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고된 하루다.

 

할 일은 많고, 일은 위험하고, 그런 하루의 고됨을 이야기해서 풀 수 있는 친구는 없다.

 

해는 졌지만 8월의 공기는 무덥기 그지없었고, 안전을 위해 두껍게 만들어진 다용도화는 땀으로 가득 차 불쾌했다.

 

지금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게 땀인지 공기 중의 수증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축축한 날씨에 맥주 한 잔이라도 하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지만, 이야기 할 친구도 없는데 술집에 같이 갈 친구가 있을 리가.

 

나에 대한 이런 저런 불만을 토하며 편의점에 들어가 평소에 자주 마시는 맥주를 집으려고 하니 손끝에서 맥주 캔의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 대신 부드러운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몸이 한참 지쳐서 자주 마시는 맥주가 진열된 위치만 확인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지라 완전 의외의 것이 손에 닿아서 조금은 놀랐다.

 

몸에 힘을 빼서 구부정한 상태로 대충 고개만 드니 한쪽 팔에 다양한 술로 가득 채워진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여성이 나보다 먼저 맥주를 집었고, 나는 그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양보했겠지만 내가 마시려던 맥주는 그게 마지막이었고, 날씨가 날씨인지라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어도 불쾌감은 여전했다.

 

“죄송하지만 이거 제가 먼저 집었는데요?”

 

“하나쯤 양보하면 안 되나요? 이게 마지막 캔이잖아요, 그 쪽은 이걸 실험 삼아 사는 거지만, 나는 다른 걸 마시고 싶지 않다고요.”

 

술을 한 가득 사는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하늘하늘한 치마 아래 하이힐이라도 신었는지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여성은 곤란하다는 듯 작게 콧소리를 내었다.

 

나긋나슥하고 몽환적인 목소리는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지만 정신이 흐려지는 것 같아 썩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편의점의 찬바람 덕분에 땀이 식어 불쾌감도 줄어드니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어 이번만큼은 내가 양보하기로 했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다른 맥주를 찾자는 생각으로 다른 곳을 찾고 있으니 볼에 차가운 금속이 순간적으로 와 닿았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라 순간적으로 몸을 떼고 거리를 벌리니 방금 장바구니에 맥주를 담은 여자가 한 손에 내 얼굴에 가져대 댄 맥주캔을 들고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이거 은근히 괜찮은데 마셔보실래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할법한 장난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웃는 얼굴에는 짜증마저도 낼 수 없었다.

 

“방금 그 맥주하고 맛은 비슷한데 뒷맛이 더 깔끔하니까 후회하시지는 않을 거 에요. 처음 사는 거라서 망설여지신다면 양보 받은 대가로 제가 하나 사드리죠.”

 

내가 뭔가 사양을 하거나 직접 산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자는 자신이 추천한 맥주를 가장 먼저 계산하고는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너무 빠른 상황의 전환에 당황스럽기 그지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으니 여자는 직접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당겨 자신이 준비한 자리에 반 강제로 앉혔다.

 

“아니, 꼭 사주실 것 까지는 없는데 말이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실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같이 마실 사람은 없잖아요? 술은 원래 같이 마셔야 좋은 법이라고요.”

 

나는 슬쩍 발을 빼서 혼자 마시려고 했지만 보드에 핀으로 메모를 고정시키듯, 여전히 몽환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은 자신이 한가득 구입한 맥주의 첫 번째 캔을 열었다.

 

만약 캔이 담겨있는 봉투를 내려놓고 하나를 열었다면 본인도 하나만 마시고 간다는 뜻이겠지만, 봉투가 테이블 위에 반쯤 벗겨진 상태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앉은 자리에서 전부 마시고 갈 것 같았다.

 

“혹시 그걸 다 마실 생각은 아니겠죠?”

 

“아뇨, 다 마실 생각 맞아요. 저도 아직은 부족하다만 양조사니 새로운 술을 마시면서 공부할 필요도 있으니까요.”

 

“매일 그렇게 마신다면 사람보다 간이 먼저 죽을 걸요.”

 

내가 캔을 따며 애매하게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여자는 키득거리며 한 순간에 캔 하나를 비웠다.

 

“그런 걱정을 해주시는 건 당신이 처음인 것 같네요. 제가 술 때문에 몸을 버린다고요?”

 

“그야,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면 당연히 몸을 버리죠. 제가 의대는 안 나왔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내가 가볍게 한 모금을 마시니 캔에 남아있는 내용물을 전부 비우고 새로운 캔을 딴 여성은 여전히 키득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지만 눈이 마주치니 자연스럽게 내 시선도 그 눈을 피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이건 어때요? 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마실 테니까 내일부터 만나서 제 몸이 망가지는 지 확인하시는 거 에요. 그러면 정말로 망가지는지 아닌지 확인하실 수 있잖아요?”

 

말은 만취한 사람이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의 입에서 본인도 모르게 흘러나올 법한 내용이었지만 아무리 보더라도 내 앞에 여자는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빠른 시간동안 500ml 한 캔을 완전히 비웠음에도 취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목소리를 듣고 있는 내가 더 취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몽롱했다.

 

정말로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만취해 본 적은 없었지만 손에 들고 있는 맥주 캔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무뎌지고, 앉아 있는 딱딱한 의자가 소파처럼 푹신하게 느껴졌다.

 

빛이 맛으로 느껴진다.

 

쌉쌀한 맛의 감촉이 느껴진다.

