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새로 써왔습니다. 몇편으로 완결낼진 모르겠는데 완결은 꼭 내겠읍니다.

추천하는 곡
https://youtu.be/M7FH1dL51oU

사유: 이게 어울림

1편 링크
https://arca.live/b/yandere/765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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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떨한 정신줄을 부여잡고 문을 나섰다. 늦여름의 뙤약볕이 그대로 내려쬐는 오후. 늘어지는 매미 소리만이 귀를 울리는 가운데, 지혜가 어디로 간건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카톡방에는 1이 꼬다리로 달린 독백만이 줄을 잇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이 모든 사단의 원흉, 자연대 2호관 305호에. 사실 원흉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웃기긴 하겠지. 지혜의 마음속 어둠을 여태 채 알아채지 못한 내 잘못이 제일 클 터다. 선배의 전화는 굳이 따지자면 촉매 정도겠지.

"죄송합니다. 좀 일이 생겨서.."

"일?네 여친이 널 아주 죽이려고하던데..양다리 걸쳤다는게 드디어 걸린 모양이야?"

양다리는 개뿔. 애초에 이 학교에서 사회적인 관계를 구축했다고 자신하는건 오직 한 사람뿐이다. 지혜, 오로지 그 애뿐, 다른 사람과는 말 한번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다. 다만 오늘의 일로 유이한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빨리 끝내놔. 교수님이 샘플 실습때 쓰실거라고 하니까. 하는 방법은 알지? 괜히 늦장부리다 여친이랑 갈때까지 가지말고."

파이펫으로 열심히 샘플을 따는 와중에 간혹 짖궂은 말을 던져대는 선배 때문이다. 지혜가 고함치는 목소리가 그대로 들린 모양. 언뜻 심한 욕설까지 섞여있었음에도 당사자에겐 그저 재밌기만 한 듯 싶었다.

"걔가 본 여친이면 양다리 걸친 애는 누구야? 우리 과? 너네 학번중에 CC는 없던걸로 아는데."

평소에는 과묵하게 일만 하는 타입이었을터다. 분명 그랬을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재잘거리는 선배.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시원하게 불을 질러버린다. 박사과정 한 명을 제외하면 오직 둘 밖에 없는 작은 랩, 그나마 박사과정생도 지금은 자리를 비운 상태다.

"듣기로는 아주 카사노바던데 이번 여친 갈아치우면 또 누굴 꼬시려고? 나는 꼬시지 말아줘. 괜히 깨졌다간 실험실 나가야하잖아. 난 여기가 맘에 들거든."

"선배, 죄송하지만 지금은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날 선 나의 대답에도 선배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나간다. 이런 사람인줄 알았으면 당초부터 이 랩엔 들어오지도 않았을텐데, 과생활을 안한 후유증이 여기서 밀려온다.

"나도 농담 아닌데. 너 나름 생긴건 괜찮은것 같은데, 성격은 영 그래. 무엇보다 좆대가리 막 놀리는게 좀.."

억울함과 분노가 밀려오지만 꾹 눌러담는다. 이런 타입은 반응해주면 더 신나서 날뛴다는걸 경험적으로 알고있으니까 그렇다. 기나긴 의무교육 시절에 늘상 당해왔던 거니까.

일방적인 대화를 빙자한 괴롭힘을 얼마나 버텼을까, 지긋지긋한 샘플도 어느덧 끝을 보인다. 결국 30분의 묵언 수행 끝에 바닥을 보인 통.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내게 재미없다는 듯한 말투로 일을 하나 더 얹어준다.

"가기전에 아가로스 젤 좀 만들고 가. 다 떨어졌더라. 그건 금방 만드니까 괜찮지?"

아가로스 파우더, 버퍼 따위를 대충 감으로 때려박고 휘저었다. 소용돌이가 이는 가운데, 이런 구멍만 보면 괜스레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 가끔은 내 인생도 이런 회오리 속으로 빠져버렸으면 하니까.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최소한 용오름에라도 휩쓸리고 싶은 날.

젤을 만들고 자리에 돌아오자 선배는 사라지고 없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연구실, 창밖에서 붉은 노을이 불꺼진 방 안을 가득 메운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아직도 카톡을 읽지않은 지혜의 일뿐.

복잡한 심정을 품고 집 앞 골목까지 들어선 순간, 맛있는 냄새가 풍겨온다. 집 근처의 누군가가 거하게 요리라도 하는지 문 앞에 설때까지 사라지긴커녕 강해지기만 하는 냄새. 예측하지 못했던건 문을 열자 그 냄새가 퍼져나왔다는 점. 그리고 지혜가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는 광경이다.

"왔어? 그래도 생각보단 빨리 왔네. 장은 그냥 내가 봤어. 괜히 화내고 나가버린게 좀 미안해서 헤헤.."

