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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농부였던 기사에게 (2)

 

 

 


 

그들은 남쪽으로 향했다. 고향에서 도망쳐 그녀가 가본 적 없는 낯선 땅으로.

 

현상수배서가 걸려 마을이나 도시에 갈 순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루크마이어는 이미 이런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몇 가지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어……우리 여기서 살아야 돼?”

“싫으면 땅바닥에서 자.”

“그건 더 싫어!”


그곳은 아무도 모르는 장소, 한 때 루크마이어의 스승이 검술을 가르치려고 사용하던

 

동굴이었다. 바로 옆에 폭포가 있어 물을 구하기 쉽고 위험한 괴물들도 거의 없었다.

 

“일단 들어와. 안에 물건들이 멀쩡할지 모르겠군.”


“옛날에 여기서 살았어?”


“수련 장소로 쓰던 곳이야. 그것도 벌써 20년 전이지만.”


안에선 나무 썩는 냄새가 났다. 그녀가 안을 들여다보니 한 때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이

 

분명 남아있었다. 그러나 침대나 가구 모두 오래 전에 썩었다.

 

“전부 버려야겠군. 어차피 며칠만 머무르다가 국경을 넘어갈 거니 참아.”


“국경을 넘는다고? 외국으로 도망치는 거야?”


“네 얼굴이 알려졌어. 어딜 가도 오래 숨어있진 못할 거야.”

 

“어디로?”


“크릭……그곳도 여의치 않으면 사막으로 간다.”


“사막!? 그, 이교도들이랑 같이 살라고? 그 사람들은 우리랑 문화도 완전 다른데?”


“익숙해지면 그만이지. 자, 얼른 도와줘.”


“이래 뵈도 나 공주님인데…….”


“넌 그냥 엘리자야. 공주도 여왕도 아닌 평범한 여자애. 그게 너야.”


두 사람이 힘겹게 동굴 안을 청소했다. 몇 시간이나 이어진 청소가 끝나니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편히 쉴 시간 따윈 없었다.

 

“근처에서 작은 동물 몇 마리만 잡아오마. 넌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혹시 추적자가 오면?”


“도망쳐. 절대 붙잡히지 마.”


그가 사냥을 하러 숲으로 나갔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곳은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뭘 잡을까 고민하며 돌아다니던 중, 그는 어느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이건…….”


나무껍질엔 ‘부모는 달라도 우리는 형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20년 전, 그가 사형 조나스와 함께 새긴 문구였다. 

 

“……형님, 제가 정말 옳은 길을 걷고 있는 겁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루크마이어가 나무에 문구 하나를 더 새긴 후 돌아섰다.

 

‘그러나 운명이 우리를 갈라서게 만들었도다.’

 

 

 

 

 

 

 

 

*****

 

 

 

 

 

 

 

 

“잡았다.”


그가 토끼의 귀를 잡아 들어올렸다. 나뭇가지와 끈으로 만든 간단한 함정이었지만

 

토끼 한 마리 정돈 거뜬하게 잡을 수 있었다. 이걸로 둘이 나눠먹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미 해가 져 주위가 깜깜했다. 너무 어두워지면 괴물에게 기습당할지도 몰랐다.

 

루크마이어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 동굴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굴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불은 피우진 않았을 텐데, 엘리자가 한 건가?’

 

그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검을 뽑았다.

 

“오, 왔는가. 자네도 나이를 먹긴 먹었군 그래?”


“……막시무스 대장.”

 

벌써 20년이나 지났거늘 그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나이는 벌써 일흔을 넘었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었으나 기백은 여전했다. 뾰족뾰족하게 솟아오른 짧은 머리카락도

 

변함없었다. 검을 들지 않는 사자의 송곳니, 막시무스 그라우카토.


“저, 나는 그게……이 사람이 온 줄도 몰라서…….”


찰나의 순간 동안 루크마이어는 어떻게 해야 막시무스를 죽일 수 있나 생각했다.

 

기습한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정면 승부, 주위에 병사가 매복해있다면 자살 행위다.

 

도망친다. 엘리자를 두고 그딴 짓은 할 수 없다.

 

“거 눈에서 힘 풀게. 나이는 먹어도 그 눈은 여전하구먼.”