 

차가운 감촉의 향이 난다.

 

술의 향이 들리고, 음악소리가 눈에 보인다.

 

술이라고는 딱 한 모금만 마셨지만 만취 이상을 넘었는지 감각이 모조리 뒤틀려 버렸다.

 

하지만 구토를 할 것 같거나 불쾌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황홀한 감각만이 뇌를 가득 채웠다.

 

“나쁘지 않네요. 그쪽 말대로 같이 마실 사람도 없었는데 잘 됐죠.”

 

가까스로 정신을 잡기는 했지만 여전히 뒤섞인 감각에서 오는 쾌락은 사라지지 않았고, 입이 다른 사람의 지배라도 받는 것처럼 제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좋아요, 그러면 내일부터 여기로 오는 거 에요. 꼭 여기에서 마실 건 아니지만 만나는 건 여기에서 만나자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얼마 뒤 고개를 들어보니 내 맞은편 있는 자리에는 비어있는 캔 무더기만 남아있었다 .

 

집에 돌아오니 방금 있었던 일이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속된 말로 만취해서 필름이 끊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도 되었지만 그런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몸의 상황이 너무나도 멀쩡했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누군가와 만나자고 했던 것과 희미하게 기억나는 긍정의 대답뿐이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가로로 벌어진 동공을 본 것 같았지만, 현실인지 술에 취한 것 같은 감각으로 인한 환각인지 파악 할 수 없었다.

 

그 이전에 그 대답도 내가 자의로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한 약속이라는 확신도 없었으니 지킬 필요도 없지 않나 싶었지만, 그때 느꼈던 그 황홀함 감각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아무리 그때 정신을 잃었다지만 돈을 잃어버리거나 장기를 뜯긴 것도 아니었으니 다시 한 번 만난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오늘도 여전히 고된 하루였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무겁거나 무더운 날씨에 그리 불쾌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느껴지는 갈증에 늘 들리는 편의점에 찾아가니 몽롱함에 흐릿해진 기억이 한 순간에 선명해 졌고, 오늘도 여전히 술을 고르는 여성이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약속을 지켜 주셨네요. 그러면 오늘도 제가 한 잔 살게요.”

 

“뭐, 좋기는 한데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예민한 것만 아니라면 대답해 드릴게요. 뭐가 궁금하신 거죠?”

 

오늘은 맥주가 아니라 편의점의 한쪽에 있는 보드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계산하고는 나를 바라보며 그 몽환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저번과 같이 몽롱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지만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는 것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여자가 내가 마실 맥주까지 계산하고는 맞은편에 앉을 때 까지 정신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도대체 누구시죠? 누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러시는 거죠?”

 

“아, 제 소개를 안 했으니 그렇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으시겠네요. 제 이름은 슈브. 술의 신 바쿠스를 섬기는 신자 중 한명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술을 사는 것도 저희 교리 중 하나거든요.”

 

“......뭐 사이비 같은 건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병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의 향을 맡고 몇 번 흡족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그 독한 술을 크게 한 번 들이켰다.

 

지금 나의 시선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이전처럼 몽롱한 상태라서 상황판단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인지 병나발을 불고 있는 모습이 조금도 추잡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게 숨을 내쉰 여성은 손끝으로 입술을 닦고는 여전히 매혹적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음에도 서서히 정신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사이비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제가 가진 도덕이나 규율은 지금하고는 약간 거리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세계를 공부하는 중인 개방적인 양조사라고 하면 될까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왜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 이야기에는 신뢰가 갔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뭐, 이것저것 따져본다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제가 겪어왔던 일을 들으면 믿지 못 하실 걸요?”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 내가 피식 웃으니 슈브도 나를 따라 미소 지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내가 조금씩 내 분량을 마셔가며 슬쩍 대화를 유도하자 자신을 슈브는 슬쩍 미소 지으며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평소에 일하는 곳이 워낙 위험이 많다보니 언제나 새로운 것에는 경계하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무엇에 홀린 것 같이 몸이 먼저 움직여 귀를 슈브의 입가에 가까이 대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가볍게 귀에 입으로 바람만 불어 넣으며 내가 들고 있는 캔에 방금까지 자신이 마시던 보드카를 섞어 넣었다.

 

“그냥 말해드리면 재미없잖아요? 그걸 전부 마시면 알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인정 해드릴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술을 마시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술을 마신다는 행위가 주는 상징성과 조금 취했을 때에 오는 열기와 붕 뜬 감각을 즐길 뿐이지, 술 자체는 그리 좋아하지 않아 독한 술은 손을 댄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호기심이 취향을 뛰어 넘었고,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슈브가 내용물을 섞은 캔을 입에 가져다 대고 단숨에 들이켰다.

 

이전에는 단순히 입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면 이번에는 나의 내장의 구조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동시에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고, 위장에는 쇳물이 고인 것 같았다.

 

몸의 혈관에 즉시 알코올이 도는 게 느껴지며 동맥 전체가 심장이 되어 펄떡이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고 있지만 않지만 뱃속에서 올라오는 술 냄새는 숨만 쉬는 것으로도 새로운 잔을 비우는 것처럼 느껴졌고,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여름의 더위가 맞물려 몸에서는 조금씩 땀이 흐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을 거칠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정리하고는 슈브를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술병에 남아있는 모든 술을 비운지 오래였다.

 

“술 자체를 그리 좋아하시는 분은 아닌가보죠?”