바로 몇 시간 전의 귀기 서린 눈빛은 간데없는 부드러운 눈빛,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고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대비가 저릿하게 공포심을 자극한다. 보조열쇠는 신발장에 넣어두었을 터. 급하게 확인해본 열쇠는 그대로 있었다.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온거야?"

"열쇠공 아저씨께 부탁드렸지. 오늘부터 나도 여기서 살건데 스페어 키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또 저 눈빛이다. 입가는 웃고있지만 눈이 웃지않는 그런 눈빛. 아까 내게 답을 강요하던 눈빛이 이젠 묵인을 강요하고 있다. 반론따윈 허용하지 않겠다는듯. 그러곤 지혜는 천연덕스럽게 내 가방을 받아들었다.

"일단 짐풀고 밥부터 먹자. 갈비찜 했으니까 식기전에 먹어ㅇ..이게 뭐야?"

신난 말투로 떠들던 지혜의 목소리가 일순간에 낮아져버렸다.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 내게 들이대는건 가방 한 쪽에 붙은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이었다.

"여친이랑 잘해봐? 이하선,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거야?"

필시 선배의 작품일터. 내가 아가로스 젤을 만들러 간 사이 붙여놓고 갔을게 선하다. 분명 나쁜 의도로 붙인건 아니었겠지만 지혜에겐 다르게 보이겠지. 지혜는 가방을 던져버리곤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치던 내 뒤로는 침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분명 나보다 체구는 작은 지혜, 하지만 그 기세만큼은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침대 위로 주저앉자 옷깃을 움켜쥐는 지혜, 그러더니 나를 밀어서 눕힌다.

"진짜 아니야. 니가 생각하는거 진짜 아니니까! 너도 잘 알잖아. 나 과생활 안하는거, 그냥 연구실 선배가 켁,커억"

"개새끼, 씨발새끼, 좆같은 새끼..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밖에 없다고 했잖아. 나만 있으면 되는거잖아!"

지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목을 조르고있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내 볼과 목에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와중 폐와 온 몸에선 산소를 달라고 아우성친다.

"지ㅎ,지혜야. 진짜 아냐..내가,내가 다 설명할게. 케에엑,"

"그래, 니 잘못이 아니라 그년이 꼬리친거겠지. 착한 하선이가 날 배신할리 없지. 걸레같은 년이 감히 누굴 꼬시려고."

그러면서 손아귀에 준 힘을 살짝 푸는 지혜. 그 약간의 틈으로 산소를 힘껏 빨아들였다. 하지만 허락된 시간은 5초 남짓. 고사리같은 손에서 나올거라곤 상상하기 힘든 우악스러운 힘이 내 기도를 짓누른다.

"그러면 증명해봐. 아까 전엔 도망쳤지만 진짜 나만 보는거라면 증명할 수 있잖아. 그렇지? 응?"

그러고는 드디어 내 목에서 손을 떼는 지혜. 밀렸던 숨을 몰아쉬느라 도저히 이성적인 생각이 나오지가 않는다. 아직도 몽롱한 상태인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는 수밖에

"허억,허억..흐으..어떻게 증명을 하면 되는거야?

"키스해. 그딴 더러운 창년이랑 말 섞은 혀는 필요 없잖아? 그러니까 키스하란말야. 지금 당장!"

지혜는 악을 쓰며 내뱉었다. 그러고는 채 무언가를 말 할 새도 없이 입을 채우는 부드러운 감각. 혀를 감싸안는 고기같은 감촉이 내가 지금 지혜와 키스중이라는 사실을 겨우 일깨운다.

숨이 막혀 겨우 떼어놓으려하자 몸을 더욱 밀어붙이며 방해하는 지혜. 겨우 입을 뗀 것은 체감상 10분도 더 지나서였다. 서로의 입가에 길게 가교처럼 이어진 침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나에게 지혜가 다시금 애원해온다.

"한번 더, 한번 더 하자. 응?"

그러고는 다시 한번 수락의 말도 없이 합쳐지는 두 개의 입술, 다행인 점은 이번엔 비교적 짧았다는 것이다. 그러고서야 조금은 진정한 것같은 지혜. 하지만 어리광부리는건 매한가지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내가 그만하라고 할때까지 안아줘."

"사랑혜 지혜야. 지혜야. 진짜, 진짜 사랑해. 그러니까 좀 믿어줘. 진짜 너밖에 없으니까."

"계속 해. 계속 사랑한다고 해달라고."

고개를 푹 숙인 지혜. 살풋 드러난 귀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멈추지 않고서 한참을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서야 사그라드는 호흡. 그렇게나 악을 써댔으니 잠이 와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나 역시도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수마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가 제발 꿈이기를 바라면서

"그 암캐년은 죽여버릴거야..죽여버릴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