 더해졌다.

맷집이 단단하다곤 해도 이렇게 얻어맞으면 아프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놈의 충혈된 눈동자가 내 벌려진 사타구니를 훑는다.


손에 침을 묻히더니, 제 방망이를 손으로 훑는다.


똑같다. 그때 그 새끼랑.



" 그만해. "



놈이 크게 부풀어 오른 물건을 다리 사이로 겨냥하고 있었다.


똑같다.


몸을 비틀며 저항해보지만, 기본적인 근력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 콜록, 그만... 하라고. "



팔에 힘을 줘도 밧줄이 뜯어지지 않는다. 

아니,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피할 수 없다.


넣어진다.


설마 동정도 전에 처녀를, 심지어 강간당해서 뗄 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이제 여자니까 이런 일을 당할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곧 따뜻한 액체가 배 위로 튀었다.

설마 벌써 끝난 건가?


아니다. 박기도 전에 싼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눈을 뜨면, 청년이 제 목을 붙잡은 채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목은 긴 장검으로 꿰뚫려서, 새빨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다.


허무한 눈으로 쓰러지는 청년을, 뒤에 선 남자가 발로 차서 치운다.


그러자 보이는 건 용사였다.

이를 악문 것이, 뭔가 화가 나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기뻤다.



" 이것도 그때랑 똑같네. "


" ...괜찮냐. "


" 아니, 추워. "


" 그럼 이거나 덮고 있어. 금방 풀어줄 테니까. "


" 고마워. "



용사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묵묵히 포박을 풀었다.


저놈이 이렇게 멋있던가. 

옷을 벗어주는 센스는 또 어디서 보고 배워온 건지, 아무튼 지금은 고맙게 받기로 했다.





* * *




그날 이후로, 용사는 날 평소처럼 대했다.

애초에 그 당시에도 딱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난 녀석의 취향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이런 애새끼 같은 가슴에 흥분했으면 그것도 좀 충격적이었겠지.


용사는 내가 잠시 다른 길로 샜다고 동료들에게 보고했으며, 나는 녀석이 말했던 대로 응응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단검은 까먹고 못 가져왔다가, 다시 돌아가서 확인했더니 사라져 있었다. 좀 허무하긴 했지만, 살았으니 됐지 뭐.


자신감 넘치게 혼자 돌아가다가 강간당할 뻔했다고, 내가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하겠냐고.

아무튼, 그놈답지 않게 이번엔 큰 활약을 해줬으니 이젠 내가 보답할 때였다.



" 아미, 무슨 생각해요? "


" 그냥. 별 생각 안 해. "



앞에 앉아있던 이리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갑자기 웬 다과회냐고 묻는다면, 지난번에 용사가 이리나의 가슴을 눈으로 좇고 있는 걸 보지 않았는가.

이것저것 생각해봤는데, 보답을 핑계로 이리나를 소개시켜주면 해피 엔딩도 가까워질뿐더러 용사도 행복해질 것이다.


물론 중간에 낀 이리나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 그녀의 생각을 묻기 위해 초청했다.



" 내가 초대했는데, 왜 차는 네가 따르고 있는 거야? "


" 전 이게 좋아서요. "



한숨을 내쉬었다.

난 왜 항상 이 모양이지. 이래서야 체면이 안 살지 않는가.


따라준 차를 호호 불어 마시는 동안, 이리나가 말했다.



" 그래서, 전 왜 부르신 건가요? "


" 그냥. 혹시 남자 소개받을 생각 없는지 궁금해서. "


" 남자요? "


" 엉, 수현... 아니, 여기 이름으론 다르윈인가? "


" 어라, 용사님이네요. "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거부감이 드러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 이리나도 용사한테 관심이 있었나?



" 아무튼, 어때? "


" 어쩌다 소개시켜줄 마음이 들었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


" 그놈이 널 좋아하는 것 같더라. 최근에 도움을 좀 받았거든, 이런 거라도 해주고 싶어서. "


" 용사님이 절? 으음,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아니라... "



이리나가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생글생글 웃었다.



" 어, 뭐라고? "


" 아니에요, 아무것도. 근데 아미는 괜찮겠어요? "


" 괜찮냐니? "


" 제가 용사님이랑 사귀어도요. "


" 나? 나야 당연히 상관없지, 그럼 승낙한 거다? 내일 아침에 우리 항상 모이는 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



나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나를 보다가, 다과를 하나 베어 물었다.

이리나의 수락을 받아냈으니 이젠 용사를 약속 장소로 끌고 오기만 하면 그만이겠지.


이걸로 빚은 갚은 거라고 해도 되겠지.


그런데 어째선지, 홀가분해야 할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아려왔다.


빨리 포기해야 하는데. 

그런데 뭘?