 

“맛만 따진다면 쓰고 맛도 없잖아요. 그냥 느낌으로 마시는 거죠.”

 

“그렇게 말하시는 분 치고는 상당히 많이 마시는 것 같으시네요. 상당히 독할 텐데 말이에요.”

 

“그거야 그 쪽 이야기가 궁금하니까 마신 거죠. 평소에 이렇게 독한 술은 안 마셔요. 그러면 약속한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솔 때문인지 계속해서 몸 안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점점 뜨거워 졌고, 뱃속에서 올라오는 술 냄새로 인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영어로 고막이 Eardrum 이라고 하는데 지금처럼 계속해서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균형 감각은 망가졌는지 여전히 웃고 있는 슈브 니구라스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는데도 앉아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바닥이 스펀지처럼 말랑거리는 동시에 몸이 붕 떠서 바닥을 밟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바닥이 솟구쳐 올라 한 순간에 벽이 되었다.

 

“저는 자격만 인정 드린다고 했지, 이야기 해드린다는 말은 안 해드렸는데요? 그보다 넘어지셨는데 괜찮아요?”

 

바닥의 미적지근한 차가움이 볼에 느껴지고는 있었지만 단순히 벽이 바닥이 되고 중력의 방향이 바뀌어 벽에 끌려 있을 뿐이지 넘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 이전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슈브는 휘적거리는 내 손을 잡아당겨 다시 바닥을 밟고 서게 해주고는 내 팔을 자신의 목에 둘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리와 부드러운 감촉에 술이 갑자기 깨는 것 같았지만, 그 동시에 또 다른 감각에 취하는 것 같았다. 

 

마치 취해있는데 거기에서 다시 취하는 것 같은 묘사할 수도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감각이었다.

 

“그래도 뭐 끝까지 다 마셨으니 조금은 알려 드릴게요. 물론 지금은 말고요.”

 

“하이힐 신고 사람 한 명을 들 수 가 있어요? 이런 일 많이 해 보셨나보네요.”

 

“하이힐은 안 신었는데요? 그보다 자택은 어디시죠?”

 

“여기서 얼마 안 떨어져 있어요. 이 길 따라서 쭉 가면 되는데 거기서 들어가면 정부에서 만든 임대 주택이 있어요..... 거기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그리고 이번에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슈브는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이 느껴진다.

 

누구에게 폭행을 당한 것도 아닌데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위장은 멋대로 발작을 계속하며 속을 뒤집어 놓는다.

 

화장실로 달려가 몇 번이고 구토를 하며 음식물을 게워내고, 냉장고에 넣어둔 물까지 다 마셔 수돗물까지 마시고 있으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방문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깨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거울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을 만날만한 꼴은 아니라서 잠시 기다려 달라 소리만 지르고 급히 입을 행구고 옷을 입은 뒤 벽에 기대서 문을 여니 슈브가 서 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숙취 때문에 고생하고 계시나요?”

 

“평소하고 다를 건 없는데....”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벌리니 그대로 다시 구토가 올라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미 뱃속에 있는 내용물은 대부분 비워내서 건더기라고 부를만한 고형물이 섞인 게 아닌 누런 위액만 올라오고 있었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더 나올 것이 없어 그대로 변기 옆에 주저앉아 낮게 신음소리만 내고 있으니 어느새 슈브 니구라스가 들어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걸 좀 마셔요. 훨씬 좋아질 거 에요.”

 

일단은 반쯤 정신이 나가있어 멋도 모르고 건네는 것을 받았지만 받은 유리병에 들려있는 액체는 불길할 정도로 검고 점성도 높아 액체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병을 열었을 때 나는 냄새는 달큰하기도 하고, 동시에 피비린내 같은 냄새가 나기도 했다.

 

“이걸 마시라는 거 에요?”

 

“네. 보기와는 달리 위험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적어도 뭐로 만든 건지는 알려 주실 수 없나요?”

 

그 질문에 슈브 니구라스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그녀를 불신하고 싶지는 아니었지만 타인 이상 친구 미만의 사람에게 의심스러운 액체를 받고 마시라 하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녀가 나를 죽일만한 이유는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원망을 살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고, 이렇게 생긴 여자와 엮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의심스러운 액체를 준 것일까.

 

내가 앉아서 계속 머뭇거리고만 있으니 슈브는 자세를 낮춰 나와 눈을 맞췄다.

 

“이상한 걸로 만들지는 않았어요. 모두 당신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재료니까 걱정 하실 것 없어요.”

 

순간 그녀의 동공이 염소처럼 가로로 벌어진 것 같았지만 그 눈에서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알고 지낸 시간은 짧더라도 꽤나 재미있는 술친구이니 한 번 정도는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병을 들어 끈적거리는 액체를 삼켰다.

 

뭔지 모르게 꿈틀거리는 느낌이 목구멍에서 느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직접 위산이 할퀸 식도를 어루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편안함이 몸에 감돌기 시작했고, 뒤틀리는 위장은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멈췄다.

 

쾅쾅 울리던 머리는 금세 잠잠해졌고, 액체가 지나간 자리는 촉촉하게 젖어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 보다는 방금 마신 액체 자체가 살아 있어 몸 안에서 뭔가 장난을 친 것 같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고, 몸은 금방 진정 되었다.

 

“확실히 좋기는 하네요. 근데 무슨 일로 여기 오신 건가요? 이걸 건네주시려고요?”