“우릴 잡으러 온 거 아닙니까?”


“아직은. 난 여기 손님으로서 왔네만, 설마 공격하진 않겠지?”


손님의 규칙. 그것은 먼 옛날부터 전해진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손님으로서 온 자를 해치는 것은 삼류 이하의 짐승이나 하는 짓, 한 때나마 기사였던

 

루크마이어가 그런 불명예스러운 만행을 저지를 순 없었다.

 

“술이랑 먹을 것도 좀 가져왔지. 자, 어서 먹지.”


“독을-”


“아 자네는 내가 그딴 모리배라고 생각했나? 이거 참 실망이군.”


그럴 리 없다는 건 루크마이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엘리자에게 눈짓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우릴 어떻게 찾았습니까?”


“왕국에 무녀가 한 명 있다네. 무슨 미래랑 과거를 본다는데, 꽤 신통해.”


“그럼 왜 우릴 잡지 않는 겁니까?”


“아, 천천히 좀 하게. 자, 여기.”

 

막시무스가 모닥불에 구운 고깃덩이를 엘리자에게 건네주었다.

 

“저, 이 분은……?”


“황금 사자단의 송곳니, 막시무스 그라우카토. 못난 신하가 공주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가 엘리자에게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송곳니 자리에서 안 내려오셨습니까? 아드님은?”


“아- 크라수스? 그 녀석은 죽었네. 트롤이 몸을 갈라버렸지.”


“유감입니다. 좋은 녀석이었는데.”


“다 자기 운명 아니겠는가.”


그가 술병에서 술을 따라 루크마이어에게 건넸다.

 

“나도 이제 나이가 일흔인데 아직도 날 이길 수 있는 기사가 없다네.”


“로멜드는?”


“자네 부관이었지? 그가 지금 발톱일세. 자네 뒤를 바로 이었지.”


그렇군, 아직 살아있었나. 루크마이어가 술을 마셨다.

 

“나는 자네를 설득하러 왔네. 벌써 우리 기사 두 명을 죽였다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경솔하게 자네 앞에서 방심한 탓이지. 이 세상은 약육강식, 죽인 자에겐 죄가 없어.”


오직 죽은 자가 약했단 죄만 있을 뿐. 막시무스가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지금 항복하고 날 따라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하지만 엘리자는 여왕이 되겠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것뿐.”


“아뇨,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막시무스가 껄껄 웃었다. 

 

“얼굴도 몸도 변했거늘 그 성격은 전혀 안 변했군. 자넨 옛날부터 고지식했지.”


“절 죽일 겁니까?”


“오늘은 아닐세. 하지만 내일 아침, 그 때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아빠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엘리자가 말했다. 막시무스가 다시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 그것이 공주님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저희 두 사람이 정할 일입니다.”


“하지만-”


“막시무스의 말이 옳다. 네가 어찌할 문제가 아니야.”


그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로이어 전하께선…….”

 

“전하께선 2년 전에 돌아가셨네. 그 분답게 복상사로 가셨지. 으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그 뒤였네. 로이어 왕께선 첩만 들이고 왕비를 새로 들이질 않으셨어. 아마

 

이전처럼 간섭당하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그 뒤엔…….”

 

“첩과 그 자식들이 내전을 벌였군요.”


“아주 장관이었지.”


막시무스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매일 사람이 죽어나갔다네. 암살자를 고용하고, 독을 타고, 목을 조르고, 불을 지르고-

 

그 덕분에 우리 기사들도 휘말려 몇몇이 죽었지. 매달 서른 명씩 죽어나갔어.”

 

“지금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들끼리 싸우다 자멸했지. 마지막 두 명이 같은 날에 서로 암살자를 보냈거든.”


어리석은 최후다. 그는 술을 털어 마시며 생각했다.

 

“결국 후계자가 될 사람이 없어졌고, 몇몇 군인들이 반역을 일으켰으나 제압당했지.

 

이 나라엔 왕이 필요해. 누구든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그게 엘리자란 말입니까?”

 

“공주님 이외엔 아무도 없어. 지금은 모두가 절박한 시기일세.”

 

“엘리자는 안 됩니다.”


