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결코 평등할수없다. 


그것은 일찍이, 내가 교회에 몸담고 있을때부터 깨달은 진리였고 


하물며 공평함을 널리 퍼뜨리던 교회에서조차도 차별은 존재했다. 


교황, 추기경, 하물며 일반 사제들간에서도 선후배 관계로 나뉘는 계급. 


그것은 한낱 호위기사에 지나지 않는 내가, 남몰래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성녀님에게, 


그녀를 지키느라 반란군들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한 이유였다. 


나같은것이 성녀님에게 절대로 어울릴리가 없다. 


이 마음은 무덤까지 갖고가자. 


그래도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기적이라는것이 존재한다면. 


그녀와 똑같은 위치에서 다시 마주할수 있다면. 


그때는 성녀님에게 진심을 전하리라, 나는 그렇게 조용히 속으로 맹세했었다. 


그러나. 


두번다시 만날리 없는 두 영혼이, 운명으로 묶여서 다시 재회하게 되었더라도. 


성녀님은. 


그녀는.





"그리운 얼굴이네요 아론." 


여전히 너무나도 먼곳에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렇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표한 그녀는.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서, 기적적으로 다시금 재회하게된 존재였지만. 


성녀와 그녀의 호위기사, 라는 절대적인 거리감은.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아니."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21세기에 와서 좁혀지기는 커녕. 


"백야그룹 회장 성유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가, 이렇게나 까마득하게 있었다. 


대한민국 10대 재벌중에서도 항상 상위 클래스에 순위를 자리매김하는 '백야그룹' 


그 백야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여겨지고있던 '성유나'는, 얼마전 전대 회장의 병세 악화로 회장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던 나는, 별 기대없이 백야그룹에 지원서를 넣었고. 


절대로 붙을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서류는, 합격을 넘어서 면접조차 치루지않았고 


이 회사에 입사하게된 나는 묻고따지지도 말고 바로 회사로 출근하라는 말을 듣고 이 회사로 오게되었더니. 


'당신은 오늘부터 회장님의 비서역활을 수행하게 될겁니다.' 


곧바로 초고속 낙하산 승진을 하게되었다. 


느닷없이 이제 막 입사한 사원에게 비서역활을 맡긴만큼 무언가 이상한점이 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아이 참, 회장님이라니 그냥 말 편하게해도 괜찮아요." 


... 설마 그 회장이 성녀님이었을 줄이야. 


은발에 가까울정도로 빛나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은 


마치 바다와 같이 자비로울것같은 그녀의 눈동자와 잘 어우러져 


그냥 서있는것만으로도 그자리를 한폭의 그림으로 만드는듯한 미소녀라는 인상을 주었다. 


"일단 묻고싶은게 있습니다 회장님." 


"말 편하게 하라니깐... 뭔데요?" 


살짝 삐진건지,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녀에게 나는 아까전부터 신경쓰고 있던것을 물어봤다. 


"제가 이 백야그룹에 입사할수있던건 역시 회장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거라면 당연히 제 덕분이지요." 


아주 약간이나마 남아있었던, 혹시 내 노력으로 입사한것은 아닐까하는 기대는. 


"솔직히 이력서에 적혀져있던 스펙만 놓고 본다면 절대로 뽑힐리 없겠지만..." 


그녀가 지은 새하얀 미소와 함께. 


"그래도 그런건 중요치 않았어요." 


조금씩 금이가기 시작하며. 


"중요한건 겨우, 겨우 당신을 다시 찾았다는것이니깐요." 


이윽고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자신이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고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을수있는것도, 내가 전생에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건것에 대한 보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것은 잘 알고있었다. 


그저 길거리에 버려진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것처럼 


동정심으로 그녀가 건네준 대기업 회장의 비서라는 자리. 


그것을 깨달은 나는 이 자리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앞으로 다시 일할수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조금 기쁘네요." 


진심으로 함박 웃음을 지으며 기뻐하는 그녀.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준 호의를 지금 당장은 거절할수없었다. 


지금 거절했다가는, 그녀가 죄책감을 느낄것이기에. 


그녀는 너무나도 자애롭고 상냥한 존재니깐, 분명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결심했다. 


"...네, 저도 성녀님과 다시 일할수 있게되어 영광입니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수개월동안 일한 뒤에 이런저런 핑계로 그만두기로.


























*     *     *




ㅡ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왜요?"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부모님의 요양을 위해..." 


"거짓말. 부모님은 아론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하는군요." 


무섭다. 


무섭다무섭다무섭다. 


살결에 소름이 돋는것을 넘어서, 영혼까지 얼어붙는듯한 감각. 


수많은 마물 군단 앞에서도 떨리지 않던 온몸이, 지금 유래없을 정도로 떨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걸까. 


처음 그녀와 재회한날, 그녀의 동정심으로 얻은 이 자리를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위해 어느정도 시간을 둔후, 자연스럽게 거절하려고 했건만. 


턱! 


"또, 핑계거리를 생각하시는 중인가요?" 


그녀에게 붙잡힌 두 어깨는, 이미 희미했던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완벽하게 봉쇄하고 말았다. 


"저는... 그러니까... 빚을 갚기위해 묵돈이." 


최소한의 뇌 필터조차 거치지않고 마구 뱉어져나오는 말들. 


"지금 돈이라고 말했나요 아론?" 


띠리링- 


그 순간 내 휴대폰에서 울리는 알림소리에 그녀를 쳐다보자. 


마치 보는걸 허락해준다는듯이, 아니 오히려 꼭 보라는듯한 그녀의 눈빛에 


휴대폰으로 옮겨간 내 눈동자가 믿을수없다는 듯이 커졌다. 


[1,00,000,0000.....] 


얼마인지조차 짐작할수없을 정도로 큰 금액. 


그 믿을수없을 정도로 큰 숫자에 고정된 내 얼굴을 붙잡아 자신쪽으로 돌린 성녀님은


서로 눈동자를 마주친후 말을 이어갔다.


"얼마든지 핑계거리를 대도 괜찮아요." 


"돈? 부족하면 더 드릴게요." 


"개인사정? 당신이 저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설령 지옥 밑바닥이라도 따라가 드릴게요."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눈동자가 전생과는 다르게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말이죠 핑계거리는 잘 선택하는게 좋을거에요." 


이윽고 나는, 평소와 다를것없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 핑계가 만약에." 


어째서인지 조금 탁해보이던 그 이유를 알고 


"여자와 관련된거라면 두번다시 말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줄테니깐."


몸소,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녀에게선 결코 벗어날수 없다는 새로운 진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