 

병을 돌려주고 약간 떠있는 머리를 바로 잡고 있으니 그녀는 약간 놀란 듯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져 명함을 꺼냈다.

 

“아, 깜빡 할 뻔 했네요. 이거 받으세요. 혹시 오늘도 마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편의점 말고 그 쪽으로 와 주세요. 무리라면 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번에는 약간 사무적인 느낌도 나네요. 근데 정말 그거 때문에 오신 건가요?”

 

“그렇죠. 혹시 다른 거라도 바라셨나요?”

 

내가 시선을 내려 명함을 읽고 있는 도중 그녀는 내 턱을 잡고는 살짝 들어 반강제로 눈을 마주쳤고, 그대로 이마를 맞대었다.

 

덕분에 호흡이 완전히 멈춰버렸고, 내 상의 아래로 천천히 손이 들어오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술을 마신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기 시작해서야 그녀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에요. 저는 그저 같이 술을 마셔 주는 게 고마워서 대접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걱정 말고 오셔도 좋아요.”

 

손으로 인사하며 화장실을 나선 그녀는 집안에서도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신발을 신고 남에 집에 들어 오냐고 지적을 해야 했지만 아직 내 정신은 그런 지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돈 되지 않았다.

 

 

 

그녀가 건네주었던 검은 색 액체는 분명히 효과가 있던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나 갈증을 유발하는 숙취는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고, 오히려 완벽한 몸 상태라는 말마저도 모자랄 정도로 가볍고, 말끔했다.

 

과도할 정도로 효과가 좋아 의심마저 들었지만, 그런 약이라면 상당한 가치가 있을 테니 그런 것을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주었던 그녀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의심하지 않는 것과 계속해서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는지, 일을 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과 가로로 벌어진 동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달리 나의 실제 행동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거의 정지 수준이었는지 지금까지 일을 하며 들어온 핀잔 보다 많은 핀잔을 하루 만에 선임에게 들었고, 결국 근무 시간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근무지에서 빠져 나왔다.

 

목적지 따위는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빠르게 근무지에서 멀어지자는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던 탓인지, 나는 어느새 언제나 오던 편의점에 도착해 있었다.

 

어째서 집이 아닌 이곳으로 온 것인지 의문이 생기기는 했지만, 뭔가 더 고민하고 싶지 않으니 평소에 하던 것처럼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친 뒤, 습관적으로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마셨지만 이상하게도 맥주에서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을 마시는 것을 넘어 액체의 차가운 감촉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오늘 생긴 정신적인 피곤함 때문에 생긴 기분 탓으로 넘기고 다시 크게 들이켰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맥주의 향이나 불쾌한 알코올의 맛, 혹은 탄산의 찌릿함이나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움까지 그 어떠한 것도 확실히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다급한 마음에 다시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술이 아닌 다른 것들, 

 

일단 맛과 향을 가지고 있는 식품이란 식품은 하나씩 집어 들어 먹어봤지만, 이번에는 누군가 위장을 걷어차는 것 같은 구역질이 올라와 삼키지도 못하고 전부 길바닥에 토해 버렸다.

 

몇 번이고 다시 씹고 먹는 것을 시도해 보았고, 구역질을 참고 삼켜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억지로 삼키려 할 때마다 식도가 조여들어 역겨운 음식물로 인해 파열해 버릴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뱉어내야 했다.

 

알코올이 들어있는 주류를 제외한다면 입에 담는 것마저 고문이었고, 그나마 마실 수 있는 주류는 어떠한 감촉도 주지 못했다.

 

포만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갈증도 해소되지 않는다.

 

독하던지, 순하던지, 다른 향이 있든지 없든지, 탁하던지 맑던지 있는 대로 전부 마셔보았지만 희미한 취기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후 삶의 모든 것은 고통으로 바뀌어 버렸다.

 

병원에도 찾아가보고, 비싼 돈을 들여서 뇌 촬영이나 뇌파검사까지 해보았지만 의사라는 작자들은 어떠한 이상도 찾아내지를 못했고, 정신과로 가보라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봐도 이런 종류의 미각이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 뿐 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라는 것이다.

 

과학이나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것 말고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정말 며칠간 폐인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죽을 생각으로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지만, 허기와 갈증만 가중될 뿐이었고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매일 아침 화장실 거울에 서서 내 모습을 살펴보았지만,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딱히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매번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자세로 자신을 찍어보지만, 1분전에 찍은 사진과 일주일 전에 찍은 사진도 구별할 수 없었다.

 

머리를 잡아 뜯으며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무엇이 시작인 것일까를 고민하던 찰나, 현관문 근처에 놓인 작은 유리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지만, 그 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검은색 액체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억을 잘 되짚어본다면 모든 시작은 그날 부터였다. 정확히는 모든 것이 시작한 날의 시작이 그 여자가 검은색 액체를 가지고 내 집을 찾아온 것 이었다.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에 집에 있는 바지의 주머니를 모두 뒤져 구겨져있는 명함 한 장을 꺼내고는 대충 옷을 차려 입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방문하기 이전에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모든 것을 해결하던지, 아니면 모두 죽던지. 이제 마지막을 볼 때가 되었다.

 

 

 

겨울이었다면 외투 같은 것에 권총을 숨길 수라도 있었겠지만, 여름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대충 권총을 우겨넣었다. 

 

손잡이가 빠져나오고, 바지도 불룩 튀어나왔지만 신경을 끄고 주소에 적힌 곳으로 찾아가니 시내와는 어울리지 않는 꽤나 넓은 단독 주택 하나가 서 있었다.

