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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https://arca.live/b/regrets/42997161?p=3



남은 일주일, 그 첫째 날이 밝았다.



***



모든 게 평소와 같다. 경첩이 다 낡아서 삐꺽거리는 문도, 집 앞에 수북하게 자라난 잡초와 이름 모를 풀,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우거진 숲까지.

구태여 신경쓰는 게 피곤할 정도로 똑같은 광경이지만, 이제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이 괜히 눈에 잘 들어온다.

이런 광경들도 이제, 일주일 후면.

제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반복한다. 스읍, 하아. 맑은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가 구멍 뚫린 물풍선처럼 다시 빠져나간다. 잠기운과 복잡한 상념으로 어지러웠던 머리가 조금은 깨끗해졌다.

자, 그럼.

누구에게 먼저 가볼까.

비록 존재감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다지만 살아온 세월이 세월이다. 작별을 전해야 할 존재들은 적지 않게 있었다. 일일히 전부 찾아가는 것은 무리겠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볼 생각이다.

수많은 소녀들의 얼굴이 머릿 속에 떠오르고 사라졌다. 하지만 좀처럼 결정을 내리긴 어려웠다. 그녀들 대부분은 나처럼 한가한 백수가 아니기에, 위치를 안다고 해도 함부로 찾아가기 조심스러웠다.

괜히 멋대로 찾아갔다가 작별마저 찝찝하게 끝나버린다면, 그만한 최악은 없을 테니까.


고민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할 무렵, 다행히 고민을 일축시켜줄 변수가 생겨났다.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펄럭ㅡ!

"어라라? 당신, 밖에 나와 있었네요. 장이라도 보러 가는 길이었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하타테와 비견될 정도로 만년 집돌이인 당신이 집을 나와 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오."

하늘을 가르는 한 쌍의 거대한 까마귀 날개가 태양을 가렸다. 위를 올려다보자 나풀거리는 치마 안으로 비밀스런 천쪼가리가 엿보였다. 무방비한 걸까, 아니면 짖궂은 장난일까. 아마도 후자일 터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어 그녀의 치마 속에서 시선을 거둔다. 아야는 칫하고 혀를 차더니 무어라 불평하며 내 앞으로 사뿐히 착지했다. 나의 재미없는 반응에 김이 샌 듯 하다.

"오늘은 일찍 오셨군요. 아야 씨."

"예예, 뭐. 오늘은 재미있는 기사가 많이 실렸거든요. 제 소중한 구독자 분들께 서둘러 신문을 갖다주러 가는 길이었답니다. 물론 당신한테도요!"

툭, 그녀의 손에서 던져진 신문이 나의 손으로 안착했다. '나이스 캐치'라면서 그녀의 엄지가 들렸다. 그 발랄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나처럼 재미없는 녀석을 상대로도 이렇게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걸 보면, 역시 그녀는 신문 기자로서의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악의적인 작문과 교묘한 사실 왜곡은 별개의 문제겠지만.

"고마워요. 잘 읽을게요."

"후후, 다음 주에 나올 것도 기대해달라구요? 당신은 붕붕마루 신문의 영광스런 첫 번째 구독자이기도 하니까, 특별히 먼저 갖다드릴게요!"

그녀는 양팔을 허리에 얹고는 흥흥 기분좋은 콧소리를 냈다. 자세 탓에 성숙하게 부푼 그녀의 가슴이 존재감을 뽐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다음 주.

그 단어가 머릿 속에 메아리쳤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약조한 훗날의 시간이, 나에겐 오지 않을 순간이라고 생각하자 가슴 한 편이 시렸다.

말해야 할까,
말해야겠지.
이러나 저러나 그녀와 함께한 시간도 결코 적진 않았으니.

"아야 씨."

"네! 무슨 일이시죠? 신문에 오탈자라도 있는 건가요?"

설령 현실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저 활기찬 목소리는 그리운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안에는 손가락 마디만한 금편이 들어 있었다.

"받으세요. 오늘 신문 값이에요."

"응? 신문 값이요? 구독료는 분명 월 초에 받았을 텐데..히, 히얏...!"

작긴 하지만 순도 높은 확실한 금이다. 반짝거리는 치장품이나 보석을 좋아하는 까마귀 텐구에겐 그 가치가 더욱 높을 터. 금편을 받아든 아야는 귀여운 비명과 함께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뭐, 뭐뭐..뭐에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당신같은 수전노가 저한테 이런 걸...잘, 잘못 준 건 아니죠? 이거 금이라구요?"

예상했던 반응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녀가 퍽 귀여웠다. 날개가 쉼없이 달싹거리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났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제대로 준 거 맞아요. 지금까지 이런 먼 곳까지 신문을 가져다 주신 수고비도 겸한 거니까, 부디 받아주세요."

"저..정말..요? 아무리 제 신문이 환상향 제일의 정보통이라고는 하지만..흐흥, 뭐 이런 것 까지..."

웃음을 숨기지 못하던 그녀는 내 옆까지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더니 은근하게 팔짱을 걸어왔다. 블라우스 너머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팔뚝에 닿았다. 그녀는 뜨거운 숨결을 목덜미에 불어넣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녀 나름대로 최소한의 서비스인걸까. 이젠, 필요 없다만.

"이거 차암, 우리 구독자께서 갑자기 무슨 일이실까...? 평소엔 인사해도 나와보지도 않았으면서...갑자기 이렇게 예쁜 짓을 하시구...혹시 저한테 관심이라도 생긴 건가요?"

혀가 꼬이는 애교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남자의 혼을 빼놓을 만큼 치명적인 유혹이었지만, 체념의 감정밖에 남지 않은 나의 마음은 그런 것에 흔들리지 못했다.

"아야 씨."


"네에, 여기 있답니다. 왜 그러시나요?"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길게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그녀는 나의 제안에 흠흠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꼬았다.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을 보아하니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흐응~ 어떡할까요오..이래 봬도 저는 꽤 바쁜 몸이라구요? 신문을 만드느라 매일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하지만...그래도 붕붕마루 애독자께서 간절히 부탁하신다면야 하루 정도는 어울려드릴 수도 있는데..."


'알았다'라는 말을 저렇게 장황하게 늘릴 수도 있던가. 나는 시간을 끌지 않기 위해 구태여 다시 말을 꺼냈다.


"부탁드려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거든요."


"...헤에, 어떤 말씀이시길래 그렇게 분위기를 잡으시는 건가요? 혹시 고백이라도 하실 생각이라면 조금 더 낭만적인 곳에서 하는 편이 좋을 텐데요?"


그녀는 장난스레 키득거리며 내 뺨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나는 준비해뒀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로 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아야 씨."


장난기가 다분한 그녀의 예쁜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보다도 나의 덧붙임이 빨랐다.


"일주일 뒤에 떠나거든요. 저."


내지르듯이 뱉어버린 그 네 마디 뒤에 따라온 것은.



"...예?"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불안정한, 한 소녀의 되뇌임이었다.


***


다음화 https://arca.live/b/regrets/43555613?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