* * *




나는 멀리서 이리나와 용사가 시장 거리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아주 기침까지 해가면서 놀라더니, 이젠 얘기도 잘 나누고 있는 걸로 보였다.

거리가 좀 있어서 뭐라고 말하는지는 못 들었지만.


나중에 내게 울면서 고마워할 용사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나도 순진하게 이번 만남이 잘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용사 놈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원만하게 이어지면 오히려 놀라울 것 같았다.


앞으로도 조금씩 간섭해가면서 둘 사이를 좁혀줄 생각이다.

그때 반응을 생각하면 이리나도 용사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 잘 될 확률이 안될 확률보다도 컸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그야 야겜이니까.

무기 숙련도나 스킬 같은 개념이 존재하는 걸 보면, 호감도 시스템도 작동하긴 할 테지.


내가 억지로 수염까지 밀어줬고, 제대로 옷까지 사서 입혀놨으니, 외모 면에서 꿀리는 점은 없을 것이다. 

호감도에 추가로 보정이 들어간다는 뜻이지.


녀석이 나보다 먼저 여자친구를 만든다는 것 때문에 내 몸이 질투라도 하는 건지, 가슴이 좀 답답하긴 했지만 괜찮다.

형님으로서 넓은 아량으로 그 정도는 용서하도록 하자.



" 아. "



잡생각을 하다가 둘의 모습을 놓쳤다.


마음만 먹으면 스킬로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감이 예리한 용사한테 들키고 말 게 뻔했다.

서둘러 몸을 움직여 거리로 쫓아 들어갔다.


둘은 어디 있을까.

꽤 외모가 튀는 둘이니만큼, 찾는 게 어렵진 않을 것이다.

어딜 가든 얘기가 나올 테니까. 선남선녀니, 뭐니.


대낮의 시장 거리는 생각보다도 꽤 한산했다.

그런 만큼 웅성거리는 소리가 유독 더 크게 들린다.



" 방금 지나간 거, 용사님이랑 성녀님 아냐? "


" 그렇겠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깐 멈춰섰다.

잘 어울린다고, 그런가.


이리나는 게임의 타이틀 히로인이니까.

게다가 용사와 성녀, 이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어울리겠어.


열심히 꾸며놓은 보람이 있었다.

이리나 옆에 서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라니, 이 얼마나 압도적인 재능인가.

칭찬받은 느낌이었지만,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얼른 용사나 찾을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발견했다.

아까 말했던 대로,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새하얀 성녀복을 입고 입가에 미소를 띤 이리나와, 마찬가지로 새하얗고 품이 넓은 셔츠를 입고 검을 활보하는 용사.

성검을 드러낸 덕인지 용사라고 알아보기도 쉬웠다.



" 정말요? "


" 예, 그 자식이 참... "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 수줍어하던 거랑은 다르게 용사는 활발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리드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리나가 오히려 따르고 있는 모습이 조금 의외였다.


쟤가 여자랑 저렇게 말을 잘했던가? 아무튼 좋은 일이다.


용사의 말에, 이리나가 활짝 웃는다. 

다행히 이리나도 용사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내 체면을 위해서 연기하는 건 아니겠지, 이리나는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성격이니까.

주선을 맡은 나로선 제법 뿌듯한 일이었다. 뿌듯해야 하는데.


이젠 확실히 알겠다.


좀 많이 아프네.




* * *




슬슬 저녁이다.

저녁인데도, 둘은 도저히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온종일 웃는 것도 피곤할 텐데. 안 돌아가려나.


콧잔등 위로, 곧 비가 온다는 것을 알리듯 차가운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은 아니었는데.



" 빨리빨리 움직여! 다 젖는다. "


" 예엡. 하, 이게 웬 봉변이냐. "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시장 거리가 분주해졌다.

급하게 좌판을 천막 아래로 숨기는 상인들이며, 신경질을 부리며 발걸음을 빨리하는 행인들.


용사와 이리나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내리는 걸 깨닫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용사가 가판대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뭔가 반짝거리는 걸 전시해놨는데, 이쪽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선물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젠 더 볼 이유도 없었다. 이미 봐야 할 건 다 봤으니까.



" 아뇨, 제가 대접해드려야죠. "


" 그러고 싶으시다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먹거리를 나누어 먹는 모습을 봤다.

평소에 병적으로 돈을 아끼던 놈치곤 제법 그놈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상대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이런 곳에 와보는 건 처음인데요. "


" 그야 용사님은 사치를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전 자주 오지만. "



용사가 이리나랑 디저트 카페로 들어가는 모습도 봤다.

그 안에서도 쉬지 않고 떠들던 용사,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리나.

이상하다. 혹시 여자를 무서워했던 것도 다 선을 긋기 위한 연기였던 걸까. 