 

대체 왜 이 곳에 저런 건물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내 몸 상태도 다를 것이 없으니 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살짝 잡고 돌려보니 별다른 저항감 없이 문이 가볍게 열렸다.

 

문이 열려 있다면 집 안에 주인이 이미 있다는 뜻이니 권총을 빼들고 천천히 들어가니 일단 차가운 공기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한기 보다는 강한 냉방에 가까운 차가운 공기. 과거 적정온도가 전해지기 이전에 은행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바닥은 매끄러운 마루로 되어 있었고, 이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아 마치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를 쪼개어 바닥으로 만들어 둔 것 같았고, 벽에는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고풍스러운 동시에 기묘한 느낌을 주는 생물의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 몸이 떨리는 것이, 알 수 없는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낮은 실내 온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할 일이 있으니 권총을 양손으로 쥐고 천천히 집의 안쪽으로 들어가니 멀리에서 또각거리는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일단은 소리를 등에 지고 벽에 기대어 숨을 죽이고 있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이 멈추었고, 다시 발걸음이 멀어지는 때를 기다리다 슈브에게 권총을 겨누며 공이치기를 엄지로 잡아당겼다.

 

리볼버 특유의 약실이 돌아가며 공이치기가 고정되는 위협적인 철컥 소리 때문이었는지, 테이블에 와인 한 병을 올려놓고 어디론가 가려던 슈브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전에는 치마를 입고 있어서 몰랐지만 머리에 산양과 같은 뿔이 달린 그녀의 다리는 염소처럼 뒤로 굽어진 역관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끝에 달려있는 발굽은 하이힐과 같은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평소의 가벼운 치마차림이 아닌, 레이스가 달린 정장에 가까운 자주색 옷에, 소믈리에 뱃지를 달고 목에는 작은 접시를 맨 그녀는 가로로 벌어진 동공을 보여주는 모노클을 바로 잡으며 가볍게 웃었다.

 

“지금쯤 오실 줄은 알았는데, 꽤나 절박하셨나 봐요? 그런 애처로운 무기까지 들고 오시다니.”

 

“넌 대체 뭐야! 나한테 뭔 짓을 한거냐고!”

 

나는 천천히 다가가 총구를 이마에까지 가져다 댔지만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권총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당신, 그거 쏠 수도 없으면서 너무 위협하는 척 하지 마세요. 안쓰러워 보이니까요. 어차피 쏘더라도 소용없으니까 저기 자리에 앉아 주실래요? 좋은 와인을 가져올 거니까 같이 마시며 이야기 해보자고요.”

 

“도망칠 생각하지 마! 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무기라고! 한 발이면 너도 그대로 죽을거야!”

 

나는 정말로 쏠 생각으로 방아쇠에 손가락까지 올렸지만 그녀의 가로로 뻗은 동공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고, 그녀는 한 숨을 쉬며 내 손을 놓더니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저는 달라요. 당신 같은 미천한 생물과는 존재부터가 다르니까요. 그러니 조용히 제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거 에요.”

 

어조는 평범했다. 화는 내는 것 같이 높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비웃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를 마주보는 그 검은 눈에서 끝도 없는 심연을 보았다.

 

단순히 깊고 어두운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인간이 지금까지 써온 단어는 내가 목격한 심연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정도로 깊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며, 그 속에 꿈틀거리는 존재들을 가려주는 어둠에게 감사하며 두려워해야 하는, 인간 따위는 그 내부를 보는 순간 광기에 삼켜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그런 공허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안을 바라보는 순간, 심연도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 눈빛 한번 만으로 끝도 없는 공포를 넘어서는 무엇을 느껴버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은 나무 바닥에 나뒹굴었다.

 

직접 쏴보지 않았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인간이 만든 어떤 무기를 가져오더라도 저 존재에는 대척할 수 없었다.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저 심연이 풀려나는 순간 이 세계의 어떠한 곳도 저 존재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웅얼거림을 반복하며 그 곳에서 도망치고자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 순간의 공포로 인해 몸이 퇴화해 버린 것인지 직립보행 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뛰려고 몸부림치는 와중에, 다시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다른 와인 한 병을 가지고 온 슈브가 바닥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나를 보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 한 개를 꺼냈다.

 

이번에도 그때 주었던 검은 색 액체가 들어있어 나는 필사적으로 마시지 않기 위해 저항했지만, 그녀가 다가온 순간 내 몸은 생존 본능으로 인해 굳어버렸고 검은 액체는 천천히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밀려올 구역질에 대비하여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 액체는 부드럽게 나의 식도를 넘어 위장까지 들어왔다.

 

“어때요, 이제 좀 진정 되었나요?”

 

“말해봐요..... 당신은 누구시죠.....?”

 

그 검은색 액체와 함께 미치광이마냥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한 순간에 바로 잡혔고, 내 질문에 슈브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이 세계를 천천히 배워가는 양조사라고요. 그러면 나머지는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 해 볼까요?”

 

 

슈브에게서 더 이상 공포스러운 심연이 엿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내가 떨어트렸던 권총은 그녀가 가져가기는 했지만, 자신을 위협할 무기를 회수했다 기보다는 내가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압수한 것에 가까웠다.

 

그저 두려웠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그 심연에 머무르는 존재들이, 혼돈 그 자체와 다름이 없는 신적인 존재들이 두려웠다.