“하여간 말이 안 통하는군!”


막시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혹시 공격할까 한시도 검에서 손을 떼어 놓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지. 부디 생각을 바꿔주게, 루크마이어 군.”


“제 마음이 변할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마음 따윈 없어.”


그가 동굴을 떠났다. 루크마이어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어쩔 거야, 아빠?”


“도망쳐봤자 곧 쫓아오겠지. 상대하는 수밖에 없어.”


“병사들을 데리고 오진 않을까?”


“내가 아는 막시무스라면 그럴 일은 없어.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남자니까.”

 

내일, 둘 중 한 사람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아무리 늙었더라도 막시무스는 기사들 중에서

 

단연컨대 최강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40년이나 대장 자리를 지킬 순 없었을 테니.

 

“역시 내가 여왕이 되면-”


“그런 소리 다신 하지 마. 못 들었어? 여왕이 되면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돼.

 

권력을 위해 가족을 죽이고, 의심하고, 싸우고……그러다 어느 날 죽겠지. 끔찍하게.”

 

“난 아빠랑 함께라면 뭐든 상관없어.”


엘리자가 그를 껴안았다. 루크마이어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잡히면 난 반역자로서 처형당하겠지. 그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아빠는, 엄마를 살리려고 한 것뿐이잖아!”


“이유나 의도는 중요치 않아.”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기사에겐 충성 아니면 반역뿐.

 

“나는 반역자야. 엘리자.”

 

 

 

 

 

 

 

 

*****

 

 

 

 

 

 

 

 

 

 

“도망치지 않았군 그래.”


“그럴까 했는데, 영감님 쫓아오기 벅찰 것 같아서 그만뒀습니다.”

 

“크하하하! 하여간 깐죽거리는 버릇은 못 고쳤어.”


막시무스는 독특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두터운 의복에 철갑을 덧댄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건틀릿이 가장 특이했다. 건틀릿의 양옆과 바깥쪽에 칼날이 달려있었다.

 

“저건……?”

“무도가 막시무스. 검을 쓰지 않으며 자신의 몸으로 싸우는 자.”

 

“이 짓도 이젠 못 해먹겠네. 허리가 아파서.”


그가 자세를 잡았다. 검을 쓰지 않는 건 그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막시무스는 온 몸이 무기,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고 부수는 무술을 사용한다.

 

루크마이어가 두 자루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몸을 숙이며 자세를 잡았다.

 

“와라, 반역자.”


그가 단숨에 앞으로 치고 나가며 매섭게 찔러댔다.

 

막시무스가 팔을 들고 그것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섰다. 

 

“예전보다 예리해졌군!”


막시무스가 날아오는 검을 두 손가락으로 잡은 후- 다른 팔로 주먹을 날렸다.

 

“!”

 

하지만 루크마이어가 곧장 반응하여 검으로 주먹을 막았다.

 

“은둔 생활하면서 좀 약해졌나 했는데…….”


“하루도 훈련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우리 애들보다 훨씬 성실하잖나, 루크마이어 군!”


그가 크게 몸을 비틀며 베었다- 막시무스가 팔로 방어했으나 곧장 이어지는 추격타에

 

비틀거렸다. 20년 전보다 속도, 힘, 기술 모두 성장했다. 무엇보다도 이전엔 반격과

 

방어에 주력하던 검술이 지금에 이르러선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변했다.

 

다시 루크마이어가 예리한 참격을 날렸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에 막시무스가

 

그의 검을 붙잡아- 있는 힘껏 꺾어 부러트렸다. 부러진 날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걸로 하나-”


동시에 막시무스가 몸을 떨었다. 검이 부러지는 순간에도 반대편의 검이 그의 

 

오른쪽 다리를 베었다. 막시무스는 깨달았다, 이건 일부러 ‘부러뜨리게 한 것’임을.

 

“이걸로 한쪽.”

 

루크마이어가 등 뒤에 숨겨놓은 단검을 꺼내며 말했다.

 

 

 

 

 

 

 

 

 

 

 

 

 

 

 

프로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긴 한데 난 그럴 수 없다는 걸 옛날에 깨달음

이유야 많지만 장편 못 쓴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