혹여나 내가 자기한테 특별한 감정이라도 품을까 봐.



"  그 녀석이 말입니다. 글쎄... "

 

"  그래서 그때... 아하.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



서로가 미소를 주고받는 모습은 수도 없이 봤다.

내 앞에선 잘 웃지도 않던 놈이, 상대 하나 달라졌다고 저렇게 웃음이 많아지다니.



"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좀 젖어도 되니까. "


" 아, 감사합니다. "



방금, 이리나가 비에 젖을까 봐 자신보다 먼저 그늘에 그녀를 데려다 놓는 용사를 봤다.

그런 반면에, 난 가려주는 사람도 신경 써주는 사람도 없었다.


비 때문에 축축하게 젖은 몸을 이끌고 눈에 띄지 않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 벽에 몸을 기댔다.

바닥이며 옷이며, 축축하게 젖어서 몸이 으슬으슬했다.


이젠 알겠다.

가슴이 저리던 이유가 대체 뭔지. 너무 뒤늦게 알아챘다. 언제부터였지.

사실은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용사가 날 구했을 때. 그때부터다.


이젠 알겠다.

내 원본이 왜 해피 엔딩 이후에 스스로 모습을 감췄는지.

저런 광경을 맨정신으로 어떻게 보고 있겠는가. 이렇게나 아픈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저 자리에.

아니, 그건 아니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난 용사의 취향이 아니다. 

가슴도 작고, 어린애 같은 외모에, 이리나 만큼 예쁜 것도 아니지.

게다가 비공략 캐릭터다. 애초에 용사와는 이어지지 않을 운명이라는 거지.


녀석 성격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내게 어울려주겠지만, 그래서야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정말로 용사를 위한다면 이게 맞았다. 


지금 저기서 웃고 있을 용사를 생각해보라, 적어도 난 이 이상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결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만 포기하면 된다.

자신감이 붙은 녀석이 연인을 늘려가는 동안, 나는 옆에서 응원하면 그만이다.

그중에 하나가 될 용기는 없었다. 내가 쓸데없이 욕심은 많아서.


그래도 난 남자였으니까. 사내로 태어나서 이 정도로 꺾이진 않는다.

내일, 다시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자.

이걸로 빚은 갚은 거라고 말하면서.



" 아이 씨. 왜. "



괜히 코가 찡했다. 눈물도 나왔다.

별것도 아닌데, 세상에 사람이 저놈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젠 차라리 비가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꼴사납게 울든 말든 아무도 못 볼 테니까.


여기 조금만 더 있다 가야겠다.

그러다 진정이 되면 돌아가서, 오랜만에 목욕도 한 번 하고. 그리고 맛있는 걸 잔뜩 먹자.

그러면 좀 괜찮겠지, 여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 야. "


" 왜. "



누군가가 나를 불렀고, 익숙한 목소리라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어, 왜. 왜 이놈이 여기 있지.


고개를 들었다.



" 네가 왜 여깄어. "


" 너야말로, 뭔데 여기 있어. "



용사였다.

기껏 입혀준 옷이 푹 젖어서, 볼품없이 늘어졌다.

나나 저놈이나, 비 맞은 생쥐 꼴인 게, 보기에 퍽 우스웠다.



" 데이트는 어쩌고. "


" 데이트? "


" 이리나 만났잖아. "


" 아. "



용사가 뭔가 깨달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틈에 몸을 추슬렀다. 멀쩡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 이리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빨리 돌아가. "


" 안 돌아가. "


" 내가 이리나를 거기 어떻게 보냈는데,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돌아가 보라니까. "


" 그전에, 너 여태 우리 쫓아다닌 거야? "


" 그래, 너 실수할까봐. "



용사는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피식 웃으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이리나한테 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 실수 한 번으로 상대를 쫓아낼 만한 아이가 아닌데.



" 왜 울었냐. "


" 안 울었어 인마. "


" 야, 내가 너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정도는 보면 알아. 딱 봐도 울었네. "



내 옆에 나란히 주저앉은 용사가 입을 열었다.

뭘 안다고 저렇게 나불거리는 거야.



" 성녀님이 그러더라, 너 여기 있을 거라고. "


" 걔가 그걸 어떻게 알아? "


" 나야 모르지. "



용사는 뭐가 그리 웃기는지, 아직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이리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즐거웠던 걸까.



" 아까 데이트라고 했지. 우리, 데이트한 거 아니야. "


" 내가 그러라고 보냈는데. "


" 글쎄, 성녀님은 네 선물 사러 가자고 하던데. 너 내가 준 단검도 잃어버렸다며. 그거 생각나서 그러자고 했지. "


" 엥, 어, 뭐? "



당황해서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고 되물었다.

지금 이놈이 뭐라고 한 거지.