 

나는 어째서 그 심연 속에 있는 것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런 심연을 품고 있는 슈브는 어떤 존재일까.

 

손에 총이 들려있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으니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 관자놀이를 파버릴 정도로 강하게 눌렀다.

 

그대로 뇌를 파버리면 잊을 수 있을까. 죽을 수 있을까.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손가락에 무언가 축축하게 묻어나는 느낌이 들자 그런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는지 슈브는 조용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방금 있었던 일은 죄송해요. 이런 일이 오랜만에 있다 보니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잊고 있었거든요,”

 

“당신...... 대체 정체가 뭐죠?”

 

“방금도 말하지 않았나요? 양조사라고요 양조사. 소믈리에도 겸임을 하고는 있지만요.”

 

여전히 능청스러우면서도 조금도 무례하지 않은 목소리의 슈브는 잡고 있는 손을 놓고는 대신 크리스탈 잔을 들려주었다.

 

“가볍게 와인이라도 어떠세요?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니 꽤나 괜찮을 거 에요.”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거에 거부감이라도 생겼는지 고개가 굳어버려 돌리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간신히 눈을 한쪽으로 돌려 그녀의 손을 보자 어떠한 라벨도 붙어있지 않은 와인병이 들려 있었다.

 

“이걸 마시면 나에게 뭘 했는지 알려 줄 건가요?”

 

“천천히 이야기 해드리죠. 영원히 숨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느긋하게 병을 기울여 내가 든 잔을 채운 슈브는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는 자신의 잔을 천천히 채웠다.

 

마치 독주를 든 기분이었지만, 정말 독주라 해도 상관이 없었다.

 

죽는 것으로 심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었고 독이 아닌 진짜 와인이라 해도 어떠한 자극도 되지 않을 것이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일단은 가져온 와인을 빠르게 비우면 비울수록 이야기의 진행도 빨라질 것이니 와인이나 그 와인을 만든 양조사에 대한 예의 따위는 집어치우고 잔을 확 기울여 한 번에 내용물을 비웠다.

 

허나 식도를 넘어가는 액체에서는 뚜렷하게 감각이 느껴졌다.

 

포도만으로는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과일들의 향, 씁쓸한 동시에 달콤한 맛 그리고 끝에 느껴지는 희미한 불쾌함 같은 알코올까지.

 

지금까지 역겨움 이외의 감각이 어떤지 잊어버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에 파묻혀 버리는 것 같았고 지금까지 느꼈던 공포마저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맛이 어떠세요? 원래는 경매에 낼 생각이었지만 특별한 손님이니 준비했어요.”

 

“이전에 맛을 느끼는 것 자체가 처음인데요. 당신 덕분에 이 모양이 됐으니까요.”

 

익숙해야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감각 때문인지 잊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그대로 빈 잔을 얼굴에 던지려 했지만 가로로 뻗어있는 동공과 마주치자마자 던지려 했던 잔을 놓치고 말았다.

 

“맛이 나쁘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그보다 지금까지 술 말고는 아무것도 못 마신 건가요? 음식을 먹으려 해도 전부 토해내고?”

 

잔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슈브는 눈을 감고 크리스탈 잔의 다리를 잡아 천천히 돌리며 향을 음미하며 말문을 열었다.

 

“역시 당신이 그런 거죠? 그 점액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꽤나 심한 짓을 해버렸네요. 당신 이전에 인간을 좀 더 파악했으면 좋았을 텐데.......”

 

“저를 실험체로 썼다는 건가요?”

 

아무리 어조와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더라도 무례함을 참을 수 있는 한계는 있기 마련이었고 지금쯤 되니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얼굴에 9mm구멍 하나 쯤 내버리고 싶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순수하게 당신을 돕고 싶을 뿐이었어요. 인간이 너무 연약할 뿐이었죠.”

 

“인간, 인간. 자신과 인간을 확실히 구별할 정도로 당신이 그렇게 우월한 존재에요?”

 

그러한 심연을 품고 있고 그 안에 있는 것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면 대답은 정해진 것이었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렇게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있는 것도 단순히 유희를 위해서지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뿔을 가볍게 쓸어낸 슈브는 내가 가져왔던 권총을 꺼내 한손으로 잡고는 눈을 총구에 들이밀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건 작은 고속의 투사체로 신체에 손상을 주는 무기인가요? 시간이 지나도 인간은 변하지를 않네요.”

 

여전히 웃는 그녀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곤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났지만 두개골이 부서지며 피와 뇌수가 흩뿌려지는 일은 없었고, 그저 탄피만이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고작 이런 걸 무기라고 하니 우스울 뿐이죠,”

 

총을 맞은 관자놀이를 만지지도 않은 그녀는 아직도 연기가 나는 권총을 나에게 겨누었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심연만큼 두려울 것은 없었다.

 

선명한 총성이 들리고 왼쪽 가슴에 알 수 없는 충격까지 느껴졌지만, 고통은 없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구멍이 뚫린 곳을 바라보았지만, 흘러나오는 것은 피가 아닌 고체에 가까운 점도 높은 검은 점액이었고 마치 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개체처럼 덩어리를 이루어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잘 다녀왔니? 새로운 곳에서 지낸 느낌은 어때?”

 

내 몸에서 떨어진 검은 덩어리는 몇 번 꿈틀거리더니 철판을 송곳으로 긁는 것 같은 소리로 착각이 될 정도로 높은 염소 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에 올라탔다.

 

끓는 물처럼 요동치는 검은 덩어리는 다른 기관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입을 치아의 형태 덕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런 혐오스러운 덩어리를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듯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형태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넘어져 방금 전 마신 와인을 그대로 토해내었다.

 

이제는 위액마저 말라버렸는지 구토를 하면서도 그때 마셨던 와인의 향이 완벽하게 동일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했던 아이에게 너무 하신 것 아닌가요? 저와 크게 다른 모습도 아닌데 그런 반응을 보이실 줄이야.”

 

“대체 그게 뭐냐고요! 왜 총을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왜 그 점액은 살아 움직이고! 뭐 하나 알 수 있는 게 없다고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한 것 입을 벌려 끼익 거리는 덩어리를 삼킨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그대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인간에게 흥미가 없었지만......이 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신을 이대로 먹어버리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네요.”

 

 

 

 

죽는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존재가 말한 “먹는다”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비유인지 사전적인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떤 쪽이더라도 내 생명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도망쳐야 했다.

 

정말 무의미하지만 1초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는 도망쳐야 했다.

 

다리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움켜쥐자 굳어있는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느리지만 천천히 내가 들어왔던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봐도 한심할 정도의 속도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슈브는 조용히 와인을 즐기며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않았다.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아 내심 포기했나 생각하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마루 사이나 벽면의 틈에서 비집고 나온 점액이 수많은 염소들의 소리를 내며 수많은 치아들이 문을 뒤덮었고,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내 손에 올라오기 직전에 손을 떼어냈다.

 

“와인을 마시기 최적의 온도는 실온이라고 알려진 경우가 많지만 그건 틀린 말이에요. 실내 환경이 좋지 않던 중~근대시대, 그것도 와인을 자주 마시는 늦가을이나 겨울의 실온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니 정말로 적정 온도는 18도라고 봐야죠.”

 

여전히 한 손에 와인잔을 든 슈브 니구라스는 천천히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그 상태에서 문을 열어 갑작스럽게 온도가 변한다면 이 섬세한 맛이 무너지니까 조금 신중하게 행동해 주세요. 좋은 와인에는 그만한 예절이 있어야 하니까요.”

 

잔에서 와인을 몇 번 굴리다 작게 한 모금 와인을 마신 슈브는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했다.

 

아무리 내가 이성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어떤 행동이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 따라갈 리가 없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는 발걸음을 이어나가는 다리를 내려다보니 문을 막던 점액들이 점점 타고 올라오며 하반신을 감싼 지 오래였고, 허리 위까지 계속해서 타고 올라왔다.

 

손으로 황급히 점액을 뜯어내려 했지만, 유동적인 움직임과는 달리 손가락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견고했다.

 

그와 동시에 실제적인 견고함과는 달리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마자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며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완전히 점액에 뒤덮였다.

 

“나한테 뭘 하려는 거야?”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이들이 당신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할 뿐이죠.”

 

“아이?”

 

슈브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고,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강제로 움직이는 외골격을 막을 수 없는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천천히 지하로 향했다.

 

지하의 내부는 상당히 간단했다. 돌로 만든 천장과 바닥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인간의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의식을 위한 돌로 만든 원형 제단과 의식을 위한 흑요석 단검 한 자루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요. 아이들 말이요. 물론 인간들 기준으로 따진다면 더 복잡하겠지만 간단하게 아이들이라고 해둘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나를 뒤덮던 외골격이 다시 움직여 아스텍의 의식을 연상시키는 자세로 나를 재단에 눕히고는 가슴 부분의 점액만이 자리를 옮겨 맨 살을 노출시켰다.

 

“다크 영, 그러는 거 아니야. 이 사람은 단순한 제물이 아니라고.”

 

몸에서 뻗어나가 의식용 단검을 쥐었던 점액은 마치 의문이라도 있다는 듯, 갸웃거리더니 단검을 내려두었다.

 

“미안해요. 아이들이 예전의 기억을 잊지 못해서 말이에요.”

 

“예전의 기억?”

 

나는 아직도 제단에 묶여있는 상태로 고개도 들지 못한 상태로 가슴이 노출되어 있었고, 슈브 니구라스는 여전히 웃으며 단검을 집어 들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에게 이런 식으로 제물을 마치기는 했죠. 물론 그 당시에는 이런 모습은 아니었지만요. 그러다보니 시대에 따라 저는 이런저런 이름으로 부르기는 했죠. 지금은 모두들 천 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숲의 검은 암컷 염소라고 부르죠. 슈브 니구라스 말이에요.”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방금은 먹어 치운다면서?”

 

나는 슬쩍 시선을 돌린 다음 여러 가지로 움직일 방법을 찾아보려 노력해봤지만, 나를 감싼 단단함 점액은 조금도 벗겨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신체의 손상을 각오하고 힘을 줘봤지만 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단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훑던 슈브 니구라스는 양팔의 소매를 걷어붙이며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먹는다는 건 상당히 많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죠. 인간에게는 먹는다는 것이 사전적으로는 입으로 일정한 종류의 물질을 섭취하는 행위를 뜻하고, 은어로는 성관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이외에도 더 큰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내 가슴팍 위로 손목을 치켜든 슈브 니구라스는 의식용 칼로 자신의 손목을 깊게 그었다.

 

피가 튈 것을 대비해 눈을 감았지만 어떠한 액체도 닿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살짝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피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깊은 상처가난 손목만이 보였다.