소개팅하라고 보내놨더니, 남의 선물이나 사고 있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다 날 위로하려고 하는 거짓말일 게 분명하다.

은근히 사려가 깊은 녀석이었으니까.



" 눈만 마주쳐도 웃는 거 보니까 아닌 것 같던데. "


"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그냥 그거야. 우리 네 얘기하고 있었거든. 그러다 보니까 그냥 웃음이 나더라. "


" 다른 여자 앞에서 내 얘기를 왜 해! "


" 성녀님이 물어봤으니까. 그리고 성녀님은 이미 돌려보내 드렸어. "


 

데이트 상대가 다른 여자 얘기해달라고 하니까 정말 다른 여자 얘기를 꺼내는 미친놈이 세상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이놈이라면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용사는 날 가만히 보고 있다가, 다시 피식 웃었다.



" 아니,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그럼 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소개팅 주선했다가, 잘 풀리니까 여기서 혼자 울고 있는 거야? "


" 아니거든. "


" 허어... 너 나 좋아하냐? "



인상을 쓰고 노려본다.

속마음을 들켰을까봐, 불안한 마음으로.



" 지랄, 아니라니까. 그냥 다른 거 때문에. "


" 아, 그러셔. 난 너 좋아하는데. "


" 그렇겠... 뭐라고? "


" 좋아한다고. "



여태까지 마주했던 기억에 의하면, 저 말은 사실이다.

거짓말을 할 때면 항상 표정이 망가지던 쓸데없이 착한 놈이니까.

용사는 지금 웃고 있었다.



" 왜? "


" 나도 잘 몰라. 최근에서야 알았으니까. "


" 너 페도야? "


" 아니, 야. 그건 아니지. 생각을 해봐, 우리가 벌써 몇 년째 알고 지냈냐? "


" 글쎄, 9년 조금 넘었지. "


" 그래, 9년. 벌써 그렇게 됐네. "



용사는 옆에 앉아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얘, 생각보다 키가 컸구나.



" 그냥 9년 동안 쭉 보다 보니까 좋아지더라. "


" 그게 끝이야? "


" 사람을 좋아하는데 거기서 뭐가 더 필요해. "


" 로맨틱하질 않네. "


" 그래도, 계기는 기억 나. "



일어선 용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면서 말했다.

반짝거리는 게 지나간 것 같은데.



" 처음 만났을 때, 그 성범죄자 새끼 때려잡고. "


" 그때 뭐가 있었나. "


" 그냥, 내가 이렇게 손을 뻗으니까 네가 막 울면서 달라붙었잖아. "



용사가 뻗은 손바닥 위로, 자그마한 반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아까 가판대 위에서 얼핏 본 것 같은, 반짝이는 반지 위로 물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 잊고 싶은 기억인데. "


" 그때, 내가 지키지 않으면 얘도 금방 뒤지겠거니. 그렇게 생각했지. "


" 지켜주고 싶다는 말을 왜 그렇게 해. "


" 부끄럽잖아. 징그러워서 안 받아줄 거면 빨리 일어나기라도 해. "



그 말대로, 용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무슨 사내놈이 이렇게 숫기가 없는지, 그 꼴이 우스워서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용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 야, 아무 여자한테나 이렇게 반지 주고 그러는 거 아냐. "


" 내가 언제 아무한테나 줬어. 이것도 나름 용기를 내서 준 거라고. "


" 됐고, 이건 압수한다. 나중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와서 말 해. "



손바닥 위에서 반지를 잡아채고, 냅다 품속에 넣고 뒤로 돌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용사가 헛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 그럼 그냥 너 평생 갖고 있어야겠는데. "


" 그러면 좋고. "


" 어, 뭐? "



대충 알아들었겠거니 하며 빨리 도망치려는데, 용사가 되물었다.



" 야, 그게 무슨 뜻인데. 그러면 좋다니. "


" 아, 좀. 등신아. "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뒤로 돌아서 녀석의 앞섶을 붙잡았다. 도저히 이러지 않고는 못 버틸 것 같아서.



" 나도 너 좋아한다고. "



프러포즈를 했는데 상대가 반지를 받았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건가?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냅다 다시 뒤로 돌아서, 혼자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곧,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 어, 언제부터? "


" 처음부터. "


" ...똑같네. "


" 그래, 똑같지. "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없이 주점까지 걸었다.


그러다 결국 주점에 도착했을 때. 서로 얼굴이 시뻘게져서 돌아온 탓인지, 이리나는 우릴 보자마자 실실 웃기 시작했다.


평소였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오늘따라 유독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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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은 떡밥은 용사 시점에서 풀 예정


https://arca.live/b/tsfiction/36384179 후일담 외전


용사 시점은 10월 32일에 업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