 

내가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상처에서는 혈액 대신 점성이 높은 검은 색 점액 한 덩어리가 흘러 나와 가슴에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점액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선명한 염소소리 대신 힘이 없고, 미약한 흐느낌과 같은 소리만 내었고 움직임 또한 확고하지 않았다.

 

“이게 뭐야......?”

 

“글쎄요. 저도 이런 아이를 낳은 적이 없어서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뭘 하려는 생각이야!”

 

“이제 곧 알게 될 거에요....... 사실 지금까지 이런 말은 한 적은 없지만 저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머쓱한지 어깨를 으쓱이던 그녀는 다시 한 번 의식용 단검을 치켜들고는 바로 내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칼날이 가슴을 뚫고 들어오면서도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고통은 전혀 없었고, 고통보다는 뭐라고 할 수 없는 미묘한 쾌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칼자루까지 깊숙이 박혔던 단검이 빠지며 또 다시 미묘한 감각이 스쳐지나갔고, 상처의 공허한 부분은 방금 가슴에 떨어졌던 검은 점액이 스며들었다.

 

이번에도 고통은 없었다. 다만 미묘한 쾌감에 가까웠던 감각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상처에서부터 스며든 검은 점액은 공허함과 무감각을 남기며 점점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내 몸이 안에서부터 점점 소유권을 빼앗기는 느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발버둥만 치고 있으니 벽에 기대어 입맛을 다시고 있던 그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신음소리를 흐느꼈다.

 

“그래서...... 당신을 한 입 크게 베어 무니 이런 느낌이군요. 정말로 자아마저 희미해질 시간동안 수많은 제물을 받아 왔지만 이런 감각을 느낀 건 정말로 처음이에요. 아, 정말로 당신을 먹길 잘 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기도 전에 가슴에 뚫렸던 상처에서는 검은색 점액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몸을 감싸던 점액은 사라졌지만 상처에서 솟구치던 점액이 온 몸을 뒤덮는 것은 순식간 이었다.

 

다행히 이전처럼 몸을 속박하는 것은 아닌지 움직일 수는 있어, 대체 무슨 일이냐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마치 점액에 관절이 먹혀버린 것처럼 팔이 떨어져 나갔고, 이내 사지들이 점점 떨어져 나가며 전신이 무너졌다.

 

떨어져나간 팔다리들은 점액 속으로 녹아들며 모습을 감추었고, 나의 사지를 먹어 치웠던 점액은 다시 나에게 들러붙었다.

 

이제는 저항을 하고 싶어도 팔다리가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머리만이 남아 점액이 입으로 밀려들어오려 하자, 이제는 중심을 잡지도 못하고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있는 슈브 니구라스는 헐떡이며 내 머리를 잡아들고는 입을 맞췄다.

 

“잠깐 자고 있어요. 금방 끝날 테니까요. 이런 식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조금 흥분해 버렸네요.”

 

속삭이는 그녀의 말과 함께 점액은 나의 눈까지 뒤덮어 시야는 암흑으로 가득 찼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감각과 나를 나로써 있게 해주는 사고와 자아마저 심연 넘어 사라졌다.

 

 

 

......

 

 

 

“......라는 꿈을 꿨다니까.”

 

“그런 개꿈을 꾸다니 정말 너답다!”

 

내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취해 보이는 내 친구는 그저 내 말을 들으며 웃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꿈은 그리 유쾌하거나 웃긴 꿈이 아니었다.

 

불쾌하고 두렵고 무엇보다 몇몇 부분은 인간으로서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까지 엿보였다.

 

단순히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해 무의식 속에만 남아있는 기억이라 설명이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것들은 절대로 기억의 일부라 할 수 없었다.

 

프로이트는 꿈을 인간이 가진 3가지 심리적 요소, Ego(자아), Es(에스), Superego(초자아)의 경험을 이용한 욕망과 검열 과정으로 해석했지만, 내가 그 꿈에서 본 것은 그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너는 뭐가 그렇게 웃겨? 내가 꿈에서라도 그런 연애 같지도 않은 유사 연애를 했다는 게 웃기냐?”

 

그나마 나를 이해줄 거라 생각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지만 이해해 주질 않아 슬쩍 기분이 나빠져 맥주잔을 비우려 했지만, 아무리 기울여도 맥주는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후 맥주잔에서는 검은 점액이 쏟아져 나왔고, 내가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니 내 앞에 있던 친구는 자신의 잔을 비우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럴 리가요.. 당신을 비웃는 것은 저 자신을 비웃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걸요.”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의 동공은 가로로 늘어나 있었고, 친구의 입에서 울려 퍼지는 여성 목소리에는 염소의 울음소리가 미묘하게 섞여 들어있었다.

 

“뭐야.... 너 설마.....”

 

“어머, 그렇게 말하시면 곤란한데요. 저희는 이제 남이 아니잖아요?”

 

내가 한 발짝 더 물러나니 눈앞에 있던 친구의 형태는 녹아내리며 사라졌고, 누군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저는 이제 당신의 세계에요. 영원히 변하지 않을 당신만을 위한 세계 말이에요. 썩어가는 육체를 넘어서, 우리 모두 경계를 알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영원히 함께요.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 있는 술처럼......”

 

또 다시 몸이 녹아내린다. 또 다시 자아가 흐려지고, 시간의 흐르는 감각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을 끌어안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점점 잠기며 사라졌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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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터 갓하고 인간이면 씹갑하고 병이나 정을 넘어 계까지 갈 수 있는 거 아님?